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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배기 깨러 왔습니다-50화 (50/139)
  • 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50화

    고기웅 본부장의 전화라는 말에 김성현이 기겁했다.

    “그 사람이 백현 씨한테 왜 전화를 해요?”

    “그거야 뭐, 실장님 위치 파악하려는 거겠죠.”

    백현의 대답에 김성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 제 위치 노출하고 계셨어요?”

    “아니요. 오히려 만나지 않도록 동선을 꼬고 있었죠. 실장님이 그걸 원하실 거라고 생각해서요. 이쪽으로 부를까요?”

    성현은 백현의 대답을 듣고는 곧바로 자신의 의향을 전했다.

    “아니요. 계속 꼬아주세요. 다시는 마주치지 않게, 절대 내 앞에 나타나지 않게요.”

    “알겠습니다.”

    강백현은 김성현의 의지를 파악하고 미소를 지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최용규가 웃으며 소리쳤다.

    [그래! 성현아~ 그놈하고 마주치지 마! 그게 최선이야.]

    하지만 곧이어 도착한 문자가 백현을 당황케 했다.

    - 강 비서! 판교 어디야? 왜 판교에 있는 거지?

    고기웅은 백현이 판교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백현은 한숨을 내쉬며 복도로 이동해서 전화를 걸었다.

    “본부장님? 판교인 것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 내가 그런 것도 못 알아낼 것 같아?

    “네. 그런데 정확한 제 위치는 모르시나보네요. 기지국으로 알아내신 거죠?”

    - ……

    “기지국 정보를 어떻게 얻으셨나본데, 이거 불법입니다. 개인 정보 보호법 위반으로 처벌 받으실 수 있는 거 아시죠?”

    - 그것보다 김성현, 왜 우리 회사로 출근 안 해? 너랑 같이 있어? 네 옆에 있지?

    “네. 옆에서 수행중입니다. 하지만, 김성현 실장님이 성한 그룹에 들어가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 무슨 소리야! 김도한 회장님이 이미 허락하셨어. 김성현이 있는 메리야트 패션그룹을 인수하고 김성현도 우리 회사로 출근하는 걸로 이미 이야기가 끝났다고!

    김도한의 말에 강백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 한숨이 수화기 건너편까지 들렸다.

    물론 이건 의도한 것이었다.

    그의 화를 돋우기 위한 것.

    예상대로 고기웅의 거친 목소리가 백현의 전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 하-아? 너 미쳤냐?

    “네. 단단히 미쳤죠. 본부장님, 뭔가 착각한 것 같은데요. 김성현 실장님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김성현 실장님, 새로운 브랜드로 다시 시작하실 겁니다. 그러니 본부장님께 갈 일은 없겠죠.”

    - 야! 야! 너 판교 어디야? 도대체 어디에 사무실 잡았어? 어?

    “그건 알아서 찾아보십시오. 이만 끊습니다.”

    - 야! 끊지 마!

    “또 하실 이야기 있으십니까? 제가 본부장님 비밀 알고 있는 건 아시죠?”

    백현은 저번에 말한 여자들의 이름을 열거할 준비를 끝냈다.

    하지만 의외로 고기웅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태연한 어투였다.

    - 인마! 너만 알고 있는 거 아니야. 나도 네 비밀 알고 있어.

    “네?”

    - 너 그거라며! 고추 좋아한다며!

    “누가 그럽니까?”

    - 크크크, 이 새끼 봐라~ 이미 정보 다 샜어 새끼야! 너 위치 어디야? 어디야?

    고기웅은 한동안 침묵하는 강백현의 반응을 음미하며 활짝 웃었다.

    고기웅은 확신했다.

    자신의 비서인 박지훈이 사촌인 박창현으로부터 얻은 고급 정보.

    이거라면, 녀석도 함부로 자신의 여자관계에 대해 떠벌릴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그저 젊은 날의 방황이라면, 그 녀석은 인생에 대한 폭로가 될 테니까.

    대한민국에서 성소수자의 취급은 결코 좋지 않다. 그걸 교묘하게 협박으로 이용하면 되는 것이다.

    - 맘대로 생각하십시오. 위치는 안 알려드립니다. 끊습니다. 전화하지 마십시오.

    심각한 어조.

    전화가 끊기고 고기웅의 얼굴에는 싱글벙글 승리의 미소가 걸렸다.

    “이 새끼, 고추 좋아하는 것 맞네. 맞아.”

    판교, 산업단지.

    핸드폰을 위치추적해서 기지국을 알아낼 순 있었다. 약 500m 반경이다.

    따라서 강백현과 김성현이 성남, 판교 내 백현동에 있다는 것까지는 고기웅도 알 수 있었다.

    문제는 그 500m 내에 기업이 수백 개는 있다는 것.

