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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배기 깨러 왔습니다-47화 (47/139)

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47화

김성현은 자신을 응원해주는 사람들을 마주보았다.

지금까지 동고동락하며 믿어준 사람들.

어떻게 보면 가족보다 더 자신을 위해준 사람들이다.

윤진희가 그랬고, 고연주가 그랬고 마르코가 그랬다.

김성현은 주변의 사람들을 보며 그동안의 일들을 파노라마처럼 떠올리기 시작했다.

처음 시작했을 때만 해도 자신이 대단한 귀족이라도 되는 듯 벌벌 떨며 대하던 직원들.

그들과 함께 지내왔던 세월이 지금에서야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새 사람과 사람으로서의 끈끈한 관계가 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감정에 젖어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이윽고 김성현이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성현 패션, 추진해 봐요. 다들 후회 안 할 자신 있죠?”

“네!”

* * *

김성현의 지시에 고연주는 그동안 모아둔 자료를 이동식 하드디스크에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윤진희는 창고에 남은 샘플을 모아 사진을 찍고 아직 디지털화 하지 않은 자료들을 기록했다.

마르코는 그동안 메리야트 패션그룹과 함께했던 모델들에게 연락을 취해서 현재의 상황을 전달했다.

“백현 씨!”

“네. 실장님.”

“시간 좀 돼요?”

“네. 물론이죠.”

* * *

김성현이 향한 곳은 메리야트 그룹 본사 최상층에 위치한 회장실이었다.

또각또각.

김성현이 신은 하이힐이 바닥과 부딪히며 요란하게 소리를 내자, 다른 사람들이 김성현을 보며 고개를 돌린다.

“아빠, 안에 있죠?”

“계시긴 하지만, 손님이 계셔서 지금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아무도 들여보내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비서실장이 회장실로 가는 입구를 막자, 평소에는 얌전했던 김성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봐요! 비서실장님! 지금 상황 파악 안 되세요?”

“아가씨! 왜 그러십니까?”

“몰라서 물어요? 내 브랜드 블랑샤 넘어간 거, 기사 안 보셨어요? 알면서 그러는 거예요? 아니면 몰라서 이러시는 거예요? 네? 빨리 비켜줘요.”

“아가씨!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비서실장이 온몸으로 막자, 김성현이 비서실장을 밀어내며 말했다.

“비키라구요!”

김성현이 핸드백을 휘두르며 비서실장을 위협했다.

비서실장이 양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면서 필사적으로 회장실로 가는 문을 막았지만, 의외로 상황은 쉽게 풀렸다.

회장실 문이 안쪽에서부터 열린 것이다.

“무슨 소란인가?”

김도한 회장의 말에 핸드백을 휘두르던 김성현이 자신의 부친인 김도한을 금방이라도 죽일듯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아빠! 들어갈게요.”

“그래. 들어와. 윤 실장!”

김도한이 자신의 비서실장인 윤정석을 불렀다.

“네. 회장님.”

“자네 방 문 좀 열어두고, 마실 차 좀 가져오게.”

“네.”

윤정석이 김도한 회장의 말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의 집무실과 비서실장의 집무실은 연결되어 있다.

복도에서 바로 회장실로 가는 방법도 있지만, 비서실장의 집무실을 통해 회장의 집무실로 가는 방법도 있었다.

회장님이 저렇게 말한다는 것은 회장실에 계셨던 손님이 자신의 방으로 이동했다는 뜻.

즉, 따님인 성현 아가씨에게 누군가의 존재를 보이고 싶지 않아서 한 행동이라는 것이었다.

“자네, 오랜만이군.”

“네. 실장님, 면접 때 보고 처음 뵙습니다.”

강백현은 미소를 지우고 윤정석 비서실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때, 비서실장의 집무실 문이 열렸다.

안쪽에서 나온 사람은 놀랍게도 고기웅 본부장.

메리야트 패션을 인수한 성한 그룹의 그 고기웅이었다.

“성현 씨는 안에 들어갔나요?”

“네. 본부장님, 아가씨께서는 회장님 집무실로 들어가셨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죄송할 건 없죠. 아직 제가 성현 씨 마음을 못 얻은 거니까 이 정도 취급은 감당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시간만 흐르면 이긴 게임이니, 느긋하게 기다리죠 뭐~.”

“……”

비아냥거리는 태도에도 윤정석 비서실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회장님과 각별한 관계인 그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막 입사한 신입수행비서의 생각은 달랐다.

강백현의 거친 목소리가 정확히 그를 향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본부장님? 지금 게임이라고 하셨습니까?”

“강 비서?”

강백현의 목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는 고기웅 본부장.

그리고 당황한 건 윤정석 비서실장이었다.

“강 비서! 너 왜 그래? 미쳤어?”

“네. 미쳤습니다. 돈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미련한 놈 때문에 돌아버리겠습니다.”

