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32화
김성현은 다시 한 번 오늘 있었던 일을 상기했다.
강백현이 분명 말했다.
헤어진 애인과 송지호를 왔었다고.
그리고 송지호를 가자고 하던 군대 동기 상준 씨.
‘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랑 상관없는 일이잖아.’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김성현을 보며 김도한 회장이 다시 물었다.
“성현아?! 김성현?”
“아… 응.”
“무슨 문제 있는 거니?”
“아니에요. 그 사람 그쪽 맞는 것 같아요. 그런데….”
“유부남이라서? 그게 조사해보더니 아니더구나. 그냥 자원봉사자래. 어려운 사람들 돕고 다니는 성실한 친구라고 하더구나.”
김도한 회장은 이미 강백현의 뒷조사를 했다.
성현이가 만났다던 요양원에 문의해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한 참이었다.
김성현 또한 유부남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었다. 그가 직접 말했으니까.
그리고 자신을 처음부터 차갑게 대했던 것도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을 이성으로 보지 않으니까.
그래서 잘 보일 생각이 없는 거다.
그래. 오히려 잘 됐어. 적어도 나한테 나쁜 마음은 가지지 않을 테니까.
“아빠, 오늘 동성이 생일인 거 아시죠?”
“그래. 동성이 녀석, 가족끼리 식사라도 하려고 했는데, 오늘은 친구들하고 밖에서 놀다 오겠다고 연락이 왔어. 아, 성현아.”
“네. 아빠.”
“오늘 점심에 기웅이 만났다면서?”
“누가 그래요?”
“동성이가 그러더라. 어떻게 잘 되어 가고 있니?”
“아빠… 나….”
솔직히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김도훈 회장의 간절한 눈빛이 그녀의 말을 막았다.
“성현아, 사람은 말이다. 시기를 놓치면 아무것도 안 돼. 잘 해봐. 너 뿐만 아니라 우리 기업의 미래가 달린 일이야. 애도 괜찮잖니? 성격도 좋고.”
나를 키워주고 아껴준 핏줄.
그래서… 거절할 수가 없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기에.
“잘 해볼게요.”
“그래. 우리 딸만 믿는다.”
그 말을 끝으로 서재로 들어가는 김도한 회장.
그런 아버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내 생각도 안 물어보시는구나.’
김성현은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강원도를 다녀온 후 기분이 조금은 풀렸나 싶었는데, 아버지의 말을 들으니 그저 울적해지기만 했다.
그래서 침대에 올라갔다.
이제 의심이 들었다.
정말 그는 나쁜 사람이었을까?
정말 그가 마신 샴페인에는 수면제가 들어가 있었던 걸까?
그냥 졸려서 잠든 게 아닐까?
‘그 사람한테 물어보면 되겠지. 그러려고 부른 거니까.’
김성현이 강백현을 떠올렸다.
내일 만나서 물어보면 된다. 수면제, 그거 어떻게 알았던 건지… 어떻게 알고 전화를 했던 건지….
같은 시각.
김도한은 서재에 들어갔지만,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주변을 서성거리며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김도한, 넌 딸의 미래와 기업의 미래 중 어떤 것을 선택할 거냐?’
무엇이 맞는지는 모른다.
물론 딸의 행복을 지켜주고 싶다.
하지만 기업이 무너지면 1만 명 이상의 실업자를 양산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최용규의 죽음이 자신에게는 너무나 행운이다.
어음부도까지 남은 기간은 겨우 9개월.
그동안 최선을 다해서 경영을 정상궤도에 올려놓아야 한다.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힘들어 보인다.
‘어떻게 해야 할까? 역시 성한그룹에 도움을 청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 다른 해법이 보이지가 않아.’
김도한이 스스로의 마음을 굳게 다졌다.
성현이를 고기웅에게 시집 보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결혼시킨 후, 성한그룹에서 5000억원의 자금을 수혈 받으면 된다.
‘미안하다. 성현아. 기댈 사람이 너밖에 없구나.’
정부지원자금.
해운업, 항공업 등과 달리 호텔서비스업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국가 기간산업이 아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애초부터 정부의 지원 따위는 바라지도 않았으니까.
그랬으니까.
* * *
다음날 아침, 강백현은 첫 출근하는 김성현을 모시고자 아침부터 대기 중이었다. 그러자 박창현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기분 좋은 일 있냐?”
“네?”
“뭐 그렇게 싱글벙글 웃어?”
“아무것도 아닙니다.”
솔직히 김성현에게 호감이 생겼다.
전 여자친구와는 반대의 성격.
사람을 위할 줄 알고, 자신보다는 남을 더 챙길 줄 아는 사람.
돈 많다고 자랑질 하지도 않고 사람 그대로를 봐주는 사람.
그래서 좋았다.
그런데 박창현이 산통을 깼다.
