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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배기 깨러 왔습니다-69화 (69/139)
  • 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69화

    인재개발원, 귀중한 시간이었다.

    동기들과 거리낌 없이 친해질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자리.

    술자리에서 백현은 다가오는 수료식에 한숨을 내쉬었다.

    3년 전, 9급 공무원 때에도 수료식을 겪었으니 딱히 처음이 아니지만 지금의 상황이 꼭 반갑지는 않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법.

    이제 각자 지원한 처, 부, 원으로 흩어질 것이다.

    실질적으로 소속이 다르면 만나기 어려운 게 공무원 사회다.

    국세청과 국토교통부, 인사혁신처와 감사원.

    백현의 동기들이 각각 지원한 부서였다.

    “백현이 형이 정말로 감사원 지원하실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그 성적 아까워 죽겠다.”

    “다들 각자 적성 맞는 곳 가는 거지. 뭘 그렇게 각을 재? 다들 가서 열심히 하자. 연락 자주하고.”

    “네.”

    “지혜 너는 표정이 왜 그래?”

    “아니. 너무 늦게 친해져서 그렇지.”

    “참나! 야야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술 마셔.”

    친하다보니 나이가 많은 백현에게 형, 오빠 등으로 부르는 동기들.

    그래서 더욱 섭섭한 느낌이 드는 지도 모른다.

    술자리가 끝나고 취기가 슬슬 올라올 즈음 오현수가 분위기를 띄웠다.

    “성환아, 스크린야구장 갈까? 그거 완전 재밌대.”

    “형님, 스크린 야구장이요? 저 야구 한 번도 안 해 봤는데.”

    “응! 날아오는 공을 타석에서 치기만 하면 돼. 어려울 거 없어. 백현이 형 가시죠!”

    동기들이 스크린 야구장의 펜스 밖에 설치된 게임 화면을 조작했다.

    수비수의 위치에 투수의 구속까지 조정할 수 있는 스크린 야구 프로그램.

    그러다보니 타석에 누가 나오냐에 따라 전략도 짜야 한다.

    솔직히 재밌었다.

    펜스 뒤의 테이블에 국민안주 치킨과 맥주를 놓고 먹고 마시니 흥이 돋았다.

    땅! 백현의 스윙에 스크린에 Home Run! 이란 글자가 새겨진다.

    “와~ 형님 진짜 운동 잘 한다.”

    “허리 돌릴 때 옷 올라가는 거 봤어? 몸도 좋아. 식스팩에 잔근육이 완전 대박!”

    “진짜? 백현 오빠 식스팩이야? 나 못 봤는데?”

    “네. 지혜 누님, 제가 맨날 보는데 형님 몸 진짜 좋아요.”

    백현은 타석에서 연달아 홈런을 쳤다.

    또 한 번 <빵!> 소리와 함께 축포가 터지고, 백현은 머쓱한 얼굴로 타석에서 내려와 펜스 뒤 테이블로 이동했다.

    “와, 이 형은 도대체 못하는 게 뭐야? 지혜야. 너 남자친구 없으면 빨리 백현이 형 잡아라. 이런 신랑감 주변에 없다.”

    “됐거든?”

    “크크, 얼굴 붉어지는 거 봐.”

    “시끄러워. 술이나 마셔. 맥주 한 병 더 시킨다?”

    “어. 시켜. 어차피 지는 팀이 쏘는 거야. 김지혜 넌 백현이 형한테 고마워해라. 어떻게 한 번을 못 치냐?”

    “야구 한 번도 안 쳐봤으니까 그렇지. 너나 잘해. 너도 못하면서.”

    김지혜는 동기 오현수의 말을 흘리며 닭다리 하나를 뜯었다.

    오현수도 김지혜보다 한참 나이가 많았지만, 오현수에게는 반말을 하고 백현에게는 존댓말을 하는 김지혜.

    동기들은 그런 마음을 어렴풋이 알아채고 있었지만 백현은 별반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그런 가운데 스크린 야구의 전광판에 2:0이란 스코어가 시야에 들어왔다.

    2회차까지 안타를 하나도 치지 못한 김지혜였지만, 백현의 홈런 2방으로 스코어는 2:0으로 앞서고 있다. 의도치 않게 분위기가 조성된 상태다.

    조성환은 이제 썸만 타면 된다고 생각하여 내심 기대 중이었다. 하지만 백현은 벽에 기대 앉아 왁자지껄한 동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형님 뭐해요? 지혜 누님 치잖아요. 자세 좀 봐주고 지도도 좀 해주고 그래야죠.”

    “알아서 잘 치겠지.”

    백현은 사실 상념에 빠져 있었다.

    지금 현재가 아닌 미래에 대한 고민.

    그들은 각자 맡은 직책을 수행하기 위해 바쁜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그럼 순식간에 세월이 흐르겠지.

    자글자글한 주름만 남긴 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칠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할 일이 많을 거다.

    지방 공무원과 달리 중앙부처는 엘리트들의 집합이다.

    날고 긴다는 사람들이 모였으니 주어진 일도 많고 시키는 일도 많다.

