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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배기 깨러 왔습니다-31화 (31/139)

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31화

김성현은 너무나 서러웠다.

고기웅이 먼저 포기해주면 좋은데, 저쪽이 너무나 적극적이니 해법이 보이질 않았다.

‘아빠… 나 진짜 힘들어. 이 방법 밖에 없는 거야?’

슬펐다. 김도한 회장.

자신의 아버지가 왜 그러는지는 안다.

어떤 심정일지도 알고.

자신과 기업 중에 택하라면 무조건 기업을 택할 거라는 아버지의 마음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언제부터 내가 정략결혼의 희생자가 되어야만 하게 된 걸까.

고기웅은 자신이 언젠가는 넘어올 거란 사실을 이미 아는 눈치였다.

아버지는 물론 동생까지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서 더 악랄하게 압박을 가하는 게 눈에 보였다.

김성현은 절망스러웠다.

‘이제는 알아.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솔직히 호텔에서의 사건이 없었다면 평생 몰랐을 수도 있다.

강백현의 그날 전화가 없었다면, 함정에 빠져 자신이 겁탈 당했는지도 모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원치 않는 결혼.

이제는 피하고 싶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너무나 잘 알게 되었으니까.

한참을 울었더니 피곤해졌다.

그래서 잠이 밀려왔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체, 뒷좌석에서 잠시 기댄 그녀가 눈을 감았다.

눈을 떴을 때는 광활한 대지와 드넓은 바닷가, 거기에 산과 호수까지 사면이 모두 다른 광경을 비추고 있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풍경에 놀라 아무 말 없이 차창 너머를 쳐다보기에 바빴다.

강백현이 눈을 뜬 그녀에게 물었다.

“일어났어요?”

“여기가 어디에요?”

“송지호.”

“송지호?”

“네. 강원도 고성에 있는 호수에요. 바다와 호수, 산과 들판이 어우러진 대한민국에서 전후무후한 관광지죠.”

“관광지인데 왜 이렇게 사람이 없어요?”

“사람 없는 데가 좋을 것 같아서요. 일어나셨으면 나오세요.”

“네.”

한참 더운 8월의 여름.

김성현이 시원한 호수바람을 마주하고 주위 풍경을 바라보았다.

호수 위에서 놀고 있는 청둥오리 가족.

뭐가 그리 즐거운지 사람이 왔는데도 숨지 않고 집을 짓는 비버 가족.

긴 다리로 호수 안 물고기를 사냥하는 백조 무리.

그리고 반대편에는 바다 특유의 소금 내음과 새하얀 백사장.

바닷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갈매기까지.

“이런 데는 어떻게 알았어요?”

“애인이랑 왔었죠.”

“애인이요? 아… 애인 있구나.”

“지금은 헤어졌습니다. 그것보다 어때요? 기분이 좀 풀리는 것 같아요?”

“조금은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슬픈 일은 다 잊어요.”

“고마워요.”

얼굴에 슬픔이 가득한 김성현을 보며 백현은 생각했다.

‘마음에 걸려. 고기웅이란 그 사람. 친절해서 더 무서워.’

슬픔에 잠긴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이제 다른 곳으로 이동할까요?”

“다른 곳이요?”

“네! 밥 못 먹었잖아요. 제가 사기로 했었고.”

“아, 제가 낼게요.”

“아니에요. 제가 낼게요. 대신 메뉴는 제가 고릅니다!”

송지호와 강원도 속초는 10분 거리다.

[야! 강백현! 성현이를 이런 데 데려오면 어떻게 해?]

대포항 지하에 있는 수산물코너.

이곳에는 어민들이 직접 운영하는 수많은 가게들이 있다.

그리고 강백현이 자주 갔던 가게도 있다.

속초에 왔으면 꼭 먹어봐야 하는 음식, 그건 오징어순대.

[아, 미치고 환장하겠네. 성현이가 그거 먹겠냐? 얘 입이 얼마나 고급인데!]

“처음이신가 봐요?”

“네. 이런 곳은 와 본 적이 없네요. 신기해요.”

“저는 이런 곳이 좋아요. 사람 사는 냄새가 나잖아요.”

강백현과 김성현이 지나가자 아줌마들과 아저씨들의 호객행위가 엄청났다.

“이리 와. 싸게 해줄게.”