    일일이 뒤지지 않으면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기업이 몰려 있었다.

    이걸 찾아내는 건 솔직히 백사장에서 모래알 찾기다.

    상호도 모르고, 새로 런칭하는 브랜드 명도 모른다.

    하지만 이쪽은 IT업계가 몰려있는 곳이지. 패션 브랜드가 몰려 있는 곳은 아니다.

    그렇다면 판교, 백현동에서 패션업체가 갈만한 곳은 단 한 곳.

    판교 내 대현 백화점뿐이다.

    “아직도 못 찾았어? 야! 넌 사람 하나 못 찾냐? 어?”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백화점에 있으니까 사람 풀어서 찾아! 알았어?”

    “네!”

    이제 곧 만날 수 있다.

    고기웅은 자신만만했다.

    도망가 봐야 자신의 손바닥 안.

    이제 곧 김성현은 자신의 것이 될 것이다.

    * * *

    한편, 강백현은 전화를 끊고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선배! 등장 바랍니다.”

    [아~ 등장했다. 오바! 뭐냐? 왜 찾았어?]

    백현이 부르자 최용규가 휭 하고 나타났다.

    “고기웅과 그 끄나풀이 판교까지 와서 김성현 실장님 찾고 있습니다. 여길 찾진 못하겠지만, 혹시 오게 되면 미리 알려주십쇼! 가능하죠?”

    [경비 서라는 거야?]

    “불만인 건 아니죠?”

    [성현이 옆에 있고 싶은데?]

    “퇴근하면 계속 옆에 있어주시고, 오늘은 좀 지켜줘요. 고기웅이 여기까지 찾아왔다잖아요.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죠?”

    [아-아아아! 오케이.]

    최용규의 승낙을 받은 백현은 갑자기 뒷목을 잡았다.

    “아~ 생각해보니 열 받네요.”

    [또 왜?]

    “박창현 비서가 제 정보 흘리는 것 같습니다. 제가 고추 좋아한다는데요? 아니 말도 적당히 해야지~ 고추를 좋아하는 게 뭡니까?”

    강백현이 쓴웃음을 짓자, 최용규가 넉살좋은 말투로 대답했다.

    [요즘엔 그거 좋아해도 천국 갈 수 있어! 그거 풀렸대.]

    “장난치지 마시고요. 그런 말 할 거면 그냥 망이나 봐주세요. 저 심각해요. 네?”

    [뭘 또 심각하냐? 오해하는 게 낫지. 적어도 너한테 경쟁자로서의 적개심을 가지진 않을 거 아냐. 만약에 너랑 성현이가 사귄다고 의심했으면 너, 지금쯤 고기웅한테 몇 번은 죽었을 걸?]

    최용규의 말에 강백현이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아아~ 농담 그만하시죠. 그 사람이 그럴 사람도 아니고, 뭐가 아쉬워서 사람을 죽이겠어요. 아, 잠깐!”

    [응?]

    “선배 죽은 것, 고기웅 짓은 아니겠죠?”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고기웅의 집착은 날로 심해지고 있었다.

    사람을 죽이진 못했을까?

    […….]

    최용규 또한 이제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알아볼게. 그 놈 옆에 꼭 붙어서 알아볼게.]

    “네. 죄송해요. 괜한 이야기를 꺼냈네요.”

    [됐어. 이건 나한테도 중요한 일이야. 만약 그 새끼가 날 죽이도록 사주했거나 날 죽였다면 난 절대 가만있지 않을 거야.]

    “……”

    강백현은 선배가 분노하는 걸 보고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죽인 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 말을 걸 수도, 안아줄 수도 없다는 것.

    그런 감정은 말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백현이 다시 오픈스페이스 공간으로 향했다.

    팀원들은 전부 회의실에 모여 있었다.

    김성현 실장은 대책회의를 시작하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제품 얼마나 확보됐어요?”

    김성현의 말에 고연주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성한 쪽에서 싹 쓸어갔어요. 패션쇼 런칭한 후 발주한 물량은 이미 다 뺏겼고요. 기존 거래처에서도 저희랑 거래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네?”

    “자신들은 메리야트 패션과 계약을 맺어서, 지금 우리가 새로 런칭하는 브랜드는 맡을 수 없다고 합니다. 계약조건이 그렇게 변경됐대요.”

    창고물량까지 모든 것을 탈탈 털어간 것은 물론, 향후 발주까지도 막아버린 고기웅 본부장.

    그러다보니 더 속이 탄다.

    김성현은 일단 의류물량은 접어두고 자신이 개발한 디자인에 관심을 두었다.

    “제가 디자인한 시안들은 어떻게 됐어요?”

