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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배기 깨러 왔습니다-62화 (62/139)
  • 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62화

    조성환이 샤워실에 들어가고, 백현은 컴퓨터 앞에서 내일부터 시작될 교과목에 대한 예습을 준비했다.

    “선배, 옆에서 자꾸 알짱거릴 거예요?”

    [뭐?]

    “아니, 도와주실 거면 도와주시고, 아닐 거면….”

    [꺼지라고?]

    “아니, 제가 언제 그렇게까지 말했어요. 그냥 왔다갔다만 하지 않아주었으면 해서요. 집중 좀 하게요.”

    [응. 오케이. 성현이 보러 간다.]

    “네~ 네. 기분 나쁘셨으면 죄송합니다. 제 마음 아시죠?”

    [아! 알지!]

    최용규는 최근 너그러워진 백현의 태도에 미소를 지었다.

    자신과 달리 사람들과 원만하게 지내는 백현이 살짝 부럽기도 했다.

    슈우우웅!

    최용규가 순식간에 프랑스로 날아갔다.

    대한민국 과천에서 프랑스 파리까지 걸리는 시간, 단 1초.

    최용규의 시선에 김성현이 보인다.

    동료인 고연주와 대화를 하고 있는데 왠지 심각해 보인다.

    최용규가 김성현의 곁으로 날아가 둘의 대화를 엿들었다.

    “연주 씨, 오늘 무슨 일 있어?”

    “아니요.”

    “근데 표정이 왜 그래? 언니한테 말해봐. 응?”

    “말하기 좀 그런데, 아무것도 아니에요. 실장님, 저희 일해요.”

    고연주가 애써 웃음을 지으며 우울한 표정을 지워보지만, 그것을 그냥 지나칠 김성현이 아니었다.

    “연주야! 말해. 말해야 풀린다. 응? 우리 같이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 우울하면 잘 나올 디자인도 안 나와. 우리 따로 나가서 얘기할래?”

    “아, 그냥 별 일 아니고… 외로워서요.”

    고연주의 의외의 대답에 김성현은 놀란 얼굴이 되었다.

    “뭐?”

    “아니, 그냥 프랑스까지 왔는데 놀지도 못하고, 남자도 못 만나고 일만 하잖아요. 그냥 인생이 좀 우울해서 그래요.”

    고연주의 말에 윤진희 또한 말을 보탰다.

    “저도요! 요즘 우울해요. 밤에는 위험해서 나가면 안 된다고 하고, 낮에는 일만 하고. 그냥 여기가 프랑스 파리인지 강원도 산골짜기인지 모르겠어요.”

    50일이란 기간.

    일만 하고 지내는 고연주와 윤진희의 한탄에 김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내가 너무 채찍질만 했어. 일만 잘 한다고 사람이 행복한 게 아닌데….’

    김성현이 잠시 고민하더니, 스케치를 하고 있는 고연주의 손을 잡으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연주 씨, 오늘 농땡이 좀 칠까?”

    그러자 얼굴은 환해졌지만 말투는 걱정스러운 고연주.

    “네?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왜? 내가 팀원 데리고 시내로 시장조사 좀 나가겠다는데 샬롯에서 설마 뭐라고 할까봐?”

    김성현의 말에 윤진희가 호들갑을 떨었다.

    “실장님! 완전 최고! 연주 언니! 우리 빨리 시내구경 하러 나가요.”

    “그래도… 괜찮을까?”

    고연주는 방금까지 심각했던 얼굴이 벌써 활짝 펴졌다.

    하지만 못 이기는 척 다시 한번 김성현의 얼굴을 확인한다.

    김성현은 부하직원이며 친한 동생들인 연주와 진희에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시장 조사하면서 커피는 연주 씨가 사고, 디저트는 진희 씨가 쏘는 걸로.”

    “네? 법인카드는요?”

    “내가 알아본 곳이 있어요. 법인 카드는 거기서. 아마 연주 씨랑 진희 씨도 정말 좋아할 거야.”

    3인방은 파리 시내를 걸으며 오랜만에 따뜻한 햇살을 마주했다.

    양산과 선글라스를 소품삼아 우아한 걸음으로 파리 시내를 활보했다.

    찰칵찰칵.

    동양에서 온 셀럽이라도 된 듯 서로 사진을 찍어준다.

    인생 샷을 건지려고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구글링으로 파리에서 유명한 커피숍을 방문, 현지 특유의 분위기를 즐겼다.

    백화점에 들러 신상품과 최신 트렌드를 분석하고, 최근 잘 나간다는 구슬아이스크림과 대만에서 넘어온 생과일주스를 마셨다. 그렇게 파리의 가을을 만끽했다.

