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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배기 깨러 왔습니다-49화 (49/139)
  • 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49화

    다음날, 호텔로 찾아간 강백현은 김성현이 머물고 있는 방 앞에서 문을 두드렸다.

    “실장님, 강백현입니다. 계십니까?”

    “아, 왔어요? 들어와요.”

    방문을 열어주는 김성현.

    어젯밤엔 당당하던 그녀였지만 오늘은 왜인지 자신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니, 백현 씨한테 할 말은 아닌데….”

    “네. 아닌데요?”

    “돈 어디 빌릴 데 있어요? 아는 곳 말해주면 금방 갚을게요.”

    백현의 입가에는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1억원이요? 실장님, 저 돈 없는 거 아시잖아요. 저 돈 없어서 불쌍하다고 고용하신 거잖아요. 실장님 대출 안 되세요?”

    “그게, 신용등급이 없어서 안 된대요. 금융거래가 너무 없어서 정보가 없다잖아요.”

    그렇다. 제 아무리 집안이 재벌이라도, 신용등급 정보가 없다면 은행 대출이 곤란하다.

    물론 대부업체 등을 통해 200~300만원 정도는 즉시 융통할 수 있겠지만, 그 금액 가지고 사무실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자칫 잘못하면 신용도 하락을 불러올 수 있었다.

    결국 백현이 주제를 돌렸다.

    “1억이 필요한 이유가 뭐예요?”

    “집 때문에 그렇죠.”

    “일단 집에 돌아가실 생각은 없고요. 맞나요?”

    “네. 없어요. 절대 안 돌아가요.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김성현의 말에 강백현이 방긋 웃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집은 구해다드리겠습니다. 생활비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거기까진 아직 생각 안 해봤죠.”

    “알겠습니다. 그것도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 * *

    오늘은 토요일이었다.

    다행히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것.

    “우리 어디가요?”

    “성현 씨가 살 새로운 숙소죠.”

    “집이요? 백현 씨 집은 아니겠죠?”

    “당연히 제 집은 아니죠.”

    백현이 데려간 곳은 게스트 하우스였다.

    하루에 15,000원만 내면 주어지는 방 한 칸짜리 공간.

    보증금은 없지만 화장실도 공용이요, 주방도 공용. 개인의 3평짜리 공간을 제외하고는 모든 곳이 공용인 그런 공간이었다.

    “일단 일주일치만 결제해주세요.”

    “10만5천원 주세요.”

    “사장님, 5천원만 에누리해주세요~”

    “아니! 서울에서 하루 15,000원이면 최저가에요. 여기서 어떻게 깎을 생각을 해요?”

    여사장의 말에 강백현이 씩 웃었다.

    “1주일 연속으로 머물면 품이 덜 드시잖아요. 렌트도 장기 렌트하면 깎아줍니다. 겨우 5,000원 가지고 왜 그러세요? 사장님이 이러시면 다른 곳 갑니다?”

    “아유~ 진짜! 알았어. 짐 가지고 들어와. 아~ 여성전용이라 남자는 못 들어와요.”

    “네. 알고 있습니다. 실장님! 짐 풀고 오세요. 전 차에서 기다릴게요.”

    일단은 하루에 15,000원짜리 단기방을 구했다.

    김성현은 못마땅한 얼굴이었지만, 하루에 33만원짜리 호텔비를 백현이 계속 내줄 수는 없었다.

    김성현은 속상한 얼굴로 짐을 정리하고 게스트하우스를 나왔다.

    “다음 계획은 뭐에요?”

    “와이파이 잡히는 곳으로 갈 겁니다.”

    “와이파이?”

    “네. 일단 돈부터 구해야죠.”

    “혹시 대출 받으실 건가요?”

    “아뇨.”

    “그럼 디자인한 제품 좀 몇 개 봐도 될까요?”

    트렁크 안에 든 김성현이 디자인한 제품을 보며 빙긋 웃는 강백현.

    무슨 꿍꿍이인지 가늠이 안 가니 김성현은 마음이 복잡할 따름이다.

    “지금 뭐하시는 거죠?”

    “사진 찍습니다. 성현 씨 물품 사진을 중고나라라는 카페에 올려서 팔면 어느 정도의 돈은 마련할 수 있을 겁니다. 블랑샤 제품이야 지금 핫한 상품이고, 직접 디자인하신 고로 많이 가지고 있으시니까. 그런 품목들은 중고나라에서 잘 팔리는 물품이거든요. 이걸로 돈 금방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이봐요! 그건 안 돼! 응? 그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원피스란 말이에요! 네?”

