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34화
수행비서, 생각보다는 극한 직업이었다.
뭐든지 해야 하는 만능 직업.
상대가 사모님이든 아가씨든 도련님이든 자신이 맡았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
지금도 그런 상황이었다.
식사를 마친 백현은 김성현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백현 씨는 오늘 오후에 마르코 씨하고 같이 10대와 20대들이 어떤 옷을 선호하는지 시장 체크 좀 부탁해요.”
“10대하고 20대요?”
“네. 10월 초, 영패션 브랜드를 새로 런칭할 생각이에요. 빠듯하긴 한데, 일단은 길거리에서 진행하는 편집샵으로 시장 반응을 보고 그 반응에 맞춰 트렌드를 맞춰볼까 합니다.”
그녀의 말에 윤진희가 반문했다.
“실장님, 저희 영패션은 건드리지 않는다고 하셨잖아요.”
“네. 소비 측면에서 영패션은 전체 의류 시장의 11% 밖에 안 되는 아주 작은 시장이에요.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지금 여성의류는 너무 경쟁이 심하고, 유행을 선도한다고 해도 미투 상품이 금방 등장해서 재미를 보기 힘들죠.”
“그건 그렇지만… 영패션은 성공 사례가 많이 없어서…. 저희가 전문성도 없고요.”
“그래요. 하지만 최신 트렌드에 민감한 젊은 층을 잡게 되면 그런 고객들은 충성고객들이 돼요. SNS에 익숙한 연령층이고, 디자인을 베껴서 미투상품이 나온다고 해도 영패션은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해서 경쟁업체에서 그리 재미를 보지 못할 거예요. 쉽게 따라할 생각도 안 할 거고요.”
김성현의 말에 최용규가 고개를 끄덕이며 강백현에게 정보를 제공했다.
[성현이는 지금 자기 인생을 건 거야.]
‘패션 브랜드 런칭에 무슨 인생을 걸어?’
[자금 사정 때문에 무너져가는 메리야트 그룹을 살리기 위해서 그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거라고.]
그룹의 존속.
누구 하나 김성현의 성공을 바라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성한그룹의 손자며느리가 되어 자금 수혈을 받을 수 있기만 바랬다.
하지만 김성현은 최대한 자신의 힘으로 그룹을 살려보고 싶었다.
자신도 엄연한 그룹의 일원.
아버지, 작은 아버지, 고모님이 그룹을 위해 발로 뛰듯, 자신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운명에 저항하고 싶어. 나도 알아. 불가능하다는 거. 그래도 도전해볼 거야. 이대론 포기할 수 없어.’
그녀가 유럽에서 쉬고만 있던 게 아니었다.
런던부터 파리, 베를린까지 여러 나라를 돌며 현재 유럽에서 유행하는 패션에 대한 연구를 했다.
고기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극복하기 위해.
공원에서 젊은 남녀가 입은 패션을 차근차근 연구했고, 어린 아이들이 선호하는 색깔을 구별하려 애썼다.
최신 트렌드를 익히기 위해 현지인들과 부지런히 대화를 시도했고 그들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접근했다.
그럼에도 막연했다.
패션이란 게 정답이 없는 산업.
유행 따라, 흐름 따라 변하는 게 일상이다보니 쉬운 게 없다.
그래도 포기할 순 없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이것 밖에 없으니까.
* * *
강백현은 김성현의 지시에 마르코와 함께 행동했다.
누가 먼저 말을 걸지 않자 조금은 어색한 분위기.
그래서 강백현이 일상적인 대화부터 시도했다.
“저 마르코 씨는 한국 사람이 아닌가 봐요?”
“자기가 그거는 어떻게 알았어? 나 프랑스 교포 2세잖앙.”
“아… 그러셨구나. 이름이 마르코니까, 교포라고 생각은 했었어요.”
“자기야! 우리 판교로 가자.”
“판교요?”
“응. 우리 거래처가 그쪽이 가장 가까워.”
그런데 계속 자기라고 부르는 용어가 계속 걸린다.
“마르코 씨는 남자한테도 자기라고 부르나요?”
“응! 나한테는 남자도 여자도 다 자기지! 왜? 내가 그렇게 부르는 게 싫어? 싫어도 어쩔 수 없어. 난 원래 이런 사람인 걸?”
흐음… 강백현은 그 사람의 개성이라 생각하고 인정해주었다.
따져 물을 수도 있지만 일단은 배우는 입장.
어떻게 보면 스승이니까.
사람마다 사는 환경이 다르다.
특별히 문제될 것만 없다면 너무 관여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는 게 백현의 생각이었다.
판교.
최근 뜨고 있는 핫플레이스.
중, 고생은 물론 대학생, 직장인까지. 그야말로 젊음의 도시다.
