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54화
“그럼 나중에 시간 되면 따로 이야기하죠. 지금은 행사가 있어서.”
“아, 네. 국장님.”
“이제는 원장.”
“아~ 넵. 원장님.”
행사가 시작되자마자 사회자의 안내로 단상에 올라가는 유성재 원장.
- 유성재 원장님 올라오십니다. 국기에 대한 경례.
국기가 내려오고, 애국가와 함께 사람들의 한쪽 손이 가슴으로 향했다.
국기에 대한 경례가 끝나고 사회자는 다음 순서를 알렸다.
- 이어서 공무원 헌장이 있겠습니다. 선서자 대표 앞으로.
강백현이 미리 받은 공무원 헌장을 들고 앞으로 뛰어나갔다.
대표자로서 오른손을 들며 헌장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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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헌장.
우리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공무원이다.
우리는 헌법이 지향하는 가치를 실현하며 국가에 헌신하고 국민에게 봉사한다.
우리는 국민의 안녕과 행복을 추구하고 조국의 평화 통일과 지속 가능한 발전에 기여한다.
이에 굳은 각오와 다짐으로 다음을 실천한다.
하나! 공익을 우선시하며 투명하고 공정하게 맡은 바 책임을 다한다.
하나! 창의성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업무를 적극적으로 수행한다.
하나! 우리 사회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국민과 함께 하는 민주 행정을 구현한다.
하나! 청렴을 생활화하고 규범과 건전한 상식에 따라 행동한다.
선서자 대표. 강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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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백현의 얼굴에는 복잡한 심경이 떠올랐다.
9급 공무원으로 임용되었을 때와 5급 공무원으로 임용된 지금의 마음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었다.
- 다음은 인재개발원장의 말씀이 있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에 유성재 원장이 연설을 시작한다.
“다들 편하게 앉아요. 인재개발원장 유성재입니다. 시대는 많이 변했지만, 30년 전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공무원으로 임용되었던 때가 기억나는군요.”
유성재의 말에 이제 막 임용된 새내기 공무원들의 눈이 또렷또렷해졌다.
1985년, 격동의 시기 때부터 현재까지 공직생활을 하고 있는 유성재였다.
그는 강백현을 비롯한 새내기 공무원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의 연설에서 그 생각을 조금쯤 엿볼 수 있었다.
“여러분들은 국가를 이끌 중요한 인재로 양성될 것입니다. 헌데 국가의 정책을 이끄는 여러분들인 만큼 단 한가지만큼은 목숨보다 중요한 가치로 여겨야 하는데요. 그게 뭔지 혹시 아시는 분 계십니까?”
유성재의 말에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내가 손을 들었다.
“정직과 청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요?”
“공무원이 부패하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습니다. 저희는 대한민국의 최고선봉이므로 투명한 행정을 위한 기본 가치로 정직과 청렴을 지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린 친구의 말에 강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직과 청렴, 그런 공무원들만 있다면 우리나라는 지금보다 더 큰 발전을 이룩할 수 있겠지. 나도 저 친구의 의견에 동의해.’
정답이라고 여겼던 정직과 청렴, 하지만 유성재는 전혀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분명 정직과 청렴도 공무원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공무원으로 임용된 순간부터 퇴직할 때까지 지켜야할 우선가치인 것이 틀림이 없지요. 하지만… 핵심 가치로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요. 그건 무엇일까요?”
강백현은 영문을 몰라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3년 동안 말단 공무원으로 공직생활을 했다. 정직과 청렴보다 더 우선하는 가치가 있을까 다시 한 번 돌아보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정답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때 유령인 최용규가 옆에서 대답했다.
[건강이지. 뭐든 건강부터 챙기라는 거 아니겠어?]
최용규의 말에 강백현이 실망의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건강은 중요 덕목임에 틀림없지만… 확실히 최우선 가치라 해도 부족하지 않지만… 자신을 비롯한 2~30대 청년들을 납득시키기에는 부족한 대답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때, 한 여성이 손을 들었다.
“저는 건강이라고 생각합니다. 건강을 지키지 못하면 맡은 일을 끝까지 책임지고 완수할 수 없기 때문에 공무원으로서 지켜야 할 핵심가치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성의 대답. 다른 동료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정답이네’, ‘아~ 건강이었구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나 유성재 원장의 입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건강, 중요하죠. 하지만 때론 건강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정책이란, 전 국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 후세대에도, 그리고 나라의 미래에도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사안입니다. 이것이 한 사람의 생명이나 건강보다 더 중요할 때도 있죠. 헌데 그러한 나라의 정책이 오락가락하면 어떻게 될까요? 이 정도면 충분히 힌트를 드린 것 같은데, 아직도 정답을 모르시겠나요?”
인재개발원장 유성재의 말에 강백현이 손을 들었다.
“정책의 일관성이라 함은 혹시 정치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강백현의 대답에 유성재가 방긋 웃었다.
“드디어 정답이 나왔네요. 저희는 공무원입니다. 정책을 수립할 때 5년 정도 앞을 보는 중기계획, 20년 이후를 보는 장기 계획 등으로 구분하여 국가의 미래를 계획하죠. 하지만 정치인들은 아닙니다. 대통령은 5년인 임기를 마치면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됩니다. 그러한 대통령의 입김에 하루아침에 정책이 변하기도 하고, 그동안 중장기 계획으로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한순간에 무너지기도 합니다.”
유성재가 침을 삼켰다.