“둘이 잘 어울리네. 신혼?! 우리 집이 제일 맛있어.”

“갈 곳 안 정했으면 우리 집 와. 서비스 많이 줄게.”

강백현은 가는 곳이 있었다.

그건 군대 동기의 집이었다.

“엄마! 저 왔어요.”

“어?! 백현이?”

“네. 상준이는 어디 갔어요?”

“아~ 물건 떼러 갔지. 누구야? 여자친구?”

“아니에요. 제가 모시는 직장 상사분이요.”

“직장 상사? 아, 그렇구나. 얼른 앉아. 뭐로 준비해 줄까?”

“오징어 순대 하나 주시고요. 숯불생선구이 두 마리 주시고요.”

“그래. 기다려. 엄마가 금방 해줄게.”

강백현의 말에 김성현이 말했다.

“엄마?”

“아, 그냥 엄마라고 불러요. 친구네 엄마 집이라서.”

“그렇구나. 누구에요?”

“군대 동기네 집. 제가 군대 22사단 나왔거든요. 그래서 외박 나오면 이 친구네 집에서 신세 많이 졌죠.”

“아….”

잠시 후 파란 앞치마를 두르고 나온 상준이가 강백현을 보며 인사했다.

“잘 지냈냐?”

“어. 오랜만이다.”

“연락 좀 하지 그랬어? 하룻밤 자고 갈래? 헤헷! 송지호 같이 한 번 가야지. 지금 풍경 엄청 좋잖아.”

“이미 갔다 왔어. 그냥 잠깐 들린 거야.”

“뭐야? 왜 나는 빼놓고 가? 옆에 분은 누구신데?”

“내가 모시는 분. 성현 씨, 제 친구 상준이에요.”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맛있게 드세요. 저희 집 진짜 맛있어요. 속초 오시면 오징어순대랑 숯불생선구이 꼭 드셔봐야 되는 거 아시죠? 지금 방금 고기 시장에서 떼어 왔으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네!”

자글자글 익어 나온 생선구이와 독특한 식감으로 입맛을 사로잡는 오징어순대가 만나니, 얼굴에 미소가 깃들었다.

[성현이가 이런 걸 좋아했다고?]

최용규는 놀랐다.

보통은 호텔 레스토랑에서 만났던 김성현이 오늘은 좀 달리 보인다.

“맛있네요?”

“그렇죠? 이것도 먹어봐요. 생선구이가 초고추장에 찍어먹으면 또 맛있어요.”

“아, 초고추장에는 한 번도 안 찍어먹어 봤는데….”

“드셔보라니까요. 진짜 맛있다니까요.”

절로 나오는 웃음.

역시 마음이 울적할 때는 맛있는 음식이 최고다.

강백현이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운을 띄웠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하곤 해요. 세상은 불합리하다고.”

“갑자기 왜 이렇게 진지해져요?”

“네? 그냥 제 지식 자랑 좀 하려고요. 안 되나요?”

“아니요. 해봐요.”

“태어날 때부터 사람은 불합리하잖아요? 누군 태어나면서부터 잘 살고, 누군 태어나면서부터 가난에 허덕이고.”

“……”

“그런데 행복은 그렇지 않아요. 욕심만 부리지 않고 나눌 줄 알고 베풀 줄 알면 그게 저를 행복하게 만들잖아요. 성현 씨는 어때요?”

“저는 그냥 잘 모르겠는데요.”

“거짓말 마세요. 윤수 옷 사주면서 행복해했잖아요. 『이거 어울릴까요? 윤수가 좋아하겠죠? 어떻게 생각하세요? 윤수 아버님! 말씀 좀 해보세요.』 그랬었잖아요.”

강백현이 김성현의 목소리를 흉내냈다.

그러자 김성현이 민망한 얼굴을 했다.

“내가 언제 그런 목소리를 냈어요? 네?”

“아니, 뭐 그냥 그렇다고요. 어때요? 기분이 많이 좋아졌죠?”

“그렇다고 할게요.”

“그렇다는 게 어디 있어요? 확실하게 좀 말해줘요. 내가 고성에 속초까지 3시간을 운전해서 왔는데, 고작 해준다는 말이 『그렇다고 할게요.』 에요?”

“아, 진짜! 목소리 따라하지 말라니까요.”

