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 깨러 왔습니다-22화 (22/139)
  • 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22화

    이제 퇴직일이 다가왔다.

    강백현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렸다.

    그가 지금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은 공무원 인사기록 카드였다.

    그가 이제까지 일했던 경력 그리고 상훈 사항 등이 포함된 문서로, 퇴직 전에 반드시 써야 되는 각서다.

    -------------------------

    본인은 국가공무원법 제57조 및 동법 제60조, 국가공무원 복무규정 제2조의 규정에 의하여 퇴직한 후에도 재직 중 알게 된 기밀을 절대로 누설하지 않을 것이며, 이를 위반할 시에는 형법 제127조의 규정에 의한 형사 고발조치 등 어떠한 처벌도 감수할 것을 서약합니다.

    부주시청 8급 강백현

    -------------------------

    별 것 아닌 내용이지만 중요한 과정.

    거기에 퇴직급여 신청서와 퇴직발령 통지서 사본도 챙겨야 한다.

    백현의 퇴직 준비를 본 동장이 물었다.

    “대전으로 가니까 좋냐?”

    “좋죠.”

    “채용후보자 등록신청은 했어?”

    “네. 합격 당일에 신청해놨습니다.”

    채용 후보자 명부에 등록하지 않으면 합격을 해도 임용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때문에 등록이 필요하다.

    이 명부는 2년간 유효한데, 만약 합격자가 임용 유예 신청을 하는 경우 이 명부의 유효 기간 안에서 해야 한다.

    보통은 합격 후 6개월 내에 임용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백현은 9급 공무원 채용 등록은 이미 했지만 5급 관련 등록은 아직 하지 못했다. 기간이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5급으로 임용될 텐데 왜 9급 공무원 채용 등록을 하냐고?

    그건 5급으로 임용되는 시기가 올해일지 내년일지 아니면 내후년일지 모르니까.

    즉, 9급 공무원 채용 등록을 하는 것은 5급의 임용시기가 늦어질 것을 대비해서였다.

    9급이야 워낙 많이 뽑고 자리도 많기 때문에 바로바로 임용되는 편이다. 때문에 그리 늦어질 게 없지만 5급의 경우 군복무 후 다시 복직하는 이들이 많아 임용시기가 밀리는 경우가 은근 있었다.

    부주시청 인사과.

    백현을 맞이하는 여성이 있었다.

    바로 일전에 퇴직 신청서를 제출했을 때 퇴직을 만류했던 한현희였다.

    “백현 씨, 결국 퇴직하시네요. 일주일 내로 취소연락 줄 걸로 알았는데.”

    “앞으로 대전에서 일 해야죠. 그리고 더 좋은 소식도 있을 지도 몰라요.”

    5급 공개채용에서 합격했지만, 채용후보자 등록기간이 아니라서 시청으로 통보가 오진 않은 상태다.

    그래서 부주시청 인사과도 그건 몰랐다.

    그런데 한현희가 곤란한 표정으로 강백현에게 말했다.

    “아~ 시장님이 면담 하자고 하시네요.”

    “면담이요? 왜 직접 이야기 안 하시고 현희 씨 통해서 하나요?”

    “퇴직 신청자 대상으로 하는 면담이라 제가 전하는 건 맞는데, 좀 급작스럽긴 해요. 원래 이런 거 없었거든요.”

    “언제인가요?”

    “오늘 인사과에 퇴직관련 서류제출 완료하면 면담 바로 하신다고 하셨어요.”

    “아…. 저만 특별히 하는 것 맞네요.”

    “네. 아마도 그런 것 같네요.”

    시장과 얼굴을 마주하기는 싫었다.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고 있다.

    징계하고 싶어도 이미 한 번 실패했으니, 다시 시도하기는 부담스러울 터.

    알아서 나가준다고 하니 그의 입장에서는 고마우면서도 껄끄러운 게 사실.

    좀 더 괴롭혀야 하는데 그걸 못해서 안달복달 할 게 분명했다.

    시장실 앞.

    시장의 비서실장이 못마땅한 얼굴로 백현을 맞이했다.

    “잘 지내고 있나?”

    “네. 강 실장님.”

    “뻔뻔하네. 사고 그렇게 쳐놓고, 퇴직신청하면서 빠져나가려고? 진짜 너 못 됐다.”

    역시나.

    강 실장의 말투로 봐서 시장이 자신을 곱게 볼 리 없다는 게 분명했다.

    ‘아, 이럴 때 선배는 어딜 간 거야?’

    요즘 따라 최용규 선배가 보이지 않는다.

    성현 씨한테 간 건지, 아닌 건지는 확실하지 않다.

    물론 선배도 자유시간이 필요하겠지.

    선배가 뭐, 내 인생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니고.

    지금 딱히 선배의 도움은 필요 없으니까.

    “네. 못된 저를 시장님이 왜 찾으실까요?”

    “퇴직자 간담회는 원래 하는 거야. 들어가 봐!”

    “네.”

    원래 하는 게 어딨다고?

    시장이 싫으면 안 하는 거지.

    시장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하다.

