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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배기 깨러 왔습니다-58화 (58/139)
  • 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58화

    최현희의 말에 유령 최용규가 슬쩍 조언했다.

    [대답 미루고,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해.]

    하지만 최용규의 의도와는 달리 강백현은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전달하기로 했다.

    “저는 최현희 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누구의 편도 아니고, 누구의 편을 들 생각도 없습니다. 그리고 1등을 양보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인 것 같네요. 저는 최선을 다 할 거고, 결과가 나오면 그대로 받아들일 겁니다. 밥맛이 없네요. 일어나보겠습니다.”

    [이 미친 놈! 빡대가리 새끼야. 상황을 봐 인마! 좀 재고 다녀.]

    최용규가 잔뜩 흥분해서 강백현에게 소리쳤다.

    최현희 역시 강백현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백현에게 소리쳤다.

    “강백현 씨! 앉아요.”

    강백현은 일어난 채로 최현희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또 할 말이 남았나요?”

    그러자 최현희는 회심의 한수를 꺼내들었다.

    “아빠는 다음 선거에 대선에 출마할 거예요. 지금으로선 대선 유력후보 3위의 위치지만, 대선이 시작되는 2018년, 즉 3년 뒤는 달라질 거예요. 만약 대선에 실패한다고 해도 백현 씨한테 해가 되는 건 없을 거예요. 그러니 1등 양보해요.”

    “하하하하, 미치겠네.”

    강백현은 최현희의 협박 섞인 제안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도대체 제가 1등 한다는 보장이 어디 있죠?”

    강백현의 말에 최현희가 강백현의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녹음하고 있는 건 아니죠?”

    “네. 아니죠.”

    “솔직히 백현 씨랑 나랑 같은 경우 아닌가요? 다 알고 있었던 거 아닌가요?”

    그녀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를 못하는 백현.

    그런 백현에게 최용규가 부연설명을 해주었다.

    [문제 유출이 되었던 거야. 그걸 바탕으로 최현희 쟤는 2등을 했던 거고.]

    부정부패, 소위 말하는 절대권력.

    강백현은 결국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와~ 미쳤네.”

    “강백현 씨, 아닌 척 그만해요. 이미 조사 다 했다니까요. 백현 씨도 마찬가지잖아요!”

    누구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강백현은 실소를 머금으며 이번에야말로 자리를 떴다.

    그러자 최현희가 방문을 열고 떠나려는 강백현의 소매를 붙잡았다.

    “거기 앉아! 앉으라고!”

    하지만 강백현은 최현희의 손을 단번에 뿌리치고 한정식 집을 빠져나갔다.

    한정식 집 밖.

    저 멀리 공무원 인재개발원이 보인다.

    그리고 강백현은 자신이 왜 그렇게 5급 공채에 목을 매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세상이 미쳤구나. 부주시 시장, 부시장 놈이나, 저 여자나 똑같아. 다 썩었어. 정치인 놈들 진짜!’

    어딜 가나 썩은 놈들 천지다.

    자신처럼 빽 없고 돈 없는 놈들은 이런 것도 모르고 불이익을 당한다.

    성적 1위?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어림도 없는 게 대한민국의 현실이었다.

    혈연, 지연으로 엮여있는 인맥.

    돈과 권력으로 손쉽게 좋은 자리를 차지한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더러운 치부가 지금도 암처럼 퍼져있다.

    물론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자유민주주의를 받아들였기에 21세기 2015년, 대한민국은 전세계 264나라 중 GDP 12위에 드는 나라가 되었으니까.

    사실 대한민국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청렴한 국가로 꼽히지만 그 안에 살고 있는 국민으로서는 아직도 갈 길이 멀게 느껴졌다.

    스웨덴처럼 명예직이면 얼마나 좋을까?

    국가에서 제공하는 법인카드로 교통비만 결제해도 횡령이라고 자진사퇴하는 국가. 그런 건 대한민국에서 불가능한 걸까?

    백현은 생각에 몰두해서 홀로 걸었다.

    곁에서 최용규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저 자식! 목숨이 10개라도 부족하겠네. 정의가 밥 먹여주냐? 몸은 좀 사리면서 해야 할 거 아니야?]

    하지만 한편으론 생전의 자신과 같은 바른 사고를 가진 백현이 잘 되었으면 한다.