마르코가 가자고 한 곳은 대현백화점 판교점이었다.
“자기는 MD라고 알아?”
“MD는 전혀 모르겠는데요.”
“음… MD 모르면 안 되는데, 자기는 그 동안 뭐했어?”
“네?”
“무슨 일 했냐고.”
“저야 뭐 그냥 이 일, 저 일 했었죠.”
“우리 쪽은 아닌 거네?”
“네. 패션 쪽은 아니었죠.”
“우리 자기는 키도 크고 얼굴 좀 반반해서 배우나 모델 쪽인 줄 알았는데, 그쪽은 아니었네.”
“그래요? 그건 생각도 안 해봤네요. 모델이나 배우는 사실 모르겠어요. 워낙 사는 게 힘들어서 닥치는 대로 일했거든요. 돈이 좀 모이고 나서는 안정적인 일을 찾았었죠.”
“아깝다! 자기 정도 키에, 얼굴에, 체중 조금만 줄였으면 모델로도 잘 나갔을 텐데….”
“아깝다뇨?”
“자기 나이가 나이잖아. 지금은 안 먹히지! 에이! 알면서~.”
“……”
강백현이 고개를 저었다.
오늘따라 자신의 외모를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다.
패션 업계라 그런지 유독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현백화점 판교점.
MD. 상품기획자.
만나보니 무슨 일을 하는지 알 것 같다.
“마르코 씨, 오랜만이네요.”
“우리 성민 씨, 잘 지냈어?”
“하하, 저희 런칭하는 편집샵 보러 오셨다고요?”
“응. 어디야?”
“7층으로 올라가야 해요. 오늘은 가오픈입니다. 어제야 세팅이 마무리 돼서, 오늘 CMD 승인만 있으면 내일부터 바로 오픈 합니다.”
“응. 가 봐도 되지?”
“네! 그럼요!”
마르코가 성민이라는 사람에게 찐득한 눈빛을 보내는데도, 그는 의외로 별 반응이 없다.
다들 그가 그쪽 성향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일까?
백현은 의문점을 뒤로 하고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대현백화점 판교점 7층 입구.
백화점 이월상품들을 특별히 전시해둔 곳.
이곳은 가판 위에 안 팔린 재고들을 쌓아놓고 파는 곳이다.
사람들이 연령 구분 없이 엄청나게 몰려 있다.
괜찮은 상품도 있지만 대부분 색상이 별로라든지, 특정 사이즈만 팔리고 나머지는 안 팔려서 악성 재고로 남은 상품이다.
즉, 미끼 상품인 것이다.
그리고 그 옆, 딱 보기에도 임시로 만든 가판대가 보였다.
그들이 운영하는 편집샵. 브랜드명은 푸드셔츠다.
“저희 푸드셔츠는 옷에 커다란 음식 이미지 있는 게 컨셉이에요.”
“아….”
“음식은 만물의 공통관심사고 여성들은 특히 달콤한 것을 좋아하잖아요. 그래서 케이크, 사탕, 아이스크림. 그런 디자인을 크게 넣어서 젊은이들의 감각에 맞게 꾸며봤어요.”
강백현이 궁금한 점을 물었다.
“아… 그런데 가격이 조금은 부담스럽네요?”
“네. 저희는 일단 이 브랜드를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시키려 하고 있고, 아무래도 성한그룹에서 투자하는 브랜드다 보니까. 고급스러움을 강조하려고 하고 있어요.”
‘성한그룹?’
성한그룹, 고기웅의 회사.
그러고 보니 명함의 직함도 성한그룹 본부장이었다.
확실히 잘 만들긴 했다.
음식의 그림이 호기심을 끌 정도로 블링블링했다.
그런데 후드티 한 벌에 8만원, 티셔츠 한 벌에 4만 6천원이라는 가격은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면이 적지 않았다.
“가격이 너무 센데요?”
“자기가 보기에도 그래?”
“네. 많이요.”
“아무래도 그렇죠. 그래도 판교 분들이 구매력 지수도 높다보니까 거기에 맞춘 것도 있어요. 일종의 시험대 역할이죠.”
강백현은 스마트폰으로 그들이 런칭한 상품을 사진으로 담았다.
‘굉장히 크고 단순해. 그러다보니 직관적이면서도 시선을 끄는 게 있구나.’
내일 런칭을 앞두고 막 나타난 CMD(최고 상품기획자)의 평도 백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디자인이 생각보다 잘 나왔네요. 직관적이면서 시선을 끄는 게, 확실히 효과는 있어 보여요. 이대로 가시면 될 것 같은데요? 세부적인 것만 조정하시죠.”
“세부적인 거요?”
“네. 위치선정하고, 저희하고 같이 진행할 프로모션 같은 거. 일단 첫 일주일 매출을 보고 어떻게 지원할지는 추후에 결정하도록 할게요.”
