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52화
김성현을 바라보는 최용규의 얼굴에 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건 문제되지 않습니다. 김성현 디자이너가 저희 샬롯과 함께 해주시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전폭적으로 지지하겠습니다, 라고 말씀하시네요.”
“정말요?”
통역 담당에 의해 내용을 전달받는 김성현의 얼굴에도 미소가 가시질 않는다.
“저희 팀원들도 함께 받아주실 수 있으신가요?”
“노 프라블럼, 로체 씨께서는 원하시면 영주권도 드릴 수 있다고 하십니다. 다만 리치, 아니 한국에서는 재벌이라고 불리는 김성현 씨가 과연 저희 제안을 받아주실지 걱정하고 계신 것 같아요.”
“이런 것까지 통역하셔도 되는 건가요?”
“네. 괜찮아요.”
옆에서 진행상황을 듣고 있던 최용규가 쾌재를 불렀다.
[그래. 성현아! 잘 됐다. 정말 잘 됐어.]
김성현도 로체의 제안에 마음의 결정을 한 듯 보였다.
* * *
그날 오후.
김성현이 실장으로서 팀원들을 모두 불러 모으고 마지막 제안을 했다.
“영패션의 도전은 아쉽게도 실패로 돌아갔네요.”
“실장님….”
“괜찮아요. 앞으로 잘 하시면 될 거예요.”
고연주와 윤진희는 현재의 상황을 모르고 안타까운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그리고 마르코도 아쉬운 듯 고개를 흔들면서 김성현을 응원했다.
“자기야~ 너무 실망할 것 없어. 다시 블랑샤 브랜드 지휘하면서 회복하면 돼. 만약에 고기웅 걔가 자기한테 해코지하면 내가 뗏지 할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응?”
하지만 김성현은 오늘 그들에게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할 수 있었다.
“오늘 샬롯 측의 로체 씨와 만나 기분 좋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저의 미래와 여러분들의 미래,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서였죠.”
“샬롯? 로체? 그 로체?”
“네.”
김성현의 대답에 마르코의 얼굴이 극적으로 환해졌다.
패션계에서 샬롯을 모르면 간첩, 로체를 모르면 더 간첩.
그만큼 로체라는 이름이 주는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패션의 본 고장, 프랑스의 대표 디자이너에게 여러분과 함께 파리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안 받았어요. 여러분께 정말 실례되는 말이긴 한데, 저와 함께 가주시겠어요?”
김성현의 제안에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사람들.
“실장님! 당연하죠. 샬롯에서 일한다는 자체만으로도 영광이에요. 우와! 프랑스 간다니 신나요!”
“저도 실장님하고 같이 갈게요.”
“자기, 잘 됐다. 샬롯의 로체 씨한테 인정받은 거잖아.”
“……”
강백현은 희망을 되찾은 동료들을 보며 말없이 웃음을 지었다.
그런 기류를 읽은 동료들이 백현에게 고개를 향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프랑스에 함께 갈 순 없을 것 같습니다.”
백현의 말에 고연주가 어떻게든 설득하려 했다.
“아…. 백현 씨. 백현 씨가 패션 업계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래요. 샬롯에서 제안 받았다는 건 구글에서 일하자는 했다는 것과 같아요.”
“샬롯이 얼마나 대단한 브랜드인지는 저도 압니다. 샬롯에서 만드는 가방 하나가 국내에서 무려 400만원에 팔려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명품 브랜드의 제안인데, 결코 싫어서가 아닙니다.”
“그럼 애인 때문에 그래요?”
“아니요. 애인도 없습니다. 그런 이유도 아니고, 단지 국내에 제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고 싶은 게 따로 있거든요.”
백현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용히 사라질 생각이었는데, 고연주의 말에 무심코 속내를 드러내고 말았다.
“자자~ 아쉬운 건 아쉬운 거고, 프랑스 가는 걸 강요할 수는 없는 거예요. 다들 오늘은 여기서 헤어지고, 자세한 건 제가 로체 씨 통해서 전달받고 전해드릴게요. 퇴근해요! 퇴근하죠!”
* * *
한숨이 절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강백현은 김성현과 단 둘이 차에 있는 이 순간이 너무나 괴로웠다.
“백현 씨, 왜 말이 없어요?”
“아닙니다. 그것보다 정말 잘 되셨네요. 프랑스 5대 브랜드 샬롯의 디자이너로 가신다니, 정말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강백현의 말에도 김성현은 전혀 기뻐보이지 않았다.
“백현 씨, 왜 같이 못 가는 거예요?”
“말씀드렸잖습니까? 꿈이 있다고요.”
“꿈? 어떤 꿈이요?”
“실장님이 인생 성공하고 싶듯, 저도 이루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꿈인데요? 그게 프랑스로 가는 티켓보다도 더 중요한 꿈인가요?”
“네?”
“아니면 백현 씨와 헤어졌다는 속초에 있는 그 애인 때문인가요?”
