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51화
D-30일, 김성현을 비롯한 직원들에게는 전쟁이나 다름없었다.
젊은 감각에 맞춰 디자인을 구상하는 직원들.
강백현도 바쁘게 현장을 오갔다.
“조성민 MD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안테나샵 자체가 고급스러운 이미지의 여성복 매장에는 어울리지 않는 편이라, 적합한 공간을 제공하지 못해서 죄송하게 됐네요.”
“아닙니다. 영패션도 자신 있습니다. 기회 주신만큼 열심히 해볼 겁니다.”
조성민 MD의 도움을 빌어 천만다행으로 얻은 기회.
남은 30일 동안 디자인 컨셉과 판매전략, 홍보전략 등을 수립하고 제작을 끝내야 한다.
백현은 현재 입점한 다양한 컨셉의 안테나샵을 살피며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로서는 아무 것도 없는 브랜드였다.
모든 것을 잃은 김성현 실장에게 기회가 온 건 천우(天佑)이지만, 이제부터 헤쳐 나가야 할 길이 너무나 고되어 보였다.
그때, 조성민 MD가 한참 생각중인 강백현에게 물었다.
“백현 씨, 마르코는 잘 지내요?”
“네?”
“그냥, 저 만난다고 하는데 아무 말 없었나해서요. 영업 파트너로 오래 연락했는데, 요즘 연락이 뜸해서요.”
“……”
조성민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강백현. 최용규가 슬쩍 필요한 정보를 주었다.
[조성민 쟤하고 마르코하고 사귀었던 거 알지? 그거 물은 거야.]
남남커플을 실제로 본 적은 없었던 강백현이다.
하지만 최용규가 전달한 정보를 토대로 마르코의 상황을 유추해보았다.
저녁때만 되면 항상 바에 가서 술에 취해있던 모습.
항상 외로워하던 모습이 떠오른 것이다.
“조성민 MD님?”
“네?”
“아마 많이 고마워하고 있을 겁니다. 마음에 쓰이시면 연락해보시는 게 좋지 않겠어요?”
“그렇겠죠?”
백현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 긴장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잘 풀린 것은 다 동료들이 뛰어난 탓.
‘내 능력이 아니었어. 마르코 씨를 좋아하는 조성민 MD의 사심과 김성현 실장님의 가능성이 기회를 만들어낸 거야.’
그래서 백현은 더 바쁘게 뛰었다.
10대들이 많이 모인다는 신촌에 가서 무작정 티셔츠를 내밀며 말을 걸어본다.
“저기요 학생, 이 디자인 어때요? 얼마면 살 것 같아요?”
“음, 제 스타일 아닌데요?”
“아, 그래요?”
“난 15,000원! 15,000원이면 살 것 같은데?”
그리고 다시 사무실에 돌아와서는 결과를 보고한다.
“총 66명에게 물어봤고요. 시장조사 결과 적정 가격은 23,000원, 구입의사는 10명 중 2명 정도였네요. 남학생들은 대체적으로 불호가 많았고, 여학생도 호불호가 많이 갈렸어요.”
“아…. 그래요?”
팀원들은 심각한 표정이다.
사실 그들은 자신이 없었다.
김성현도 마찬가지였다.
난생 처음해보는 영패션. 처음에는 쉬울 줄만 알았지만 청소년들의 트렌드는 수시로 변했다. 그걸 단 한 달 만에 파악하기란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다.
설상가상, 푸드 셔츠를 디자인했던 최유나 디자이너를 섭외하려 했지만 그것도 실패로 돌아갔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이제 영패션은 안 하기로 했습니다.’라는 답변이었다.
사실 최유나 디자이너를 섭외하지 못한 시점부터 사업구도는 난항이었다.
김성현 실장을 주축으로 한 이 팀에 영패션에 대한 전문가는 아무도 없었다. 또 시간이 촉박하니 그에 대한 대비도 해결책도, 방향도 제대로 정할 시간이 없었다. 그저 무작정 움직이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30일은 금방 지나갔다.
런칭 첫 날.
손님들은 급조한 디자인의 옷을 보며 난색을 표했다.
대현 백화점의 조성민 MD 또한 고개를 저으며 김성현 실장에게 브랜드의 퇴출을 통보했다.
“실장님, 죄송하지만 실적이 너무 안 좋아서 내일부터 바로 빼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성민 씨! 하루 밖에 안 됐는데….”
“하루에 저희가 치르는 비용을 환산하면 400만원입니다. 이렇게 반응이 없던 적은 저희도 처음이라서 더 이상 리스크를 감내할 순 없을 것 같습니다. 경우가 아닌 것은 알기에 정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내일 내로 모두 철수시켜주세요.”
최악의 실패.
실패도 이렇게 망할 수는 없었던 것.
조성민과 마주치는 것을 최대한 피하던 마르코가 화가 난 목소리로 다그쳤다.
“성민이 너~ 일 이렇게 하는 거 아니야!”
마르코의 여성스러운 목소리.
사람들이 쳐다봐도 조성민은 마르코에게 진지한 얼굴로 대응했다.
“마르코 형, 이건 비즈니스야. 감정으로 다가오지 말자. 응?”
