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 깨러 왔습니다-29화 (29/139)

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29화

백화점으로 가는 길.

차 안에서 김성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강백현 씨는 용규 씨 후배라고 했죠?”

“네. 그런데요?”

“둘이 같으면서도 많이 다르네요.”

“뭐가 같은데요?”

강백현이 운전하면서 김성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최용규도 어느새 차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어? 뭐야?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

강백현은 이제 놀라지 않았다.

갑자기 나타나는 거야 원래 그의 전매특허였으니까.

“백현 씨는 자기주장이 좀 강한 편이라고 해야 할까요? 좀 애 같아요. 그것도 많이!”

“아, 어제 숙소 문제 때문에 화나신 건가요? 제가 좀 너무한다고 생각하신 거죠?”

“아니요. 솔직히 그 부분은 제가 신경을 못 쓴 거 인정해요. 매일 보던 박 비서가 그런 환경에서 살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거든요. 아무 말도 없으셔서 그냥 불편 없이 지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얼굴이 화끈거리더라구요. 그래서 사실 민망했어요. 반성도 많이 했고요.”

“낯간지럽네요.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다니, 전 부끄러워서 말을 아예 못 꺼냈을 것 같은데.”

“무슨 소리예요? 낯짝 두꺼운 건 강백현 씨도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요?”

“네?”

“아니, 멀쩡한 사람이 왜 애를 시설에 맡기냐고요.”

이렇게 나오니 할 말이 없어져 버린다.

까칠한데 말 속의 뜻은 의외로 다정해서였다.

오랫동안 대답을 안 해서일까?

그녀가 표정을 보고 최용규가 백현에게 재촉했다.

[뭐라도 말을 해 봐. 성현이 민망해하잖아.]

‘하려고 했거든요?’

“알았어요.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고요. 그럼 선배랑 제가 다른 점은요?”

“일단 자상함이요?”

“자상함?”

“네. 용규 오빠는 자상했죠. 절 위해줬고.”

“그런가요? 그럼 저는 어떻다는 건가요? 매너 없고, 막무가내라는 말씀인가요?”

강백현이 되묻자, 김성현이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충분히 그래 보이는데요?”

“그래도 전 김성현 씨를 위기에서 몇 번이나 구해드렸죠. 그런데 김성현 씨는 저한테 호텔 밥값을 떠넘겼고요.”

“그 부분은 저도 인정해요. 안~다고요. 그런데 백현 씨! 제가 지금은 백현 씨 고용주거든요? 말 좀 싸~가지 있게 해주실래요?”

“아~눼이! 눼이! 그래야죠! 그래서 제가 이제 뭘 하면 될까요?”

김성현이 살짝 미소를 짓더니, 퉁명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짐을 들어야죠. 수행비서니까요.”

“아~ 짐꾼이었군요. 열심히 일해 보죠. 수행비서 겸 짐꾼 1호. 첫 시작부터 우리 사장님 실망시켜드리면 안 되니까.”

대현백화점 주차장에 주차를 마쳤다.

먼저 내린 김성현을 따라나선 강백현.

그리고 그 뒤에서는 최용규가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아, 진짜 백화점을 왜 왔지?]

강백현은 최용규의 말을 무시하고 김성현을 따라갔다.

지하 2층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길.

지상 1층에 귀금속 코너가 스쳐간다.

김성현과 윤미진이 겹쳐 보이는 것은 어째서일까.

미진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오빠, 저거 보면서 생각나는 거 없어?』

『뭐?』

『왜 이렇게 둔감해? 나한테 잘 어울린다고 생각 안 해?』

그럼 강백현의 행동은 미진이 모르게 슬쩍 가격표를 쳐다보는 것.

미진이가 고른 것은 왜 하나같이 비싼지 모르겠다.

옆에 5만원, 6만원 짜리도 있는데, 미진이가 고른 건 항상 30만원이 넘어간다.

그래. 내 여자니까. 사랑하니까. 그런 이유로 보석만 거의 수백만원 어치는 사준 것 같다.

그렇게 사주면서도 어딘가 못마땅한 백현에게 미진이는 항상 이렇게 말했었다.

『뭘 그렇게 고민해? 결혼하면 어차피 내 것이 오빠 거고, 오빠 것이 내 것인데.』

그래. 그 논리.

그거에 속아서 정말 헤프게 썼었지.

강백현은 미진이가 태웅이와 헤어지고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그리고 김성현의 실상도 궁금했다.

과연 그녀는 오늘 백화점에서 무엇을 할까?

잠시 후면, 그녀의 행동을 통해 그녀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을 텐데… 솔직히 실망스러울 것 같다.

얼마나 사치스러울까?

도대체 이 여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는 길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길었다.