“너… 정신병 있지?”
“네?”
“뭐가 그렇게 좋냐고? 내가 그렇게 좋냐?”
“아니라니까요. 제가 박 비서님을 왜 좋아해요? 이제 그만하기로 했잖아요.”
“그래. 알았어. 오케이! 그 얘기는 그만하자. 너 오늘 나랑 아줌마 모시고 장 좀 보러 가자.”
“네?”
“장 좀 보러 가자고. 아줌마 한번 뵈었었다며.”
“저… 일 있는데요?”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성현 아가씨, 오늘 복직 후 첫 출근이라고 운전 부탁한다고 하시던데요?”
“뭐? 야! 그거 내가 하면 안 되냐?”
“아… 저를 꼭 집어 말씀하시긴 했는데, 원하시면 그렇게 하시고요.”
“그래. 너 어차피 아가씨한테 잘 보일 생각 없잖아. 아가씨 지금 남자친구분도 없고… 혹시 진짜~ 혹시!”
“네?”
“나랑 잘 될 수도 있잖아.”
“그럴까요? 그런데 참, 그런 생각하셨어요?”
“뭐가?”
“일개 수행비서가 재벌집의 딸을 흠모하여 사랑하는 그런 이야기?”
“인마! 말도 못하냐?”
“아닙니다. 상상은 할 수 있죠.”
“그래서 어때? 내가 간다? 어?”
강백현이 씩 웃으면서 그에게 기회를 양보했다.
“네. 그러십쇼. 전 상관없습니다.”
잠시 후, 김성현이 나왔다.
“어? 박 비서님이 왜 나와 계세요?”
“아… 오늘 출근이시라고 들었습니다. 수행비서가 필요하실 텐데, 제가 오늘 일정이 비어서 모셔드릴까 합니다.”
“아… 강 비서는요?”
“강 비서는 오늘 아주머니랑 같이 장 보러 갈 것 같습니다.”
“아… 그래요? 그런데 어쩌죠?”
“네?”
“강 비서랑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박 비서님이 장 보러 대신 가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
박창현이 아무 말이 없자, 김성현이 다시 말했다.
“무슨 문제 있나요?”
“아닙니다. 아가씨, 지금 바로 강 비서 불러오겠습니다.”
박창현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승부조차 해보지 못하고 패배한 기분이었다.
생각해보니 녀석은 그쪽이라고는 해도 얼굴도 잘 생기고 키도 컸다.
거기에 목소리도 맑은 저음이라 듣기 좋았고, 옷발도 잘 받았다.
그런 반면에 자신은….
아무리 봐도 옷맵시가 나질 않는다.
선천적으로 그럴 수 없는 체형.
젠장.
‘아가씨, 그 녀석은 저 좋아한다고요! 아가씨하고는 가능성이 없어요! 차라리 제가 낫지 않습니까? 네?’
* * *
기존의 숙소.
그곳을 사진 찍고 있는 녀석의 얼굴이 보인다.
“야!”
“네. 무슨 일 있으세요?”
“아가씨가 너 부른다.”
“아~ 박 비서님이 가신다고 하시면 되잖아요.”
“너한테 따로 할 말이 있으시단다.”
“아, 그래요? 그럼 제가 가죠.”
“빨리 가 봐!”
박창현은 솔직히 녀석이 부러웠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아가씨가 저렇게 관심을 주니 좀 그렇다.
그때, 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박창현을 불렀다.
“창현아!”
“네. 누님, 오셨어요?”
“오늘 장 보러 가는 거 알지?”
“네~ 그럼요.”
“그 친구도 데려가나?”
“네?”
“강 비서! 오늘 나랑 같이 장 보러 가면 내가 맛있는 거 사 줄 텐데…”
“아~ 누님? 사심이 보이시는데요?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뭘? 그 친구도 돌싱이라며! 이 누나하고 딱 맞지. 애도 혼자 못 키워서 그런다는데, 얼른 좋은 여자 만나야지. 누나랑 딱 맞잖아. 어?”
“농담도 적당히 하셔요! 누님한테 가겠습니까? 걔는 어떤 여자가 와도! 아무리 밀어줘도 안 될 겁니다.”
“뭐가 안 돼? 남녀가 모이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그 친구 유부남 아니에요. 자식도 자기가 낳은 자식이 아니라 그냥 후원자래요. 자원봉사자고요.”
“그래?! 그럼 아직 결혼 안 한 거네? 아가씨랑 잘 될 수도 있겠다~ 응?”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어? 뭔데? 뭐 알고 있는 거 있지? 응?”
42살의 아줌마 영현댁.
“아! 모르겠습니다. 장이나 보러 가시죠.”
그리고 36살의 노총각 박창현.
그 둘은 서로 한숨을 내쉬며 대형마트로 이동했다.
