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55화
백현은 안내데스크가 설치된 기숙사 본관 1층으로 향했다.
기숙사 배정을 받기 위해서다.
여성들은 좌측의 별관, 남성들은 우측의 본관을 사용하는데, 아무래도 합격자 중 남성이 많다보니 남자들이 본관 쪽으로 배정된 듯 했다.
사실 꼭 기숙사에 들어가야 하는 건 아니다.
출퇴근시간만 지키면 인재개발원 생활에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지방에서 출퇴근하기에는 과천이라는 지역 자체가 교통편이 원활하지 않았다.
교통비에 허비하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기숙사가 훨씬 낫다는 게 백현의 판단이었다.
“기숙사 신청은 이쪽으로 오세요.”
안내데스크에는 공무원 두 분이 앉아 있었다.
“패용하고 있는 명찰 좀 보여주시겠어요?”
“네.”
“2인 1실인데, 누구랑 같이 쓰실 건가요?”
안내 공무원의 말에 강백현이 당황했다.
‘어? 누구랑 같이 쓸지 미리 정해놓고 왔어야 하나?’
그러고 보니 백현 외에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짝을 지어서 들어온 상태였다.
“태형이 형! 우리 306호래.”
“그래? 너 코 많이 골지 않냐?”
“에이! 형 나 코골이 수술 했잖아. 괜찮아. 걱정 안 해도 돼.”
친해 보이는 두 사람이 306호에 배정되어 계단을 오르는 게 보였다.
다른 팀도 있었다. 역시 친해 보이는 두 사람.
절친인 듯 서로에 대해 허물없이 대하고 있다.
“아~ 존나 짜증나. 너랑 같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였던 것도 짜증나는데 기숙사까지 같이 쓰냐?”
“큭큭 뭐래! 미친 놈. 기숙사 같이 쓰자며?”
“그거야 모르는 사람하고 쓰는 것보단 너랑 쓰는 게 그나마 나으니까 그런 거지. 혼자 쓸 수 있었으면 진작 혼자 썼지 인마.”
“지금이라도 바꿔?”
강백현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옛말.
5급 공개채용 합격자들은 거의 대부분 인서울 출신.
그들끼리는 서로 친목이 있는 경우도 많았다.
“같이 쓰실 분 없으면 저희가 임의로 배정해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하루 12,000원이고요, 조식/석식은 구내식당에서 4,000원씩 내고 드실 수 있어요. 기숙사비는 계좌이체만 가능하시고, 구내식당은 드실 때마다 카드로 식권 발급해서 드시면 됩니다. 또 궁금한 것 있으세요?”
“아니요. 없습니다.”
“네. 308호 카드키 들고 올라가세요.”
강백현은 짐을 들고 배정받은 방으로 향했다.
5급 공개채용. 국가 핵심인재들의 숙소답게 최신식 설비가 들어서 있다.
카드키를 대자 문이 열리고, 역시 카드키를 꼽으면 방에 전원이 들어온다. 말하자면 호텔식이다.
대형 TV와 냉장고, 더해서 안락하게 쉴 수 있는 1인용 소파가 2개나 있다.
그뿐 아니다. 테라스에는 건물 밖의 뷰가 확 들어온다. 그야말로 최고의 시설이다.
굳이 호텔과 다른 점을 찾자면 책상 2개가 있다는 점.
책상 2개와 의자 2개가 이곳이 인재개발원의 기숙사라는 점을 상기시켜주고 있었다.
‘너무 좋네. 9급하고는 비교가 안 돼.’
시설의 차이에서 백현은 자신의 신분 변화를 체감할 수 있었다.
‘국가 세금이 많이 들어간 만큼, 최선을 다해 공부하자. 국가를 위해, 나를 위해, 그리고 부정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백현은 다시 한 번 의지를 되새겼다.
‘전달사항 나오기 전까진 샤워부터 할까?’
뜨거운 물을 틀어보니 1초도 지나지 않아 온수가 흘러나왔다.
백현은 순간식 가스 보일러의 성능에 크게 감탄했다.
집에서는 온수가 나오는 데까지 시간이 좀 걸렸던 것이다.
‘시설 좋네. 진짜 좋아.’
그 때 벨소리가 들렸다.
띵! 띠리리링!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리는 것이다.
‘누구지?’
백현은 샤워기 물을 끄고 화장실 문을 빼꼼 열고 말했다.
“누구세요?”
“저 308호 배정 받았는데요.”
“아~ 저도 308호인데, 씻고 나와서 인사드릴게요.”
“네.”
