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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배기 깨러 왔습니다-41화 (41/139)
  • 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41화

    다음 날 아침.

    고기웅은 호텔 방 창가에 앉아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따뜻한 햇살 아래, 흰 가운만 걸친 사내는 만족스런 얼굴로 미래의 자신과 배우자의 모습을 상상했다.

    『서방님. 서방님! 일어나세요! 아침 드셔야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이렇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일하면 몸이 탈나요. 서방님만 바라보고 일하는 성한 그룹 사람들이 10만이 넘는데, 잠을 줄이면 걱정된다고욧!』

    애교로 무장한 김성현의 모습이 보고 싶다.

    비록 지금은 쌀쌀맞지만, 하룻밤만 자면… 그렇게 되면…

    그때, 고기웅의 뒤편에서 여성의 손이 나타나 자연스레 목을 감쌌다.

    “오빠, 언제부터 일어나 있었어?”

    “일어났니?”

    “응. 오빠 최고! 진짜 좋았어.”

    “그래? 다행이다. 나도 좋았어. 근데 현희야.”

    고기웅의 말에 여자의 표정이 순식간에 급변했다.

    “오빠, 내 이름 까먹은 거야? 나 유미잖아.”

    “아, 그랬나? 유미야. 테이블 위에 봉투 올려놨어. 무슨 의미인지 알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서로 질척거리지 말자고. 하룻밤 잤다고 우리가 이어질 거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

    “오빠! 기웅 오빠! 이러지 마. 오빠 이런 사람이었어?!”

    고기웅은 정유미를 매정하게 뿌리쳤다.

    쉬운 여자는 고기웅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쉽게 정복한 대상은 가치가 없으니까.

    앞에 있는 이름 모를 여자는 세상에 있는 흔하디흔한 여자였다.

    하지만 김성현은 달랐다.

    원해도 원하지 못하는 여자.

    기회가 있어도 얻지 못한 여자.

    자신의 손아귀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빠져나간 여자는 없었는데, 유일한 예외가 생겼다. 그게 바로 김성현.

    ‘이게 내 집착인가? 이제 멀지 않았어.’

    고기웅이 미소를 지으며 가운을 벗고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경고하는데, 허튼 수작 부릴 생각은 하지도 마. 하루 아침에 실종되고 싶지 않으면! 알았어?”

    “오빠! 난 오빠 진짜 좋아했는데….”

    “날 좋아한 게 아니라 돈을 좋아했겠지. 배경을 좋아했겠고. 누가 너처럼 하루 만에 남자랑 잠을 자냐?”

    그의 말에 정유미가 눈물을 흘리며 봉투를 챙겼다.

    봉투 안에 든 금액은 천만원.

    나쁘지 않은 금액이다.

    “나쁜 놈! 나쁜 자식! 너 인생 그 따위로 살지 마. 알았어?!”

    “그래. 할 말 끝났니? 끝났으면 얼른 가라. 연락하지 말고!”

    그 말을 끝으로 정유미가 떠났다.

    고기웅은 샤워 후 테이블 위를 가장 먼저 바라보았다.

    천만원이 든 봉투가 사라졌다.

    그걸 보며 고기웅의 얼굴에 미소가 깃들었다.

    ‘그래. 넌 천만원짜리일 뿐이야. 어딜 가나 딱 거기까지겠지.’

    고기웅이 핸드폰을 열어 자신의 사진첩을 확인했다.

    컴플리트란 제목의 사진첩에 담긴 수많은 목록에 하나가 추가됐다.

    그건 바로 오늘 아침까지 호텔에 함께 있었던 정유미.

    그 의미는 다름 아닌 관계 여부.

    그리고 고기웅은 다른 사진첩을 열었다.

    거기 최상단에 김성현이 자리잡고 있다.

    고기웅이 김성현의 사진폴더 이름을 바꿨다.

    폴더이름 : 공략 166일째.

    다른 여자들은 공략 50일을 넘긴 여성이 없는 가운데, 유독 혼자서 3자리의 숫자를 얻고 있었다.