    과연 혼자 이겨낼 수 있을까? 난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고, 내가 하는 일은 어떤 결과를 도출해낼까?

    그때 그의 고민을 해결해 줄 구세주가 나타났다.

    [나 없이 잘 지냈냐?]

    ‘어?’

    [잠깐 염라 만나러 올라갔다 왔어. 염라가 앞으로 빙의는 자주 쓰지 말래. 빙의하다가 흩어진 혼백 다시 모으느라 시간 좀 걸렸네.]

    백현은 오랜만에 나타난 최용규를 보며 웃었다. 그때 김지혜는 삼진 아웃을 당해 타석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지혜야, 내 타석 순서 오면 대신 좀 들어가.”

    “아! 오빠 한참 이기고 있는데 왜? 큰 거야?”

    “응. 큰 거야. 시간 걸려.”

    백현은 민망한 대답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며 나갔다.

    당황한 김지혜가 화제를 돌리며 성환에게 말했다.

    “알았어. 빨리 와. 야! 조성환, 내 차례 때 구속 소프트볼로 바꿔. 알았어?”

    “네. 누님. 그 정도는 해드려야죠.”

    “비웃지 마. 이겨 줄 테니까.”

    신나게 노는 와중에 바깥으로 나온 백현이 최용규의 형체를 확인했다.

    “선배, 많이 진해졌네요.”

    [그러니까. 빙의가 이렇게 힘 빠지는 줄 누가 알았겠냐? 그것보다 할 말 있다.]

    “뭔데요?”

    [내가 올라가서 보고 온 건데 너한테 사(死)자가 끼었단다. 생(生)자가 있어야 오래 사는 거고, 사(死)자가 금방 죽는 건데, 네 이름이 사(死)자에 있는 거야.]

    “네? 그게 무슨 말인데요?”

    [몰라. 살생부에 네 이름이 올라와 있었어. 내가 깜짝 놀라서 단번에 달려왔다니까.]

    “아! 갑자기 나타나서 이런 것 가지고 농담하지 마요.”

    취기가 올라온 백현이 정색하며 최용규를 질책했다. 하지만 최용규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내가 이런 거 가지고 농담할 리가 없잖아. 아무튼 사(死)자에 있다고 무조건 죽는 건 아니고, 큰 위험이 닥칠 거야. 그래도 걱정 마. 내가 있잖아.]

    “……”

    * * *

    백현은 생전 할아버지로부터 죽은 자의 말을 조심하라고 들었다.

    영혼을 볼 수 있었던 할아버지는 집안의 성주신과 대화하며 얻은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곤 했다.

    아버지는 귀신 들린 소리 하지 말라고 항상 나무랐지만, 할아버지는 자신이 곧 세상을 뜰 거라고 말하고 한 달 후에 실제로 돌아가셨다.

    이후에는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말을 한자 한자 써가며 기록했고 할아버지를 그리워했다.

    백현이 죽은 할아버지를 목격한 것은 6살 때의 일이었다.

    평온하게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백현의 앞에 영혼 상태로 나타난 것.

    [백현아~]

    “네. 할아버지.”

    [할애비가 보이는구나?]

    “네. 보여요.”

    [하하하, 그래. 할애비 성주단지 잘 보관하고 있어야 돼. 네 아비한테 전해줘. 그거 깨지면 할애비가 우리 자손들 지키질 못해요. 알겠니?]

    “네. 할아버지. 그런데 어디 가세요?”

    [할망구 보러. 이놈의 할망구가 바람 피우나 감시해야지.]

    어릴 적의 백현은 바람이 무슨 뜻인지 몰랐었다.

    백현이 귀신 이야기를 하자 엄마, 아빠,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기도했다. 자식들에게 해코지 하지 말라고.

    그리고 할머니마저 돌아가신 이후, 할아버지는 백현 앞에 나타난 적이 없었다.

    그렇게 8살 이후, 다시 귀신을 보게 된 건 32살 때였다.

    그게 바로 최용규 선배다.

    * * *

    “알았어요. 주의할게요. 그런데 어떻게 죽는지는 알아요?”

    [그걸 알면 내가 이러고 있겠냐?]

    “알았어요. 조심할게요. 무조건 죽는 건 아니죠?”

    [응. 운명은 극복할 수 있댄다. 그래서 우리가 무당 쓰고, 굿 하고 그러잖냐.]

    “그게 효과가 있어요?”

    [그거야 모르지. 나도 해본 적이 없는데.]

    그때 스크린 야구가 끝났는지 동기 셋이 올라왔다. 얼굴에는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오빠, 왜 안 내려와! 경기 졌잖아.”

    “아~ 졌어? 돈은 누가 냈어?”

    “지혜가 냈어요. 근데 형, 누구랑 대화하신 거예요?”

    “아, 잠깐 블루투스 이용해서 엄마랑 통화했어.”

    백현은 손에 잠깐 귀를 대었다 떼며 주위의 의심을 불식시켰다.

    다들 취한 상태여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세 사람.

    “그럼 이제 어디 갈까요? 노래방?”

