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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배기 깨러 왔습니다-21화 (21/139)
  • 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21화

    김성현의 말에 강백현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물론 김성현 보라고 그런 건 아니었다.

    김성현 옆, 유령인 최용규한테 지은 표정.

    [내가 역추적해서 올 줄 알았냐? 너도 생각이 있었으면 공중전화기를 이용하든가 그랬어야지! 왜 핸드폰으로 발신자 제한 표시를 거는데!]

    현재 상황은 황당 그 자체다.

    하지만 일단은 위기를 모면하는 게 먼저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는데요?”

    백현은 짜증이 솟구쳤다.

    ‘겁탈당할 뻔한 거 구해줬으면 그냥 모른 체 하면 되잖아요. 뭘! 나한테까지 찾아옵니까? 네?’

    백현의 말에 김성현이 뒤에 있는 남자를 슬쩍 쳐다보았다.

    “박 기사님, 전화 한 번 걸어보실래요?”

    “네. 아가씨.”

    백현은 황당했다.

    그런데 그 박 기사라는 사람이 전화를 걸자, 강백현의 폰에서 요란한 착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어제 발신자 제한 표시로 걸려온 전화기로 걸었습니다. 저 분이 어제 아가씨에게 전화 건 분 맞습니다.”

    비서의 말에 김성현이 백현을 올려다보며 추궁했다.

    “강백현 씨! 샴페인, 어떻게 알았어요? CCTV가 있었나요? 아니면 공범자였나요? 설명이 필요하겠는데요?”

    강백현은 비서를 흘깃 보고 그녀가 흥신소 직원을 통해 자신을 찾았다는 것을 눈치 챘다. 말은 비서라고 하지만 그녀에게 비서가 있을 리가 없었다.

    요즘은 흥신소 직원과 같이 다니면 그들을 ‘비서’라고 부르라고도 한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백현이 생각에 잠겼다.

    ‘흥신소까지 써서 날 찾아?!’

    ‘어떻게 하냐? 나여서 실망했겠는데?’

    ‘나 돈 없어. 없다고! 너한테 넘어가지도 않을 거고!’

    김성현이 찾아온 이유는 단 하나.

    돈 때문일 것.

    하지만 자존심상 그런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의 자존심을 구겨주기로 했다.

    “맨입으로요?”

    “네?”

    “맨입으로 되겠냐고요?”

    “사례를 원하시는 건가요? 강백현 씨는 볼 때마다 실망이네요. 얼마면 얘기하실래요?”

    이 여자, 강하게 나온다.

    돈 달라고 하면 빠져줄 것 같았는데 의외로 속내를 숨긴다.

    ‘60만원 덤터기 씌울 땐 언제고 어디서 돈 자랑질이야?! 거지면서!’

    강백현은 그녀의 당당한 태도에 자신도 뻔뻔하게 나가기로 결심했다.

    “누가 돈 달라고 했습니까? 어떻게 알았는지 알고 싶으면 들어오시죠.”

    백현은 김성현을 안으로 안내했다.

    그러자 김장을 담그던 아줌마들이 활짝 핀 얼굴로 강백현을 응원했다.

    “어머? 백현 씨가 데려온 분은 누구야?”

    “오우~ 세련됐다. 이곳 사람 아닌 것 같은데?”

    “헤어졌다며! 그새 여자 생겼네?”

    강백현은 생각했다.

    남자 등골 빼먹고 사입었을 명품 블라우스에 치마.

    딱 봐도 세련되어 보이는 복장의 그녀.

    꽃뱀! 과연 네가 이거 할 수 있을까?

    “아~ 오늘 같이 봉사활동 하실 거예요. 성현 씨! 김장 담가본 적 있죠?”

    “네?! 나보고 이걸 하라고요?”

    “네. 저도 하는데요? 얼른 와서 비닐장갑 껴요. 뭐해요? 궁금한 거 알기 싫으면 그냥 돌아가시던가!”

    분명 못한다고 돌아갈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는 짜증을 내면서도 척척 다가와서 비닐장갑을 끼었다.

    “해요! 하면 되잖아요. 대신에 다 끝나면 얘기해주는 거예요.”

