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 깨러 왔습니다-71화 (71/139)
  • 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71화

    강백현은 연수원 동기들과 함께 비즈니스석을 채웠다.

    인솔자를 포함해서 총 17명. 비즈니스석이 20좌석인 것을 고려하면 이번 정책연수 인원으로 85%를 채운 것.

    여기서 백현이 친한 사람은 오현수와 김지혜 뿐이다.

    나머지는 알고 지내긴 하지만, 그냥 서먹서먹한 관계일 뿐이다.

    때문에 김지혜의 옆자리에 앉은 백현을 딱히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백현과 지혜, 성환, 현수 이 4명은 마치 한팀 마냥 서로 붙어 다녔다. 다른 동기들도 남녀불문하고 친한 동기들끼리 앉았기에 매우 일반적인 상황이었다.

    다만, 최용규는 달랐다.

    [오오오~ 스위트, 달달한 분위기~♥]

    강백현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최용규를 바라보았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며 협박할 때는 언제고 지금은 저리 장난만 치고 있으니 답답할 따름이다.

    하지만 선배가 옆에 있어서 조금은 안심이기도 했다.

    위험하다면 미리 알려 줄 테니까.

    혹시 비행기에 이상이 있다면 조종석에 다녀와 현재 상황을 알려줄 것이고, 테러가 발생하면 범인이 누군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알려줄 것이다.

    백현은 사실 비즈니스석이 처음이었다.

    신기한 듯 의자, 스크린 등의 버튼을 누르며 이것저것 기능을 확인해보았다.

    그러자 김지혜가 빙긋 웃으며 물었다.

    “오빠, 비즈니스석 처음 타 봐요?”

    “응. 왜?”

    “아니, 너무 해맑은 미소로 리모컨 누르고 있잖아요.”

    “확실히 비즈니스석이 편하긴 하네. 다리도 쭉 뻗을 수 있고.”

    훤칠한 키에 긴 다리의 백현이 몸을 쭉 뻗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김지혜가 그런 허당 같은 모습에 피식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어?”

    “아니, 매사 진지했던 사람이 그러니까, 좀 사람 같으니까 그렇죠.”

    “신기해서 그런다. 신기해서. 국가에서 왕복항공권 287만원 내줬으면 당연히 하나하나 확인해봐야지. 편의기능, 거기에 불편사항. 이런 것들 확인해서 국민들이 편하게 지낼 수 있게 하는 게 우리 일이잖아.”

    “말은 잘 해요~ 백현 오빠! 비행기 처음은 아니죠?”

    지혜의 질문에 강백현이 마지막으로 비행기 탔던 때를 떠올렸다.

    “음, 필리핀 세부 갔다 온 적은 있지.”

    “세부요? 누구랑요?”

    “여자친구랑 갔었지.”

    그러고 보니 1년 전 미진이랑 세부로 해외여행 갔을 때를 떠올렸다.

    세부의 최고급 휴향 시설로 꼽히는 케이파크.

    시설 수준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해서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휴향지로 손꼽히는 곳이었다.

    “아! 짜증나. 저가항공이 뭐야! 오빠, 불편해 죽겠어.”

    “아, 어. 미안. 특가상품이라고 해서 예약했는데, 많이 불편해?”

    “장난해? 생수도 안 주는 비행기가 세상에 어디 있어? 그리고 생각해봐. 사진 찍어야 되는데, 쪽팔려서 비행기 안 사진을 못 찍겠잖아.”

    미진이의 등살에 3박 4일 내내 고생했던 때가 떠올라 백현의 표정이 일순간 굳어졌다.

    “왜요? 왜? 안 좋은 일 있었어요?”

    “아니, 그냥 이제는 헤어졌으니까. 근데 지혜야. 넌 남자친구 안 만나?”

    백현의 말에 최용규가 미소를 지었다.

    [마음 생긴 거냐? 잘 해보려고? 어?]

    ‘아니거든요? 그냥 예의상 한 질문이라고요.’

    강백현은 최용규를 무시하고, 김지혜를 바라보았다.

    김지혜는 백현의 질문에 아무렇지 않다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좋은 남자가 있어야 만나죠. 오빠 같은 사람 주변에 없어요?”

    백현은 사실 ‘나 포기해라. 임자 있어.’라는 의도로 한 말이었지만 지혜는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래서 좀 더 알아듣게끔 말을 더했다.