아무 말 없이 위층으로 오르는 김성현.

강백현은 다섯 발자국 뒤에서 수행했다.

말은 거창하게 했지만, 실제로 백현의 오늘 역할은 에스코트도 아닌 단순한 짐꾼이다.

이게 현재 강백현이 맡은 일.

앞서가던 그녀가 여성복 매장에서 멈추더니 강백현에게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줄래요?”

“네. 사장님!”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강백현을 두고 홀로 쇼핑하러 간 그녀.

그런데 10분이 지나도, 15분이 지나도 그녀가 돌아오질 않는다.

강백현은 혀를 찼다.

“그럼 그렇지.”

그러자 최용규가 백현의 옆에서 말동무가 되어 주었다.

[뭐가?]

“그냥 여자는 다 똑같은 것 같은데요.”

[무슨 생각하는데?]

“그냥, 사치스러운 거? 예쁜 것에 환장하는 거? 그런 거 아니에요?”

[성현이는 그런 애 아니라니까.]

“뭐가 아니야? 지금 벌써 고르러 갔잖아요. 오지도 않고.”

[화장실 간 거거든?]

순간 뻘쭘해진 강백현.

“화장실이었어요?”

잠시 후 급한 걸음으로 걸어오는 김성현이 보였다.

“미안해요. 늦었죠? 올라가요.”

“네.”

진짜 화장실이었다니.

그녀가 다시 멈춘 곳은 7층이었다.

아동복 매장.

“아동복 매장? 여기는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강백현 씨.”

“네?”

“학교에서 윤수가 입은 옷 봤어요?”

김성현이 갑자기 윤수 이야기를 꺼냈다.

윤수가 뭘 입었더라?

이런 쪽의 관찰력은 부족한 강백현이다.

솔직히 원장님이 알아서 잘 해주실 거라 생각했기에 윤수의 복장은 백현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잘 모르겠네요.”

“어휴~ 윤수 아버님?”

“네?”

“윤수 옷, 얼마나 오래 된 건지, 보푸라기가 장난이 아니던데. 신발은 다 헤졌고. 학교에서 왜 무시당했을까 생각해봤어요?”

“아니요.”

“이런 거 하나하나가 학교생활에서 아이들 사이에 따돌림 당하게 할 수 있는 거예요. 요즘 부모님들이 자식한테 비싼 거 사주는 건, 사치스러워서도 아니고, 자식에게 비싼 옷 입혀주고 싶어서도 아니에요. 다들 주어진 내에서 합리적인 소비를 하잖아요. 그런데 왜 자식에게는 비싼 옷 입히겠어요? 학교에서 또래들 사이에서 무시당하지 않게 하려고, 그걸 안 입으면 못 산다고 따돌림 당하니까, 그래서 옷도 신발도 가방도 좋은 거 사주는 거예요.”

그녀의 논리적인 접근에 강백현이 대답을 머뭇거렸다.

“윤수 사이즈 뭐예요?”

“네?”

“윤수 신발 사이즈랑 옷 사이즈.”

“잘 모르겠는데….”

“아~ 진짜! 아빠 맞아요? 도대체 아들한테 관심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김성현의 말에 강백현이 고개를 숙였다. 사실을 말하려고 하는데 옆에서 최용규가 신신당부했기 때문이다.

[아빠 아닌 거 절대 말하지 마라? 어? 너 그거 말하는 순간 성현이가 너 자른다. 분명해! 알았어?]

차마 거짓말은 할 수 없었던 강백현.

무응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데 김성현이 꼬치꼬치 캐묻는다.

“키는요?”

“아마… 1미터 28?”

“128cm? 확실해요?”

“아마 맞을 거예요.”

“알았어요. 입혀보고 사이즈 안 맞으면 직접 와서 교환해요! 알았죠?”

“아… 네.”

어느 순간 부터였을까?

강백현은 김성현에게 반말을 할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어른스러운 그녀.

나이는 분명 그녀가 더 어린데, 하는 행동은 자신보다 어른 같다.

그녀는 주니어 남성복을 8벌이나 구입했다.

가격은 56만원.

그나마 여름 정기 세일기간이어서 조금은 할인된 가격이다.

그리고 내려가다 갑자기 남성복 매장에 들렀다.

최용규가 미칠 듯이 팔팔 뛰며 김성현의 주위를 뱅글뱅글 돌았다.

[성현아! 안 돼! 얘를 왜 사줘?]

김성현의 옆에 있어보니까 알겠다.

최용규가 얼마나 집착남이었는지.

‘진짜 죽어서도 진상이네. 재벌이라는데 옷 좀 한 벌 얻어 입으면 안 되나? 어?’

솔직히 명품과는 거리가 멀게 살아온 강백현.