    “남자 입으로 두말 하겠어요? 엄마! 여기 배추 10포기만 가져갈게요. 여기 성현 씨가 양념 묻힐 거야.”

    묘한 상황. 아줌마들은 계속해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아줌마들은 김치에 소금을 치면서도 김성현을 쳐다보고, 겉절이에 양념을 묻히면서도 김성현을 바라본다.

    모두의 시선이 김성현! 김성현! 김성현!

    김성현은 사실 민망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봉사활동에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서민들의 생활이 이런 것이었을까?

    난생 처음 경험해보는 김장.

    그리고 처음 만나는데도 어려워하지 않고 자신을 거침없이 챙겨주는 아주머니들.

    “이거 먹어 봐. 간 잘 됐지?”

    양념이 갓 배인 배추겉절이를 입 안에 넣어주는 백현 엄마의 손길에 김성현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네. 맛있어요.”

    “그래. 잘 됐네. 어디서 왔어?”

    “네?”

    “우리 백현이랑은 무슨 관계?”

    “아… 그냥 아는 사이에요.”

    “아! 그래도 뭐, 봉사활동까지 따라올 사이면 마음에 없는 것은 아니겠구만.”

    아까는 아줌마가 문제였지만, 이번엔 백현의 엄마가 문제다.

    백현이는 엄마의 말에 정색하며 소리쳤다.

    “엄마, 그런 거 아니거든요?! 일단 봉사활동 하러 왔으니까 이상한 거 묻지 마세요.”

    김치 담그는 게 끝나자 이제 국수를 삶을 차례다

    강백현이 김성현을 보며 나무라기 시작했다.

    “성현 씨는 국수 한 번도 안 삶아봤어요?”

    “네?”

    “국수 너무 오래 삶아가지고 면이 불고 끊어지잖아요. 아니 집에서 요리 안 해요?”

    “안하는데요?! 여자면 다 요리 해야 되나요?”

    “아니! 뭐, 그렇진 않지만, 너무 기초가 없어서. 좀 그렇네.”

    “뭐래는 거야? 저기요! 빨리 대답해요! 지금 뭐하는 거예요?”

    “일단 끝까지 다 하면 대답해주겠습니다. 엄마! 여기 성현 씨 좀 도와줘. 국수 진짜 못 삶는다.”

    백현의 요청에 백현 엄마가 방긋 웃으며 김성현을 마크한다.

    “그래. 엄마가 붙어줄게. 우리 젊은 언니! 이리 와 봐. 국수 삶을 때 멸치는 대가리를 이렇게 따줘야 돼. 그냥 넣고 삶으면 국물이 쓰단 말이야. 이거는 머리 따다 말았네. 멸치 똥 그대로 넣을 거야?”

    “……”

    김성현이 멸치머리를 따고 똥을 빼기 시작한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아줌마가 한 마디 슥 끼어든다.

    “그래. 아가씨는 멸치 똥하고 머리 분리 담당. 국수는 언니들이 삶을 테니까 그것만 해.”

    비밀을 알기 위해 지방까지 온 김성현이었지만 백현과 백현의 엄마, 아주머니들 틈에 섞여서 멸치 똥만 주구장창 따고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

    국수 60인분이 준비되자 아이들이 몰려왔다.

    신생아부터 18살 고등학생까지.

    다들 부모가 없거나, 부모가 형편이 안 돼 시설에 맡겨진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해맑았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응. 많이 먹어!”

    “좀 더 주세요!”

    “다 먹고 와. 남으면 더 줄게.”

    “네!”

    오랜만에 온 자원봉사자들이 좋은지 자꾸 품에 안기는 아이들.

    외롭게 자라다보니 어른들의 살가움이 그들에게는 너무나 행복한 순간이 된다.

    강백현이 그런 장면을 보고 있는 김성현에게 물었다.

    “어때요?”

    “뭐가요?”

    “저런 애들 보면서 아무 생각 안 들어요?”

    “그냥… 불쌍한 애들이구나. 잘 챙겨줘야겠다. 그런 생각?”

    “많이 발전했네! 남자 등골만 빨아먹더니!”

    “어휴! 내가 언제 그랬어요? 아~ 됐고요! 샴페인 어떻게 알았어요? 설마 나 도청하고 그런 거 아니죠?”

