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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배기 깨러 왔습니다-20화 (20/139)
  • 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20화

    김성현은 발신자 표시제한 전화가 끊긴 후, 정면을 바라보았다.

    샴페인에 수면제가 들었다?

    상상도 못했던 일.

    하지만…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있다면?

    지금 이 장소는 자신 스스로 찾아왔다.

    더구나 남녀 사이 무슨 일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장소. 호텔의 초고급 슈페리어 룸.

    거기에 샴페인과 케이크.

    몹쓸 상상이었지만, 모든 게 들어맞는다.

    이곳에서 자신이 몹쓸 짓을 당해도 증거도 증인도 없다.

    누군지 모를 남자와의 전화통화였지만, 합리적인 의심이 김성현을 사로잡았다.

    그때 고기웅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

    “발신자 표시제한? 누구에요?”

    “아, 스팸 전화인 것 같아요.”

    “아! 요즘 그런 전화 많이 오죠? 통신사 바꿔라, 인터넷 가입해라, 대출해라. 저희한텐 다 의미 없는데~ 안 그래요?”

    “네.”

    고기웅은 방금의 전화에 대한 의심을 거두고 자신을 어필하기 시작했다.

    “아깐 너무 들이댔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 정말 나쁜 사람 아니에요. 순수한 마음으로 성현 씨한테 관심 있고, 성현 씨하고 만나길 기다렸어요. 하지만 이렇게 안 하면 안 만나주니까.”

    “네.”

    “그럼 한 잔 들죠!”

    고기웅이 샴페인 잔을 들었다.

    그러나 김성현은 그의 행동에 호응하지 않았다.

    수컷이 암컷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하는 행동.

    가증스러운 행동이 성현으로 하여금 경계를 풀 수 없게 했다.

    이를 눈치챈 고기웅이 표정을 관리하며 슬쩍 김성현의 눈치를 보았다.

    ‘뭐지? 수면제를 눈치챈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다행히 김성현이 알아챈 것 같진 않았다. 그녀는 목이 마른 듯 침을 삼키며 고기웅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했다.

    “저 물 좀 가져다주실래요? 술 먹기 전에는 항상 물부터 먹는 버릇이 있어서.”

    그녀의 말에 고기웅이 웃으며 냉장고로 걸어갔다.

    “진작에 말씀하시지. 아~ 제가 성현 씨 취향을 몰랐네요. 앞으로 주의할게요. 컵에 따라드릴까요? 아니면 생수병 그대로?”

    “따라주세요.”

    김성현은 그가 냉장고에서 물을 따르는 동안 샴페인 잔을 서로 바꿨다.

    계속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기에 그가 뒤돌아보는 짧은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들키지 않았다.

    고기웅은 아무것도 모른 채 행복한 얼굴로 물 한잔을 건넸다.

    김성현을 문을 벌컥벌컥 마시며 쿵쾅쿵쾅 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눈앞의 샴페인 잔을 보았다.

    “한 잔 할까요?”

    “네. 그러죠.”

    고기웅의 검지와 엄지에 잡힌 샴페인 잔이 높게 올라갔다.

    미묘하게 긴장된 분위기.

    남자는 이제 곧 다가올 파티를 기원하며 샴페인을 마셨고, 여자의 목으로 샴페인이 넘어가는 것도 확인했다.

    고기웅은 활짝 웃었다.

    1/3 이상 샴페인을 들이킨 김성현.

    이제 곧 그녀는 잠들 것이고, 다른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것이 될 것이다.

    그에게 여자는 쉬웠다.

    제 발로 호텔로 찾아오는 여자와는 강제적인 관계를 맺더라도 법적으로 불리할 게 없었다.

    강제로 데려온 것도 아니라 그녀가 스스로 찾아왔고, 룸서비스를 시켜 같이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신 후 서로가 원한 상태에서 관계를 맺은 것으로 해석이 된다.

    대한민국의 법이 그랬다.

    고기웅에게 여자란 육체적인 쾌락,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어차피 도구.

    쉬운 여자일수록 흥미를 잃는 법이다.