강백현의 대답에 윤정석이 당황하며 고기웅에게 사과했다.

“얘가 갑자기 왜 이래? 본부장님? 제가 교육 단단히 시키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강백현은 결국 할 말은 내뱉고야 마는 사람이었다.

“본부장님? 당신에게는 게임일지 모르겠는데, 김성현 실장님은 평생 일궈놓은 모든 것을 빼앗긴 겁니다. 시간이 해결해준다고요? 돈이면 세상 사람들이 다 당신 뜻대로 될 것 같습니까?”

“미친놈! 그만해! 너 이러다 해고야! 인마! 얼른 본부장님께 사과해! 본부장님,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윤정석이 강백현의 고개를 억지로 숙이게 하려 하자 앞에 있던 고기웅이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비서실장님, 놔둬요. 저 친구랑 따로 얘기 좀 할게요.”

“네?”

“저 당돌함이 재밌어서 흥미가 생기네요.”

고기웅은 자신의 앞에서 당당하게 고개를 든 녀석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짓밟아줄게. 저 당당함. 최용규도 분명 저랬지. 어리석은 놈! 공무원 놈들은 하나같이 다 왜 저러는지 몰라.’

고기웅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띤 채, 소매를 걷으며 강백현에게 제안했다.

“옥상으로 올라갈까요? 회장님 집무실 앞에서 이러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요?”

“그러죠.”

“후후, 올라갑시다!”

고기웅이 두 주먹을 꽉 쥐고 조소를 머금었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두 사람을 보며 비서실장의 얼굴에는 난감한 표정이 걸렸다.

“아~ 이걸 어떻게 해야 해?”

그리고 그걸 뒤에서 지켜보던 한 사내가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비서실장에게 말을 던졌다.

“별 것도 아닌 것 가지고 뭘 그래? 젊을 때는 저럴 수도 있지.”

“아니! 김 기사님? 이게 별일이 아니에요? 완전 비상사태인데요?”

“후후, 강 비서가 속 시원하게 말해주니까 얼마나 좋아. 사실 성한 그룹이 우리한테 뭐 해준 게 있나? 우리가 IMF때 해준 건 생각도 못하고, 지금 잘나간다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놈들이 회장님은 뭐가 좋다고! 그놈들은 예의도 모르는 놈들이잖아. 안 그래?”

김 기사의 말에도 윤정석 비서실장은 난감한 얼굴이었다.

“그건 그렇지만, 이건 저희 얼굴에 먹칠하는 거라서.”

“괜찮아. 저 친구 신입이라 실수했다고 하면 돼. 그리고 어차피 우리가 손해볼 건 없잖아? 딱히 성한 그룹에서 우리를 위해 해준 것도 없고 말이야.”

* * *

같은 시각, 옥상에서는 남자 둘과 유령 하나가 서로를 바라보며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강 비서, 사람들 앞에서 뭐하자는 거지? 날 망신 주려는 거야?”

[독기 품었네. 저 새끼 얼굴 봐. 백현이 너를 아주 죽일 듯이 바라보네! 이 새끼!]

강백현은 유령을 옆에 두고 그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고기웅 씨.”

“고기웅 씨?”

“네. 내가 고기웅 씨를 본부장님이라고 불러줄 이유는 없죠. 어차피 고기웅 씨는 메리야트 그룹하고 일절 관계도 없는 사람이잖아요.”

“너 사람 잘못 봤어. 나랑 붙어서 너한테 무슨 이득이 있지? 주제 파악을 못하는 것 같은데?”

고기웅의 말에 강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의 의미.

“압니다. 고기웅 씨하고 붙어서 좋을 거 없다는 거. 하지만 난 잃을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어차피 회사 그만두면 그만이거든요.”

“허허, 미치겠네. 너 뭐야? 너한테 김성현이 뭐기에 이렇게까지 하냐? 너 김성현 이거냐?”

고기웅이 새끼 손가락을 내밀며 조롱하듯 말했다.

그의 말에 강백현이 헛웃음과 함께 그를 비난했다.

“정말 저속하네요. 성한 그룹의 재벌 3세라는 분이 그런 거에 집착해서 어찌 기업을 운영합니까?”

“풋! 아무것도 모르는 병신 같은 놈! 너 내가 웃으니까 무서운 줄 모르는 거지? 내가 우습게 보이냐?”

강백현은 그의 말에 씩 웃었다.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본부장님의 행동이나 말 자체가 실장님께 오히려 역효과니까 말씀드리는 겁니다.”

강백현의 말에 옆에 있던 최용규가 자꾸 후배를 부추겼다.

[와~ 강백현, 돌려 말하지 말고 그냥 주먹 날려 인마! 저 새끼 아구창 씹창 내버리라고!]

그때, 한숨을 내쉬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는 고기웅.

“좋아. 무슨 뜻인지는 알겠어. 하지만 넌 선을 넘었지.”

“네?”