    “집에 들어가실 겁니까?”

    “아니! 그래도 아직 새 제품을 중고로 판다는 건 좀…. 다른 방법은 없어요? 거래처에 물건 받아달라고 부탁해도 되잖아요.”

    “뭐, 김성현 실장이 집 나와서 개털 되어서 재고 정리중이라는 기사를 전국에 뿌리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그건 회사에도 피해를 줄 거 같은데요?”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당연히 중고품으로 팔아야죠. 지금은 제가 대신 거래를 하면서 성현 씨 돈을 마련하는 게 최선 아니겠어요?”

    싱글벙글 웃는 백현의 말에 김성현이 기분이 상해서 눈을 치켜 올렸다.

    “아~ 진짜, 나는 백현 씨 볼 때마다 모르겠어. 매일매일 다른 사람 같아.”

    “그럼 다행입니다. 전 그런 사람 맞으니까요. 철저할 땐 철저하죠.”

    “칭찬 아니거든요? 됐어요. 장난 그만치고, 팔 거 골라봅시다. 까짓 것! 공구나라인지 뭔지, 한 번 거기에 팔아보자고요.”

    “눼눼! 일단 뭐 비싼 것부터 팔아보겠습니다. 속옷 종류부터 파는 게 좋겠네요. 일단 성현 씨가 브랜드 가치를 올려놓은 블랑샤 제품이니까, 잘 팔리겠죠?”

    김성현이 런칭한 이브닝 드레스가 20만원에.

    얼마 전 런칭한 누드브래지어는 4만원에 거래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자주 안 신는 구두와 이제는 지겨워진 색의 틴트 등 이런저런 것을 정리하니 수중에 175만원이란 돈이 들어왔다.

    지하철역에서 직거래.

    물론 그 거래를 하러 나간 건 김성현이 아닌 강백현이다.

    강백현이 거래를 끝내고 돈을 받아오자, 김성현이 놀랐다.

    “우와~ 이해 안 돼! 중고거래 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군요?”

    강백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대부분 사람들이 아껴 씁니다. 대한민국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어떻게 하면 하나라도 아껴볼까 고민하는 게 정상이에요. 김성현 실장님이 중고 거래가 가능하다는 걸 신기하게 생각하는 게 비정상이고요.”

    “알았어요. 그만해요. 좋아요! 이제 더 팔 것 없죠? 175만원이 생겼네요. 이걸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음, 생활비로 써야겠죠?”

    “사무실은? 이제 메리야트 패션 사무실도 못 쓴단 말이에요!”

    “그건 월요일날 해결해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아직 시간이 안 돼서요. 성현 씨는 일단 연주 씨, 진희 씨, 그리고 마르코 씨한테 월요일 12시에 출근하라고 전해주세요. 장소는 그날 오전 9시에 말씀드린다고 하고요.”

    “알았어요. 근데 뭔가 확실한 게 있어서 그러는 거죠?”

    “네. 이래보여도 저 능력 있습니다. 뭐, 성현 씨 길거리에서 재울 생각 없고, 길바닥을 사무실 삼아 일하게 할 생각도 없습니다.”

    “뭐래요~ 이봐요! 당신 드라마 너무 많이 봤어요.”

    “그렇습니까? 아무튼 오늘은 끝입니다. 헤어질까요?”

    하루 종일 중고거래로 심신이 지친 강백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김성현이 떠나려는 강백현을 붙잡으며 물었다.

    “잠깐만요. 우리 아빠한테는 전화 안 왔어요?”

    “왔습니다. 실장님 왜 안 들어오냐고, 빨리 모시고 댁으로 들어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근데요? 왜 말 안 했어요?”

    “어차피 안 들어가실 거잖아요. 실장님, 들어가실 건가요? 그럼 부르고요.”

    “됐어요. 월요일날 봐요.”

    “네. 준비 열심히 하십시오. 저도 일요일은 좀 쉬어야겠습니다.”

    * * *

    일요일, 백현이 호텔에서 한 일은 김성현을 위한 사무실 구하기였다.

    판교 창업지원센터.

    백현이 그곳의 안내데스크를 방문해서 이것저것 수소문을 하고 있었다.