지금도 맞춤양복 13만원짜리 하나뿐. 단벌신사다.

그런 강백현의 몸에 양복을 대보며 스타일을 가늠하는 김성현.

그녀가 고심 끝에 하나를 고르더니 강백현에게 물었다.

“이거 괜찮아요?”

“아… 저는 괜찮습니다. 맞춤 양복이 편하거든요.”

“백현 씨 주려는 거 아닌데요.”

“네?”

“동생 사주려고요. 동생하고 체격이 비슷하거든요.”

“아… 그거였나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설레발을 치던 최용규가 갑자기 인생 승리한 듯 만세를 부른다.

[오. 크크크. 그럼 그렇지. 캬캬캬캬캬! 깜짝 놀랐네.]

다시 주차장에 내려가는 길.

김성현이 입을 열었다.

“강백현 씨는 사연이 많으신 것 같아요.”

“네. 그렇죠.”

“과거는 묻지 않을게요. 다만 저랑 약속했듯이 윤수한테는 잘 해줘요! 그 나이 대에 입은 상처는 쉽게 극복하기 힘들어요. 사랑받아도 잘 자랄까 걱정될 나이인데, 가족과 떨어져 산다는 게 마음이 아파서 그런 거니까, 제가 오지랖을 부려도 좀 이해해주시고요.”

“네. 감사합니다. 근데 성현 씨.”

“네?”

“윤수랑 제가 닮았나요?”

“왜요?”

“그냥 궁금해서요. 자꾸 성현 씨가 윤수 아빠를 저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요.”

[이 자식아!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걸 왜 말해!]

강백현은 최용규가 뭐라 하든 솔직해지기로 했다.

이제까지 그녀에게 한번도 거짓말을 한 적은 없었지만, 오해나 착각도 원치 않았다.

“네?! 아니에요?!”

“네. 저 윤수 아빠 아닙니다. 그냥 후원자 겸 자원봉사자에요. 저희 가족도 다 그렇고요.”

“아… 아… 말도 안 돼! 윤수 아빠 아니었어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네. 윤수는 박윤수고 저는 강백현인데, 일단 성부터 다르잖아요.”

“그거야… 엄마 성을 따를 수도 있는 거고.”

“가능하긴 하지만, 드문 경우죠.”

김성현이 할 말을 잃었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윤수가 강백현에게 아빠라고는 했지만, 강백현이 윤수에게 아들이라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무엇보다 성이 달랐는데도 눈치 채지 못하고 그를 책망했던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왜 알면서도 아무 말을 안했어요?”

“그거야 물어보지 않았으니까?”

“수행비서 한다고 하면 말을 했어야죠. 이건… 취업 사기 아니에요?”

“네. 그래서 말을 하잖아요. 아~ 그렇다고 윤수를 안 챙기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윤수가 저를 제법 잘 따르기도 하고, 저도 윤수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성현 씨가 걱정하는 것처럼 윤수가 부모 없는 아이라고 무시당하는 거, 절대 방관하지 않을 겁니다. 이제 아시겠죠?”

김성현의 목에서 억울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으… 진짜! 너무해!”

“네?”

“아니, 오해했잖아요! 내가 강백현 씨 얼마나 미워했는지 알아요?!”

김성현의 얼굴에 누가 봐도 미안해하는 마음이 떠올랐다.

윤수를 향한 서로의 마음.

그리고 착각, 오해.

모든 게 풀리자, 그동안 서로에게 했던 행동이 떠오른다.

“이제 좀 미안하십니까?”

“알았어요. 사과의 의미로 밥 살게요. 뭐 좋아하세요?”

“뭐든 잘 먹습니다. 가리지 않아요. 특별히 비싼 것도 좋습니다.”

그의 대답에 김성현이 생각했다.

역시 이 남자, 최용규하고는 다르게 매우 뻔뻔하다고.

“근데 강백현 씨?”

“네.”

“강백현 씨가 제 잘못만 계속 강조하는 것 같은데 저도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요.”

“네? 무슨 할 말이요?”

“전화번호부에 저장된 꽃뱀은 뭐였죠?”

“네?! 아….”

“강백현 씨도 나 꽃뱀으로 착각했잖아. 이거 먼저 사과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그건….”

“사과부터 해야겠죠?”

“아… 네. 죄송합니다.”

“그럼 강백현 씨가 오늘 밥 사요. 내가 먹고 싶은 걸로.”

“뭐가 먹고 싶으신데요?”

“강백현 씨가 맞춰 봐요. 내가 좋아하는 음식.”

최용규는 뒷좌석에서 둘의 대화를 들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뭔가 심각한 얼굴.

[‘기류가 묘한데?’]

그때, 김성현의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 누나, 지금 어디야? 밥이나 같이 먹자고 전화했는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