    “나 같은 사람? 그것보다 현수는 어때? 오현수 걔 정도면 너랑 좀 잘 어울리지 않나?”

    “그 오빠는 장난기가 심해서 저랑 안 맞아요.”

    “그럼 내 룸메이트 성환이는? 걔는 너 잘 따르잖아. 누님 동생 사이니까 엄청 친하지 않아?”

    “아! 오빠, 걔는 아니에요. 걔는 아직 군대도 안 갔잖아요.”

    김지혜의 입에서 군대 미필이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강백현은 갑자기 할 말을 잃었다.

    확실히 잃어버린, 아니 앞으로 잃어버릴 시간이 많은 남자를 만나는 것은 여자 입장에서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결혼정보업체 등록해 봐. 요즘 업체 통해서 만나는 사람 많다더라. 우리 정도면 꽤 점수 높지 않나? 교사랑 공무원이 1등 신부감이잖아.”

    백현의 말에 김지혜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더니 주변 동기들의 눈치를 잠시 살피다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빠! 남자는 일단 주변에서 찾고 보는 거래요. 괜찮은 남자인지 며칠, 몇 주 살펴보고 진짜 괜찮다 싶으면 접근하는 거라고요.”

    지혜의 말에 백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확실히 지혜는 자신의 연예 상대도, 결혼 상대도 아니었다.

    백현 입장에서 김지혜가 싫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막 매력있고 사랑스럽고 그런 건 아니었다.

    그에 비해 자신이 얼마 전까지 상사로 모시던 김성현은 기품, 성격, 능력, 거기에 아이에 대한 배려, 어른에 대한 공경까지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

    백현은 성현에게 이미 마음을 빼앗겨서 지혜에게 나눠줄 마음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기분 나쁘지 않도록 백현이 에둘러 말했다.

    “나도 그런 사람 있어.”

    “어? 진짜요? 말해 봐요. 누구예요?”

    백현의 말에 김지혜의 표정이 일순간 밝아졌다.

    김지혜는 백현이 룸메이트인 조성환과 오현수, 그리고 자신 말고는 따로 만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공부 밖에 모르는 사람이고, 인간관계나 연애도 미룬 채 성공만을 위해 달리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백현의 입에서 전혀 의외의 말이 흘러나왔다.

    “내가 넘보지도 못할 높은 사람. 그런데 진짜 내 한평생을 바칠 수 있는 사람.”

    김지혜는 백현이 답답했다. 똑바로 말해주면 좋은데 자꾸 비유해서 말하니 그게 자신인지 아닌지 확실하지가 않았다.

    3개월간 지켜본 정황상 그의 주변에 여자가 없다는 것은 확실한데, 왜 말을 못하냐고!

    그래서 조금 용기를 내었다.

    “마음속에 담아두면 상대방은 몰라요. 오빠, 지금이라도 마음을 고백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내심 기대하는 듯한 눈빛.

    백현은 한껏 이야기했는데도 눈치채지 못하는 김지혜가 이제는 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대놓고 너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고, 아직 김성현과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소위 썸 타는 정도인데 그것을 남들 앞에서 이야기하기도 조심스러웠다.

    더구나 자신과 달리 김성현은 국내에서 이름이 꽤 알려진 셀럽 중 하나였다.

    실시간 검색어에도 올랐던 성현이었다.

    자신의 발언 하나하나가 성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니 더욱 신중할 수밖에. 이제는 확실히 말해주기로 했다.

    “지혜야.”

    백현이 지혜를 부르자, 그녀가 깜짝 놀라 설레발을 쳤다.

    “어? 오빠 잠깐만요.”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하지 마요.”

    “나 썸 타는 사람 있는데.”

    “알아요. 아는데! 지금 하지 말라니까요.”

    강백현은 김지혜의 호들갑에 황당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니, 썸 타는 사람이 있다니까. 이미 일곱 달 전에 만나서 연락 주고받는 사람 있다고.”

    “네?”

    “아무튼 있어. 그러니까 오빠 걱정 안 해도 돼. 지혜도 주변에 좋은 사람이 빨리 나타났으면 좋겠다.”

    강백현이 애써 민망한 표정을 지우며 리모컨을 조작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백현이 누른 버튼이 칸막이를 올리는 버튼이었다.

    붙어 있다 보니 커플석으로도 보이는 좌석. 그 사이로 자동차 유리가 올라오듯 칸막이가 올라온다.

