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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배기 깨러 왔습니다-59화 (59/139)
  • 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59화

    최현희의 말에 씨가 있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

    그녀가 신은 단화의 굽이 백현의 구두를 밟은 탓이다.

    백현이 통증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 미안해요. 발을 헛디뎌 밟고 말았네요. 어떡해! 백현 씨, 많이 아파요?”

    [일부러 그랬네. 쟤 일부러 그랬어.]

    최용규는 자신의 대학 후배 최현희의 행동에 핀잔을 늘어놓았다.

    마치 실수인 듯 뻔한 연기를 하는 최현희. 하지만 주변의 남자들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백현의 표정을 살필 뿐이었다.

    강백현은 실소를 터트릴 뻔했다.

    ‘일부러 밟은 거야? 1등 놓친 것 때문에? 쟤 진짜 단순하다. 왜 저러고 살지?’

    하지만 여기서 처신을 잘못하면 그녀의 의도에 말려들게 된다.

    어떻게든 자신의 이미지에 흠집을 내려는 게 그녀의 목적일 테니까.

    이를 모를 리 없는 백현이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현희 씨, 그러실 수 있죠.”

    “정말 괜찮아요? 아~ 정말 미안해서 어떻게 하지?”

    헌데 최현희의 행동에 남자들은 몰라도 동기인 여성들의 표정에는 냉소가 가득했다.

    ‘여우 짓 하는 거 봐. 어휴~ 꼴 보기 싫어.’

    그때 백현과 최현희 사이로 누군가가 길을 내며 지나간다.

    “아아악!”

    “아, 괜찮아요? 현희 씨 어떻게 해! 정말 미안해서 어떻게 하죠?”

    한 여성의 등장. 그녀의 행동에 최현희가 그만 감정을 폭발시켰다.

    “김지혜! 너 일부러 밟았지?”

    “아, 현희 씨. 당연히 아니죠. 미안해요. 괜찮죠?”

    5급 공채 신입인 김지혜의 등장에 최용규가 방긋 웃으며 중얼거렸다.

    [3등 등장, 대박인데?]

    김지혜는 같은 여자로서 부끄러운 행동을 하는 최현희가 교육기간 내내 못마땅했다.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기어코 깎아내리는 그녀의 행동.

    비겁하고 못마땅했지만 아무도 그녀를 제지하지 못했다.

    발표 수업 때도 그렇다.

    최현희의 조원들은 그녀의 들러리일 뿐인 게 눈에 보인다. 성과는 다 최현희 차지.

    그런 욕심을 얄밉게 생각한 나머지, 김지혜는 그만 우발적인 행동을 벌이고 만 것이다.

    “너! 분명히 일부러 밟았어!”

    “현희 씨, 그런 거 아니에요.”

    “야! 내가 왜 현희 씨야. 너보다 2살 많은 언니잖아! 언니라고 불러!”

    “싫은데요? 동기끼리 서로 존댓말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최현희의 손바닥이 김지혜의 뺨을 향해 움직였다.

    짝 소리와 함께 김지혜의 뺨에 손바닥 자국이 생겨났다.

    헌데 김지혜는 씩 웃더니 자신도 손을 움직여 상대의 뺨에 싸대기를 날렸다.

    최현희는 누군가에게 맞아본 게 처음이기에 깜짝 놀랐다. 다리가 후들후들 거리고,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순 없었다. 기세에 밀리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때문에 최현희가 적반하장으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쳤어? 쳤어? 너 고소할 거야. 일부러 밟은 거 여기 있는 모두가 봤어. 다 봤지? 저 여자가 나 밟고, 싸대기 친 것 봤지?”

    마치 드라마의 악역처럼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최현희.

    강백현이 보다 못해 말을 걸었다.

    “현희 씨.”

    “네. 백현 씨 봤죠? 내가 고소할 테니까 증인 서 줘요.”

    “그건 모르겠고.”

    “네?”

    “아까 현희 씨가 제 발을 일부러 밟은 것 같아서요. 저도 고소해야 되나 싶네요.”

    그러자 옆에 있던 김지혜가 말을 보탰다.

    “저도 현희 씨가 백현 씨 발 일부러 밟고 시치미 떼는 거 똑똑히 봤어요.”

    김지혜와 강백현이 같은 의견을 내자, 최현희가 노발대발하기 시작했다.

    “뭐라는 거야? 둘이 쌍으로 미쳤니? 너희는 교양도 없어?”

    최현희의 본성이 폭로되는 순간.

    이제까지 최현희를 편들던 남자들 몇몇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현희 씨. 더 이상 악화시키지 말죠?”

