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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배기 깨러 왔습니다-45화 (45/139)
  • 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45화

    집에 들어간 고기웅은 곧바로 아버지가 계신 서재로 들어갔다.

    고창훈 부회장. 고명규 회장의 장손.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고기웅을 향했다.

    “왔니?”

    “네. 아버지.”

    “기웅아. 이제 방황은 그만할 때가 되지 않았니?”

    고창훈 회장이 증권사 찌라시를 내밀었다.

    그걸 본 고기웅이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주장했다.

    “아버지, 오해입니다. 윤현주하고 그런 일 없었습니다.”

    “알아. 윤현주하고는 아무 일 없었던 거, 진작에 파악했어. 윤현주하고는 없었던 거 알아.”

    윤현주를 두 번이나 강조하는 부회장.

    그가 자신의 아들에게 또 다른 사진을 내밀었다.

    호텔 CCTV에 찍힌 사진.

    앞서 하룻밤을 같이 보냈던 정유미와 팔짱을 낀 고기웅의 사진이다.

    “그 여자는 왜요?”

    “이름이 정유미? 모델 출신이라고 그러더라. 너하고 무슨 관계니?”

    “이미 헤어졌습니다. 그 여자는 저랑 이번 건하고 관계도 없고요.”

    “찌라시 최초 유포 PC를 역추적해보니, 그 여자 집이 나왔어. 그래서 너하고 무슨 관계인지 찾아보니 그 사진이 나왔고…”

    아버지의 말에 고기웅이 주먹을 절로 쥐었다.

    ‘저 년이 찌라시를?’

    하지만 지금은 변명할 말이 없다.

    부회장은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덕분에 성한패션주식 시간외거래가가 무려 5%나 떨어졌더라. 네 찌라시 하나 때문에! 그 여자 하나 때문에!”

    고기웅은 바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래. 일단 윤현주 모델 CF 건은 이사회에서 결정하기로 했다. 모델 이미지가 이렇게 된 이상 더 이상 계약을 이어나갈 순 없어. 찌라시 유포는 우리 성한 그룹 차원에서 전방위로 조치하고 있으니 곧 잠잠해질 거야. 하지만!”

    부회장이 언성을 높이며 강조했다.

    “네 행실이 변하지 않는 한, 계속 구설수에 오를 수밖에 없겠지. 그건 네가 후계 구도에서 탈락한다는 이야기가 되겠고.”

    후계 구도의 탈락이라는 말이 동반하는 의미.

    고기웅에게는 그 의미가 너무나 컸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아. 남자라면 그럴 수 있어. 실수할 수 있고, 젊었을 때 그런 건 사람들이 다 잊어. 네가 결혼하기 전에는 누굴 만나든 누가 신경 쓰고 그러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하지만 넌 우리 그룹을 이어받을 정식 후계자야. 더 이상의 방황은 할아버지 이전에, 내가 용납하질 못해. 알았어?!”

    “명심하고 있습니다.”

    “그래. 성현이랑은 어떻게 되고 있니?”

    “성현이요?”

    의외의 말.

    아버지의 입에서 김성현의 이야기가 나오니, 고기웅으로서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김도한 회장한테 오늘 연락이 왔더구나.”

    “김 회장님…께서요?”

    “그래. 성현이가 널 굉장히 좋아하고 있다고… 만나고 싶어 한다고. 이미 네 엄마랑 한차례 만나지 않았니? 그때 이후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궁금해 하더구나.”

    아버지의 말에 고기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성현이 날 좋아한다고? 만나고 싶어 한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김성현에게 그럴 낌새는 없었다. 그렇다면 예상되는 건 딱 한가지.

    메리야트 그룹의 자금사정이 여의치 않다는 것.

    “아버지. 사실 성현이랑 잘 되고 있진 않습니다. 그건 김도한 회장님의 바램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지금 기업이 어려운 상황이기도 하니까, 그런 식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거겠죠.”

    “그래. 메리야트 쪽 자금 사정 힘들다는 것은 알아. 그걸 떠나서 네 마음을 듣고 싶은데?”

    사실 이 대목에서 고기웅은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지?! 아버지는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메리야트 그룹을 도와주는 거, 누구보다 반대하신 게 아버지였잖아. 그런데 지금은 왜?’

    고기웅은 일단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전하기로 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김성현이 마음에 들진 않습니다.”

    “그래? 의외인데? 엄청 좋아하는 줄 알고 있었는데?”

    “……”

    “패션 감각 뛰어나고, 외모도 그 정도면 됐고, 자기 일에 자부심도 가지고 있고, 더구나 오늘 블랑샤를 검색어 1위까지 올려놓았지. 외모, 실력, 능력 그거 다 가진 여자 흔치 않잖아? 만약 내가 너라면 반드시 가지고 말았을 거야.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그런 여자를 반드시 손에 넣었겠지.”

    부회장의 말에 고기웅이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핏줄은 어디 가질 않는다.