    김성현도 마찬가지.

    오늘 이후로 다시는 연락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은 고기웅.

    그가 먹잇감을 향해 늑대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제 슬슬 여자의 입에서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올 때였다.

    [어지럽네요.]

    [어? 내가 왜 이러지?]

    보통 이런 패턴.

    그런데 왜? 왜! 왜 멀쩡한 거야?

    고기웅이 당황했다.

    그리고 처음 느껴보는 이상한 두통이 찾아왔다.

    주변 풍경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왜 내가? 왜 내가 졸린 거지?

    아…….

    눈이 감겼다.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두 시간 뒤. 의식을 되찾았다.

    테이블 아래 쓰러진 상태였다.

    “으으윽… 뭐지?”

    자신의 옆에 있어야 할 김성현은 사라진 상태.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보지만 받지 않는다.

    이제는 스스로도 의심이 들었다.

    내가 수면제를 먹은 거야?! 그런 거야?!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호텔 로비에서 대기하고 있는 자신의 비서를 불렀다.

    “박 비서!”

    - 네. 도련님.

    “당장 올라와!”

    - 네.

    박지훈이 방으로 들어왔다.

    샴페인 잔이 깨져서 카페트는 엉망, 도련님의 셔츠도 흠뻑 젖어 있었다.

    “수면제를 어떻게 탄 거야?!”

    “제대로 탔습니다. 혹시 효과가 없으셨습니까?”

    “뭘 제대로 타? 내가 자버렸잖아. 김성현 앞에서 꼴사납게 이게 뭐냐고! 어?!”

    수행비서 박지훈은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은 절대 실수하지 않았지만, 이런 일은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도련님의 계획은 실패했다.

    여기서 아니라고 잡아떼다가는 모가지가 날아간다.

    직장 자체가 날아간다.

    그래서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 멍청한 새끼야! 나가! 이 머가리 같은 새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 * *

    같은 시각.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온 김성현이 펑펑 울었다.

    설마설마 했지만, 고기웅이 진짜로 자신을 겁탈하려 들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1분도 안되어 눈이 풀리고 힘을 잃고 쓰러지는 고기웅.

    그 모습을 보는 김성현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버렸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길.

    문제의 그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그 이름 석자 고기웅.

    이제는 쳐다보기도 싫은 사람. 그래서 핸드폰을 바로 꺼버렸다.

    ‘이 결혼 못해. 나 못할 것 같아. 진짜 못해! 못 한다고!’

    억지로 만나야 하는 관계라서 더 가혹한 운명이다.

    그녀의 곁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최용규.

    그는 한참 동안 성현의 곁을 떠나지 못했다.

    [괜찮아. 내가 지켜줄게. 성현아, 넌 내가 지켜줄게.]

    * * *

    다음 날.

    강백현은 시험 준비로 방문하지 못했던 동네 보육원을 방문했다.

    한 달에 한 번, 3년간 꾸준히 봉사활동을 하던 곳이었다.

    강백현네 세 가족은 이웃의 도움이 되고자 한 달에 한 번씩 여기 시설을 찾는다.

    오늘은 아버지가 경비 일로 빠지셨고, 엄마와 둘이 봉사활동을 왔다.

    요양원 원장님이 그런 둘을 반갑게 맞이했다.

    “백현 씨 왔어요?”

    “네. 원장님, 자주 못 와서 죄송해요. 3개월 만이죠?”

    “그래. 괜찮아. 그나저나 백현이 엄마! 남편 분은 어따 두셨어?”

    “에이! 오늘 경비 서는 날이야. 그래서 아들만 데려왔지.”

    “그랬구나. 오늘 김장 담글 거니까, 주방으로 와. 백현 씨는 힘 좋으니까 배추 좀 옮겨줘. 200포기 담아야 돼.”

    “200포기요?”

    “응. 그것도 두 달이면 다 먹어. 많은 양 아니야.”

    시끌벅적.

    봉사활동 온 자원봉사자들.

    오늘은 평소보다 많은 20명이다.

    일요일이다 보니 직장 다니는 사람들도 많이 와서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되었다.

