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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배기 깨러 왔습니다-72화 (72/139)
  • 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72화

    최용규의 말대로 동기들이 김지혜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지혜야. 사촌 오빠?”

    “어? 어. 그렇게 친하진 않고.”

    “아, 그래? 외교관이시구나.”

    “응. 외무고시 합격했던 것 같아.”

    “같아는 뭐야?”

    “아니, 사실 그렇게 큰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라서.”

    아직 20대 중반의 청춘.

    국가를 짊어질 사무관들의 연애세포는 아직 팔팔했다.

    * * *

    대사관 견학은 프랑스와 대한민국의 관계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되었다.

    프랑스의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와서 문제가 되었던 병인박해와 병인양요, 6.25 전쟁 발발시 UN군 파견 지원,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군사, 문화, 경제 등 다방면에 걸쳐 프랑스와 대한민국의 관계가 대사관의 역사관에 전시되어 있었다.

    그 다음은 사무실 견학.

    프랑스 정세 및 양국 관계에 대한 업무를 처리하는 정무과, 통상무역이나 금융 투자를 담당하는 경제과, 국방과 외교 및 국가안보 관련 자료를 수집하는 무관부, 그 외 교육원에 문화원 등등.

    여권이나 공증, 사건사고의 대응을 맡고 있는 영사과도 빼놓을 수 없다.

    “이것으로 간단하게 저희 주 프랑스 대한민국 대사관을 견학하셨는데요. 어떻게 도움이 되셨는지 모르겠네요.”

    김한울 외교관의 말에 교육생들의 입에서 긍정적인 답이 흘러나왔다.

    김한울의 역할은 이게 끝.

    견학이 끝나자 글로벌비즈넷의 가이드 강미란이 다음 일정을 안내했다.

    “20분간 화장실 이용하실 분 이용하시고, 타고 온 차량 안에서 모일게요.”

    자유 시간.

    강백현은 외교관 김한울에게 말을 걸고자 다가갔다.

    헌데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사촌동생 김지혜 뿐이었다.

    “김지혜, 너 남자친구 있어?”

    “그걸 갑자기 왜 묻는데?”

    “아니! 네가 항상 말했잖아. 공무원 되면 바로 남자부터 사귄다고. 올해 설에 친척들 앞에서 호언장담 하던 거 기억 안 나?”

    “아니! 그걸 왜 동기들 있는 데서 말하냐고!”

    김지혜의 시선이 오현수를 넘어 강백현을 향했다.

    강백현은 못들은 척 담담히 고개를 돌렸다.

    “아, 우리 지혜 데려갈 잘생긴 남자는 없으려나?”

    “아~ 진짜. 그만 좀 해. 아~ 여기 강백현 오빠인데, 소개할게. 이번 5급 공채 수석한 오빠.”

    화제를 돌리려는 듯 강백현을 소개하는 김지혜.

    강백현은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지혜 동기, 강백현이라고 합니다.”

    “아! 여자 친구 있으세요?”

    “네? 아니 없습니다.”

    “그럼 우리 지혜 좀 데려가세요. 아~ 애가 성격이 좀 드세서 남자친구가 없다니까요.”

    “하하, 언젠가 생기겠죠. 저 혹시 이것도 인연인데 연락처 좀 얻을 수 있을까요?”

    “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만약에 업무적인 것이나 협조할 것이 있다면 연락드리고 싶어서요.”

    강백현의 말에 김한울이 고개를 저었다.

    “업무적인 연락은 저희 대사관으로 직접 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개인적인 연락처는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러자 김지혜가 토라진 듯 타박했다.

    “아니, 뭐 그리 비싸게 굴어?”

    “야! 외교관은 원래 연락처 함부로 주고 그러는 거 아니야.”

    “백현 오빠, 적어요. 010-3575-****, 로밍 되어 있으니까 이걸로 전화하면 돼요.”

    김지혜의 말에 강백현이 어색한 미소로 대답했다.

    “아, 이건 아닌 것 같아. 그냥 프랑스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혹시 외교관님 개인번호 알면 도움이 될까 해서 그랬던 거거든. 외교관님,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김한울이 빙그레 웃었다.

    “아니요. 드릴게요. 지혜가 보통은 저러질 않거든요? 저장하세요. 언제든 연락하시고요.”

    “그래도 될까요?”

    “네. 제가 촉이 좀 왔거든요. 김지혜, 안 그래?”