    “아… 몰라요! 그냥 감이 그랬어. 꿈에서 선배가 나와서 얘기하더라구. 성현 씨 남자 조심해야 된다고! 샴페인에 수면제 타고 그런다고!”

    강백현이 얼버무리자, 김성현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꿈? 무당이에요? 그걸 말이라고 해요?”

    “아니면 말고!”

    “서울에서 여기까지 내려왔는데, 진짜 이럴 거예요?”

    김성현이 짜증을 부리자, 윤수가 백현에게 달려오며 말했다.

    “아줌마, 우리 형한테 화내지 마!”

    “화 낸 거 아니야.”

    “아줌마 미워! 미워!”

    “꼬마야. 나~ 그런 사람 아니야.”

    김성현의 말에 윤수가 작은 주먹으로 성현의 허벅지를 때리며 말한다.

    “미워! 빨리 가! 우리 집에서 가라고!”

    “……”

    윤수의 완고한 고집에 결국 김성현이 마지못해 일어났다.

    백현의 엄마가 윤수를 다른 곳으로 분리시켜 놓았고, 강백현은 김성현을 배웅하려 고아원 밖으로 나왔다.

    차량 앞에서 대기하던 비서가 뒷문을 열어준다. 헌데 김성현이 차를 타려다 말고 강백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강백현 씨.”

    “네?”

    “뻔뻔하시기도 하고 정말 예의 없는 면도 있어서 사실 좀 그랬어요.”

    “눼이눼이. 그러시겠죠.”

    “그래도 고맙단 인사는 하고 싶네요. 우리 악수하죠.”

    손을 내미는 김성현. 그리고 그걸 보며 황당한 표정을 짓는 강백현.

    그런데 고아원에서 빠져나온 윤수가 강백현의 손을 잡더니 김성현의 손 위에 놓는다.

    “아줌마랑 화해 해!”

    민망한 상황이다.

    거리를 두고 싶은 백현이었지만, 윤수가 있으니 더 이상 각을 세우진 않았다.

    “김성현 씨, 우리 윤수가 화해하라고 해서 화해하는 겁니다. 아시겠죠?”

    “고맙다고 하는 사람한테 꼭 그렇게 말해야겠어요?”

    “그래야 더 이상 서로 안 볼 테니까요.”

    두 사람이 손을 꼭 잡고 흔들었다.

    그런데 윤수도 그 손을 잡았다.

    김성현은 생각했다.

    ‘아이한테 잘하는 거 보면 나쁜 사람은 아닐지도.’

    김성현의 옅은 웃음에 윤수 또한 씩 웃으며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아줌마! 내 이름은 윤수. 박윤수.”

    “그래. 내 이름은 성현, 김성현. 근데 아줌마 아니거든? 아직 결혼 안했거든?”

    “어? 그럼 잘 됐다. 우리 형도 결혼 안 했는데?”

    “응?”

    다시 되묻는 김성현의 말을 깡그리 무시하고 자기 할 말을 하는 윤수.

    “누나! 성현 누나. 또 올 거지? 우리 형이랑 나 보러 또 올 거야?”

    “아니, 엄마는?”

    “엄마는 하늘나라에 계셔. 그러니까 누나가 우리 형이랑 결혼해서 나 데려가. 엄마가 있어야 형이 나 데려갈 수 있어.”

    이 말로 강백현이 돌싱이라고 확신한 김성현이었다. 그것도 아빠인 자신을 형이라고 부르라는 몰상식한 아빠.

    그녀는 윤수의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

    “누나는 다른 남자 있어.”

    “어디에 있는데?”

    “윤수네 엄마랑 같은 하늘나라에. 하나님께서 돌봐주고 계실 거야.”

    김성현의 말에 유령 최용규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알 러뷰! 영원히 사랑해!]

    물론 유령이 무슨 소릴 하건 자기 말을 계속하는 윤수였다.

    “그럼 누나는 결혼 안 해? 우리 형이랑 결혼해!”

    “윤수야. 네 형아는 누나 스타일 아니야.”

    “그걸 어떻게 알아? 만나보면 달라질 수도 있잖아.”