    “저희 쪽도 공간이 있긴 해요. 하지만 업종 자체가 제조업이면 저희가 지원하는 종목은 아니거든요. 산업진흥원 쪽으로 알아보셔야 할 것 같아요.”

    강백현은 직원의 안내에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혹시 산업진흥원은 어느 쪽에 있나요?”

    “네. 안내책자 드릴게요. 산업진흥원도 여러 곳이 있거든요. 꼭 판교일 필요가 없으시면, 여기 확인해보시면 어디가 가능한지 나올 거예요.”

    안내 책자를 받아 하나하나 확인한다.

    하지만 판교와 달리 다른 지역은 일요일에 안내직원이 상주하지 않았다.

    국가에서 전략적으로 육성하는 테크노밸리와는 상황이 다른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등록하지 않고도 사무실로 사용 가능한 곳을 알아냈다는 점.

    “오픈 스페이스 공간은 모두에게 열려 있는 공간인가요?”

    “네. 가능합니다. 몇 명 정도 쓰시는데요?”

    “5명이요.”

    “아, 그럼 가능하실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다.

    각 지역의 창업지원센터 등은 예비창업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구비하고 있었다.

    공무원이던 백현이 사전에 알던 것보다 더 많은 걸 지원하고 있는 것이다.

    오픈 스페이스 공간, 회의실, 컴퓨터실, 거기에 헬스장과 식당까지.

    ‘다행이야. 사무실도 구했어.’

    다음날, 판교 창업지원센터의 오픈스페이스 공간으로 출근한 사람들.

    그들은 내심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김성현을 바라보았다.

    고연주가 김성현의 손을 잡고 위로했다.

    “실장님. 힘내세요.”

    “다들, 미안해요~ 지금이라도 돌아가실 분은 돌아가세요. 아마 성한 그룹에서는 받아줄 겁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실장님. 실장님 곁에 있어야죠.”

    “저도 실장님 곁에 있겠습니다. 실장님도 포기 안 하실 거죠?”

    “연주 씨, 진희 씨.”

    두 사람은 주말에도 일을 했던 모양이다.

    “샘플 자료는 주말 간 사진 다 찍었고요. 성한 쪽에 넘어가지 않은 디자인은 제가 이번 주까지 다 정리해놓을게요. 아마 저희 새로운 브랜드 런칭할 때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연주 씨 고마워. 정말 고마워.”

    마르코도 마찬가지였다.

    “아유~ 성현이 너~! 왜 그랬어? 응?”

    “미안해요. 마르코 씨.”

    “됐어! 괜찮아. 다시 성공하면 되잖아. 우리 바닥부터 올라왔어. 그러니까 할 수 있어. 그리고 기반이 아예 사라진 것도 아니고, 인맥은 남았잖아.”

    “네. 고마워요.”

    “근데 백현 씨는 어디 있어? 오늘 안 보이네.”

    “그러게요. 아침까지 나 여기로 태워줬는데….”

    강백현은 근처 주민센터에 방문하고 있었다.

    “행복주택공급 신청 말씀하시는 거죠?”

    “네. 맞습니다.”

    미혼인 무주택자, 만 19~39세 사이로 소득이 있는 업무를 하는 사람.

    거기에 재산이 2억 3천 미만인 사람.

    다행히 김성현은 그 조건에 부합하고 있었다.

    “신청 대상에 부합하시네요. 신청 가능하실 것 같아요.”

    “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백현은 자신의 이름으로 행복주택공급 신청을 완료했다.

    다행히 소득이나 기타 지원 대상 선정기준에서 결격사유가 없었던 것.

    김성현은 강백현이 건네는 열쇠를 받으며 고개를 들었다.

    “이 키는 뭐예요?”

    “임대주택입니다. 성현 씨 이름으로는 안 되더라구요. 성현 씨가 가지고 있는 메리야트 주식 때문에 재산부분에서 결격사유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제 이름으로는 가능했고요. 일단 성현 씨 재기할 때까지는 거기서 생활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무일푼인 김성현에게 집이 생기고 사무실이 생겼다.

    물론 이전의 집이나 메리야트 그룹 사무실에 비하면 초라한 공간이지만, 지금의 성현에게는 무엇보다도 절실하게 필요한 장소였다.

    “고마워요 백현 씨.”

    “아닙니다. 전 월급 받은 만큼 일하는 것뿐이죠. 근데 어쩌죠 실장님?”

    “네?”

    “고기웅 본부장한테 전화가 왔네요. 받아야 되나요? 말아야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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