티격태격하는 둘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아, 얘네 뭐하는 거야? 미친 거야?’]

최용규는 그게 못마땅했다. 그래서 나중에 꼭 혼내주기로 결심했다.

* * *

집으로 돌아오는 길.

김성현은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여름이라서 그런지 아직 해는 넘어가지 않았다.

푸른 바다와 산.

그리고 맛있는 음식과 운치 있는 풍경.

김성현에겐 오랜만에 제대로 된 휴식이었다.

헌데 머릿속에 자신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을 팀원들이 생각났다.

‘나도 이제 회사에 복귀해야겠지.’

일을 쉰 지 벌써 5개월이 넘어갔다.

최용규를 떠나보내고 일선에서 물러나 잠시 휴식에 들어갔던 김성현의 생각이 깊어졌다.

‘그래. 나도 이제 내 삶을 살자. 이대로 남들한테 끌려다닐 수만은 없어.’

김성현은 돌아오는 동안 스마트폰으로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자신의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스스로의 꿈을 잃지 않기 위해.

최고의 여성패션 리더가 되는 그 날이 올 때를 상상하며.

* * *

집에 돌아오자, 성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백현 씨, 고마웠어요.”

“아닙니다. 아가씨. 들어가세요.”

“네. 아~ 저 내일부터는 회사에 복직할 거예요. 아침 8시까지 차량 준비하고 대기해주세요.”

“출근이요?”

“네.”

김성현의 출근이라니.

강백현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차피 박창현한테 물으면 되니까.

차량을 주차하고, 지하철을 타고 메리야트 호텔로 갔다.

임시 숙소.

생각해보니 너무나 과분한 처우.

월급보다 호텔 방값이 더 나올 것만 같아서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돈 받은 것보다는 더 값어치 있게 일을 해야 하는데, 만족했으려나 모르겠네.’

호텔방 안, 들어가자마자 스산한 느낌이 들었다.

에어컨이 너무나 빵빵하게 틀어져 있었던 것.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박창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이야!”

“아, 박 비서님, 계셨어요?”

박창현은 상의는 벗어던지고 반바지만 입은 채 다리를 꼬고 있었다. 그 상태로 여유롭게 TV를 보다가 강백현이 온 걸 보고 깜짝 놀라 주섬주섬 옷을 입기 시작했다.

“뭐 하십니까?”

“뭐하긴, 네가 쳐다볼까봐 그렇지.”

‘아, 미치겠네.’

강백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 그런 사람 아니라니까요.”

“그럼? 어떤 사람인데?”

“그냥 보통 사람인데요.”

“클럽은 자주 가냐?”

“클럽이요?”

“여자 친구는?”

“없는데요.”

“남자 친구는?”

“많긴 한데, 박 비서님이 생각하는 그런 의미의 남자 친구들은 아닙니다.”

“아~ 모르겠다. 난 너 진짜 모르겠어. 너 행동도 이상하고. 아무튼 지내보면서 판단할게. 그때까진 우리 서로 선을 긋고 조심하자고.”

박창현의 유난스런 행동에 강백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일단 저 좀 씻겠습니다.”

“씻는 걸 왜 말해?”

“사소한 거 가지고 일일이 반응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강백현이 훌러덩 옷을 벗자 박창현이 놀란 얼굴이 되었다.

“너 운동 좀 했다?”

“그냥 많이 움직이는 것뿐입니다. 제 몸은 왜 관심 가지십니까?”

“뭐?”

“아니,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박 비서님이 그쪽 계열이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뭐야?!”

“서로 쌤쌤하시죠. 저도 박 비서님 호모로 보고, 박 비서님도 저를 호모로 보고 서로 피하면 되잖아요.”

“야~ 인정하는 거야?”

“아, 그만하죠. 농담은 농담으로!”

* * *

같은 시각.

김성현이 집에 들어오자, 회장님이 그녀를 보며 말을 건넸다.

“어디 다녀오니?”

“응. 잠깐 다녀왔어.”

“성현아.”

“응?”

“너 그 새로 고용한 비서 있잖아.”

“아, 강백현 씨?”

“응. 그 친구가 성소수자라는 얘기가 있더라구. 알고 있었니?”

김도한 회장의 말에 김성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럼 속초에서 만났던 그 남자가 헤어진 애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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