“너 진짜! 너 진짜! 나한테 이럴 거야?”
하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김성현 사단이 한 달 간 준비한 영패션은 망했다.
전문성도 없고, 시간도 없었다. 의지가 있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고연주와 윤진희는 말없이 마네킹과 의류를 정리하기 시작했고, 김성현은 눈물을 참지 못하고 자리를 떠났다.
강백현은 한숨을 내쉬며 결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 * *
백화점이 문을 닫은 오후 9시.
백현이 재고를 꺼내 용달차에 싣기 시작했다.
그때 최용규가 백현에게 말을 걸었다.
[백현아.]
“네. 선배. 반성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입조심할게요. 제가 잘못한 거 압니다. 질책하지 말아주세요.”
강백현은 김성현에게 근거 없는 자신감을 불어준 걸 후회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용규는 강백현을 원망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김성현이 결정한 것이기에.
그것보다는 지금의 결과를 어떻게 이겨낼지가 중요하다.
[성현이 뒤에 있다고 알려주러 왔어.]
“아….”
강백현이 뒤쪽을 바라보자, 김성현이 다가와서 입을 열었다.
“혼자 뭐하고 있어요?”
“그러는 김성현 실장님이야 말로 뭐하러 오셨습니까? 들어가서 쉬세요. 정리는 제가 마무리하겠습니다.”
“아니에요. 같이 정리해요. 다른 직원들은요?”
“이미 다 퇴근했습니다.”
김성현은 말없이 재고정리를 도왔다. 강백현은 그걸 보면서 갑자기 감정이 벅차올랐다.
“실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실장님께 잘 될 거라는 말만 안했어도 이런 결과는 아니었을 텐데.”
“백현 씨, 나 괜찮아요. 사실 전문성이 없이 갑자기 준비한 거잖아요. 결과가 이렇게 나온 걸 어쩌겠어요. 사실 패션업계에서는 실패할 확률이 성공할 확률보다 훨씬 높아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 말아요.”
“실장님….”
백현은 김성현의 말을 듣고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내가 결정했으니까 실패도 내 책임이에요. 백현 씨는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한 거니까 자책할 필요 없어요. 그것보다 백현 씨?”
“네?”
“앞으로 성한 그룹에서 일할래요? 아니면 기존에 하던 수행비서 할래요? 아, 수행비서 하면 저랑은 이제 같이 일 못해요. 아마 회장님 밑에서 일하게 되겠죠.”
김성현의 말에 강백현의 눈빛이 변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메리야트 패션에서 키운 블랑샤 브랜드, 내일부터 맡아달라고 고기웅 본부장에게 연락 받았어요. 그래서 내일 만나기로 했고요. 저랑 같이 일할 생각이라면 내일은 쉬고 모레부터 성한 그룹으로 출근해요. 백현 씨는 월급 그대로 받으면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하면 되요.”
김성현의 말에 최용규가 황당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이건 무슨 소리야! 성현아! 네가 고기웅 밑으로 왜 가? 어?]
그건 강백현도 같은 의견이었다.
“실장님, 고기웅 본부장 밑으로 가는 거 싫어하셨잖아요. 그런데 왜 그런 결정을 하시는 겁니까?”
“그게 최선이니까요.”
[백현아! 설득해! 설득해서 다시 해보자고 해!]
최용규의 말에 강백현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살짝 저었다.
‘선배, 지금 난 실장님을 설득할 수 없어요. 아시잖아요.’
하지만 백현은 궁금했다.
김성현이 과연 어디까지 결심했는지, 어디까지 생각하고 고기웅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인지. 그래서 물었다.
“실장님, 그 말뜻은 정략결혼도 생각해본다는 건가요?”
“그래요. 백현 씨, 사실 백현 씨가 보기에는 이해가 안 될지 모르겠지만, 돈이 많다고 모두 행복한 건 아니에요. 그 돈을 이유로 때론 사랑도, 감정도, 자신의 운명까지 타인에 의해 결정되기도 하죠. 전 그런 삶을 살아오도록 결정되어 있었고요.”
김성현의 대답을 듣자, 강백현의 고개가 떨구어졌다.
“실장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세요? 네? 사실은 싫잖아요. 고기웅 본부장 싫어서 저한테 자기 앞에 나타나지 않게 해달라고 하셨잖아요. 기억 안 나요?”
[그래. 백현아! 설득해! 절대 안 돼! 고기웅 그 놈한테만큼은 절대 안 돼!]
강백현은 감정이 격해졌다. 하지만 김성현은 모든 것을 결정한 상태였다.
“사실 한 달 전부터 여성복 업계에 블랙리스트가 돌고 있었어요. 저랑 마르코, 그리고 진희 씨랑 연주 씨. 거기에 백현 씨까지.”
“블랙리스트요? 저도요?”
“네. 이 다섯 명과 함께 일하는 사람은 앞으로 성한 그룹과 일할 수 없다고요. 실제로 성한 그룹은 여성패션 업계에서 선두주자이기도 하고, 관련 브랜드만 50여 개가 넘는 국내 1위 업체이기도 해요. 우리 블랑샤 브랜드를 단숨에 집어삼킨 거 백현 씨도 직접 봤잖아요.”