“그동안 정치에 휘둘려 정책이 오락가락 했던 것에 대해 한 명의 공무원 선배로서 이 자리를 통해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 그리고 여러분께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부디 정치적 중립을 지켜 우리나라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갈 수 있도록 각자 역할을 다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유성재의 발언에 강백현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짝짝짝!』
『짝짝짝짝!』
임용을 앞둔 공무원들이 열화와 같은 박수를 치기 시작한다.
이후 강백현이 공무원 대표로 선서를 했고, 입소식은 무사히 끝이 났다.
하지만 강백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정치적 중립?’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공무원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시장이나 도지사가 여당이냐 야당이냐에 따라 갈리는 공무원들의 승진 서열이 갈린다.
선출직인 시장, 국회의, 대통령의 절대적인 권력.
공무원들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다 개소리네.]
최용규의 말에 강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개소리긴 하지.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야.’
이념에 따라 움직이게 되면 국가의 정책은 한쪽으로 밖에 흘러갈 수 없다.
지금의 일본이 그랬고, 과거의 조선이 그랬다.
경제적 관점보다 북한과의 관계를 우선시하는 대통령.
조국의 이념보다 일본과의 관계를 우선시하는 대통령.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바뀌는 국가의 정책들.
21세기 2015년인 지금도 바뀐 것은 없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누가 맞다고 단정해서 정의할 수 없었다.
각자 생각하는 게 다르고, 뭐가 맞고 틀린 것은 개인의 이념에 따라 다르게 생각할 수 있으니까.
정치적 중립이란 말에 강백현은 솔직히 이가 갈렸다.
다만, 유성재 원장의 발언에 일정부분 동의한 것은…
여당이든 야당이든 상관없이 썩은 놈들은 도려내고 싶으니까.
어딜 가도 뇌물 받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공공의 이익을 해치는 놈들이 있으니까.
그런 놈들을 도려내기 위해 5급 공무원이 되기로 결심한 거니까.
강백현은 당찬 걸음으로 연수원의 숙소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하냐?]
“선배, 이따 숙소에서 얘기할게요. 지금은 주변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오케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3년의 기억들.
썩어 문드러져 더이상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 적폐조직. 그런 공무원 사회에서 30년을 살아온 사람의 입에서 정치적 중립이라는 말이 나오다니. 강백현에게는 솔직히 위선처럼 느껴졌다. 30년 동안 정치적 중립을 과연 지키고 사셨을까? 그 고위공무원께서?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정책을 바꿀 정도로 뛰어난 사람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정책을 만드는 것은 분명 공무원이지만, 그런 정책을 따를지 말지 결정하는 것은 결국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혈연, 학연, 인맥에 돈과 운까지 가지고 있다.
이 4가지 중 하나도 갖고 있지 못한 강백현이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였다.
썩어 문드러진 놈들을 잘라내는 것.
없애도 없애도 슬금슬금 기어 나올 테지만, 강백현은 자신의 인생 하나쯤 비리 척결에 전부 걸기로 결심한 것이다.
강백현이 주먹을 쥐었다. 그때 뒤쪽에서 누군가가 강백현의 등을 툭툭 두들겼다.
“저~기요!”
“네?”
“왜 불러도 말이 없으세요? 5급 공채 수석, 강백현 씨 맞죠?”
강백현은 자신에게 말을 건 여성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말 예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는데 한편으로는 인위적인 느낌을 풍기는 얼굴이기도 했다.
그녀의 특별한 듯, 조금은 흔하기도 한 외모에 강백현이 시선을 빼앗긴 사이, 상대가 다시 한 번 되물었다.
“백현 씨, 저는 이번 5급 공채 2등 최현희,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자신이 2등이라고 밝히는 상대의 말에 강백현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1등이야 선서 대표니까 안다 치는데, 본인이 2등인 것은 어떻게 알았어요? 등수는 안 알려주던데요.”
“다 아는 방법이 있어요. 전화번호가 어떻게 돼요?”
“네?”
“아빠가 항상 말했거든요.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은 적이 되면 곤란하니, 친구로 만들어라, 라고.”
“아빠?”
“네. 최장철 국회의원이요. 모르세요? 4선 국회의원인데….”
강백현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녀가 건네는 스마트폰에 번호를 찍어주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네. 그런데 백현 씨.”
“네?”
“아까 원장이 정치적 중립이라고 말했을 때, 사실 동의하지 않았던 거죠?”
“네?”
“기분 나쁜 표정이 역력했잖아요. 사실 그 점에 대해서는 저도 굉장히 동의하고 있거든요. 그 점에서 백현 씨랑 저랑 공통점 하나는 생겼네요. 이따 숙소 가서 전화할게요.”
최현희가 자신의 말만 내뱉고는 백현과 반대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여성숙소와 반대방향에 있는 남성숙소.
그렇다는 것은 그녀가 이쪽으로 온 것은 자신의 번호를 따기 위해서라는 이야기.
그녀의 목적은 무엇일까?
백현은 그 의도가 궁금해졌다.
“선배!”
[어?]
“저 여자, 조사 좀 해 줘. 사는 곳은 어디고, 뭘 하던 여자고, 뭘 노리고 나한테 접근했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오케이, 알았다.]
최용규가 고개를 끄덕이며 최현희가 사라진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 사이 강백현은 스마트폰으로 최현희의 프로필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국회의원이라…. 최현희라고 했지? 도대체 왜? 뭐 때문에 나한테 접근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