    시장실 안.

    시장님이 얼마나 대단한 나으린지 모르겠는데 시장실은 엄청 넓었다.

    한 40평은 되어 보이는 커다란 공간.

    그곳을 시장이 혼자 쓰고 있었다.

    시장실 안에는 미니수족관을 방불케 할 정도로 커다란 거실용 어항이 놓여 있고, 수십 개의 난과 생화를 기르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얼마짜리인지 모를 미술품들.

    명품임이 틀림없어 보이는 소파와 수제 가구들까지.

    저 모든 것이 시민들의 세금이라고 생각하니 울화통이 터졌다.

    “왔나?”

    시장은 당연하다는 듯 목에 힘을 주고 있었다.

    “네. 시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일단 앉지. 커피 괜찮은가?”

    “네. 괜찮습니다.”

    시장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직도 알 수가 없다.

    말투는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왜? 날 죽일 놈으로 생각하고 있을 텐데?

    설마 5급 붙은 걸 알아서?

    그것 때문에 후환이 두려워서?

    벌써 눈치 챘다면 대단한 인맥을 가지고 있을 거다.

    그럼 긴장해야 할 터이고.

    그런데 자신이 지켜본 시장은 그냥 건달 출신이다. 그렇게 머리가 좋진 않은 것으로 아는데….

    그 시장의 의도가 조금은 의아하다.

    “자네, 대전으로 간다고?”

    “네. 9급 지방행정직 최종 합격했습니다. 이제 시장님 눈에 띌 만한 일은 없겠네요.”

    그러나 역시 그는 본색을 드러냈다. 금세 백현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로 돌변했다.

    “크크크, 참 바보 같은 선택을 했어.”

    “네?”

    “퇴직신청 한 거 말이야. 자네는 몰랐나? 퇴직신청 안 해도 임용되면 알아서 임용시기에 맞춰 소속변경 해준다는 사실 말이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부주시에서 하루라도 더 근무하는 게 싫어서요. 비리로 얼룩진 시장님과 국장, 기타 똘마니들이 같이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고 있는데 어떻게 근무를 계속 합니까? 그래서 퇴직 신청서를 냈죠.”

    “아주 당돌하네. 그러니까 내부고발도 했겠지. 그래. 잘 가봐! 근데 이건 알아둬. 내년까진 임용 안 될 거야.”

    “네?”

    “퇴직하고 2년 동안 손만 빨고 있을 거라고! 대전시청에 자네 징계의결 요구 건으로 기관장 명으로 임용 유예신청 해두었으니.”

    강백현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시장을 바라보았다.

    “시장님!”

    “응? 왜? 이건 예상 못했나? 대전시에서 바로 임용될 줄 알고 좋았지? 세상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 줄 알았나? 하하! 잘못 봤어. 인마! 너는 이제 x된 거지. 크크크.”

    시장의 본색이 드러나자, 강백현이 빙그레 웃어보였다.

    “시장님! 기분 좋으시죠? 지금 막 행복하고 짜릿하고! 통쾌하고 그렇죠?”

    백현의 당당한 태도에 시장은 당황했다.

    ‘뭐야? 이 새끼 왜 이렇게 당당해?’

    강백현은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쏟아부었다.

    “남들 짓밟으니까 기분 좋고 그렇죠? 사람들은 권력을 가지면 다들 그렇게 되나 봐요. 시장님 지금 말씀이 굉장히 웃긴 거 알죠? 인구 10만 명의 부주시의 시정활동을 책임지시는 기관의 장께서 사사로운 감정으로 일개 공무원인 저를 그렇게 괴롭히시는 거, 쪽팔리지 않으세요?”

    “뭐야?!”

    “그냥 시장님은 딱 그 그릇이구나. 생각이 들어서요. 더 높게는 못 올라가시겠구나~라는 생각이 드네요.”

    “야! 어디서 함부로 입을 놀려? 어?! 너 인마, 까불 상대가 있고, 안 까불 상대가 있는 거야. 네가 내 앞길을 막고도 내가 가만히 있을 줄 알았어? 어휴~ 강 주무관! 대전 가서 잘해! 이렇게 말할 줄 알았어?!”

    “네. 말뿐이라도 그 정도는 해 주실 거라 기대했습니다. 그게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니까요. 저도 시장님이 부르는데 여기 안 들어올 수 있었어요. 간담회 불참해도 되잖아요! 의무 아니잖아요. 그래도 왔어요. 왜요? 시장님하고 그래도 풀 수 있는 건 풀어보자. 그런 생각하고 왔어요. 근데 뭐요? 내 앞길을 막는다고요?”

    강백현의 손짓에 시장이 일어나서 손찌검을 하려 했다.

    하지만 젊은 사람의 힘을 이길 수는 없는 법.

    시장의 날아오는 손을 간단히 쳐낸 강백현이 입을 열었다.

    “손 함부로 놀리지 마세요! 입도 함부로 놀리지 마시고요. 막아보세요. 어디 끝까지 막아 봐요. 내 앞길 막아도 난 스스로 잘 할 테니까!”