5분 뒤 백현은 젖은 몸을 수건으로 닦으며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방금 전 인사한 남자가 짐을 풀고 있는 게 보였다.
“안녕하세요. 강백현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네. 조성환입니다.”
악수를 건네는 백현에게 다소 어색한 자세로 손을 내미는 조성환.
퉁퉁한 체형과 어리버리한 얼굴을 보니 원활한 사회생활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잘 지낼 수 있겠지?’
자신도 모르게 염려하는 백현에게 조성환이 물었다.
“저기요. 이제 같이 지내는데 편하게 형님이라고 불러도 되죠?”
“아, 몇 살이신데요?”
“23살이요.”
강백현이 그의 말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제가 좀 노안이죠?”
백현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재빨리 대처했다.
“아니, 그것 때문에 놀란 게 아니라요. 23살에 5급 붙은 것 때문에 놀란 거예요.”
“아, 최연소 합격자도 아닌데요 뭐.”
“그래도 올해 남자 중에서는 최연소 아닌가요?”
“그렇긴 한데…. 음. 작년에만 붙었어도.”
조성환의 말에 강백현이 기겁했다.
‘작년에도 시험 봤었던 거구나. 23살이면 엄청 젊네. 그런데 그러면 군대 제대 후 바로인가?’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백현이 질문했다.
“군대는 어디 부대 나오셨어요?”
“아직 안 갔어요. 교육 끝나고 바로 입대해야 돼요.”
“입대요?”
“네. 기본병과 장교라고, 전문사관으로 임관하거든요. 내년에 육군 입대합니다.”
백현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5급 공개채용에 합격하면 얻는 혜택.
그건 군대를 병으로 가지 않고 장교로 임관한다는 것.
물론 지원하지 않고 병으로 다녀올 수도 있지만, 장교로 가면 월급도 받고 복무기간동안 공무원 호봉도 인정받을 수 있다. 때문에 대부분 장교로 다녀오는 경우가 많다.
“와~ 그래도 장교로 복무한다니 다행이네요. 제 군 생활 생각만 하면 진짜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와요. 제가 04군번인데 그때는 진짜 쓰레기들만 있어서, 아, 모든 사람이 쓰레기란 건 아니고, 군대 분위기가 그렇다는 거예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형님이랑 같은 방이라서 굉장히 놀랐어요.”
“네?”
“1등이시잖아요. 사실 서연고 출신에서 보통 1등이 나오는데, 이번에는 그게 아니라서 엄청 궁금했었거든요.”
“아, 혹시 학교 물어봐도 될까요?”
“서울대요.”
“와, 서울대시구나. 대한민국 엘리트. 성환 씨가 부러우실 게 아니라 제가 부러워해야 할 것 같은데요?”
명실상부 대한민국 극소수만이 갈 수 있는 대학 출신.
그런 친구가 자신에게 부럽다고 하니 백현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시험 얼마나 준비하셨어요?”
그런데 조성환은 진심인 듯 했다. 강백현이 잠시 고민했다.
자신의 실력도 있었지만, 민법에서 최용규 선배의 도움이 없었다면 합격하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니 양심에 찔려서였다.
“5독 정도 한 것 같아요.”
“와~ 5독 만에 합격하시다니, 그것도 수석으로 합격하셨다니 정말 대단하시네요. 형님! 완전 존경합니다.”
조성환의 말에 강백현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어리숙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조성환은 인간미가 있었다. 겉으로는 사회생활과 인연이 없어 보였지만 실제로는 활발한 성격에 적극성도 있었다.
‘내가 잘못했네. 외모로 사람 판단하면 안 되는 건데.’
“5독 전에 9급 공무원 준비하면서 기초를 쌓았던 게 많이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사실 전 충남 부주시에서 공무원으로 3년 정도 생활 했거든요.”
“와! 더 대단하세요. 공직 생활 하면서 시험 보신 거잖아요.”
“대단할 건 아니고, 아는 선배가 많이 이끌어줬거든요.”
“선배요?”
“네. 최용규 선배라고 고등학교 선배가 많이 도와주셔서 결과가 좋았네요.”
“최용규 선배면, 4년 전에 저희 학교에서 수석 합격한 그 최용규 선배님 아닌가요? 공직기강 감사팀에서 일하시던 선배님이요.”
조성환의 말에 강백현이 깜짝 놀라 조성환에게 시선을 옮겼다.
“최용규 선배랑 잘 아세요?”
“그 선배님은 절 몰라도, 저희들은 최용규 선배님 다 알죠. 우리 학교에서 선배와의 대화 시간에 가끔 오셔서 독려도 해주시고 응원도 해주셨거든요.”
