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37화
박창현이 애완견 목욕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애완견 전용 가방을 챙기고, 뽀삐가 샤워 후 갈아입을 옷을 준비한다.
그런데 박창현의 표정이 영 좋지가 않았다.
“야!”
“네?”
“너 지금 나 비웃지?”
“아니요. 그런 적 없는데요.”
“이거 다 너한테 인수인계할 거야. 아가씨 출근 안 하는 날은 네가 한다. 알았냐?”
“네. 죄송하네요. 오늘은 성현 아가씨가 출근하는 날이라서.”
그때 밖으로 나오는 김성현.
검정 블라우스에 단정한 차림.
“많이 기다렸어요?”
“네. 실장님! 타시죠.”
“어? 백현 씨 오늘 기분 좀 좋아 보이네요? 무슨 일 있었어요?”
“그런 건 아니고요. 애완견이 참 귀여운 것 같네요. 그렇죠? 우리 박 비서님.”
김성현이 애완견 가방을 든 박창현을 불렀다.
“박 비서님.”
“네. 아가씨.”
“뽀삐, 잘 부탁드려요. 항상 미안하네요. 직접 해야 하는데 바빠서요.”
“아닙니다. 제 일인데요.”
“네. 그럼 다녀올게요.”
“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강백현과 김성현이 회사로 출근했다.
여성복의 트렌드가 변화한 탓일까. 김성현은 엄청 바쁘고 강백현은 상대적으로 한가하다.
“실장님?”
“네. 말씀하세요.”
“오늘 시키실 일 없으신가요?”
“특별히는 없어요. 뭐 할 일 있으세요?”
“아니요. 특별히는 없습니다.”
그러자 마르코가 옆에서 말했다.
“미스터 강?”
“네?”
“자기는 오늘 시간 남으면, 어제 매장 다시 한 번 들러봐.”
그러자 김성현이 마르코에게 물었다.
“마르코는 오늘 바쁘죠?”
“응. 자기야~ 오늘 모델들 만나보는 날이잖아. 패션쇼 런칭 전에 에이전시에서 모델 리스트 보고 우리랑 같이 일해 줄 마스크들 얼른 뽑아야지. 그 친구들 몸에 맞게 옷도 디자인 해봐야 하고.”
마르코의 말에 김성현이 모델 리스트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고민에 빠진 김성현 실장.
에이전시에 가서 모델을 섭외하려면 누군가 직접 움직여야 한다.
“백현 씨, 혼자 가도 되겠어요? 아니면 오늘은 좀 쉴래요? 나도 오늘 직원들이랑 업체 미팅이 잡혔는데, 이쪽이 좀 폐쇄적이라서 백현 씨를 데리고 가기는 좀 뭐해서요.”
그러자 마르코가 씩 웃으며 백현에게 물었다.
“나는 품평회 가는 거야. 모델들 속옷 입고 나오는데, 그거 보려면 자기도 같이 가고!”
“아… 아닙니다. 마르코 씨가 말씀하신 대로 판교에 다녀오겠습니다. 오늘 편집샵 런칭일이라서 반응도 궁금하니까요. 다녀와서 보고서 작성하겠습니다.”
그리고 마르코의 당부.
“그래. 그렇게 해. 아~ 자기야! 어제 만난 성민 씨 있잖아.”
“아, MD분이요?”
“응. 성민이한테 내가 자기 잘 봐주라고 전화해둘 테니까, 가서 많이 배워와. 처음 이 일 시작할 때 많은 도움이 될 거야.”
“네.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어제 갔던 매장 가서 사진 찍고, 분석하고, 많이 배우고 오겠습니다.”
그러자 김성현 또한 미소를 지었다.
“조심해서 다녀와요.”
“알겠습니다.”
“아~ 점심은 먹고 나서 영수증 챙겨오고.”
“네. 감사합니다.”
강백현이 홀로 사무실을 나가자 마르코가 씩 웃으며 말했다.
“나도 미스터 강 같은 애인 있었으면 좋겠다.”