    헤어지는 게 아쉬운지 끝장을 보려는 현수의 말에 지혜가 대답했다.

    “노래방 좋지. 백현 오빠, 노래 잘 불러요?”

    “아니, 오늘은 이만 들어가자. 나 들어가 봐야 돼.”

    “일찍 들어가서 뭐해요. 이제 평가도 다 끝났잖아요. 얼른 노래방 가요! 가자! 갑시다!”

    백현의 팔짱을 끼며 노래방을 가자고 소리치는 김지혜. 최용규가 방긋 웃으며 중얼거렸다.

    [쟤 진짜 너 좋아하네. 대쉬해 봐. 둘이 잘 어울리네.]

    최용규의 말에 백현이 지혜의 손을 풀며 손사래를 쳤다.

    “아아아~ 다들 취했다. 나 썸녀랑 통화해야 돼.”

    “썸녀라뇨?”

    “썸녀 있어. 지금 프랑스에서 일하고 있거든. 그럼 난 일찍 들어갑니다. 성환이 넌 현수랑 지혜랑 더 놀다올거면 놀다오고.”

    “아~ 형님! 이대로 가는 게 어디 있어요?”

    조성환이 떠나는 백현의 옆에 달라붙었고 김지혜가 허무한 듯 백현과 성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 오현수가 김지혜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 거야?”

    “말을 했어야지. 백현 오빠 만나는 사람 없다며!”

    “없는 줄 알았지. 계속 대쉬할 거야? 고? 아니면 여기서 스톱?”

    “몰라. 아~ 뭐야. 존나 재미없어.”

    김지혜가 실망한 듯 택시를 잡고 자리를 뜨자 오현수가 당황한 듯 고개를 저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이제까지 제일 신나게 논 당사자가 누군데….”

    * * *

    같은 시각.

    인재개발원장은 인사혁신처장의 전화를 받고 있었다.

    - 유 원장! 도대체 결과가 왜 그렇게 나온 거야? 의원님하고 대화 끝났잖아.

    “네. 하지만 이미 공표된 성적을 바꿀 순 없었습니다. 보는 눈이 많은데 결과를 바꾸는 건 자살골이나 다름없었죠. 좀 더 일찍 말씀해주셨으면 조치할 수 있었는데, 시기가 너무 늦어서 대처할 수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유성재 원장의 말에 인사혁신처장이 한숨을 내뱉었다.

    - 이러면 내가 면이 안 서잖아. 면이. 알았어. 감사원 건이라도 해결이 되어야 할 텐데, 미치겠군. 아무튼 나중에 의원님 만나면 잘 말씀드려. 너하고 내가 말을 맞춰야 안 다친다. 알았어?

    “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전화를 끊은 유성재 원장도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관계를 크게 악화하지 않고도 최현희 교육생 관련 건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오히려 일찍 연락 받았으면 큰일날 뻔했군. 성적 조작이라니, 도대체 어디까지 썩은 거야?’

    하지만 감사원 출신인 유성재 원장도 국회의원에게 대들 힘이 없다.

    여당 대표 출신 최장철.

    그는 대통령 다음 가는 힘을 가진 인물이다.

    차기 대선 후보인 그에게 정면으로 대든다는 느낌을 주면 그의 자리도 단 번에 날아갈 수 있다.

    그만큼 힘든 자리.

    하지만 유성재는 그 와중에도 최선을 다해 일이 커지는 것만은 막았다.

    따르르릉.

    그때 유성재의 아래에 있는 정호섭 과장에게 연락이 왔다.

    - 국장님, 호섭입니다.

    “응. 호섭아, 무슨 일이냐?”

    - 그게, 인사혁신처장이 감사원 합격 인원을 강백현에서 최현희로 바꾸라고 청탁을 해왔습니다. 바꾸기만 하면 승진 시켜준다고. 나중에 청와대에 자리 마련해주겠다는 제안입니다.

    “그래서 네 생각은?”

    - 제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이미 아시지 않습니까?

    유성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겠어?”

    - 네. 언젠가는 이런 일이 저한테도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저희가 국가를 위해 일하지. 권력의 개가 되기 위해 일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 호섭아, 네 판단을 존중한다.”

    - 국장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국장님과 연관되는 방향으로 진술하진 않을 겁니다.

    이때, 유성재와 정호섭의 통화를 듣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그건 바로 최용규.

    한때 충남도청 공직기강감사실에서 일했던 그 사람의 유령이다.

    [훌륭하십니다. 선배님들이 계셔니 아직 대한민국에는 희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최용규가 그들의 결정에 고개를 숙였다.

    * * *

    그리고 다음 날.

    교육생들이 지원한 처, 부, 원의 발표가 홈페이지에 게재되었다.

    - 감사원 인사발령.

    ○ 고위감사공무원 전보(3명, 12.11.자)

    - 재정경재감사국장 김태보

    - 국토해양감사국장 남석호

    - 공공기관감사국장 유성찬

    ○ 신규보임 (1명, 12. 11.자)

    - 충남도청 공직기강감사실 팀장 강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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