조성환의 말에 강백현이 헛웃음을 지었다.
‘학교에서는 나름 인정을 받았었구나.’
백현이 생각에 빠진 사이, 갑자기 조성환이 눈물을 닦기 시작했다.
“아…. 죄송해요. 울면 안 되는데….”
“괜찮아요. 눈물 닦아요.”
백현이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조성환에게 건넸다. 그는 눈물을 닦으며 말을 이어갔다.
“선배님, 진짜 좋은 분이셨거든요. 졸업하시고 나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공부하셨대요. 그리고 4년 전에 행시랑 고시 한 번에 합격하셔서 다들 사법연수원으로 가실 줄 알았는데, 인재개발원으로 가셔서 정말 인상 깊었거든요.”
“아…. 왜 인재개발원으로 가셨을까요?”
백현은 최용규의 선택이 궁금했다. 조성환은 자신이 아는 범위 내에서 관련한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최용규 선배님은 나중에 대통령이 되려고 인재개발원을 택했대요.”
“네? 변호사 출신이 대통령 되기 더 쉽지 않나요?”
“선배와의 대화 시간에 그 질문도 나왔었는데, 선배님께서는, 대통령이란 자고로 한쪽의 시야만 보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 여당과 야당, 그리고 국민들의 의견을 종합해 국가의 이익이 되는 쪽을 선택해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법무부보다는 행정안전부가 좋다고 판단하셨대요.”
“그런데 행정안전부가 아니라 감사원으로 가지 않았나요? 제가 알기로는 그렇다고 알고 있거든요.”
“그것도 언젠가 다시 만나면 여쭤보려고 했는데, 기회가 안 닿았네요. 왜 감사원으로 가셨을까요? 감사원에 가시지 않으셨다면 지금쯤 엄청 잘 나고 계셨을 텐데.”
“……”
최용규의 죽음 때문에 갑자기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하지만 백현은 애써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최용규 선배님이 아무 생각 없이 그리로 가시진 않았겠죠. 국가를 위해 좀 더 넓은 시야를 가지려고 감사원에 가신 게 아닐까요? 감사원은 많은 공무원들을 상대하잖아요. 물론 목적이 감사이긴 하지만….”
“말이 너무 길어졌네요. 형님, 저 씻어도 되죠?”
“네. 그러세요.”
조성환이 짐을 풀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뜻밖에 최용규의 과거를 들은 강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도 나름 자신의 인생 목표 달성을 위해 노력하셨네요. 그나저나 감사원은 뭐 때문에 들어가신 겁니까?’
그때, 최용규가 호들갑을 떨며 백현의 기숙사에 들어왔다.
[야! 308호면 308호라고 말을 해줘야지. 한참 찾았잖아.]
“방 배정이 선배 가고 나서 결정됐어요. 그나저나 선배, 그 여자에 관련해서는 알아봤어요?”
[아니, 1시간 관찰한 걸로는 부족해. 그냥 기숙사 들어가서 씻고 옷 갈아입더니 바로 잠들더라. 특별한 건 없었어.]
“알았어요. 그냥 친해지려는 것일 수도 있겠네요. 나중에 시간 될 때마다 한 번씩 뭐하나 봐주세요. 단순하게 접근한 게 아닐까봐 조금은 걱정되네요.”
[그래. 나 성현이 보러 가도 되지?]
일단 백현의 부탁을 완수한 최용규는 이내 몸을 돌렸다.
“아, 잠깐만요. 선배 말인데, 행정안전부에서 감사원, 그리고 공직기강감사팀으로 갔잖아요.”
[응. 그랬지.]
“왜 감사원이었어요? 선배, 대통령 되고 싶어서 이것저것 배울 수 있는 행정안전부로 간 거라면서요.”
[아, 그 얘기? 누구한테 들었냐?]
“누구한테 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고요. 감사원으로 가신 이유가 뭐예요?”
최용규는 백현의 질문에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사실 선배들한테 대들었다가 찍혔거든. 그래서 제주도로 발령났길래, 이건 안 되겠다 싶어서 감사원으로 지원했지. 다행히 충남도청으로 보내주더라.]
“네?”
[성현이랑 곧 결혼할 건데 제주도 가면 큰일 나잖아. 중요한 시기인데 최대한 가까운 곳에서 일해야지. 왜? 그게 궁금했어?]
최용규 선배의 말에 실망한 백현. 가방에 손을 넣었다.
[백현아?]
“선배, 실망입니다.”
성주단지의 손톱. 그건 최용규에게 극악의 고통을 불러온다.
[아아아아! 백현아! 으아아악! 왜 그래? 왜 그래! 으아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