그는 담배를 물더니 하늘 방향으로 구름 모양의 연기를 내뿜은 후 말했다.

“이 담배 연기를 보면 무슨 생각이 드냐?”

“…….”

“연기가 구름처럼 나타났다가도 바람에 휩쓸려 순식간에 사라지지?”

고기웅의 말에는 은근히 깔린 모종의 기운이 있었다.

강백현이 처음으로 긴장했다.

그의 비유 섞인 말은 협박이 확실했다.

“내가 너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들 수 있는데? 어때?”

“협박인 겁니까?”

“강백현, 32세, 충청남도 부주시 8급 공무원.”

“지금 뭐라고….”

“허가과 허가담당이었다가 내부고발로 찍혀서 부제동 주민센터 주민복지담당으로 발령. 하지만 시장한테 찍혀서 직무유기라는 사유로 인사위원회 회부 뒤 결국 사표 제출.”

고기웅의 말에 강백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자신의 뒷조사를 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기에 지금의 충격이 더욱 더 크게 다가왔다.

“그래도 시험을 다시 봐서 대전시 9급 공무원에 단번에 합격했지만, 인사위원회 회부 건으로 부주시에서 임용대기 요청. 현재 상태로는 최소 2년은 임용되지 못할 것이 분명함. 셀브레인, 담양우유 등 여러 기업에 취업하려 자소서를 내보았지만 해당지역에서는 블랙리스트에 올라 기업에서 채용을 꺼리는 상태. 그러나 우연히 최용규의 여자친구였던 김성현에게 취업을 부탁해 현재 수행비서로 일하고 있다- 라고 조사해왔군. 더 할 말 있나?”

“제 뒷조사를 한 겁니까? 이건 엄연한 사찰입니다.”

“그냥 참고조사라며 내 비서들이 종합해온 것뿐이야. 난 보고를 받았을 뿐이고.”

“그게 그거 아닙니까? 사찰이지 않습니까!”

울분 섞인 강백현의 말에 고기웅이 비웃었다.

“통장 잔액 2751만원. 자가차량 없음. 나이 32세에 백수 겨우 면해서 아등바등 살고 있으면서 나한테 고개를 빳빳이 들어?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빌어. 내 신발 핥으면서 ‘난 본부장님의 개입니다. 앞으로 개처럼 살겠습니다’라고 말해! 그럼 이번만은 넘어가주지. 어때?”

강백현은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는 고기웅의 사고방식이 싫었다.

고기웅에게는 어떠한 정보도 구해올 수 있는 흥신소가 있었다.

돈만 주면 뭐든 해주는 불량배, 아니 심부름꾼.

그래. 재벌들에게는 그런 것들이 있다.

하지만 거지같이 살고 있는 강백현도 빈손은 아니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24시간 잠도 안자고 전국, 아니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획득할 수 있는 성주신이 있었다.

[김나연.]

“김나연.”

“뭐하는 거야?”

강백현의 입에서 여자 이름이 튀어나오자, 허풍이라고 생각한 고기웅이 조소를 보냈다.

하지만 강백현은 멈추지 않았다.

[김나연, 조선화.]

“김나연, 조선화.”

“하하하, 웃기는군. 지금 뭐하자는 거지?”

강백현의 입에서 4명의 여자이름이 튀어나왔다.

[김나연, 조선화, 장미혜, 최유란]

“김나연, 조선화, 장미혜, 최유란!”

“…….”

그러자 자신만만했던 고기웅의 입가에서 삽시간에 미소가 사라지고 말았다.

강백현은 최용규가 불러주는 대로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김나연, 조선화, 장미혜, 최유란, 일본의 사카모토 미야코, 미국의 제이미 수잔, 러시아의 볼트레안 조세핀, 영국의 루키 클레어, 대만의 왕진미, 더 부릅니까?”

강백현의 입에서 그가 강제로 범했던 여성들의 이름이 차례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고기웅의 얼굴이 타오르듯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너 뭐야? 너 도대체 뭐야?”

“뒷조사는 저도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당신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죠? 아니요! 내 뒤에는 당신보다 더 든든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요? 당신 사생활 까발려지니까 부끄럽습니까?”

강백현의 반박에 고기웅이 당황해서 추궁했다.

“누구한테 얻었어? 그 정보 누가 말했어? 어?”

“내가 누구한테 정보 얻었는지 당신이 궁금해 할 건 없고, 앞으로 처신 잘 합시다. 피차 사람 대 사람 관계 아닙니까?”

“이 새끼가!”

“그만!”

강백현의 고함에 주먹을 휘두르려던 고기웅이 동작을 멈추었다.

“방금 여자들 이름과 함께 기사화되는 꼴 보기 싫으면 앞으로 김성현 실장 괴롭히지 마십쇼. 얼굴 들이밀지도 마시고요. 설마 성한 그룹 회장님 귀에 이 여자들 이름이 들어가는 걸 바라는 건 아니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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