    김한울이 김지혜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김지혜가 사촌오빠인 김한울에게 버럭 화를 냈다.

    “미쳤나~봐. 김한울 씨! 미쳤어요? 프랑스 오더니 머리가 어떻게 됐어요?”

    “아닌 척 하지 마. 어휴~ 내가 널 모르냐? 널 본지 벌써 20년이 넘어간다. 꼬꼬마 때부터 봤는데 뭘 아닌 척 하고 그래?”

    강백현은 연락처를 저장하고, 더 이상의 불편한 상황을 피하고자 목례를 하고는 자리를 피했다.

    그러자 김지혜가 얼굴이 붉어져서 주먹으로 김한울의 명치를 때렸다.

    김한울은 맞으면서도 활짝 웃으며 생각했다.

    ‘맞네. 맞아. 좋아하는 거 맞아. 내가 너 모를 줄 아냐? 너 나 좋아한다고 맨날 쫓아다닐 때 그 눈빛이었어. 사촌이라 안 돼서 동성동본은 왜 결혼 안 되냐고 법 고친다고 했었잖아. 법 개정 됐어도 6촌 이내는 안 돼서 포기했지만.’

    “시간 됐네. 가 봐!”

    “아~ 진짜, 또 이상한 소리 하기만 해 봐. 오빠! 큰 엄마한테 이를 거야.”

    “됐네요. 얼른 좋은 남자 만나. 조심히 가. 호텔로 가니?”

    “응.”

    오늘 일정은 대사관이 끝이었다.

    김지혜는 사촌 오빠인 김한울에게 손을 흔들었다.

    혈연으로 이어진 관계.

    친척이라고는 하나 때로는 친남매보다 더 나을 수도 있는 관계다.

    한편, 강백현은 버스에 앉아 김한울의 연락처를 저장해두고 있었다.

    최용규가 그런 모습을 보며 물었다.

    [뭘 그렇게 애써서 번호를 받냐?]

    “그냥 나중에 도움 받을 수 있을까 싶어서요. 이런 인맥 하나하나가 나중에 다 힘이 되는 거잖아요.”

    [그렇긴 해도, 딱히 외교관 인맥이 필요하진 않을 텐데?]

    “없는 것보단 낫죠. 그것보다 성현 씨가 이 근처죠?”

    백현의 질문에 최용규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여기서 멀지. 한참 멀지.]

    “멀긴 뭐가 멀어요. 여기서 5분이면 가는데. 호텔에서도 10분 거리예요.”

    [이 자식! 벌써 조사 다 했네?]

    “샬롯 본사 위치는 인재개발원 들어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제 업무였잖아요. 그렇다고 김성현 실장님 만나려고 그런 건 아니고요.”

    [그 말 진짜지?]

    “그럼요. 지금 한참 열심히 일하고 있을 텐데, 괜히 만나러 가서 마음 싱숭생숭하게 하면 안 되니까요. 저희 약속했잖아요. 서로 성공하고 보자고.”

    백현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 미뤄두었다.

    솔직히 보고 싶다. 그리고 그 때의 감정을 다시 한 번 확인해보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국가에서 지원하는 해외정책연수로 온 것.

    괜한 구설수에 말려들기도 싫었고, 불필요한 오해도 사기 싫었다.

    그런데 남은 연수 일정이 그의 마음을 흔들리게 했다.

    “다들 짐 푸셨죠? 호텔 3층에 가시면 저녁 마음대로 드실 수 있어요. 술은 공짜 아니니까 알아두시고요. 남은 음식 호텔방에 절대 싸가지고 오지 마시고요. 여기 뷔페니까 그런 행동 전부 민폐인 것 아시죠? 우리 프랑스에서 교양 있는 모습 보여주고 가자고요!”

    가이드의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가이드는 그들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보다.

    “아~ 이쯤에서 박수 한 번 나와야 되는데!”

    박수를 유도하는 강미란.

    그녀의 행동에 사람들의 얼굴에서 웃음이 피었다.

    * * *

    뷔페, 먼저 음식을 담고 원하는 자리에 앉는다.

    자리는 김지혜가 먼저 맡아두었다.

    4명이 앉을 수 있는 사각형 테이블.

    김지혜가 강백현과 오현수가 있는 방향으로 손을 흔들었다.