    저 녀석이 성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쓰면서도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죽어보니, 아니 죽어서 곁에서 지켜보니 백현이 녀석의 삶이 참 대단해보였던 것이다.

    경비일을 하는 아버지와 식당 일을 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란 외동아들 강백현.

    기숙사에 살면서도 매주 주말 집에 가지 않고 동네 인력소에 들려 일거리를 찾던 녀석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최용규가 강백현의 곁으로 날아갔다.

    [야야야야! 같이 가 인마!]

    “왜요? 또 선배 말 안 들었다고 화 내려고요?”

    [아니야. 잘 했어. 네 인생은 네가 결정하는 거지.]

    “선배, 나 내 실력으로 1등해서 최현희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줄 겁니다. 지금부터 공부해야겠네요. 반드시 이겨야겠다는 의지가 흘러넘치고 있거든요.”

    강백현의 말에 최용규가 우려의 목소리를 전했다.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쉽지 않을 걸?]

    “선배, 민법 말고는 다 내 실력으로 올라온 거예요. 잊지 마요.”

    [그 민법이 수석과 차석을 가리는 결정적인 이유였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내 힘으로 알아서 증명하겠다고요. 어차피 인재개발원 내에서 같은 시간 내에 누가 더 집중해서 열심히 하냐에 따라 달린 거잖아요. 지금부터 공부만 팝니다.”

    그 말에 최용규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프랑스와의 시차는 8시간.

    원래라면 지금은 프랑스의 패션 브랜드 샬롯에 출근한 성현의 곁에 있을 시간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백현의 곁에 남았다.

    [정책기획 실습에서 임형호 교수는 분석 고도화 작업에 대해 가점을 많이 줘.]

    “네?”

    [분임토론 자료 중에서는 상호교류를 통한 상대방 관점 이해와 시각을 확장하는데 주안을 많이 두면 될 거고.]

    “아~ 뭐하시는 거예요?”

    [팀원 촉진자와 정책 기획자, 업무 실행자와 업무 조정자에 대해 제대로 구분해 놔. 중앙부처별 필요 역할 중 5급은 앞서 말한 4가지 역할로 구분하거든.]

    강백현은 황당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혼자 공부해도 되는데, 옆에서 최용규가 포인트를 찍어주고 있다.

    “선배, 빨리 프랑스로 가요. 성현 씨 곁에 가서 스토커 짓이나 하시라고요.”

    [싫거든? 크크, 너 인마, 이게 얼마나 좋은 기회냐? 여기 선배가 바로 옆에서 과외해주는 게 얼마나 좋냐?]

    “아니, 이건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니까요?”

    [됐거든? 이제 4급하고 고공단에 대해 알려준다. 4급은 조직관리자, 정책판단자, 업무 관리자, 이해 관계조정자로 분류하고, 고위공무원단의 역할은 …….]

    결국 강백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렇게까지 핵심을 짚어주면 도저히 집중하지 않을래도 안할 수가 없다.

    [다음으로는 직급별 요구 역량에 대해 쉽게 설명해줄게. 요구 역량은 Working, Managing, Relating, Self 차원으로 나뉘는데….]

    고등학교, 같은 기숙사에 살던 시절.

    강백현은 그 시절 최용규의 모습이 떠올랐다.

    수능 끝나고 놀기 바쁜 고3인데도 자신이 쓰던 필기노트를 건네주며 공부하라고 독려하던 선배의 모습.

    ‘그런 추억이 있었지.’

    그런 선배와의 인연이 죽어서도 이어지는 것.

    강백현의 입가에는 슬쩍 미소가 깃들었다.

    “알았어요. 그리고 또 중요한 거 알려줘요. 요점만 빨리빨리.”

    [오케이! 다음은 과장급 역량과 국장급 역량의 비교인데, 결국 자료제시 파악-정리-대응방안 마련-보고 라는 일련의 과정을 정리하는 게 과장이고, 국장은…… 이렇게 설명하면 교수 입장에서 80점 이상 대답은 될 거야.]

    “80점 말고 100점짜리 대답을 알려주셔야죠.”

    강백현의 장난기 어린 말투에 최용규가 삐뚤어진 표정을 지었다.

    [야! 토 좀 달지 말아줄래?]

    * * *

    한 달이 훌쩍 지나갔다.