    고기웅이 스마트폰 속 김성현의 사진을 확대하더니, 키스하고는 중얼거렸다.

    “기다려. 넌 이제 곧 내 거니까.”

    * * *

    강백현은 대현 백화점 판교점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오늘은 김성현도 함께였다.

    강백현이 웃으며 물었다.

    “패션쇼 준비하시느라 바쁘실 텐데, 저 때문에 괜히 시간 빼신 거 아니에요?”

    “걱정 마요. 다 챙길 수 있으니까. 내 일인 이상 허투루 하는 일은 없을테니까요.”

    김성현은 확실히 책임감이 있었다.

    후배직원들에게 전적으로 맡기고 책임까지 미루는 공무원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많이 다르네요.”

    “뭐가요?”

    “아니, 그냥 제가 일했던 조직하고는 많이 달라서요.”

    “백수 아니었어요?”

    “백수라고 뭐, 아예 일을 안했나요? 이런 일 저런 일 다 했죠.”

    “풋, 웃겨. 어디 동네 아르바이트 하시는 거랑 저랑 비교하지 말아주실래요? 우리 그룹, 나름 대기업이거든요?”

    “네. 그렇죠. 확실히… 대기업 맞죠. 시한부지만….”

    강백현의 말에 김성현이 말했다.

    “그런 면이 제가 백현 씨를 고용하게 된 이유인지도 모르겠어요.”

    “네?”

    “보통은 제 앞에서 좋은 말만 하거든요. 그게 절 망치는 길이란 걸 알면서도 말이죠. 물론 지금의 팀원은 아니에요. 저한테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죠.”

    김성현의 말에 최용규가 고개를 저었다.

    [요즘 성현이 왜 저러냐? 왜 이렇게 진지해?]

    강백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성현에겐 나름의 고충이 있을 터.

    그건 그녀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부분이다.

    편집샵을 가보니 거의 초상집 분위기였다.

    그 이유는 바로 매출 때문.

    그들의 전략이었던 고급 브랜드로서의 도약, 그건 어느새 물거품이 되어버렸고, 급작스럽게 만든 현수막에는 ‘런칭 기념 50% 할인’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김성현이 편집샵을 둘러본 후, 강백현을 향해 말했다.

    “역시 브랜드 런칭은 쉽지 않네요.”

    “뭐 걸리는 거 있으세요?”

    “최유나 디자이너, 여성복 업계에서 나름 유명한 분이세요. 성한 그룹의 영패션 브랜드를 런칭한다고 해서 성공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처참해요.”

    부제 : 『음식을 옷에 디자인하다.』

    2015년, 최유나 디자이너의 걸작이 다시 탄생하다. (중략)

    벽에 걸린 포스터를 보고 이 푸드 패션을 만든 사람이 최유나라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강백현이 고개를 돌려 김성현에게 물었다.

    “저 실장님?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말씀하세요.”

    “여성복은 런칭 하기 전에 주로 어떤 점을 보나요?”

    “일단은 유럽? 이탈리아 쪽에서 최신 유행하는 것들을 많이 찾아봐요. 유명 디자이너들이 여는 패션쇼를 보고, 그걸 입어주는 셀럽들의 SNS 활동, 그리고 광고, 잡지들이 많이 좌지우지 하는 편이죠.”

    “국내는요?”

    “국내도 마찬가지에요. 패션쇼에 나왔던 의상을 연예인들이 협찬 받아서 입는 경우가 많아요. 드라마, 시상식, 영화 등을 통해 간접홍보를 하기도 하고요. 그걸 기반으로 영업해요. 그 방식은 몇 십년째 똑같아요. 저희도 그렇게 하고 있고요.”

    그때, 매장 앞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성한 그룹의 기획본부장 고기웅이었다.

    “성현 씨 왔어요?”

    고기웅의 인사에 김성현이 답례했다.

    “네. 오랜만입니다.”

    “이번 신규 브랜드 건으로 대현 쪽에서 편집샵 여신다는 거, 강 비서 통해서 전해 들었습니다.”