강백현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김성현의 오해를 풀었다.
“저 남자 안 좋아합니다. 동성 취향 절대~ 절대 아니고요.”
그런데 그런 대답이 더욱 더 오해를 불러온다.
게이가 아니라니 그렇다면 김성현은 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기주장이 강하지만, 정말 매력적인 남자.
절대 자신을 똑바로 봐주지 않는 동성을 좋아하는 이 남자가 자신의 취향을 부정하고 있다.
그녀에게 백현은 다음과 같았다.
이제까지 자신을 몇 번이나 도와줬는지 셀 수가 없을 정도인 사람.
자신을 죽음 앞에서 전화로 구해준 사람.
자신을 수면제를 먹여 범하려는 나쁜 쓰레기로부터 구해준 사람.
그리고 샬롯의 디자이너로 갈 수 있게 발판을 마련해준 사람.
그가 바로 곁에 있기에, 손을 내밀면 잡을 수 있기에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럼 더더욱 이해가 안 가네요. 왜 프랑스로 같이 못가는 건데요? 제가 싫은 건가요? 제가 귀찮아요?”
김성현의 호소하는 듯한 목소리에 강백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성현아~ 왜 그래! 너 왜 그러는데?]
최용규는 당황한 상태.
낌새는 어느 정도 채고 있었지만, 김성현의 감정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기에 최용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강백현은 갑자기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실장님이 싫은 건 아닙니다. 사실 프랑스 같이 가고 싶기도 하고요. 실장님 좋은 분이란 건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럼 프랑스로 같이 가요. 뭐가 고민이에요? 나 백현 씨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같이 있고 싶고요. 고민하지 마요. 같이 가요!”
[성현아! 너 백현이 좋아하고 있던 거야? 그랬던 거야?]
김성현이 자신도 모르게 백현의 손을 잡고 말았다.
그 행동을 통해 서로 절제하던 감정을 느닷없이 확인해버린 두 사람이었다.
돌려 말했지만 둘은 지금의 대화 속에 담긴 속뜻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강백현은 선을 지켰다. 이대로는 김성현의 인생을 망쳐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강백현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전 실장님 좋아할 수 없습니다.”
“그건 무슨 말이에요?”
“간접적이지만 최용규 선배의 죽음의 원인에 제가 있으니까요.”
“……”
[강백현…. 너 그게 무슨 말이야? 인마! 네 잘못 아니야! 아니라고. 그땐 그냥 내가 화가 나서 너한테 뭐라고 한 거지. 네 잘못 아니야 인마!]
김성현의 말문이 막혔다. 최용규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강백현이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리고 있다.
강백현은 헤어져야 하는 순간을 잘 알았다.
김성현은 확실히 그가 만나던 다른 여자와는 달랐다.
똑똑하고 당돌하고 결코 포기하지 않으며 진취적인 여성이었다.
그녀에게 매력을 못 느끼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 터.
지금처럼 이런 시간이 계속되면 언젠가 자신의 마음을 어쩌지 못할 때가 올 것이다.
그래서 거리를 두려 하는 것이다.
“선배가 사고 난 그날 저녁,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 저였습니다. 제가 그날 내부고발자료를 넘겼고, 선배는 그 밤에 뺑소니를 당해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죠. 이런 제가 무슨 낯짝으로 김성현 씨와 만나겠습니까?”
“강백현 씨, 잠깐만! 잠깐만! 지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부주시 허가과 허가담당이었던 공무원, 강백현 주무관은 사고당일 최용규 사무관에게 증거자료를 넘기며 신신당부했습니다. 들키지 말아달라고, 들키면 공무원 생활 끝난다고요. 하지만 선배는 안일했고 결국 죽고 말았어요.”
“강백현 씨! 지금 뭐하자는 거예요?”
[백현아~ 야, 네가 나쁜 놈 될 필요 없어. 어?]
하지만 강백현은 제대로 거리를 둘 생각이었다.
“김성현 씨, 돈 많더군요.”
“뭐라고요?”
“돈도 많고, 생각도 짧아서 저한테 이용당하기 딱 쉬운 먹잇감이었습니다. 고기웅 본부장과는 친분이 있었어요. 그래서 성현 씨 정보를 캐는 건 너무 쉬웠죠. 사실 그때 구해주려고 전화 건 게 아니에요. 내가 고기웅으로부터 김성현 씨 빼앗고 싶어서 전화한 거죠.”
“강백현 씨! 강백현 씨!”
“하지만 그것도 이제 지겨워졌습니다. 절 좋아하십니까? 그렇게 금방 사랑에 빠져서야 어디 기업 운영 하겠습니까?”
“나 이해 안 돼요. 왜?”
“그거야~ 당신 돈이 얻고 싶었던 거지. 근데 이제 당신 거지잖아. 그러니까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는 거잖아.”
강백현이 차에서 내렸다. 운전은 김성현도 할 수 있으니까.