    다 좋은데 자원봉사자들은 입이 문제다. 남의 인생이 뭐가 그리 궁금한지 오랜만에 봉사활동을 나온 백현에게 관심이 많다.

    “백현 씨는 장가가면 아내가 좋아하겠다.”

    “네?”

    “김치도 담글 줄 알지. 국수도 잘 말지! 거기에 키도 크고 얼굴도 훤칠하고 직장도 안정적이지.”

    “아… 그런가요?”

    “이제 결혼해야지? 작년에 여자친구 데려오지 않았었나? 미진이라고 했지?”

    “아….”

    백현이 곤란한 표정을 지어보이자, 봉사활동 온 아주머니들이 눈치 없이 물었다.

    “왜? 왜? 이미 결혼 했나? 임신 했어?”

    “아니요. 저희 헤어졌어요.”

    “아 왜?! 둘 다 공무원이라서 걸어 다니는 중소기업인데, 왜 헤어져? 웬만하면 만나야지. 안 그래?”

    “그러게. 다시 잘 해봐!”

    봉사활동, 다 좋은데 진짜 저 주둥아리들이 문제다. 아줌마들의 가십거리가 되는 것만 아니면 진짜 좋을 텐데….

    다행히 엄마가 있어서 더 이상 미진이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이 여편네들! 니네 아들이나 간수 잘해! 내 아들이 너네 물건이야? 응?”

    그때 백현이를 보며 환한 웃음을 지으며 한 꼬마가 뛰어왔다.

    “형아! 백현이 형아!”

    “아~ 윤수니?”

    “응! 형! 놀아줘!”

    “지금은 김장 담그는 중이라 안 되는데?”

    “아아아~ 형아, 우리 빨리 풋살 하러 가자! 응?”

    그러고 보니 어느 새 윤수 뒤로 꼬맹이들이 쭉 섰다.

    윤수, 정현이, 수종이, 형태, 민복이 거기에 서진이였나?

    백현은 녀석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분명 맞을 거다.

    “윤수야. 정현이, 수종이, 형태, 민복이 데리고 먼저 풋살장 가 있어. 형이 10분만 더 김장하고 너희랑 놀아주러 갈게.”

    이름을 불러주니 아이들이 좋아한다.

    “알았어. 형! 형! 저번처럼 골키퍼 해야 돼. 우리 그럼 슈팅 연습하고 있는다?”

    “오케이. 10분 뒤에 갈게.”

    “응. 형, 우리가 20번 차서 10번 이상 골 넣으면 저번처럼 형이 우리 아이스크림 쏘는 거야! 이번엔 안 져!”

    “알았다니까?! 에이, 맨날 오면 풋살만 하재!”

    “응. 우리 먼저 간다!”

    윤수를 필두로 다섯 아이들이 보육원 뒤쪽에 있는 풋살장으로 이동했다.

    사실 풋살장이라고 부르기는 애매한 곳이었다.

    먼지는 풀풀 날리고, 골대에는 그물 하나 없는 낡은 시설이었지만, 아이들은 밝게 잘 자라고 있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잘생긴 형.

    그런 백현을 보며 아줌마들이 말한다.

    “백현이가 인기가 많네.”

    “그렇죠. 봉사활동 오래 했으니까.”

    “후후, 김장은 맡기고 가 봐! 애들하고 놀아줘.”

    “아~ 미안하네요.”

    “미안하긴! 얼른 놀아줘야지.”

    풋살장에서 아이들은 신나게 공을 찼다.

    매정하게 다 막아내는 골키퍼 강백현.

    “아~ 진짜! 또 막았어!”

    골을 막으면 짜증을 부리는 순수한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형! 한 손 주머니에 넣고 막아. 그럼 인정!”

    아직 10살도 안 된 주제에 협상부터 하는 녀석도 있다.

    생돈 나가는 게 아깝기는 했지만 오늘은 져주기로 했다.

    오랜만에 봉사활동을 오랜만에 왔으니,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 하나씩 사주면서 즐거운 추억을 선사할 예정이다.

