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44화
그날 저녁.
호텔에 들어온 강백현은 샤워로 지친 몸을 씻어냈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셔츠가 땀내로 범벅이었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바빴다.
“진짜 공무원하고 천지차이네요. 천지차이.”
강백현의 말에 최용규가 대답했다.
[그거야 네가 일 없는 지방직 공무원으로 갔으니까 그렇지. 중앙직은 달라.]
“여기보다 바쁘다고요?”
[더 바쁘다기 보단 여러 가지 일을 한 번에 해야 하는 게 힘들지. 여기는 패션이면 패션만 하면 되잖아.]
“그럴 수 있겠네요. 각종 문서 작업도 기본으로 깔고 가니까요. 여기는 문서 작성이 별로 없어서 좋긴 합니다.”
[그것보다 뉴스 좀 봐라.]
“뉴스요?”
[어. 인터넷 뉴스에 성현이 완전 토픽이다. 토픽!]
“네?”
강백현이 인터넷 뉴스를 열어보았다.
연예 섹션에 올라온 뉴스 Top 1.
그 제목은?
<메리야트 그룹 김도한 회장의 장녀 김성현, 블랑샤 패션쇼 모델로 깜짝 등장!>
강백현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뉴스를 클릭해보았다.
내용인즉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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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야트 패션의 기획실장 겸 디자이너인 김성현. 그녀가 자사 브랜드인 블랑샤의 패션쇼에 깜짝 등장해 화제가 되고 있다.
본래 무대의 말미에 등장할 것으로 예고했던 윤현주 모델의 건강 문제로 무대에 대신 오른 김성현은 속옷이 훤히 비치는 시스루 이브닝 드레스를 입고 등장해 참여한 셀럽들과 기업 관계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관련 사진 : 블랑샤 패션쇼 무대의 피날레를 장식한 김성현 디자이너.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등장]
워킹 간에 삐끗하는 등 실수는 있었으나, 실수에 굴하지 않고 당당한 표정으로 워킹을 마친 김성현 실장. 관객들은 그녀의 용기에 환호의 박수를 보냈다.
이번 패션쇼는 대한민국 최초로 디자이너가 직접 무대에 오른 사례로 알려졌다. 이러한 열정을 발판으로 블랑샤가 국내에서는 물론 세계적인 브랜드로 도약하기를 기자는 열렬히 응원하는 바이다.
담당 : (성문일보) 조수환 기자.
누가 이 기사를 읽었을까요?
남성 : 65%, 여성 35%
10대 : 3%, 20대 : 33%, 30대 : 34%, 40대 : 20%, 50대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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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댓글 반응.
그몸칭찬해 : 우와~ 관리 잘 했네. 대박! 역시 여자는 관리해야 돼.
(찬성 4251 반대 3531)
RE : 여혐아웃 : 여기서 몸매 이야기가 왜 나옴? 찬성 455 반대 31
RE : 노리노리 : 아이디부터 틀딱냄새 오지네. (찬성 555 반대 32)
sumi**** : 언니! 베댓 신경쓰지 말아요. 너무 예뻐욧!
(찬성 4111 반대 314)
제형남푠 : 40대 남성입니다. 솔직히 노출을 떠나서 자기 일에 저렇게 노력하는 도전정신에 한 표를 던집니다. 김성현 디자이너님, 앞으로 크게 성공하실 겁니다.
(찬성 3915 반대 315)
기사는 핫토픽에 올라 있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김성현의 행동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으니까.
“이거 너무 많이 보는데요?”
[왜? 잘 됐잖아. 해외 바이어들 문의도 많았던 거 너도 알잖아. 이 정도면 완전 성공한 건데?]
“아니, 그것도 그런데, 회장님이 성현 씨를 용납하실까요? 시스루 복장이면 엄청 야한 복장인데….”
[아…]
말이 무섭게, 회장님의 전화가 백현에게 걸려왔다.
비록 저장은 되어 있지만 처음 걸려오는 전화였다.
“네. 회장님. 강 비서입니다.”
- 자네 어딘가?
“지금 숙소에 있습니다.”
- 성현이는 어디 있나? 어디 있기에 연락이 안 되는 거야?
“지금 여직원들하고 회식 중에 있습니다.”
- 알았네. 성현이 데리고 바로 집으로 들어오게.
“네. 알겠습니다. 성현 아가씨 연락해서 바로 모시고 들어가겠습니다.”
- 최대한 빨리 와! 알았지?!
“네.”
전화가 끊기고 강백현이 고개를 저었다.
“이것 봐요. 회장님은 별로 안 좋아하신다니까요?”
[……]
“자기 자식이 대중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몸매 평가받고 그러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아닙니까?”
[아… 맞네. 빨리 준비해서 성현이 데리고 집으로 가.]
“네. 바로 들어가야죠. 잘 수습하실 수 있을까 모르겠네요.”