김성현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혹시 모르죠? 백현 씨하고 마르코 씨하고 잘 될지도! 사무실에 남아 있을 사람 없죠? 마지막에 누가 나올 거예요?”
“제가 보안카드 챙길 게요. 실장님.”
* * *
백화점 개점 시간은 오전 10시.
강백현은 서둘러 판교로 이동했다.
이 시간의 대현 백화점은 생각보다는 한산해 보였다.
“오셨네요?”
“네. 잠시 매장 확인도 하고, 저희도 신규 브랜드 런칭하니까 어떻게 하는지 좀 배워보려고요.”
부푼 기대감으로 고객을 기다리는 편집샵 직원들.
내부 평가에서 괜찮은 성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표정도 환해 보인다.
그런데 생각보다 사람들이 찾질 않는다.
지나가다 가격표를 보고는 아무 말 없이 떠나가는 손님들.
그러고 보니 어제하고 좀 다른 점이 있다.
그래서일까? 직원들이 초조해한다.
강백현은 사진을 찍으며 고객의 동선을 살폈다.
고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곳에는 상자가 깔려 있고.
상자 뒤쪽으로 조잡하게 서 있는 마네킹들이 여럿 보인다.
‘동선이 이상해. 상자가 왜 저기 깔려 있는 거야?’
그래서 물었다.
“상자 때문에 시야를 가리지 않나요?”
“본부장님께서 저렇게 조치하라고 하신 거라서.”
“아…….”
고기웅 본부장의 작품이었기에 백현은 더 이상 말을 아꼈다.
그때 한 남자가 백현에게 말을 걸었다.
“마르코 씨한테 전화는 받았어요. 오늘 에이전시 미팅 있다면서요?”
“네. 바쁘셔서, 저 혼자만 왔습니다.”
백화점 상품기획자, MD 조성민.
어제 마르코와 함께 만난 사람이었다.
꽤나 스마트하고 패션 감각도 뛰어나보였다.
그는 매장 사진을 찍고 고객 동선을 확인하는 백현을 보며 입을 열었다.
“상당히 자료조사를 많이 하시네요.”
“네. 처음이니까요. 열심히 해야죠.”
“아… 처음이구나. 사실 패션업계가 쉬운 건 아니에요. 저도 이 자리까지 올라오는데 7년이나 걸렸거든요.”
“아… 네. 대단하시네요.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그래요? 마르코 형이 말한 게 있어서 저도 많이 도와드리고 싶네요.”
“감사합니다.”
“한 가지 질문 해봐도 될까요? 사실 배우고 싶다니까 쉽게 알려주고 싶어서 그래요. 질문, 대답 형식으로 가르쳐주면 이해하기가 쉽거든요.”
“아… 네.”
조성민이 물었다.
“MD, 상품기획자라고 말씀드렸어요. 제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건 뭘까요?”
“히트 상품을 내는 것 아닐까요?”
“아니요. 백화점에 들어와 있는 상품이 원활하게 공급되는지 확인하는 것. 특히 오늘 같이 처음 런칭하는 편집샵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고요.”
“아….”
“더 알고 싶으면 저 따라와요. 어느 정도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네.”
그의 배려에 현장의 분위기를 알 수 있었다.
“티셔츠 위에 에그타르트 그림이 예쁘게 나왔네요?”
“네. 달콤한 부분이 강조되도록 색을 최대한 진하게 썼고요. 그 위에는 홍콩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홍콩에 들리면 한 번 먹어봐야 할 간식이 에그타르트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도록 살려봤습니다.”
“음… 확실히 실험적이긴 해요. 한국에 관련된 디자인도 있나요?”
“네. 지금 시판은 안 됐고, 이게 그 디자인인데요. 한 번 봐주실래요?”
Korea. 그리고 그 위에 올려진 디자인은 비빔밥이다.
“비빔밥이네요?”
“네. 산채비빔밥이요. 다채로운 색깔로 맛은 물론 미적으로도 세계적인 추세에 손색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손님.
눈길을 주다가도, 가격표를 보고는 헉 소리를 내며 지나친다.
민망한 분위기 속에서 조성민이 매니저에게 물었다.
“재고는 충분하죠?”