    자신의 소유욕, 정복욕, 그건 모두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기질.

    “저는 그 점이 마음에 안 듭니다. 앞에서는 예의 갖추면서 뒤로는 어떤 짓을 꾸밀지 모르는 게 여자거든요. 그런데 그 여자는 그러면서 허점이 없어요. 미꾸라지처럼 계속 제 손아귀를 빠져나가죠.”

    고기웅의 말에 고창훈 부회장의 입가에 미소가 깃들었다.

    마치 젊은 시절의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았다.

    ‘똑같아. 나랑 똑같아. 철부지 녀석! 하지만 성현이 같은 애가 안사람으로 들어오면 너도 안정되겠지. 기웅이를 잘 이끌어줄 거고.’

    고창훈이 자신의 아들에게 말했다.

    “그래. 네 마음대로 안 되니까, 다른 여자들처럼 컨트롤이 안 되니까, 그래서 도리어 신경이 쓰이는 거란다. 그건 남자라면 다 똑같이 느끼는 거야. 특히 넌 더 심하고.”

    “심하다니요?”

    “기웅이 넌, 어릴 때부터 갖고 싶은 거라면 뭐든 가지려 했지. 소유욕이 정말 남달랐어.”

    “그 점은 아버지를 닮은 거죠.”

    “그래. 사실 나는 반대였다. 김성현 만나는 거 반대였어. 그런 식으로 만나는 게 자기 그룹을 살리겠다고 딸을 바치는 것하고 뭐가 다르니?”

    “아버지….”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그런 여자라면 우리 집안 사람으로 들어와도 손색이 없어. 이제 세상은 바뀔 거야. 남자들만의 고유 영역이던 사업도 여성들이 비집고 들어오고 있지. 이제 특출난 여성은 성공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도래한 거지. 김성현은 바로 그런 싹을 가지고 있고.”

    열정, 감각, 센스.

    오늘 뉴스를 통해 김성현에 대한 선입견을 고쳐먹은 부회장이었다.

    “마음에 든다면, 최대한 빨리 식을 올려. 어떻게든 잡아. 얼마가 들어가도 좋아. 네가 마음에만 든다면 그 만남, 그 결혼, 절대 만류하지 않으마.”

    “아버지….”

    “대신 네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철저하게 밟아. 나중이 되면 그 아이는 우리 성한패션에 독이 될 거야. 사업수완이 장난이 아니야.”

    “……”

    붙잡거나, 짓밟거나.

    중간은 없다.

    아버지의 말에 고기웅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그래. 이제 너도 성한 그룹의 정식 후계자다. 더 이상 생각 없이 행동하지 않도록 해.”

    “알겠습니다. 아버지.”

    “그래. 나가 봐.”

    아버지의 말을 듣고 나서 돌아오는 길.

    고기웅의 마음은 심란한 상태였다.

    수행비서 박지훈이 옆에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도련님, 죄송합니다. 찌라시 건을 예상했어야 했는데, 제 실수입니다.”

    “아니야. 오히려 잘 됐어. 그것 때문에 내 마음은 확실해졌으니까.”

    고기웅은 어느 때보다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이제 흔한 여자는 필요 없다고.

    아무래도 김성현. 김성현이 자신의 옆에 있어야겠다고.

    * * *

    같은 시각.

    김성현도 집 앞에 도착했다.

    “고생했어요. 백현 씨.”

    “아닙니다. 실장님, 오늘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래요. 주차하고 들어가요. 많이 늦었네요.”

    “네. 내일 뵙겠습니다.”

    차량을 주차한 강백현은 숙소로 가는 대신 최용규를 불렀다.

    “선배.”

    [갑자기 또 왜 선배?]

    “무슨 이야기인지 듣고 좀 알려줘요.”

    [너! 오늘 이상하다? 왜 성현이한테 관심을 가지지?]

    “그런 거 아닙니다. 단순히 걱정돼서 그럽니다. 회장님 전화 목소리를 들으니 좋아하시는 게 아니라 화내시는 것 같았어요.”

    강백현의 말에 최용규가 다시 한 번 경고했다.

    [알았어. 아무튼 너도 성현이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았지? 너 같은 놈하고 엮이면 안 돼. 알았어?]

    “나도 내 분수 잘 알아요. 그러니까, 그냥 옆에 가서 듣고 알려줘요. 그래야 저도 혹시 모를 상황에 대처를 할 테니까.”

    [알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 큰일 없을 거야.]

    “넵.”

    김성현이 집안에 들어가자 그녀의 어머니가 심각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회장님 안에 계셔.”

    “엄마! 아빠 왜 그러는데?”

    “아빠랑 둘이 말해. 나는 너한테 해줄 말이 없어.”

    “엄마!”

    회사 경영에는 일절 손을 대지 않는 엄마였다.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는 듯, 아무 말도 없이 아빠에게 떠미는 엄마의 모습.

    하지만 엄마는 항상 저랬다.

    어떠한 경우에도 회사하고는 거리를 두었다.