“그 정도로 영향력 있는지는 몰랐습니다.”
“그렇겠죠. 정리도 끝난 것 같은데, 이야기는 이만 하고 돌아가죠. 결과는 정해져 있습니다. 백현 씨는 아무 걱정 안 하고 그냥 지내면 돼요. 그거면 됩니다.”
“실장님….”
강백현은 뒤돌아서는 김성현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결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야! 강백현! 뭐하냐? 설득하라니까! 어?]
김성현이 사라지고, 옆에서는 최용규가 닦달을 한다.
하지만 강백현은 김성현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선배, 김성현 실장님 우는 거 봤습니까?”
[봤으니까 하는 말이잖아. 인마! 가기 싫은데 억지로 가는 거잖아.]
“압니다. 그걸 알면서도 본인이 선택한 길이에요. 모든 것을 알고 받아들이겠다고 결심했다면 저도 어쩔 수 없는 겁니다.”
[이 병신! 머저리 같은 놈! 병신! 병신! 병신!]
* * *
다음 날, 김성현은 자신의 숙소 물품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제 집에 돌아가야 할 때다.
“응. 엄마.”
- 그래. 성현아, 오늘 집에 들어오는 거지?
“응. 그동안 마음 고생 시켜서 미안.”
- 아니야. 그래도 성한 그룹에서 좋게 봐줘서 다행이다. 이제 진짜 후회 안 할 자신 있지?
“응. 혼인절차도 바로 치르고, 성한 그룹 회장님도 뵙기로 했어. 그러니까 엄마, 너무 걱정하지 마.”
- 그래. 잘 생각했어. 오늘은 성한 패션으로 출근하는 거니?
“응.”
- 알았어. 이따 저녁때 봐!
김성현은 자신의 엄마, 노진희와의 전화를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였다.
엄마와 같은 운명을 살기로 했다.
주어진 운명에 저항하면 저항할수록 안 좋은 일만 생긴다.
그래서….
이제 운명에 거스르지 않기로 했다.
출근하는 길.
매일 보던 그 남자가 있다.
차량 조수석에 탄 김성현이 운전석의 강백현에게 물었다.
“어제는 잘 들어갔죠?”
“네. 잘 들어갔습니다.”
“오늘 왜 나왔어요?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새벽 6시부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네?”
“실장님, 전 마음의 결정을 했습니다. 이게 실장님께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겠지만 전 제가 생각한대로 행동해볼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강백현이 성한 그룹이 있는 강남이 아닌 강서구 방향으로 차량을 틀었다.
그러자 김성현이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백현 씨, 어디가요? 강 비서!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강백현은 말없이 차를 몰았고, 뒤에 탄 최용규도 말없이 백현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이제 모든 것은 김성현에게 달려 있었다.
결국 참다못한 김성현이 화를 냈다.
“강백현 씨! 지금 어디 가냐고 묻고 있잖아요!”
그러자 강백현이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김성현에게 대답했다.
“김성현 씨, 꿈 이뤄드리러 갑니다.”
“뭐라구요?”
“김성현 씨, 꿈 이뤄드리러 간다고요.”
힐튼 호텔 앞, 차량을 멈춘 백현이 조수석 문을 열었다.
그리고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는 누군가에게 물었다.
“샬롯에서 나오신 로체 씨인가요?”
그러자 금발 머리의 여성이 방긋 웃으며 백현에게 응답했다.
“아~ 미스터 강?”
“네. 김성현 디자이너 모시고 왔습니다. 김성현 씨! 인사하시죠. 여기는 샬롯의 대표 로체 씨, 그리고 로체 씨? 여기는 패션브랜드 블량샤를 성공적으로 런칭한 한국의 대표 디자이너 김성현입니다.”
김성현의 얼굴에 놀란 표정이 가득했다.
“미스 김? 만나고 싶었어요. 어제 블랑샤에 갔는데 그만 두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오늘 아침 비행기로 프랑스로 돌아가려는데, 미스터 강으로부터 연락을 받게 되었네요.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할까요?”
김성현을 만나러 온 블랑샤의 수석디자이너 로체.
그리고 그런 로체를 보며 감격하는 김성현.
그 둘이 호텔 로비를 통해 안쪽에 마련된 라운지로 들어간다.
백현은 자신의 옆에 붙어 있는 최용규를 오랜만에 칭찬했다.
“선배, 고생했어요. 선배 덕분에 성현 씨는 자신의 운명에 저항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네요.”
오전 9시 33분. 강백현이 핸드폰이 울렸다.
[뭐냐? 문자 온 것 같은데?]
“네. 확인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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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공무원인재개발원 입소 안내]
5급 공채 최종합격을 축하합니다. 2015, 공무원 인재개발원 입소 일정이 확정되어 안내해드립니다.
날짜 : 2015년 9월 13일 14:00.
장소 : 경기도 과천 공무원 인재개발원 2층 대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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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이른 타이밍이었다.
강백현은 프랑스의 로체와 대화중인 김성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성현 씨, 마지막엔 도움을 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네요. 이제 안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