CMD의 말에 푸드셔츠의 런칭을 맡은 성한패션의 관계자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운명일까?
하필이면 고기웅이 그 자리에 나타났다.
고기웅은 자상한 목소리로 직원에게 말했다.
“아~ 재현 씨! 어떻게 잘 봐주고 계세요?”
“네. 본부장님이 직접 여기까지 웬일이세요?”
“아~ 저희 그룹 일인데 제가 직접 챙겨야죠. 직원들한테만 책임을 전가할 수 있나요? 우리 재현 씨가 보기엔 어땠어요?”
“이미 평은 했는데, 일단 음식 디자인이 굉장히 스위트하면서도 젊은 감성에 맞을 것 같은 느낌이어서 괜찮아 보이긴 합니다. 일단 내일 판매성적을 봐야겠지만….”
“좋은 결과가 나오겠죠. 저희가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브랜드니까요. 잘 부탁드려요.”
“네. 일단 내일 성적 기대하겠습니다.”
강백현은 고기웅이 이쪽을 보지 않기를 바랬다.
아직 시선 밖. 하지만 동료인 마르코가 초를 쳤다.
“어머! 우리 기웅 씨 아니야?”
“아… 마르코 씨! 오랜만이네요. 어?”
자신을 발견한 고기웅. 그의 반응을 보며 마르코가 백현에게 말했다.
“자기! 이리 와. 소개해줄게. 성한그룹 기획본부장, 우리 기웅 씨!”
“어제 뵈었습니다. 오늘 통화도 했고요. 안녕하세요! 고기웅 본부장님.”
“네. 강 비서가 마르코랑 같이 있다는 것은 성현 씨랑 같이 일하게 됐다는 거네요?”
“네. 그렇죠? 그렇겠죠?”
“그럼 앞으로 부딪힐 일 많겠네요. 저도 당분간은 성한그룹 패션 분야에 관심을 두기로 했어요. 메리야트 쪽하고 함께 할 생각인데, 우리 친해져야 할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정이 가질 않는다.
그가 저리 말하는 목적이 따로 있으니까.
역시나 그의 관심사는 김성현이다.
“마르코 씨!”
“응.”
“왜 성현 씨랑 같이 안 왔어요? 같이 온다고 연락 받아서 일부러 여기까지 왔는데….”
“아~ 우리 자기는 지금 여성복 패션쇼 보러 갔는데? 기웅 씨 왔으면 내가 우리 자기랑 같이 왔지. 지금 전화해볼까?”
“아니에요. 괜찮아요. 마르코 씨랑 오랜만에 봐서 반갑네요. 성현 씨랑 나 잘 해볼 테니까, 마르코도 나 적극 밀어줘요. 알았죠?”
“당근! 오케이지! 나만 믿어~ 자기!”
“역시 마르코는 말이 통해 좋아요. 백현 씨.”
“네?”
“백현 씨도 나 도와주는 거예요! 우리 벌써 2번째 만났잖아요. 앞으로 더 자주 만나게 될 텐데, 친하게 지내자고요. 알겠죠?”
강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본부장님.”
“그래요. 우리 서로 돕고 살자고요.”
주차장을 내려가는 길.
마르코가 갑자기 급한 얼굴로 말했다.
“자기야. 나~ 시크릿 가든 좀 다녀올게.”
“네? 시크릿 가든이요?”
“아~ 못 알아 들으면 어떻게 해?”
“아… 화장실! 네. 다녀오세요. 저는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혼자 남은 백현이 차량 앞에서 고민했다.
‘고기웅하고 선을 긋는 건 좋지만 적대적으로 보일 필요는 없어. 보기에 그리 나쁜 사람으로 보이진 않으니까. 단순히 선배가 싫어하는 사람이라서 수면제라고 거짓말을 한 것일 수도. 선배가 실제로 장난 좀 많이 치잖아?’
강백현의 머릿속에는 자신을 게이로 오해하게 만든 최용규의 장난이 단단히 뇌리에 박힌 상태였다.
일명 『나 삐졌음』 상태.
그때 고기웅이 주차장에 내려온다.
백현이 인사를 건네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의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나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급하게 사과를 하는 남자.
“죄송합니다.”
“이 자식아! 성현 씨가 패션쇼 참가하러 갔으면 그쪽으로 안내를 했어야 할 거 아니야? 어?!”
고기웅의 손바닥이 남자의 뺨을 후려쳤다.
강백현은 놀랐다.
재벌 3세의 본 모습.
그래. 그 위화감의 정체가 저거였어.
이중인격의 표본.
고기웅의 실체를 알게 된 강백현이 일단 스마트폰을 들었다.
‘녹화해두자. 언젠가는 쓸모가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