* * *
강백현은 조그마한 차를 보며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벤츠가 아니네요?”
“네?”
“저번에 저희 동네 몰고 오신 차는 벤츠였잖아요.”
“출근할 때는 되도록 국산차량을 이용해야죠. 그리고 벤츠도 제 차 아니었어요. 렌트였다고 했잖아요.”
“렌트?”
“내 동생 어제 봤죠? 동생이 차 잃어버리고 나서 보험으로 받은 게 그 차량이었거든요.”
“차량을 잃어버려요?”
“네. 누가 훔쳐갔대요. 그래서 신고는 했는데, 아직 못 찾아서.”
“그럼 해외로 불법수출 했을 수도 있겠네요.”
“저도 그럴 거라 보고 있어요.”
강백현이 고개를 저었다. 얼마나 좋은 차였기에 훔쳐가지?
요즘에는 CCTV가 많아서 훔쳐가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지금 바로 본사로 모실게요. 출발하겠습니다.”
강백현이 차량을 발진시켰다.
“그런데 백현 씨.”
“네?”
“그 대답 언제 해줄 건가요?”
“어떤 대답?”
“그 수면제, 어떻게 알았어요?”
“음… 글쎄요. 꼭 말해야 하나요?”
“기웅 씨랑 원래 알고 있던 관계인가요?”
“그건 아니에요.”
“그럼요?”
적당히 얼버무리고 끝난 문제인데, 계속 물어보니 당황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해야 해? 어제까진 아무 말 없다가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그러자 최용규가 방긋 웃으며 끼어들었다.
[잘 풀어 봐.]
‘뭘 잘 풀어? 아 미치겠네.’
“꼭 말씀드려야 하나요?”
“음… 뭘 해야 말해줄래요?”
“뭘 해줄 수 있는데요?”
“소개팅?”
“소개팅?!”
“네. 남자는 보통 그거면 되지 않나요? 뭐, 백현 씨 이제 백수도 아니고, 메리야트 그룹 다닌다고 하면 호감 보일 사람도 많을 거고.”
성현이 이런 소릴 한 이유는 어제 들은 성소수자라는 말 때문이었다.
사실 궁금했지만 직접 물어볼 수는 없었기에 대화 도중 이런 식으로 튀어 나온 것.
“왜요? 애인 있어요?”
“있었죠.”
“무슨 이유로 헤어졌어요? 물어봐도 되죠?”
“뭐, 돈 문제 때문이었죠. 제가 부족했던 거고, 인정합니다.”
“그럼! 괜찮은 친구들로 내가 주선해줄게요. 제가 복직하면 같이 근무하는 친구들 있는데, 다들 예쁘고 성격도 좋아요. 자연스럽게 자리 마련해주면 되잖아요.”
“아… 제가 헤어진 지 얼마 안 되어서요. 그리고 사실 여자 울렁증도 좀 있고요.”
“여자 울렁증이요?”
“네.”
김성현은 이제 아버지가 말한 게 납득이 되었다.
강백현이 저런 식으로 돌려 말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정말 그 쪽이었구나. 하긴 우리 패션 업계도 한두 명이 아니니까.’
김성현의 전공은 패션의류.
이쪽에는 강백현과 같은 부류가 넘쳐났다.
다만 직접적으로 묻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기 때문에 서로 모른 척해주는 것일 뿐.
이 사람은 티가 안 나서 전혀 의심하지 않았는데, 라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우리 팀에 잘 어울릴 수도?’
그런 생각도 잠시, 회사에 도착한 김성현이 운전석에 있는 백현을 불렀다.
“강백현 씨.”
“네?”
“주차하고, 트렁크에서 상자 가지고 3층 사무실로 들어와요. 소개시켜줄 사람이 있으니까.”
“어? 여기서 대기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아니에요. 수행비서라고 놀고먹을 순 없잖아요. 일 해야죠. 짐도 들고.”
김성현이 조수석에서 내려 사무실로 올라갔다.
혼자 남은 강백현은 허무한 듯 혼잣말을 내뱉었다.
“아… 네. 짐꾼. 아… 그래요. 나 짐꾼이었지.”
트렁크에 보니 박스 하나가 실려 있었다.
그 안에는 그림이 그려진 종이들이 가득했다.
블링블링한 옷을 입고 있는 남성 여성의 모습이다.
“뭐야? 이거 다 성현 씨가 그린 거야?”
그러자 최용규가 갑자기 씩 웃었다.
[몰랐냐? 패션브랜드 블랑샤 못 들어봤어?]
“블랑샤는 알죠. 그거 미진이가 환장하던 브랜드였는데? 지금은 좀 죽지 않았나요?”
[죽긴 뭐가 죽어. 아직 잘 나가는데. 그거 런칭한 사람이 바로 성현이야. 엄청난 사람이라고.]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