* * *
김성현이 향한 곳은 헬리엇 호텔이었다.
맞다. 그 남자들만 가는 곳.
그래서 오히려 여자들끼리 술 마시기 좋은 곳.
그 술집이다.
윤진희가 입을 열었다.
“실장님!”
“응?”
“백현 씨 온다는데요? 연락 왔어요.”
“아~ 정말? 왜?”
“실장님 모시러 온다고 하네요. 전화기 꺼두셨나 봐요?”
“꺼둔 것은 아니고, 배터리가 나갔어. 오늘 하루 종일 바빠서 충전할 시간이 없었잖아.”
김성현의 말에 윤진희가 슥 하고 나섰다.
“아! 여자끼리 모처럼 오붓한 대화 하고 싶었는데! 백현 씨가 망치네요.”
“망칠 것까지야. 백현 씨한테 그런 말 하지 마. 오늘 엄청 노력했잖아. 마지막엔 윤현주 씨도 결국 데려왔던데 뭐.”
“실속은 없었죠. 좀 더 일찍 데려왔어야 했어요. 연주 언니랑 저랑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아세요?”
윤진희의 말에 고연주가 끼어들었다.
“얘는? 현주 씨 안 와서 오히려 더 잘 됐잖아.”
그때 핸드폰에 띵동 하고 알람이 울렸다.
“실장님! 또 메일 왔어요.”
“뭐? 이번에는 어디야?”
“프랑스의 샬롯이라는 브랜드인데요. 패션 업체 중에서는 5위에요. 나름 건실한 업체고, 유럽에서 20년간 나름 상위권 계속 유지하는 업체거든요. 거기서 우리 업체랑 미팅날짜 잡고 싶대요.”
“그래? 샬롯이?!”
“네. 우리 기분도 좋은데 또 한잔 할까요?”
“응! 그래야지. 마시자!”
“넵!”
세 명의 여성은 즐거워했다.
“여기 너무 좋다. 진짜 좋아요.”
“나도 좋아. 너무 편해. 아무도 집적거리지 않으니까.”
“그것도 그렇고, 남자들도 다 잘생겼어.”
“맞아! 실장님은 이런 장소도 아시고, 정말 부러워요. 다 가지셔서.”
“연주 씨가 보기엔 내가 부러워? 다 가진 것 같아?”
“네! 너무너무 부럽죠.”
“연주 씨.”
“네?”
“세상은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실장님 노력하시는 거 우린 다 알고, 그 노력 때문에 성공하는 것도 다 아는데, 실장님 안 부러워하면 그게 사람인가요?”
서로 칭찬하는 분위기가 좋다.
그때 김성현이 주제를 돌렸다.
“나는 연주 씨가 부러워. 진희 씨도 부럽고. 다들 귀엽고 예쁜데 왜 남자친구 안 만나?”
그러자 윤진희가 물었다.
“후후, 실장님! 혹시 백현 씨 여자친구 있어요?”
“백현 씨?”
“네! 사실 백현 씨가 잘 생겼잖아요.”
직원들의 말에 김성현이 아차 싶었다.
‘백현 씨는 남자 좋아하는데… 말할 수도 없고 어떻게 하지?’
그래서 슬쩍 돌려서 말했다.
“백현 씨는 진희 씨를 좋아하진 않을 걸?”
“어? 왜요?! 왜! 실장님이 보기에 제가 그렇게 매력이 없어요?”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아~ 모르겠다. 말 안 할래.”
이런 주제는 아예 말을 꺼내지 않는 게 좋다.
아웃팅을 하면 안 되니까.
백현 씨 스스로 밝히기 전까지는 타인의 입에서 나오면 안 되니까.
그런데 얘네들이 오해를 한다.
“어? 실장님, 백현 씨 좋아한다. 맞죠? 네? 그래서 일부러 운전도 시키고 매일 같이 다니고 그런 거죠?”
“아니거든?! 얘네들 오늘 왜 이래?”
김성현이 투정을 부리자, 고연주와 윤진희가 방긋 웃었다.
“실장님, 취하니까 귀여워요.”
“됐어! 백현 씨 오면 이 자리 끝이니까, 시킬 거 있으면 빨리 시켜. 법카는 나 있을 때까지만이야.”
“알았어요! 에휴~ 실장님도 참! 백현 씨랑 단 둘이 데이트 하시려는 거죠?”
“백현 씨랑 나는 아니라니까! 진짜 아니야. 절대 이루어질 수가 없는 사이야. 알겠니?”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가 어디 있어요?”
“아~ 몰라. 너희가 관심 있으면 직접 대쉬하면 되잖아. 왜 내 눈치를 봐?”
김성현의 말에 고연주와 윤진희의 표정이 밝아졌다.
“어? 진짜 안 사귀어요? 관심도 없고요?”
“아니라니까.”