“나 같은 사람 좋아하지 말고 좋은 남자 만나세요. 세상에는 나 같은 쓰레기 많으니까.”
“야! 야! 강백현 씨! 거기 안 서요? 안 설 거예요?”
강백현이 김성현이 탄 차를 등지고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했다.
김성현은 조수석에 내려 백현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뒤에서 차량들이 클락션을 울려대는 바람에 운전석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최용규가 강백현의 곁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너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네가 무슨 성현이를 이용해? 너 병신이냐?]
그러자 강백현이 눈물을 흘렸다.
“말 걸지 마.”
[야! 야! 너 왜 울어?]
“씨발, 내가 가진 게 없어서 운다. 왜? 왜! 나랑 만나면 불행해질 거 아니까 운다고! 선배도 내 입장 알 거 아니야?”
강백현은 처음으로 자신의 처지를 원망했다.
못 살아서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자신감만 가지고는 아무것도 지킬 수 없고, 아무것도 해결 할 수 없다.
[백현아~. 그래도 인마, 성현이한테 그렇게 말하는 건 너무 했어 인마!]
“선배도 원했잖아. 내가 김성현이랑 안 이어졌으면 했잖아.”
[그건 그런데, 그래도 이건 인마, 아니잖아.]
강백현은 곧바로 회장님 집의 쪽문으로 들어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아쉽지만 이게 가장 좋은 결단.
그때 박창현 비서가 들어왔다.
“어? 백현, 너 뭐하냐?”
“짐 쌉니다.”
“짐을 왜 싸?”
“오늘부로 일 그만 둡니다. 그만 두렵니다.”
“왜? 너 무슨 일 있었냐?”
“아….”
갑자기 펑펑 울기 시작하는 강백현.
결국 박창현이 그런 그를 안아주며 위로해주었다.
“왜 그래 인마! 어? 말을 해. 아가씨 때문에 그래? 아가씨 괜찮아. 성한 그룹 가서 일한다고 하잖아. 회장님도 좋아하시고, 사모님도 좋아하시고, 고기웅 본부장한테도 다 잘 된 일인데 뭘 그래. 너한테 해코지 할 일 없을 거야. 내가 고기웅 본부장한테도 잘 말해놓을게. 응?”
그때, 갑자기 방문이 열린다.
“박 비서? 어?”
두 사람이 포옹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당황한 표정을 짓는 김도한 회장.
“아, 네. 회장님.”
“아니아니~ 이따 말하지.”
회장이 뒷걸음질 치자, 박창현이 재빠르게 강백현을 밀어내고 움직였다.
“괜찮습니다. 회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아~ 15분 뒤에 김 기사랑 같이 성한 그룹 좀 들리자고. 그거 말하려고 했지.”
“아! 넵. 알겠습니다. 15분 뒤에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근데 저 친구는 왜 울어?”
“아무 일도 아닙니다.”
“그래. 그래그래.”
* * *
15분 뒤. 김도한 회장과 박창현 비서, 그리고 김 기사가 떠나고, 강백현이 홀로 남아 짐을 싸고 있었다.
그런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백현 씨!”
“……”
“강백현 씨! 대답 안 해요?”
강백현은 본심을 감추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네. 실장님.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내 집이니까 내가 오죠. 그것보다 강백현 씨.”
“네. 말씀하십시오.”
“나, 강백현 씨한테 또 안 속아요.”
“네. 그러시라고 경고 드린 겁니다. 앞으로는 세상을 넓게 보셨으면 좋겠네요.”
[……]
여전히 쌀쌀 맞게 대답하는 강백현에게 김성현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약속해요.”
“네? 뭘 말씀이십니까?”
“3년, 3년 후에 성공해서 돌아올게요. 백현 씨도 더 멋진 남자 되기로. 어때요?”
“네?”
“약속 안 해요? 용기내서 말했는데 얼마나 더 사람 비참하게 만들 거예요? 응?”
김성현의 말에 강백현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새끼손가락을 마주 내미는 강백현의 대답에는 희망이 실렸다.
“큰 성공 하고 돌아오셔야겠네요. 저도 더 이상 백수 강백현은 아닐 겁니다.”
“백현 씨야 말로 큰 성공 하셔야죠! 전 최고의 디자이너가 될 거거든요! 저한테 어울리는 남자 되시려면 떳떳하게 성공하세요. 그땐 다시 이런 행동 하지 마시고요!”
그녀의 말에 강백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왜 그랬는지 알고 있었군요?’
그의 웃음에 김성현도 웃음을 터트렸다.
‘모르겠네요. 왜 백현 씨가 옆에 있으면 웃음이 나는지…. 3년, 과연 내가 기다릴 수 있을까요?’
자신들의 진심을 확인한 두 사람.
하지만 서로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이제는 헤어져야 할 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넓은 어깨를 가진 강백현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약속입니다. 3년 뒤, 다시 만나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