    한 남성 동기의 말이었다. 최현희는 이빨을 꽉 깨물며 노려보았다.

    그러나 다른 동기 한 명이 백현과 지혜의 편을 들었다.

    “현희 씨, 혹시 백현 씨한테 1등 빼앗겼다고 그러는 건가요?”

    “뭐야? 내가 그렇게 속 좁은 줄 알아?”

    “그런데 내로남불도 아니고, 자기는 남의 발 밟아도 되고, 다른 사람은 본인 발 밟으면 고소하고? 싸이코세요?”

    “야! 너 뭐야? 도대체 뭐야?!”

    이미 동기들 중 일부는 최현희의 행동에 학을 떼기 시작했다.

    간단한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던 상황이 점차 악화되자, 강백현이 한숨을 내쉬더니 김지혜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나가죠. 따로 얘기하죠.”

    백현과 김지혜가 나가려 하자 최현희가 흥분해서 백현의 소매를 잡았다.

    “강백현 씨, 걔 놓고 가요. 어디 가요? 내가 고소한다니까!”

    “고소하려면 해보세요. 나도 최현희 씨 고소할 테니까.”

    백현은 최현희를 간단히 뿌리치고는 김지혜와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 최현희의 학교 후배인 조성환이 그녀를 말렸다.

    “선배님, 다른 동기들이 다 봐요. 여기서 그만 하시는 게 좋겠어요.”

    “이걸 어떻게 참아? 둘 다 나한테 말하는 싸가지 봤지? 어?”

    * * *

    김지혜와 따로 건물 밖으로 나온 강백현은 옆에 따라붙어 참견하는 최용규가 못마땅했다.

    [무슨 말 하려고? 그냥 돌려보내!]

    ‘어휴~ 말이나 못하면 진짜.’

    재미난 구경도 아닌데 졸졸 따라오는 최용규.

    강백현은 얼른 방으로 돌아가 성주단지로 선배를 괴롭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김지혜와의 대화가 먼저였다.

    “왜 나선 겁니까?”

    “네?”

    “왜 나서서 일을 크게 벌이신 거냐고요.”

    김지혜는 어쩐지 따지고 드는 강백현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말꼬리가 올라갔다.

    “그거야 백현 씨가 곤란하니까 그런 거죠.”

    “앞으론 생각하고 행동하세요. 최현희 같은 사람은 단순한 감정싸움으로 가면 골치 아파지니까요.”

    “이봐요! 손을 왜 잡아요?”

    김지혜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강백현은 김지혜를 데리고 편의점에 들어갔다.

    그리고 소독약과 밴드를 구입한다.

    김지혜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피부 까졌어요. 일단 이걸로 연고 바르고 소독해요.”

    “아….”

    “그리고 다음부터는 자신이 손해 볼 상황이면 나서지 말아요. 도와준다고 해서 결과가 반드시 좋으리란 법은 없으니까.”

    연고를 발라주고, 얼굴에 밴드를 붙여주는 강백현의 손길에 김지혜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됐어요! 얼굴 상처는 내가 알아서 할게요.”

    “아, 미안하네요. 그것보다 피부과 한 번 들려보시는 게 좋아요. 고운 피부 다 망가지겠네.”

    “……”

    “아깐 고마웠습니다. 나중에 도움 필요하면 말씀하세요. 정리 노트나 뭐, 공부하면서 필요한 것들? 제가 도움 줄 수 있는 거면 뭐든 도움 줄게요.”

    강백현은 시크한 표정을 지으며 편의점을 나섰다.

    편의점에 남겨진 김지혜는 강백현의 행동을 상기하다가, 방금 전 모두의 앞에서 자신이 했던 짓을 떠올리고는 부끄러움에 소리를 질렀다.

    “아~ 짜증나! 내가 왜 나섰지? 아~ 진짜!”

    * * *

    그날 늦은 밤.

    강백현은 수업용 교재를 메모하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많은 일이 있었네. 내가 과연 잘하고 있는 건가?’

    한편으론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최대한 조용히 지내고 싶었는데, 최현희와 만난 후 모든 게 꼬여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백현은 테라스에 나와서 스마트폰의 연락처 스크롤을 내리며 자신의 지인들을 떠올렸다.

    식당에서 일하는 엄마와 경비 일을 하는 아빠.

    그리고….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는 못된 동생 윤수.

    [강백현] : 윤수야. 잘 지내니?

    백현의 문자에 윤수가 답장을 했다.

    [박윤수] : 응. 근데 형아! 나 싫어진 거 아니지?

    [강백현] : 그럴 리가 없잖아. 형이 윤수 좋아하는 거 알잖아.