    최용규는 3인방을 따라다니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파리 현재시간 오후 6시.

    김성현이 만면에 웃음이 가득한 고연주와 윤진희에게 물었다.

    “오랜만에 나오니까 좋다. 연주 씨랑 진희 씨도 스트레스 많이 풀었죠?”

    “네. 실장님, 완전 좋았어요. 남자들도 옷도 잘 입고, 세련되고.”

    윤진희의 말에 김성현이 방긋 웃었다.

    “하여간 꼭 이렇게 바깥에 나오면 남자 얘기는 빠지지가 않는다니까. 그것보다 제가 얘기했었죠?”

    “네? 뭐를요?”

    “그새 까먹었어요? 법인카드! 저녁 먹어야죠.”

    “아~ 넵!”

    프랑스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백화점.

    이곳의 1층에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브랜드 중 하나인 샬롯이 1층 유리창 광고면을 전부 채우고 있다.

    디자이너로서 자신들이 만든 옷이 파리의 메인 시내에 전시되는 것은 얼마나 뿌듯한 일일까?

    그러한 일이 지금 막 벌어지고 있다.

    고연주는 본인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은 채 얼굴을 양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실…장님?”

    “왜요? 뭔데요?”

    “아니! 제가 디자인한 옷! 제가 디자인한 옷 맞죠? 네?! 실장님이 제 디자인 보고 상부에 제안 넣어보자고 하셨잖아요. 근데 왜 저 옷을 마네킹이 입고 있죠?”

    마네킹이 고연주가 디자인한 옷을 그대로 입고 있다.

    그것뿐이 아니다.

    마네킹이 신고 있는 구두 역시 며칠 전에 윤진희가 디자인했던 물건이다.

    “어? 저 구두는 내가 디자인했던 거랑 똑같은데….”

    이를 본 김성현이 웃음을 지운 채 무뚝뚝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 뭐지? 왜 두 사람이 디자인한 옷하고 구두가 마네킹에 입혀 있을까? 설마 두 사람 다른 디자이너 디자인 표절한 거 아니죠?”

    김성현의 말에 고연주가 깜짝 놀라서 두 손을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에요! 실장님, 오해에요. 그 디자인 제가 생각해서 그린 거고, 다른 옷들 참고한 거 진짜 아니에요.”

    “진희 씨는?”

    “저도 아니에요. 실장님. 저 그런 사람 아닌 거 아시잖아요. 아~ 혹시 상부에 제출하신 건 아니죠? 아! 진짜 오해하면 어떻게 하죠? 저희가 디자인 표절했다고 생각하진 않겠죠?”

    두 사람의 말에 김성현이 전화를 걸었다.

    “Bonsoir!”

    - Bonsoir!

    김성현의 입에서 프랑스식 인사가 튀어나오자, 윤진희와 고연주가 당황해서 발을 동동 굴렀다.

    “실장님! 일단 파악부터 하고 전화를 하시는 게 맞지 않아요?”

    “저희가 디자인 훔친 게 확실히 아니긴 한데, 먼저 저게 왜 걸려있는지 확인을 하고 연락하시는 게….”

    의류 디자인을 하다보면 분명 자신이 창작한 것인데도 이미 상품으로 출시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지금의 상황도 마찬가지.

    진짜 만에 하나지만, 다른 디자이너가 먼저 상품화시킨 것이라면 저 디자인은 고연주와 윤진희의 것이 아니게 된다. 그러므로 신중한 두 사람.

    그런데 프랑스어로 된 인사말 뒤로, 전화기에서는 익숙한 한국말이 흘러나왔다.

    - 자기야. 도착했어?

    특유의 느끼한 말투. 고연주와 윤진희가 환한 웃음을 지었다.

    “마르코?”

    “마르코 씨랑 전화하신 거예요?”

    김성현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글라스 커튼월 안쪽 샬롯 매장에서 마르코가 환한 웃음과 함께 손을 흔들어주었다.

    김성현이 빙그레 웃으며 윤진희와 고연주에게 물었다.

    “일단 소감 좀 들어봐야겠죠? 지금 두 사람, 기분이 어때요? 50일 동안 낯선 곳에 와서 죽을 만큼 일한 결과! 두 사람의 결과물이 여기에 있어요. 만족스러우신가요?”

    감동과 희열.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김성현.

    그러기에 윤진희와 고연주가 낯선 프랑스 파리까지 큰 고민 없이 따라나선 것이었다.

    “실땅님! 진짜! 이러시는 게 어디 있어요?”