    어린 아이의 조숙한 말에 김성현이 빙그레 웃었다.

    “애가 못하는 말이 없네.”

    “누나! 약속해! 다음 달에도 또 같이 온다고! 매달 한 번씩 꼭 온다고!”

    아이가 보채자, 강백현이 옆에서 지켜보다 한 마디 거들었다.

    “윤수가 그렇게 말하는데 한 번 들어줍시다. 한 달에 한 번은 괜찮잖아요? 네?”

    “그렇게 쉽게 약속하면 안 되죠.”

    “누나! 전화번호.”

    윤수가 집요하게 김성현의 전화번호를 받았다. 그리고 백현에게 말했다.

    “형아, 핸드폰!”

    “어? 왜?”

    “줘봐! 빨리! 빨리!”

    윤수가 강백현의 전화에 김성현의 번호를 입력하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번호 땄다. 이제 둘이 잘해보는 거야! 응?’

    그런데 번호 위에 뜨는 글자.

    [꽃뱀]

    그걸 본 김성현이 강백현을 찌릿 째려보았다.

    “이제까지 날 꽃뱀이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아니었습니까?”

    “제대로 잘못 봤거든? 윤수 아버님?!”

    * * *

    김성현이 기사가 모는 벤츠를 타고 떠나갔다.

    손을 흔들며 끝까지 배웅한 강백현과 박윤수. 아쉬워하는 윤수를 향해 강백현이 물었다.

    “그 누나 좋냐? 왜 그랬어?”

    “응. 엄마같이 포근해. 얼굴도 예쁘고.”

    “얼굴이 다는 아니다. 윤수야. 세상 살아보면 너도 그걸 알 때가 올 거다.”

    “몰라. 예뻤어. 형 좋아하는 것 같았어.”

    “전혀 아니거든. 완전 잘못 봤거든? 그리고 왜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떼를 썼어? 그러면 안 되는 거 알잖아.”

    “그거야… 형이 저 누나랑 결혼했으면 하니까….”

    “치! 됐다. 윤수야. 들어가라. 형은 이제 집에 가야겠다.”

    아쉬워하는 윤수. 하지만 헤어짐이 있기에 다시 만나는 날도 있다.

    “다음 달에는 올 거지?”

    “그래. 와야지. 윤수야. 얼른 들어가자. 원장님하고 동생, 형들이 걱정하겠다.”

    “응!”

    백현은 윤수를 들여보내고 엄마가 나오길 기다렸다. 헌데 최용규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백현아, 성현이 꽃뱀 아니다.]

    “응?”

    [너 저번에 가서 60만원 냈던 호텔 있지?]

    “응.”

    [그거 성현이네 호텔이야. 성현이는 그 메리야트 호텔 그룹 장녀고.]

    “뭐?! 선배! 그게 사실이야?”

    [그래. 성현이가 나한테 돈 뜯은 적 없고, 그럴 이유도 없지. 마음씨 착하고 괜찮은 애야.]

    “아니, 그걸 왜 지금 이야기하는 겁니까?”

    [그거야 너랑 안 어울리는 여자니까 그렇지.]

    “네?”

    [‘네?’는 뭐냐?]

    “됐습니다. 그만 하시죠.”

    백현은 최용규의 말에 실소하고는 아무 말 없이 엄마를 향해 걸었다.

    “엄마! 집에 가요!”

    “응. 근데 그 여자는 누구야?”

    “에이! 나중에 얘기해 줄게요.”

    “궁금해서 그러지. 우리 아들하고 잘 어울리겠던데?”

    “나랑 안 맞아요. 사는 환경이 다른 사람인데요. 엄마! 오늘 고생했어요.”

    “그래. 백현아. 들어가자.”

    “네!”

    강백현은 엄마를 모시고 집으로 향했다.

    그 가족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최용규.

    한 달에 한 번, 봉사활동을 하는 백현의 가정.

    별 거 없어보였던 백현네 가족은 오히려 자신의 집보다 화목하고 즐거워보였다.

    [‘소소한 삶도 나름 좋을지도.’]

    서민의 삶.

    분명 자신이 추구하던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는 백현네 가족.

    그들의 삶을 지켜보는 최용규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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