“네. 그럼요.”
“가격 문제는 일단 오늘 반응을 보고 다시 한 번 논의해 봐요. 지금 손님이 많이 없는 게 가격적인 문제일 수도 있으니까.”
“네. 그건 오늘 판매성적 보고, 저희 실장님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그래요. 럭셔리 브랜드로 나가려는 건 아는데, 일단 유명해져야 하잖아요? 사실 이대로는 좀 힘들어 보이네요.”
“……”
* * *
백현은 얼떨결에 MD를 따라다니게 되었다.
그는 어디서든 자신의 주장을 분명히 드러내는 사람이었다.
“누가 흰 바지를 구석에다 두라고 했어요?”
하지만 경력이 얼마 되지 않는 매니저는 책임을 회피하는 발언을 했다.
“네? 제가 일 할 때부터 이렇게 진열되어 있었는데요.”
그러자 조성민의 얼굴이 엄청 붉어졌다. 자신에게 따지는 매니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아~ 화나려고 그러네. 이거 회의 때 분명히 제일 앞에 진열하라고 했는데, 고친다고 하고 그대로 뒀네. 진짜 아무 말 못 들었어요? 김유진 매니저가 아무 말 안 했어요?”
“네. 못 들었는데요.”
조성민은 단단히 화가 난 표정으로 직원들에게 요구했다.
“지금 다 이동시켜요. 이쪽부터 밝은 계열 싹 다 앞쪽으로 진열하고, 어두운 색깔은 뒤쪽으로 다 빼요.”
“지금이요? 손님들 오실 시간인데, 내일 하면 안 될까요?”
“이봐요! 누가 여름에 검은색 바지하고 가방을 제일 앞에 진열합니까? 네?! 싹 다 고쳐요! 당장! 지금 당장!”
“네. 알겠습니다.”
MD는 힘이 있었다.
그는 백현에게 하나하나 보여주고 있었다.
다른 매장으로 이동하며, 조성민이 말했다.
“백현 씨.”
“네.”
“사실 마르코 형은 나보다 1개월 먼저 입사한 선배였어요. 사실상 제 스승이죠.”
“아….”
그는 차분한 어조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MD는 굉장히 외로운 직업이에요.”
“……”
“불편한 말을 내뱉어야 할 때가 굉장히 괴롭죠. 그래서 마르코 형이 MD일을 그만두고 디자이너 쪽으로 전향한 게 아닌가 싶어요.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프랑스에서 했던 것처럼 MD쪽으로 입사하셨거든요.”
“MD가 적성에 안 맞았나보네요?”
“그 말이 맞겠죠. 일은 굉장히 잘 하셨어요. 다만 사람들을 관리하는데 있어서 교포 특유의 억양과 살아온 환경 등이 문제가 되었죠. 그래서 디자이너 쪽으로 전향하신 거죠.”
마르코의 과거를 언급하는 조성민.
모든 게 이해가 갔다.
그가 왜 어제 굳이 판교로 왔었는지.
왜 오늘도 판교로 가라고 했는지.
마르코는 자신의 가장 편하고 믿음직스러운 인맥을 소개시켜준 것.
그래서 고마웠다.
“물론 디자이너가 쉽다는 건 아니에요. 창의적인 일은 몸은 쉽더라도 정신적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죠. 저하고는 확실히 안 맞는 부분이 있어요. 그래서 마르코 형이 늘 존경스러워요. 하지만 MD도 쉬운 것만은 아니에요. 특히 입점업체와 트러블이 있을 때는 많이 속상하죠.”
“네. 그럴 것 같습니다.”
“백화점에서 매출을 내기 위해서 저희가 분석한 게 있고 경험적으로 학습한 게 있어요. 그런데 입점 업체에선 표면적으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실제로는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아요. 고객의 동선, 마네킹의 위치, 적정 판매가격과 프로모션 등의 효과, 브랜드의 가치. 저희는 그런 걸 데이터로 분석해서 신규업체들이 보다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돕고 있는데, 그들은 저희가 통제하려고 든다고 생각하죠.”
그러자 백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생각을 더했다.