    김지혜가 어색한 표정을 감추며 말했다.

    “갑자기 칸막이를 왜 올려요?”

    “앗 미안.”

    백현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김지혜.

    칸막이가 올라가자, 최용규가 백현에게 핀잔을 늘어놓았다.

    [왜 그랬냐?]

    ‘뭐가요! 내가 뭘 했는데?’

    [미친놈아, 상처 줬잖아. 거절할 거면 그냥 첨부터 성현이 사진 보여주고 거절하면 좋았잖아. 사람 설레게 만들고, 이용해 먹고.]

    ‘내가 뭘 이용했다고 그럽니까! 최대한 정중하게 알아들으라고 이야기한 거라고요.’

    * * *

    프랑스 파리 샤를 드골 공항.

    12시간의 비행은 생각보다 어색하지 않았다.

    김지혜는 다행히 백현의 말을 잘 알아들은 것 같았다.

    백현이 원하는 포지션은 친한 오빠, 동생 사이다.

    김지혜 역시 그 이상은 서로의 마음이 원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더이상 백현의 마음을 떠보지 않았다.

    그런데 태연하게 씩씩하고 당당한 표정을 하고 있는 지혜의 작은 변화를 오현수가 캐치한 모양이었다.

    “백현이 형! 지혜 왜 저래요?”

    “아~ 아무 일도 없었는데? 왜?”

    “표정이 평소와 달리 조금 우울해보여서요.”

    현수의 말에 강백현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어? 나는 그런 거 못 느꼈는데.”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후 일정은 생각보다 강행군이었다.

    첫 방문 장소는 파리에 있는 주 프랑스 대한민국 대사관.

    이곳에 주재하는 외교관이 나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혹시 저희 외교부에서 발송한 메시지 다들 받으셨나요?”

    외교관의 말에 모두가 핸드폰을 켰다.

    백현의 핸드폰에도 외교부에서 발송한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총 5개의 메시지.

    [Web 발신]

    한국 입국시 US$600면세 (면세품 물품 포함), 자진신고 15만원 이내 관세 30% 감면.

    [Web발신]

    [외교부] 해외 위급상황시 영사콜센터에서 필요한 안내를 받으세요.(+82-2-3210-****)

    [Web발신]

    [외교부] 세계 각지 테러 가능성 높아 신변안전유의, 특히 다중밀집장소 방문자제 요망

    [Web발신]

    외교부 영사콜센터가 통역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영/일/중/불/노/서어)(+82 2-3210-****)

    [Web발신]

    프랑스 입국시 담배 단속 유의, 세관 통과 후라도 1보루 이상 초과소지시 몰수, 벌금 부과.

    동기들이 메시지를 전부 확인한 걸 보고 외교관이 말을 이었다.

    “대사관이 하는 일은 간단해요. 저희는 프랑스에서 주재국인 대한민국의 업무를 대신해주는 역할을 하죠. 여러분이 여권을 잃어버렸거나 비자(사증)가 만료되었을 때 그것을 증명해주는 역할을 기본적으로 수행하고요. 자국민이 위험에 빠졌을 때 보호할 의무가 있고, 타국에서 일어나는 중대 사항들을 종합해 자국에 보고하며, 그 나라와의 문화교류, 친선 관계 등을 위한 업무를 수행하죠. 제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주 프랑스 대사관 영사과에 재직 중인 김한울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김한울 외교관이 정책연수로 방문한 공직자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그의 인사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지혜야!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어. 진짜 왔구나.”

    김한울이 김지혜를 알아보자 모두가 놀란 눈치.

    두 사람 사이가 궁금한 사람들이 둘을 번갈아가며 쳐다본다.

    “아, 공교롭게 제 사촌동생도 여기 연수를 왔네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더 대단하고 반가운 것 같아요. 대사관 둘러보면서 저희가 구체적으로 어떤 업무를 하고 있는지 견학 시작할게요. 혹시 화장실 먼저 다녀오고 싶으신 분 계신가요?”

    김한울, 김지혜. 소위 말하는 엘리트 계층.

    그 둘을 보며 최용규가 백현을 달랬다.

    [백현아~ 지금이라도 지혜 잡는 게 좋지 않겠어? 너한테 호감 있는 것 같은데, 늦기 전에 다시 생각해 봐. 응?]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