    “그게 전략기획부 쪽에서 메리야트 패션을 넘기면서 기존에 출원한 디자인 권리까지 모두 성한 쪽으로 넘겼어요. 성한 쪽에서는 방금 전에 헤이그 국제출원 절차까지 이미 완료한 거 확인했고요.”

    “네? 헤이그 국제출원까지 마쳤다고요?”

    헤이그 국제출원.

    외국에서 공인된 디자인 출원 방법이었다.

    일반적으로 디자인은 개별 국가를 기준으로 접수한다.

    파리협약에 의하면, 디자인에 대한 우선권을 주장하려면 개별 국가별로 디자인에 대한 특허를 출원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효율성과 복잡한 절차 때문에 최근에는 헤이그 국제출원 방식으로 많이 선회하고 있었다.

    이 방법의 장점은 각 가입국가 중 하나만 인정을 받으면, 국제 사무국을 통해 여러 국가에 동시에 디자인 등록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성한에서 1주일 만에 헤이그 국제출원을 마쳤다는 것은 블랑샤 브랜드의 디자인을 절대 빼앗기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김성현은 자신의 모든 것이 빼앗겼다는 것을 알고는 눈물을 글썽였다.

    하지만 자신을 믿고 남아준 연주와 진희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괜찮아요. 다 예상 범위 내에요.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는 이미 예상 했으니까 걱정 말아요. 무슨 방법이 생기겠죠.”

    김성현이 애써 마음을 다잡는데, 마르코가 책상에 양손을 올리며 말했다.

    “자기야~ 우리 쪽도 상황이 별로 안 좋아. 모델들도 이제 우리랑은 일 못하겠대.”

    “왜요?”

    “우리랑 일하면 성한 패션에서 더 이상 일을 안주기로 한 모양이야.”

    “우리 쪽 편이 아무도 없어요? 마르코 씨는 그쪽에서 평판 좋잖아요.”

    “좋긴 좋지. 하지만 성한은 여성패션 국내 1위야. 얼마 전에도 그쪽에서 모델 빼가서 위기를 겪었잖아. 우리 자기가 무대에 나서지 않았으면 패션쇼도 망했겠지. 그땐 운이 좋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모델들이 이제 우리하고 일하려하지 않아. 부정해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잖아? 자기도 이제 인정해야 해. 주변을 봐!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일을 해?”

    마르코는 지난 3일간 고민한 끝에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창업지원센터에서 지원받은 공동사무공간.

    사무실조차 꾸릴 수 없는 상태이기에 임시로 마련한 공간.

    여기서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

    그 결과가 예측되자, 마르코가 현실을 꼬집었다.

    “우리 자기들! 내가 가장 어른이니까 솔직히 말할게~ 우리 접자. 응? 메리야트로 돌아가자~ 고기웅 걔~ 마음에 안 들어도 이게 맞아. 먹고는 살아야지. 응?”

    마르코의 말에 김성현이 고개를 푹 숙였다.

    확실히 지금은 자금도 없고 디자인도 모두 빼앗긴 상태. 브랜드도 없고 거래처까지 모두 막힌 상황.

    “진짜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우리가 모은 자료도 없고, 거래처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결국 돈 앞에서는 모든 것이 부정당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포기하지 마요. 내가 고기웅 본부장 만나서 설득해볼게요. 자료 얻고, 디자인 권한 회수해서 우리 다시 시작해요.”

    김성현의 말에 강백현이 고개를 저었다. 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힘들 것 같아요. 실장님.”

    “그래. 자기야~ 그냥 우리 포기하자. 응?”

    팀원들의 대답에 힘이 쏙 빠지는 김성현.

    그런데 강백현은 달랐다.

    “저…. 자료가 있긴 합니다.”

    “무슨 자료요?”

    “저번에 편집샵 견학 다녀와서 모아둔 영패션 관련 자료가 있거든요. 고기웅 본부장한테 받은 정보도 있고요. 아~ 대현 백화점 조성민 MD로부터 정식 브랜드 런칭 제안도 받아놓은 터라 연락해봤는데, 영패션 관련 편집샵은 한 달 후에 열어줄 수 있다고 합니다. 영패션이라 좀 걸리긴 한데, 이걸로 판로는 마련할 수 있지 않을지….”

    강백현의 말에 깜짝 놀라는 김성현과 동료들.

    “언제 그렇게 움직였어요?”

    “제가 움직인 건 아니고, 상황이 잘 풀린 거죠. 성한 패션에서 자리를 비워줬으니까요. 다만, 이게 정말 좋은 상황인지 나쁜 상황인지는 전문가가 아니라 잘 모르겠습니다.”

    백현의 말에 김성현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영패션 가능할 것 같아요?”

    “원래 해볼 생각도 있었잖아요? 이쪽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죠. 다만, 전 불가능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좋아요. 한 달만, 딱 한 달만 해보죠. 여기에 제 인생을 걸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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