    “아~ 진짜 너무해! 너무하신다 진짜!”

    김성현의 작은 선물에 윤진희와 고연주가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폭포수 같은 눈물에 화장이 지워지는 두 사람.

    “두 사람 빨리 뚝 그쳐요! 이따 잘생긴 셰프들이 만들어주는 전통 프랑스 레스토랑에 갈 건데, 화장 지워진 채로 갈 건가요?”

    김성현이 일부러 퉁명스러운 말투로 말하자, 그 속뜻을 짐작한 고연주와 윤진희는 감동을 받았다.

    “아~ 진짜! 감동감동, 실땅님 최고! 정말 최고예요!”

    “고맙습니다. 진짜- 너무 오늘 기분 너무 좋아요!”

    최용규는 3인방의 우정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1시간 후, 프랑스 코스요리를 먹는 네 사람의 대화.

    “아~ 백현 씨도 같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맞아. 프랑스 같이 왔으면 좋았잖아. 안 그래요 실장님?”

    두 사람의 말에 김성현이 화제를 돌렸다.

    “자자자! 지금 이 자리 없는 사람 이야기 하지 말고, 앞에 있는 프렌치 느낌 물씬 나는 신사 분들한테 집중합시다. 우리 아직 젊어요. 세상에 남자는 많고, 어떤 인연이 어떻게 생길지 모르는데~ 과거에 집착할 건가요?”

    나비넥타이에 말끔한 정장. 포마드로 머리를 깔끔하게 정리한 프랑스 남자들이 서빙을 하고 있다.

    “실장님 말이 맞아~ 진희야! 저 남자 괜찮지 않아?”

    “네. 영화배우 주드 리 닮은 것 같은데요?”

    “응. 저런 사람이 나한테 와서 연락처 달라고 했으면 소원이 없겠다.”

    “그럼 내 인생 다 바치죠. 평생 프랑스 살아야 한다고 해도 만날래요!”

    프랑스 남자들의 외모를 보고 즐거워하는 두 사람.

    “쟤는 내 스타일이야~ 연주랑 진희, 너희들 넘보지 마~ 응?”

    그리고 그 남자들을 흠모하는 사내, 디자이너 마르코.

    헌데 이 중 한 사람은 이 순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찰칵! 찰칵! 11층에서 보이는 파리의 정경을 핸드폰에 담고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모습이었다.

    [김성현! 성현아, 아니지? 아니지?]

    최용규의 시선은 김성현의 스마트폰 화면에 가 있었다.

    [껄렁한 강비서와의 채팅방]

    김성현의 손가락이 갈팡질팡한다.

    스마트폰에 쓰려는 글씨는….

    - 프랑스 경치 이렇게 예쁜데! 안 올 거예요?

    그 글씨를 본 최용규의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

    [왜! 왜 이렇게 돼버리는 건데!]

    최용규에게는 불행 중 다행.

    김성현은 껄렁한 강비서와의 채팅방에 쓴 <프랑스 경치 이렇게 예쁜데! 안 올 거예요?>를 전송하지 않고 한 글자씩 지워버린다.

    김성현의 흔들리는 마음이 최용규를 가슴 아프게 만들었다.

    김성현은 자신을 사랑했던 기억을 점차 지워나가고 있었다.

    최용규는 자신 대신 강백현이란 사내를 마음에 담아가는 그녀를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다.

    정작 가까이 있었을 때는 티 안 냈으면서!

    일만 하고 있었을 땐 강백현에 대한 생각 없었으면서!

    왜 혼자 쓸쓸해하는 건데?

    조금씩 변해가는 그녀의 마음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최용규가 뚱한 표정을 지으며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밤 1시.

    강백현이 다음날 교육할 과목을 펼친 채 책을 읽고 있었다.

    [아직 안 자냐?]

    최용규의 말에 강백현이 노트북 내 메모장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성환이 자요. 말로 대답 안 할 테니까 글자보고 말해요.

    [응. 너 좋아하는 여자 생긴 것 같다.]

    - 어? 성현 씨가 나 보고 싶대요?

    눈치 빠른 녀석.

    최용규는 그래서 이 후배 녀석이 더 싫었다.

    [아니! 성현이 말고.]

    - 농담 하려면 그냥 가요. 나 공부나 하게. 지금 막 집중 잘 되고 있었어요.

    그래서 최용규는 훼방을 놓을 작전을 구상했다.

    [김지혜, 걔가 너 좋아하는 것 같아.]

    - 김지혜? 그 레오퍼드?

    [그래. 걔랑 잘 해 봐! 혹시 아냐? 운명의 연인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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