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42화
박창현과 박지훈은 거래를 했다.
김성현에 대한 정보 한 건당 10만원.
‘괜찮아. 기업 기밀도 아니잖아.’
수행비서로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비밀엄수.
그걸 지키지 못한 시점에서 비서로서는 실격이다.
하지만 박창현은 애써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빚을 갚으려면 이 방법 밖에 없었어. 그리고 나중에 아가씨랑 본부장님이 잘 되면 오히려 나한테 고마워할 거 아니야? 그렇잖아. 맞지?’
어떻게 보면 천운이라 할 만한 기회였다.
“백현아.”
- 네. 박 비서님.
“언제 들어와?”
- 음… 지금 실장님이랑 같이 저녁 먹으러 가는데요.
“저녁? 어디서?”
- 아~ 잘 모르겠는데요.
“죽을래? 왜 몰라?”
- 아니, 진짜 처음 와보는 곳이라서요. 잠시만요. 실장님? 가는 곳이 어디에요?
진짜 모르는 듯 강백현이 김성현에게 물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답.
- 성수동 『갈라파고스』라고 하네요.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무슨 일 있긴, 그냥 물어본 거지. 언제 들어오나 해서.”
- 금방 들어갑니다. 아~ 박 비서님, 어제 밤에 도련님 수행하시던 동안 옷에 냄새가 많이 묻었더라고요. 그래서 코인 세탁기에서 한 번 돌렸어요. 옷장 안에 넣어뒀으니까 확인 부탁드려요.”
“어? 그래?”
- 네. 그럼 저 끊습니다.
“어. 알았어.”
강백현은 생각보다 꼼꼼하고 일 잘하는 후배였다.
하지만 박창현은 녀석에게 마음을 줄 생각은 없었다. 때문에 곧바로 자신의 사촌에게 연락했다.
- 네. 창현이형.
“성수동, 갈라파고스.”
- 아, 그쪽으로 가신대요?
“응. 지금 연락 받았어.”
- 네. 도련님님께 보고 드릴게요.
“알았다. 잘 부탁해.”
-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요즘 형 때문에 살 맛 납니다. 진작에 이러지 그러셨어요!
“됐고. 돈이나 송금해. 들어가라.”
- 넵!
박지훈은 사촌 박창현의 전화를 받고 씩 웃었다.
고기웅 앞에서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싸대기가 날아온다.
요즘은 그런 게 없다. 이유는? 김성현의 위치를 제대로 알아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 윈윈이다.
박지훈은 안 맞아서 좋고, 박창현은 돈 벌어서 좋고.
한편, 호텔에 있던 박창현은 옷장을 열었다.
역시 빨래바구니는 텅 비워졌고, 그 안의 빨랫감은 말끔히 다림질까지 되어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얘 뭐지? 자기가 알아서 내 옷을 빨고 다려도 놨다고?’
그런데 문제는, 속옷도 잘 개어져 있다.
‘잠깐만, 왜 속옷까지 빨았어? 이 새끼! 설마?!’
몹쓸 상상.
‘아니겠지? 설마! 내 거 냄새 맡은 건 아니겠지?!’
* * *
같은 시각.
김성현이 참석한 성수동의 모임 자리.
김성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근조근했다. 그만큼 중요한 상대 앞이었다.
“현주 씨, 저희하고 함께하시기로 결정해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아니에요. 이번에 김실장님 디자인이 너무 잘 나와서 오히려 제가 함께 하자고 요청한 거잖아요.”
“감사합니다. 사실 저희가 그렇게 좋은 업체는 아니에요.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여서, 탑모델이신 현주 씨가 함께 해주신다는 게 얼마나 영광인지 몰라요.”
“아니에요. 이번에 모피를 중심으로 한 디자인이 굉장히 예뻐 보였어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디자인이어서 저도 깜짝 놀랐어요! 어머! 이건 되겠다. 그 생각이 들어서 우리 실장님한테 연락을 드렸죠.”
모델 윤현주의 말에 김성현이 자신의 옷에 대해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아, 드려야 할 말씀이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사실 그 옷들이 전부 인조 모피에요.”
“아… 그랬구나.”
“아무래도 인조 모피다 보니까, 천연 모피보다는 다양한 디자인을 낼 수 있고, 합리적인 가격으로 책정할 수 있어서 채택했어요. 그런데 그런 부분을 혹시 마음에 안 들어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미리 말씀드리는 거예요. 저희 브랜드는 고급스러운 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엄청 비싼 명품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에요. 혹시 현주 씨 이름값이 있는데, 거기에 누가 되진 않을까 걱정되어서요.”
그걸 보며 강백현은 느꼈다.
‘진짜 재벌 같지가 않아. 오히려 공무원보다 더 조심스럽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말해주니까, 절로 마음이 움직여.’
선배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김성현은 확실히 대단한 수완을 가지고 있었다.
노력도 하고, 능력도 있는 완벽한 커리어우먼이다.
남들이 보기엔 세상 부러울 게 없어보였다.
‘대단해. 정말 대단해.’