“정말 백현 씨한테 대쉬해도 되요?”
“실장님, 그 말 후회하시기 없기에요. 네?”
“그~래. 후회 안 해. 너희도 나중에 백현 씨한테 차이고 나서 울지나 마. 그 남자 뭐가 좋다고 그렇게 난리니?”
“열심히 하잖아요. 그리고 저 안 차여요!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라고 항상 실장님이 말씀하셨잖아요. 안 그래? 진희야.”
“맞아. 그랬었어. 실장님 항상 용규 씨는 자기 하기 나름이라고… 아…앗… 죄송해요.”
“아니야. 괜찮아. 이미 떠난 사람인 걸. 괜찮아. 진희야.”
“아. 네. 조심할게요.”
“실수했으니까 진희! 한잔 쭈-욱 들이켜!”
“넵! 실장님!”
사적인 대화에 몰입하는 일행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깃들었다.
그때 강백현이 도착했다.
“실장님, 차량 준비 완료했습니다.”
“아, 그래요. 진희야, 연주야. 같이 타고 가자. 집까지 태워줄게.”
“그래도 돼요?”
“당연하지!”
그런데 강백현이 막았다.
“그건 안 될 것 같습니다.”
“응? 백현 씨 왜 그래? 무슨 일 있어요?”
“회장님이 단단히 화나신 것 같아서요. 빨리 집으로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정말?!”
“네. 얼른 가시죠.”
집으로 가는 길.
김성현이 차량 잭에 충전기를 연결한 후 전원을 켰다.
부재중 통화만 무려 10통화.
다 회장님의 전화다.
김성현이 조심스럽게 백현에게 물었다.
“집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요?”
그러자 백현은 고개를 저으며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요. 실장님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죠.”
“나요? 나?”
“네. 일약 스타가 되셨으니까요. 지금 해시태그에 메리야트 그룹하고 실장님 이름이 검색어 1위, 2위입니다.”
* * *
같은 시각.
고기웅은 직원들로부터 업계소식을 보고 받고 있었다.
“블량샤가 이번 패션쇼 대박 쳤습니다.”
“뭐? 대박?”
“네. 김성현 실장이 모델로 직접 나섰나봅니다. 일단 몸매도 죽이고요. 직접 디자인한 옷을 입고 나와서 신뢰도를 높인 게 주효했습니다. 인터넷 반응도 장난이 아닙니다.”
“장난이 아니라니?”
“아무래도 모델은 좀 식상한 감이 있었는데 일반인이 무대에 오르니 신선했다는 반응이 많고요. 일단 김성현 실장이 본부장님 같은 재벌 3세지 않습니까?”
“계속 말해 봐.”
“그런데도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사업을 위해 직접 몸으로 뛰어드는 모습이 반응이 좋습니다. 일반인들의 워너비 대상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허겁지겁 달려온다.
“본부장님?”
“왜?! 또 무슨 일 있어?”
“아니… 윤현주랑 이번에 CF 7억짜리 1년 계약한 것 있지 않습니까?”
“어. 있지. 이번에 같이 한다고 하는 조건으로 했어. 왜?”
“윤현주 브랜드 가치가 많이 떨어졌는데요. 업계 탑 이미지가 이번 사건으로 많이 죽었습니다. 왜 무대에 오르지 않았는가에 대해 증권가 찌라시가 돌고 있나 봅니다. 그 찌라시 내용은… 직접 확인해보십시오.”
찌라시 내용이 가관이었다.
[톱모델 Y양이 S그룹 재벌 3세 K씨와 염문을 뿌리고 있다고 한다. S그룹 재벌 3세는 윤락과 환락에 빠져 살고 있는데, 최근에는 톱모델 Y양과 비밀교제를 이어가고 있다고. 비밀교제를 조건으로 CF계약을 따낸 Y양은… 중략]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어?!”
“원래 증권사 찌라시란 게, 헛소문들이 많아서….”
“아무리 봐도 나랑 윤현주를 저격했잖아. 이거 누가 뿌린 건지 조사해! 어? 당장 조사해!”
“그것보다 아직 CF 방송 안 나갔으니까 모델을 갈아타셔야 될 것 같습니다. 지금 이대로는….”
“장난해?! 너희들은 그것 밖에 안 돼? 난 걔하고 아무 관계도 아니야. 어?! 너희도 지금 나 의심해? 그런 거야?”
“아닙니다.”
“근데? 갈아타? 뭘 갈아타? 여자를 갈아타? 말을 그따구로 밖에 못하지? 너희 뇌가 비었지? 울서대, 세연대 나온 녀석들이 생각이 그렇게 없어? 어?!”
그때 고기웅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헌데 발신자를 확인한 고기웅에게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 기웅아, 바쁘냐?
“아닙니다. 아버지.”
- 집으로 들어와. 해줄 말이 많으니까.
“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