    강백현이 시장실 밖을 뛰쳐나왔다.

    안에서 시장의 욕설이 바깥까지 들려왔다.

    『야! 강 실장! 저 새끼 잡아와! 내 앞에 데려와!』

    하지만 백현은 깡그리 무시하고 시장실을 떠나 밖으로 나갔다.

    그는 결심했다.

    나중에 칼을 쥐고 되돌아오겠다고.

    저런 사람들 제 목소리 못 내도록 복수하겠다고.

    한번 권력의 맛을 보면 헤어 나오기 힘든 것 같다.

    노르웨이, 핀란드.

    그쪽의 국회의원, 지자체장들은 다들 봉사직이다.

    수행비서도 없이 홀로 다니며 입법 활동을 하고 월급도 서민에 비해 결코 많지도 않다.

    우리나라 국회의원 1명에게 달리는 수행원은 총 9명.

    시장도 규모에 따라 2명에서 최대 6명까지 특별 채용할 수 있다.

    지인, 친척.

    실력이 아니라 자신이 아는 사람, 편한 사람들로 꽉 채워 정작 실무 능력은 전혀 없는 인간들이 업무를 보고 있는 판국이다.

    선거 때 자신을 도와준 사람을 챙겨준다고 하지만, 그것도 실력이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하는데 인맥으로 뽑다보니 나라가 개판난다.

    여, 야 할 것 없이 똑같았다.

    현재 시장이 있는 정당이나 다른 정당이나 다 마찬가지.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돌아온 주민센터.

    오늘은 사람이 없다.

    사람들이 집 밖에 나오지 않는 건 비가 온다는 예보 때문일까?

    싱숭생숭한 마음은 여전히 텅 빈 듯 허전했다.

    그때 걸려오는 전화.

    ‘얜 뭐야?’

    미진의 전화다.

    잠시 밖으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오빠, 오늘 시간 돼?

    “안 되는데? 그리고 왜 너한테 오빠냐? 우리 모르는 사이 아니었어?”

    - 됐고! 빨리 탄원서 써줘. 태웅 오빠, 오빠 때문에 징계 받는다며?

    “뭐라는 거야? 미친 소리 하지 말고 끊어!”

    - 오빠! 정말 이러기야?

    “응. 너랑 할 말 없다. 끊자.”

    강백현이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바로 걸려오는 전화. 다른 번호로 연락이 왔다.

    “왜?!”

    - 네? 강백현 씨 휴대폰 아닌가요?

    상대의 음성이 달라서 깜짝 놀란 강백현이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아, 네 맞는데요? 누구시죠?”

    “안녕하세요? 전 인사혁신처 채용관리과 최연우 주무관이라고 해요.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강백현 씨가 5급 공개경력채용시험에 최종 합격하셨습니다. 그것 때문에 알려드릴 게 몇 가지 있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아… 넵.”

    “건강검진 하시고 건강검진기록 7월 15일까지 팩스나 메일로 제출해주시고요. 채용후보자 등록도 해주세요. 이건 인터넷으로 하시면 됩니다. 메일 주소하고 팩스 번호는 지금 문자하고 이메일로 보내드릴게요.”

    “아~ 감사합니다. 저 근데 현직 공무원이라서 올해 건강검진 했거든요. 그걸로 대체 가능할까요?”

    “아, 공무원이셨구나. 어디서 근무하세요?”

    “저 부주시요.”

    “아, 전 세종인데! 축하드려요! 저도 공부해서 사무관 되고 싶은데 쉽지가 않네요.”

    뜻밖의 칭찬에 할 말이 없었던 백현이 주제를 바꿨다.

    “저 혹시 임용 시기는 언제쯤 예상되시나요?”

    “확실히는 모르겠는데, 일단 시험 성적이 좋으셔서 금방 될 것 같아요.”

    “네?”

    “이거 얘기하면 안 되는데, 민법 성적 잘 나오셨잖아요.”

    “네. 그랬죠.”

    “일반 행정직, 수석으로 합격 하셨어요. 그래서 원하는 곳 신청하면 바로 가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선배가 도와준 민법.

    그 성적 때문일까? 압도적인 점수이긴 했는데 설마 1등이었을 줄은 몰랐다.

    강백현은 다시 궁금한 점을 물었다.

    “공무원 신규 임용자 교육은요? 과천에서 하는 거.”

    “그건 곧 편성되실 것 같아요. 5급은 1년에 한 번 있거든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강백현이 전화를 끊고 미소를 지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시장님, 오늘 일 실수하신 겁니다.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으셨어요. 전 이제 대전시 소속이 아니라 중앙부처 소속이거든요. 그러니까 시장님이 헛짓거리 하신 겁니다. 아~ 5급 합격했다는 건 제 주변사람 아무한테도 말 안 할 겁니다. 알게 되면 또 임용 유예 기관장 서신 보내면서 제 인생에 훈수 두실 게 분명하니까요. 사람은 자신의 패를 함부로 보여주는 게 아닙니다. 시장님! 오늘 일 반드시 후회하실 날이 올 겁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