그리고 윤현주도 백현이 느끼는 것과 같은 심정이었다.
“아니에요. 실장님. 그 말 들으니까 더 안심인걸요?”
“네?”
“저 사실 동물애호가에요. 하지만 모델 일 하면서 모피를 안 입을 순 없잖아요. 지금도 저희들의 의상에 대한 욕망 때문에 수많은 동물들이 가죽 하나 벗겨지고 죽어나가는 게 현실이고요. 그래서 그런지 실장님의 그 말이 더욱 와닿는 것 같아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이걸로 좋은 인연 이어갔으면 좋겠네요. 실장님, 저희 얼른 먹어요. 음식 다 식겠어요.”
“그럴까요? 백현 씨!”
“네. 실장님.”
“가서 음료수하고 냅킨 좀 가져다 달라고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 * *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불청객이 들어왔다. 고기웅이었다.
강백현과 김성현, 둘 다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말을 거는 고기웅.
“아~ 우리 김 실장님이 여기 계셨네요? 어라? 현주 씨 아니에요?”
“아, 본부장님. 오랜만이에요.”
“저를 알아보세요?”
“당연하죠. 성한 패션! 제가 무대만 무려 20번이나 올라갔잖아요.”
“맞아요. 현주 씨는 경력 10년이나 되시니까 저보다 무려 3년이나 선배시죠.”
“후후, 에이! 너무 겸손하시다. 그런데 본부장님! 여기는 웬일이세요?”
“아~ 우리 비서랑 같이 파스타 먹으러 왔어요.”
“어머! 남자 둘이서요?”“네! 그런데 여기 제가 아는 분들이 계셔서 제가 비서에게 대기하라고 했네요. 괜찮으면 제가 합류해도 될까요?”
뻔뻔한 자식!
강백현이 눈을 치켜 올리며 고기웅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다행히 윤현주가 커트를 했다.
“아~ 이걸 어쩌죠? 본부장님, 저희 지금 비즈니스 중이라서, 그건 좀 곤란할 것 같아요. 나중에 같이 식사 한 번 해요.”
“네. 그래요. 그럼 맛있게 드시고요. 아~ 성현 씨도 맛있게 드세요.”
“네.”
고기웅이 자리를 떠나 빈 테이블에 앉았다.
그런데 계속해서 이곳을 쳐다보고 있다.
강백현과 김성현은 그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표정변화를 느낀 윤현주가 위화감에 물었다.
“아…뭐 불편하신 것 있으세요?”
“아니요. 괜찮아요. 현주 씨, 정말 감사해요. 저희 패션쇼 열심히 준비하겠습니다.”
“다음 주 일요일이죠?”
“네. 맞아요.”
“음~ 이거 부담 돼서 조금만 먹어야 되겠는데요?
“아니에요. 당연히 저희가 사는 거니까 마음껏 드세요. 괜찮아요.”
“그것 때문이 아니라 무대에서 잘 보이려면 체중 조절해야죠. 그래도 먹는 것 앞에서 치사하게 굴 순 없으니까 한 입만 먹어볼까요?”
“네!”
파스타 한 입.
포크에 돌돌 말아 엄청나게 두텁게 만드는 윤현주.
한 입이라지만 엄청난 양.
윤현주가 그걸 맛있게 먹으며 씩 웃었다.
“자기 전에 운동 좀만 더 하죠. 뭐.”
“네! 그래요. 현주 씨.”
모델 경력 10년차인 윤현주. 그녀는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여성이었다.
* * *
런칭 시기가 다가오자 모든 인원의 걸음이 분주해졌다.
각종 바이어와 정부인사, 연예인들에게 초청장을 보내고, 각각의 급과 서열에 따라 앉는 위치를 조정, 분배해야 했다.
이 업무는 마르코와 강백현에게 주어졌다.
“자기야. 부이사관이 높은 거야? 서기관이 높은 거야?”
“부이사관이 높은 거죠. 3급일걸요?”
“아… 그렇구나. 자기, 그런 거 잘 아네. 공사판에서 일했다며.”
“그런 건 기본이죠. 공무원 급수 모를까 봐요?”
“다들 모르는데? 우리 예쁜 자기들, 공무원 형아들 급수 아는 사람 있어?”
마르코의 말에 고연주가 말했다.
“마르코 씨는 스마트폰으로 찾아보지. 그런 걸 뭐하러 물어요? 사람이 뭐든 다 알아야 돼요?”
“아니! 뭐 그것 가지고 삐졌어?! 자기도 진짜 속 좁다. 좁아!”
마르코가 투정부리자, 고연주가 씩씩대며 투덜거렸다.
“아~ 마르코 진짜 요즘 이상해. 빨리 애인이나 사귀어요. 주변에 괜찮은 남자 많다면서요.”
“내가 주변에 괜찮은 남자가 어디 있어? 있으면 너희가 나 소개시켜줘라.”
“마르코한테는 성민 씨 있잖아요.”
“성민이 걔는 안 돼! 딴 눈 너무 팔아. 그래서 우리 헤어졌잖아.”