    “네. 그렇게 됐죠. 그런데 기웅 씨는 괜찮으세요? 브랜드 정리, 너무 빠르신 거 아닌가요?”

    “아닙니다. 저희는 10개 런칭해서 1개만 성공하면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저희 성한 그룹의 경영전략이죠. 패션이란 게 그렇잖아요? 실패한 100개 브랜드보다 성공한 브랜드 하나가 수백, 수천 명의 직원들을 먹여 살리는 거. 저희는 그런 브랜드를 원하고 있어요. 미련은 없습니다.”

    “그렇군요.”

    김성현은 고기웅의 생각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업마다 경영전략은 다를 수밖에 없다.

    김성현이 있는 메리야트 그룹은 성한 그룹과 달랐다.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손을 뻗어 하나 얻어 걸리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철저히 준비해서 완벽하게 성공하길 바랐다.

    사실 고기웅의 전략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패션엔 정답이 없으니까.

    그녀가 이끄는 팀의 성과는 성한 그룹에 비하면 너무나 미미했으니까.

    대기업이라고 같은 대기업이 아니었다.

    규모 면에서 성한 그룹과 메리야트 그룹의 격차는 말로 언급하기도 민망할 지경이었으니까.

    고기웅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성현 씨, 1개월 뒤 런칭 때문에 인력 필요하다고 도움 요청하신 것, 그거 답변 들으러 오신 건가요?”

    도움을 요청?

    강백현이 당황했다.

    고기웅이 왜 이렇게 당당하게 나오지?

    확실히 그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어제 통화했을 때는 자신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또 왜?

    정답은 술이었다.

    술이 취했을 때와 아닐 때.

    그는 술이 취하면 망가진다.

    하지만 멀쩡한 상태에서는 누구보다 강인하고 냉철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고기웅이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으며 말했다.

    “성현 씨, 저희 사업부 인력을 인수받는 거 말고 다른 제안을 드릴게요.”

    “제안이요?”

    “네. 제 밑으로 와서 우리 성한 패션의 노하우를 배워보는 건 어때요? 저희쪽 비즈니스 파트너, 바이어, 디자이너들과 협력 업체까지. 성현 씨가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드리죠.”

    당했다.

    백현은 거부하기 힘든 제안을 하는 고기웅의 계략을 순식간에 눈치 채고 말았다.

    확실히 저런 조건이라면 누구나 솔깃해할 것이다.

    하지만 김성현은 그의 제안에 바로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는 맡은 팀이 있어요.”

    “압니다. 하지만 그리 대단한 팀도 아니잖아요? 성현 씨가 여성복 브랜드 쪽으로 이제 막 입문했다면, 저희는 이미 20년 이상 관련 노하우를 축척해왔어요. 그건 제 실력이 아니라, 이쪽이 가진 집단 지성의 힘이죠. 성현 씨한테는 그런 게 없잖아요? 내 밑으로 들어오면, 우리쪽 네트워크를 이용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해줄게요. 어때요?”

    강백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완벽히 당했어. 역으로 제안을 해?’

    과연 끌릴 수밖에 없는 제안이다.

    하지만 그룹이 다른데, 그렇게 해서 성공해도 메리야트 그룹의 성공이 아닌 성한 그룹의 성공이다.

    10억을 벌어도, 100억을 벌어도, 메리야트 그룹이 버는 돈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김성현은 고작 월급쟁이를 하러 성한그룹으로 갈 생각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참인데, 고기웅은 거기까지 간파하고 있었다.

    “순이익의 50%를 드리죠. 성현 씨가 손해 보는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리스크는 온전히 우리 성한 그룹 쪽에서 감당하겠습니다. 이 정도면 굉장히 파격적인 조건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생각해보시고 연락주시죠. 아~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1개월 뒤에도, 3개월 뒤에도 이 자리는 저희 성한 그룹이 사용할 예정입니다. 성현 씨는 저희와 함께 하지 않는 한 대현 백화점의 편집샵을 이용할 수 없을 겁니다. 이미 저희 쪽에서 내년 3월까지예약을 마쳐두었으니까요.”