    여자는 회사 경영에 신경 쓰면 안 된다면서, 항상 저런 식이셨다.

    엄마 집안이 무너지지만 않았어도 저러시진 않았을 텐데….

    집안에서 철저하게 을로 사는 엄마를 보면 김성현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

    그리고 서재 안.

    김도한 회장은 고압적인 시선으로 김성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앉거라.”

    “아빠….”

    “회장님이라고 불러!”

    “아빠! 갑자기 왜 이래?”

    김도한 회장은 마음이 아팠다.

    ‘성현아, 용서하렴. 기업을 살려야 해. 그 핵심은 너야.’

    하지만 자신의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낼 순 없었다.

    “성현이 너, 오늘 품행이 단정하지 못하더구나. 네가 패션쇼 모델로 나가?! 우리 그룹 기업 이미지 망칠 일 있니?”

    “아빠, 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 아빠는 내가 최근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면서 그런 말을 해?”

    “모든 것은 결과야. 과정이 어떻든 결과가 말해준다고! 네 품행, 네 행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김도한 회장의 말에 김성현이 따지고 들었다.

    “그게 아니겠지. 아빠는 성한 그룹에서 내 행실을 가지고 혼사를 취소할까봐 그게 걱정스러운 거잖아.”

    “김성현! 김성현!”

    딸의 대응에 김도한이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김성현도 그냥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아빠, 세상은 변했어. 사람들은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사람을 좋아해. 모든 일에 최선을 다 하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그래? 이건 뭔데? 이 기사는 뭔데?”

    김도한 회장이 태블릿 PC로 비판적인 기사 하나를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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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 데까지 간 메리야트 그룹의 장녀 김성현, 노출의상 파격적]

    블랑샤 브랜드의 무대, 마지막 피날레를 장식한 김성현 실장의 의상이 논란이 되고 있다.

    그녀가 입은 이브닝 드레스는 단아했지만, 안쪽 속옷이 훤히 보여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엉덩이 부분이 꽉 끼는 빨간색, 검은색 속옷과 색깔을 맞춘 브래지어는 그동안 모델 및 연예인에게 쏠렸던 화제성을 다시 가져오기에 충분했다.

    당당해서 보기 좋았다는 긍정적인 의견과 일반인의 과한 노출이 보기 민망하다는 부정적인 의견이 동시에 혼재하는 현재, 관련 기사는 무려 65개에 달하고 있다.

    재미일보 조운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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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김도한 회장이 가리킨 댓글 부분은 더 충격.

    누가 이 기사를 읽었을까요?

    남성 : 92%, 여성 8%

    10대 : 3%, 20대 : 33%, 30대 : 34%, 40대 : 20%, 50대 : 10%

    댓글 반응.

    - 누나! 핥고 싶어요! [찬성 31, 반대 28]

    - 이 여자, 재벌 아니었으면 진작에 화류계에 데뷔했음. [찬성 28, 반대 3]

    - 캬캬캬캬, 기자가 빻았네. 여적여, 그 성별 어디 안 가죠? [찬성 25, 반대 1]

    김성현이 아빠의 말에 상처를 입었다.

    “아빠! 별로 읽지도 않는 기사잖아. 이런 기사를 가져와서 날 상처 주는 이유가 뭔데? 왜 내가 하려는 일을 방해하는 건데!”

    “상처? 방해? 그룹 이미지 때문에 말하는 거야. 네 돌발적인 행동 하나 때문에, 그룹의 전체적인 이미지가 다 떨어지고 있다고. 어?”

    “이미지가 왜 떨어지는데?”

    “그룹 재무팀에서 분석 결과가 나왔어. 내일 주식 하방이 예상된다고.”

    “아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러자 김도한이 한숨을 내쉬며 찌라시 하나를 보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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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리야트 그룹의 몰락]

    자금사정이 어려운 메리야트 그룹을 살리고자 그룹의 장녀 김성현이 반 나체 차림으로 무대에 올랐다. 메리야트 그룹은 증권시장에서 1년 이내 자본잠식이 우려된다는 메시지가 지속적으로 흘러나오고 있으며, 특히 지난 달 300억 물량 모집 금액 중 23억만 조달된 회사채가 그 경고 메시지를 증명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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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

    “내일 주식이 폭락할 거다. 네 행동으로 인해… 기업이 위기에 빠질 거야.”

    “알았어. 아빠가 무슨 말 하려는 건지 잘 알았어.”

    김성현이 서재를 나갔다. 최용규가 씁쓸한 얼굴로 김성현의 옆을 따라갔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9시.

    강백현이 김성현에게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실장님?”

    “네?”

    “오늘 메리야트 패션! 12%나 올랐는데요?”

    “12%요? 주식 말하는 거죠?”

    “네. 그룹 본사도 3%나 올랐습니다. 프랑스의 명품 브랜드 샬롯이 저희 브랜드 블랑샤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게 프랑스 언론에서 이슈가 되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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