“거기에 수수료를 많이 벌기 위해 자신들을 압박한다고 생각하겠고요.”
“그렇죠. 한국의 백화점은 모두 임대료 대신 수수료를 받으니까요.”
모든 업체를 둘러본 조성민 MD가 물었다.
“백현 씨.”
“네?”
“그런데 마르코 씨랑은 무슨 관계에요?”
“직장 상사인데요.”
“아, 그것 말고는 없어요?”
“네. 어제 처음 만났는데요. 무슨 일 있나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조성민은 계속 백현에게 이것저것을 가르쳐주며 미소를 지었다.
‘마르코가 나한테 챙겨주라고 한 이유가 이거였네. 내가 보기에도 멋있는 남자야.’
사실 조성민도 성소수자. 원래는 마르코와 옛 연인이었던 관계.
그런 그가 그 사실을 숨긴 채 백현에게 물었다.
“식사는 같이 하실래요?”
“아닙니다. 전 따로 가볼 데가 있어서요.”
“잠깐만요! 이거 가져가요.”
조성민이 아쉬움을 달래며 선물을 하나 건넸다. 단, 백현에게 주는 건 아니었다.
“이게 뭐죠?”
“비밀입니다. 김성현 실장님께 갖다드리면 좋아하실 겁니다.”
“네.”
강백현은 조성민이 건넨 선물을 받아 들고 회사로 돌아오며 생각했다.
푸드 셔츠의 패착.
그 원인은 과연 가격이었을까?
아니면 젊은 친구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해서였을까?
회사로 돌아왔을 때는 때마침 퇴근시간.
다들 퇴근 준비를 하고 있다.
“백현 씨 다녀왔어요?”
김성현 실장의 말에 강백현이 대답했다.
“네. 대현백화점, 조성민 MD가 실장님께 이걸 드리라고 하더라고요.”
“성민 씨가?”
“아~ 아시는 분이세요?”
“알죠. 아주 잘 알죠. 너무 잘 알죠. 우리 회사 매일 왔었는데….”
“실장님, 저는 오늘 출입증 나온다고 해서 보안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알겠어요. 출입증 나온 후에 차에서 대기해요. 저는 일 마치고 30분 내로 주차장으로 갈게요.”
“네. 알겠습니다.”
직장 동료 여성들과 함께 포장을 풀기 시작하는 김성현.
그런데 그 안에서 속옷 세 벌이 나온다.
그러자 연주가 환하게 웃었다.
“어머! 실장님! 디자인이 완전 좋아요.”
“그래?”
“완전 제 스타일!”
“사이즈 별로 주문했으니까 이건 연주 씨가 착용해보고, 이건 진희 씨가 집에서 착용하고 내일 아침에 간단한 소감 말해줘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다들 퇴근하죠!”
“네!”
먼저 가는 여직원 2명.
그런데 김성현은 속옷의 디자인을 보며 고심하는 중이었다.
‘정말 잘 나왔네. 스킨톤에다가 미니마이저 형태라서, 착용한 듯 안한 듯한 느낌도 줄 것 같고, 와이어가 질긴 폴리에스테르 재질이라서 모아주고 당겨주는 기능성도 괜찮을 것 같은데? 지금 착용해볼까?’
아무도 없는 사무실.
김성현이 윗섬을 푼 채, 거울을 보며 브래지어를 착용했다.
‘편안해. 기능성도 갖췄어. 역시 성민 씨가 보는 눈이 있었네.’
마음에 꼭 드는 브래지어.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카드를 대는 소리가 들린다.
김성현이 생각했다.
‘에이, 진희 씨는 또 뭘 놓고 간 거야?’
항상 깜박깜박하는 진희.
그런 진희를 연주가 챙겨주곤 하는데, 오늘은 결국 무엇인가를 놓고 간 것 같다.
“진희 씨! 또 뭐 놓고 갔어?”
김성현이 장난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문을 열고 앞에 나타난 사람은 진희가 아니었다. 연주도 아니었다.
“아….”
“백현 씨?!”
강백현은 난처한 얼굴로 브래지어를 착용하고 있는 김성현에게서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