    고기웅의 말에 강백현이 따졌다.

    “본부장님!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이건 협박 아닙니까? 내년 3월까지라니요! 이 자리는 3개월 뒤에 저희가 쓰기로 되어 있습니다. 이게 갑자기 무슨 협박입니까!”

    강백현의 말에 고기웅이 비웃으며 말했다.

    “협박? 자네는 너무 몰라. 이런 게 비즈니스야. 그건 그렇고 강 비서! 협박은 자네가 먼저 하지 않았나? 거의 공갈 수준으로 우리 노하우를 공짜로 달라고 했잖아. 안 그래?”

    고기웅의 말에 김성현이 대답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하지만 기웅 씨, 이런 식으로 하시면 서로 마음만 불편해질 뿐이에요.”

    “네. 불편하죠. 성현 씨 속셈은 이미 압니다. 일부러 나 피하는 거 다 티 나요. 하지만 쉽지는 않을 겁니다. 왜냐고요? 다른 길은 내가 철저하게 막을 거거든요.”

    김성현이 쓴웃음을 지으며 백현을 돌아보았다.

    “가죠.”

    “네.”

    “더 이상 들을 것도 없어요. 돌아가요.”

    “네. 알겠습니다.”

    강백현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괜히 나섰다가 도리어 편집샵 오픈 기회마저 놓쳐버린 것이다.

    차 안에서 강백현이 김성현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상황이 더 악화된 것 같습니다.”

    “아니에요. 받은 것도 없고 준 것도 없잖아요. 저 사람 도움 받으면서 브랜드 성공시키느니, 차라리 망하는 게 나아요.”

    “그래도 망하는 것보다는….”

    “아~ 진짜! 농담 할 때에요?”

    “아닙니다!”

    김성현이 주먹을 꽉 쥐었다.

    지독히도 분한 모양이었다.

    헌데 고기웅은 김성현이 자신과의 결혼을 피하고자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고민하는 백현의 귓가에 김성현의 목소리가 울렸다.

    “강백현 씨!”

    “네.”

    “앞으로 빡세게 일할 준비 하세요. 오늘 일 만회하려면 하루 24시간으로 부족할 거예요. 알겠어요?”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좋아요. 일단은 에이전시랑 만나서 모델 명단부터 확보하고, 그 친구들 신체사이즈부터 재고 와요. 영패션 브랜드 런칭은 일단 잠정 연기합니다.”

    “연기군요.”

    “네. 일단은 이번 패션쇼로 승부를 보겠어요.”

    “알겠습니다.”

    강백현은 김성현의 굳은 의지를 느끼며 결심했다.

    최선을 다하겠다고.

    꼭 성공시켜 주겠다고.

    그래서 고기웅에게 끌려다니지 않도록 도와주겠다고.

    * * *

    같은 시각.

    고기웅이 한 남자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 네. 본부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박 비서, 정보 준 거 좋았어요. 나중에 성현 씨랑 잘 되면, 박 비서를 우리 성한 그룹 기획본부실에 넣어줄 테니 힘내도록 해요. 아~ 그리고 강 비서랑은 친한 관계 계속해서 유지하도록.”

    - 강 비서랑요?

    “네. 그렇게 해서 내부 정보를 최대한 많이 빼내도록 하세요. 김성현에 대한 정보는 어떠한 것이라도 좋습니다. 사례는 지금 금액이면 만족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고기웅이 자신의 직속 비서를 불렀다.

    “박 비서?”

    “네. 도련님.”

    박지훈 비서가 고개를 숙이며 답하자 고기웅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네 사촌, 생각보다 쉽게 넘어 오는데?”

    “사람은 돈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 그래서 내가 너를 좋아해. 돈 밖에 모르니까. 나도 너처럼 그렇게 좋아하는 것 좀 있었으면 좋겠다.”

    고기웅의 말에 박지훈이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감추며 생각했다.

    ‘도련님은 그것 밖에 모르지 않습니까? 도련님의 성욕만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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