    1차 중간 성적 발표일.

    오늘 성적 발표로 상위권과 중위권, 하위권이 명확해질 것이다.

    게시판에 붙은 성적에 백현의 동기들이 웅성웅성 거린다.

    ‘난 몇 등이지? 20등 안에는 들었겠지?’

    선배 최용규가 알려주는 요점들을 충실히 정리해서 시험에 대비한 강백현.

    그런 백현이 상위권인 것은 당연했다.

    더구나 백현은 이미 3년 이상의 실무를 경험한 상태기도 했다.

    보고서 작성, 정책기획 실습은 물론 직무 맞춤형 심화학습까지. 이미 쌓여있는 경험적 지식 위에 학문적 소양을 더하는 것이기에 남들보다 이해가 빠른 것은 물론이었다.

    “와! 강백현이 1등이야.”

    “그 사람, 수석 합격한 사람 맞지?”

    “어. 교수님들 질문에 열성적으로 대답하는 그 사람 있잖아.”

    그러나 실제로 1등을 해보니 모두의 시선이 쏠리는 것이 결코 달갑지는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나간다는 명문대 출신들도 백현의 성적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다.

    이럴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는 상황. 누군가가 백현을 향해 말을 걸었다.

    “와! 백현이 형 1등 축하드려요.”

    인재개발원에서 한 달 간 같이 지냈으니 얼굴은 익숙했지만 이름까지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백현의 시야가 슬쩍 그의 명찰로 향했다.

    “현수 씨, 고마워요. 제가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부끄럽네요.”

    “에이~ 수석 합격하신 분이 운이 좋았다니요. 다 실력이죠. 진짜 대단하세요.”

    동기 오현수의 칭찬에 강백현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나이도 많은데 노력해야죠. 현수 씨는 저보다 5년 이상은 빠르잖아요. 20대에 5급 공무원이라니. 저도 그래봤으면 좋겠네요.”

    “아니에요. 형, 저 형보다 2살 밖에 안 어려요. 저도 서른 살인데요?”

    백현은 30살이라고 밝힌 오현수의 말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동안이시네요.”

    “아~ 백현이 형이 동안이죠. 형, 저 초면에 죄송한데 연락처 좀 받아도 돼요?”

    다짜고짜 연락처를 달라는 오현수. 백현은 흔쾌히 승낙했다.

    “그럼요.”

    둘이 전화번호를 교환하는 사이 또 한 명이 찾아와 백현에게 말을 걸었다. 백현은 그의 등장에 미소를 지었다. 바로 룸메이트 조성환이었던 것이다.

    “우와, 형님 진짜 또 1등하셨네. 대박이다.”

    붙임성 있게 다가오는 성환에게 오현수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오현수입니다.”

    같은 학교 출신이 아니라 지금까지 대화할 기회가 별로 없던 두 사람이 사교성 있게 인사를 주고 받았다.

    “저는 백현 형님 룸메이트 조성환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아~ 성환 님? 제 바로 위네요.”

    “네?”

    “제가 성적 5등인데 성환 님이 4등이잖아요. 이번 기수 최연소 합격자셨죠?”

    “아, 부끄럽습니다.”

    사실 백현은 두 사람에게 고마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친근하게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면 주변의 동기들에게 차갑고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다는 인상을 남길 수도 있었다.

    노파심일 수도 있지만 단체생활은 항상 쉽지 않았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모두에게 인정받기란 어렵다는 걸 백현은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국가 정책을 이끌어갈 핵심 인재라지만, 대부분은 인생경험이 부족한 사회적 초년생인 게 사실이다.

    때문에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 있는 말과 행동은 최소화하고 싶었다.

    그런데 한 여성이 강백현을 향해 다가오며 오해의 소지가 있는 발언을 내뱉었다.

    “상위권 분들이 다 같이 모여 계시네요.”

    그녀의 말에 같은 대학 후배인 조성환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최현희 선배님, 안녕하세요!”

    “응. 성환아, 4등 축하해.”

    “네. 그래도 선배님은 못 쫒아가죠. 2등 축하드려요.”

    조성환의 칭찬에 최현희는 어색한 미소를 짓더니, 백현을 향해 웃으며 말을 걸었다.

    “백현 씨, 1등 축하드려요. 그러나 아직 전반전 밖에 안 끝난 거 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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