    골을 넣은 윤수가 백현에게 만원을 받은 후, 정현이한테 말했다.

    “정현아! 형이 만원 준 거 가지고 애들하고 같이 편의점 가서 아이스크림 사와.”

    “윤수 형은 같이 안 가?”

    “난 백현이 형이랑 이야기 좀 하고 있을게. 아이스크림은 너랑 똑같은 걸로 골라.”

    “응.”

    강백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윤수를 바라보았다.

    윤수는 자꾸 몸을 꼬고 쑥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물었다.

    “왜? 할 말 있어?”

    백현의 질문에 윤수가 억지로 해맑게 웃으며 물었다.

    “응. 백현이 형! 언제 결혼해?”

    “나?! 당장은 안 할 건데?”

    그런데 백현의 대답에 윤수의 표정이 굳어졌다.

    녀석은 자신의 본심을 말했다.

    “나, 여기 살기 싫어.”

    “왜?”

    “엄마, 아빠 없다고 학교 친구들이 놀린단 말이야.”

    “……”

    백현은 마음이 아팠다.

    고아인 윤수.

    더구나 얼굴에 다친 흉터가 있다는 이유로 입양이 여러 번 무산되어 더욱 더 안타까웠다.

    그런 윤수가 투정을 부린다.

    “형! 결혼 언제 해? 빨리 해! 빨리! 어?”

    “형이 결혼하는 게 왜?”

    “형 결혼하면 나 입양해 줘야지. 형이 3년 전에 말했잖아. 만약에 결혼하면 나 입양하는 거 생각해보겠다고.”

    “윤수야. 그거야 장난스럽게 말한 거고.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

    아직 10살. 윤수는 3년 전에 장난스럽게 했던 그 말을 아직도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 때문에 백현은 미안했다.

    제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그런 부분은 단호하게 안 된다고 했어야 했는데. 녀석은 아직도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었다.

    “안 돼?”

    “그건 대답 못 해줘. 윤수나 나한테나 굉장히 어려운 문제야.”

    “친구들 다 입양 됐는데, 난 안 됐단 말이야. 아무도 나 데려가지 않는다고! 나 형이랑 같이 살고 싶어! 형 같은 아빠랑 살고 싶다고! 형이 내 아빠 해주면 되잖아. 그럼 나 학교 가서 아빠 생겼다고 자랑할래! 그러니까 빨리 형 결혼해! 응?”

    강백현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미안. 윤수야.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응. 알았어. 그럼 대신 이거 하나만 부탁할게. 들어줄래?”

    윤수가 백현의 손을 꽉 잡았다.

    “말해봐. 형이 들어줄 수 있는 건 들어줄게.”

    “나… 형하고 둘이 있을 땐 아빠라고 불러도 돼?”

    10살과 32살. 22살 차이.

    분명 나이로 보면 아빠와 아들로 봐도 무방하지 않은 정도.

    윤수는 울먹였다.

    아빠 없는 서러움.

    그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순 없었다.

    자신은 겪어보지 못했으니까.

    그래서일까?

    아이의 바람을 꺾고 싶지 않았다.

    강백현이 윤수에게 말했다.

    “그건 안 돼.”

    “한 번만! 어? 응?”

    “알았어. 그럼 딱 한 번만 불러. 더 이상은 안 돼. 알았지?”

    “응. 아빠! 아빠! 안아 줘!”

    윤수가 백현의 품에 꼭 안겼다. 따스한 아이의 품.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백현은 녀석을 안아주며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런데 그 뒤로 시선이 마주치는 한 여자가 있었다.

    백현은 그녀를 잘 알고 있었다.

    선배의 전 여자친구. 김성현이다.

    그녀의 청순한 목소리가 정확히 강백현을 향했다.

    “강백현 씨?”

    “네. 성현 씨가 여기 무슨 일이에요?”

    그리고 김성현을 본 윤수의 눈빛이 번쩍 하고 빛났다.

    “누구야?”

    “아드님이랑 있었군요. 혹시 발신자 표시제한으로 전화를 걸은 게 강백현 씨 맞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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