    [박윤수] : 좋아하면 뭐 해. 어차피 안 데려갈 거면서!

    [강백현] : 까분다. 삐진 척 하면 진짜 안 놀러간다. 학교는 잘 다니지?

    [박윤수] : 응. 변호사 아저씨 소문나서, 친구들이 다 나 무서워해. 다들 나한테 지려.

    [강백현] : 지려가 뭐야?

    [박윤수] : 오지고 지린다고. 형아, 그 말 몰라?

    오진다. 지린다. 백현은 검색해서 해당 단어를 찾아보았다.

    놀랍게도 표준어 오달지다에서 근원이 된 단어.

    그런데 연관 검색어에 급식체란 말이 뜬다.

    [강백현] : 형한테 장난치지 말고 공부 잘 하고 있어. 조만간 놀러 갈 테니까.

    [박윤수] : 응! 형아도 잘 지내. 사랑해!

    [강백현] : 그래! 나도!

    오랜만에 윤수와 톡을 하니 백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데 박윤수의 톡은 그게 마지막이 아니었다.

    [박윤수] : 다음엔 누나랑 같이 와. 기다릴게.

    [강백현] : 또 까분다. 빨리 자! 형아한테 장난치면 원장님한테 이른다?

    [박윤수] : 메롱! 이만 사라진다. 뿅!

    마지막 문자에 강백현이 웃음을 지었다.

    ‘윤수 이 녀석! 성현 씨가 그렇게 보고 싶나?’

    * * *

    김성현과 마지막으로 본 지 무려 50일이 지난 상황.

    그동안 최용규는 강백현의 옆에서 깐죽거렸다.

    [성현이 소식 안 궁금해? 말해줄 수도 있는데?]

    “됐거든요? 나 공부해야 되니까 귀찮게 하지 마요.”

    [공부라면 내가 옆에서 도와주잖아. 여유 있을 것 같은데?]

    “됐어요. 연락 없는 게 서로 희소식이잖아요. 더 이상 내 앞에서 성현 씨 얘기 하지 마요.”

    [알았다. 나중에 후회하지 마. 성현이 지금 완전 잘 나가거든?]

    말은 그렇게 했다.

    그런데 1차 시험 결과가 나오다보니 백현도 김성현의 근황이 알고 싶고 자신의 결과도 자랑하고 싶었다.

    결국 톡을 보내버렸다.

    [강백현] : 실장님, 잘 지내세요?

    보내자마자 김성현에게서 답장이 온다.

    [김성현 실장] : 네. 백현 씨. 오랜만이네요.

    [강백현] : 무슨 답장을 5초도 안 돼서 하세요? 혹시 문자 기다렸어요?

    [김성현 실장] : 아니요. 지금 막 퇴근해서 팀원들이랑 톡으로 업무 중이었어요.

    [강백현] : 거기는 아직 오후 4시지 않아요?

    [김성현 실장] : 네. 그런데 프랑스는 법정 근로시간이 35시간 밖에 안 돼서 오늘은 오후 1시에 퇴근했거든요.

    [강백현] : 우와, 진짜 좋네요.

    [김성현 실장] : 좋긴요! 놀러 온 거 아니잖아요. 인정받으려고 초과근무수당도 없이 지금도 일하고 있는 거거든요?

    [강백현] : ㅋㅋㅋ. 무급으로 일하는 중이군요! 연주 씨랑 진희 씨는 잘 지내요? ㅎㅎ

    [김성현 실장] : ㅎㅎ는 뭐징? 연주 씨랑 진희 씨가 보고 싶었어요?

    갑자기 기묘해진 분위기. 강백현은 이런 분위기를 너무나 잘 알았다.

    여기서 실수하면 큰일 난다.

    30초도 되지 않은 시간에 강백현의 손가락이 바삐 움직였다.

    [강백현] : 물론 보고 싶죠. 우리 같은 팀원이었잖아요!

    일단 그녀가 원하는 대답이 있더라도 바로는 주지 않아야 한다.

    과거에서 배운 교훈이다.

    역시나 김성현의 읽씹이 시작됐다.

    잠시 뜸을 들인 강백현은 씩 웃으며 생각했다.

    ‘이 정도면 살짝 고민했겠지?’

    그리고 메시지 하나를 슬쩍 전송했다.

    [강백현] : 그래도 실장님만큼 보고 싶었겠어요~♥?

    강백현의 마지막 메시지에, 유령 최용규가 갑자기 백현의 옆에 출현했다.

    [야! 강백현! 도대체 뭐하는 짓이야! 그만 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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