대현 백화점, CMD 조성민.
강백현이 익숙한 이름에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설마 성민 씨가 대현 백화점 그 성민이에요?”
그러자 마르코가 강백현의 등을 철썩 때리면서 놀랐다.
“어머! 얘는 이제야 안 거야?”
“으아아아악. 마르코 씨! 갑자기 왜 때려요?”
“좋아서 때리지! 백현씨 딱 내 스타일인뎅!”
마르코의 입에서 나오는 다분히 여성적인 말투.
농담 반, 진담 반. 어떻게 받아쳐야 할지 난감한 백현이 웃으며 말했다.
“전 마르코 씨 제 스타일 아니거든요? 얼른 일하시죠!”
확실히 공무원 사회하고는 많이 다르다.
획일적이고 따분한 소리만 하는 공직사회와 달리 패션 업계는 진한 농담도, 가벼운 농담도 꺼리지 않고 친하게 지냈다.
그래서 그런지 재밌는 부분도 있지만 짜증나는 부분도 많았다.
같은 남자인 마르코가 강백현을 시종 부리듯 시키기도 한다.
“백현 씨, 힘 좀 써 봐.”
“마르코 씨도 같은 남자잖아요.”
“자기가 체격 더 좋잖아.”
“어휴~ 알겠어요. 제가 들게요.”
제단용 천을 옮기고, 마네킹에 입혀 품평을 하고.
자체 품평 결과 무대에 올릴 옷과 내릴 옷을 결정하면, 그 옷을 입힐 모델을 결정해서 그 사이즈에 맞춰 재단을 시작한다.
사람 수가 사람 수다 보니 많이 바빴다.
사실 강백현은 허드렛일 밖에 할 게 없었다.
김성현이 이끄는 팀은 굉장히 다양한 일을 했다.
의상의 최초 디자인 과정부터 생산까지 모든 일을 수작업으로 다 했다.
그야말로 장인 정신.
그래서 결과가 좋은 걸지도 몰랐다.
삼일 후.
패션쇼 이틀 전, 리허설이 열렸다.
에이전시에서 뽑은 모델은 한명도 펑크 내지 않고 리허설 현장을 찾아주었다.
조명도 모두 완벽했고, 무대 디자인도 각진 삼각형과 사각형 무늬가 모던하게 멋진 조화를 자아내고 있었다. 분명 좋은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 패션쇼, 분위기가 괜찮을 것 같은데요? 현주 씨가 모델로 서주시니, 다른 기업에서도 참석할 수 있겠냐고 먼저 연락이 많이 왔어요.”
“역시 실장님이 수완이 좋다니까.”
옆에는 당사자가 있다. 윤현주는 바쁜 와중에도 리허설 현장을 찾아 무대를 점검하고, 같은 무대에 설 후배들에게 격려의 말을 건넸다.
“너희들! 이 무대 제대로 해! 내가 볼 때, 우리 김 실장님이 이번 브랜드로 런칭으로 대박날 수도 있어. 그러면 너희들도 실장님하고 같이 유명해지는 거야. 하나를 해도 제대로 하자고! 알겠니?”
『네!』
윤현주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지원해주니, 김성현의 입가에는 미소가 절로 걸릴 수밖에.
“고마워요. 현주 씨, 정말 고마워요.”
“아니에요.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 해주세요. 아~ 그리고 제 옷에 달린 펄이 조금 날리더라고요. 박음질 좀 더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후배 애들한테 옷 안 맞는 부분 다 적어두라고 했어요. 저희도 최선을 다 할 테니까, 우리 실장님도 신경 써주세요.”
“네. 그럼요. 너무너무 고마워요.”
“아니에요. 김 실장님도 돈 많이 썼던데요? 보니까 홍보 장난 아니더라고요.”
“다 현주 씨가 도와주신 덕분이죠.”
“고마워요! 실장님! 파이팅!”
“네. 현주 씨도 파이팅!”
* * *
대망의 패션소 당일.
무대를 앞두고, 최종 리허설.
이제 한 시간 뒤, 패션쇼가 시작된다.
그런데 윤현주가 보이질 않는다.
“아니, 현주 씨 어떻게 된 거야? 1시간 남았어. 1시간!”
“무슨 일이 있겠죠.”
“무슨 일이 있긴 무슨 일이 있어? 어?! 연락이 안 되잖아.”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았다.
이미 메인 모델 윤현주가 참석한다고 홍보를 마쳤다.
온갖 셀럽들이 윤현주를 보기 위해 찾아올 게 분명했다.
그런데 당사자가 연락이 되질 않는다.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된 거야?”
그때, 최용규가 상황을 파악하고 도착해서 백현에게 알렸다.
[백현아.]
“어?”
[윤현주, 설득 당했어.]
“뭘 설득당해요?”
[고기웅 본부장이 그랬대. 이번 패션쇼 나가게 되면, 앞으로 성한 그룹에서는 패션쇼는 물론, CF도 주지 않을 거라고. 이거 참석하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