    오현수는 방긋 웃으며 지혜의 옆자리에 그릇을 놓았다. 그러자 김지혜가 오현수를 향해 말했다.

    “여기 말고! 앞에 앉아. 아니 대각선!”

    “야! 나는 사람도 아니냐?”

    “사람 맞는데 특별한 사람은 아니잖아.”

    “너 좀 노골적이다? 나도 너한테 오빠인데, 왜 백현이 형하고 차별 두냐?”

    오현수의 말에 김지혜가 대꾸했다.

    “오빠, 거울 좀 봐.”

    “야! 크크크 팩트 폭력 날릴래?”

    “아 됐고, 백현 오빠, 내 옆에 앉혀.”

    “너 비행기에서 표정 안 좋았잖아. 백현 형이 너 거절 한 거 아니야?”

    “아! 쫌! 그냥 도와주면 안 돼?”

    김지혜가 오현수에게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오현수는 마음이 착잡했다.

    백현 형은 지혜한테 전혀 마음이 없어 보이는데, 지혜는 왜 저럴까?

    자기를 좋아해주는 사람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왜 보지 못하는 걸까?

    하지만 그녀의 심정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다.

    이제 해외정책연수가 끝나면 동기들끼리 보기는 힘들어질 것이다.

    각자 지원한 부, 처, 원에 가서 적응하려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테니까.

    어떻게 보면 썸을 탈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그리고 그 기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알았어. 네 앞자리로 유도하면 되는 거지?”

    “응. 잘 해! 어? 마지막이야.”

    “넌 왜 나한테 계속 반말이냐?”

    “친하니까 그런 거지. 현수 오빠한테는 설레는 거 없으니까 진짜 친해서 그런 거라고.”

    한편, 백현은 뷔페에서 최용규의 잔소리를 듣고 있었다.

    [반대쪽으로 가.]

    “왜요?”

    [그쪽에 맛있는 거 있어. 프랑스 하면 빵이잖아. 갓 구운 빵부터 먹어야지.]

    “아니에요. 전 스테이크 먹을래요.”

    [아니! 빵부터 좀 먹으라니까.]

    “그만 좀 하세요. 귀찮아 죽겠네. 도대체 불만이 뭔데요? 옆에 성현 씨라도 있어요?”

    강백현이 블루투스 이어폰을 착용한 듯 흉내를 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전화하는 것처럼 보일 테니 오해 살 일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백현에게 한 남자가 다가왔다.

    “자기야! 자기 맞지? 우리 백현 자기!”

    “마르코 씨? 어? 마르코 씨가 여기는 왜?”

    “우리 팀원들 식사하러 왔잖아. 저기 연주랑 진희도 있고, 우리 성현 자기도 있고.”

    강백현은 당황했다.

    ‘진짜 있었어?’

    그때 고연주가 손을 흔들며 과장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백현 씨다! 백현 씨! 여기요~ 여기!”

    윤진희도 마찬가지였다.

    “실장님! 어떻게 백현 씨가 여기 있을 수 있죠? 와아!”

    그들의 호들갑에 마르코가 신이 나서 백현을 독촉했다.

    “자기야! 우리 테이블로 와. 오랜만에 같이 밥 먹자. 할 얘기도 많고.”

    “아, 네. 잠깐만요. 일행들에게 말 좀 해두고요.”

    강백현이 오현수와 김지혜가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김지혜는 들뜬 얼굴로 오현수의 발을 툭 치며 사전에 약속된 행동을 지시했다.

    오현수는 김지혜를 살짝 째려보고는 백현을 향해 입을 열었다.

    “형! 제 옆 자리 앉으세요. 아! 오늘 진짜 기분 좋네요.”

    “어. 그런데 미안해서 어떡하지?”

    “네?”

    “지혜야. 현수야. 오늘 저녁은 너희 둘이 먹어. 나 잠깐 아는 지인 만나서, 거기 좀 합류할게. 현수야! 너 호텔방에 있을 거지?”

    “아, 네. 그건 왜요?”

    “왜긴, 네가 호텔방 키 들고 있잖아. 형 조금 늦을 수도 있으니까 혹시 피곤해서 잘 것 같으면 연락해. 알았지?”

    강백현이 그 말을 끝으로 다른 테이블로 이동했다.

    어안이 벙벙한 김지혜의 표정을 본 오현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운이 나빠도 이렇게 나쁠 수 있나?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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