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15화
퇴직 신청서를 제출하려는 백현.
그런데 접수 담당자이자 공무원 선배인 한희진 씨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백현 씨, 퇴직하려고요?”
“네. 그렇게 됐네요.”
“공무원보다 좋은 직장이 어디 있다고 퇴직을 해요? 시간 지나면 다 괜찮아지니까, 그냥 다녀요.”
“말씀만이라도 감사하네요. 저 대전으로 갑니다.”
“대전? 뭐하게요?”
“공무원 시험 봤는데 붙어서요.”
백현의 대답에 한희진이 밝은 얼굴로 축하해줬다.
“잘 됐네! 백현 씨는 일 잘하고 머리 좋으니까 한 번에 붙는구나. 7급 붙었어요? 이제 승진이네!”
“아니요. 9급입니다.”
“아… 괜찮겠어요? 3년 날리는데….”
“괜찮습니다.”
“임용일은 결정 났어요? 몇 개월 대기한대?”
“그것까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퇴직하고 생각하려고 합니다. 접수 부탁드리겠습니다.”
“후회 안 하죠? 접수하면 끝인데… 임용일 결정난 후에 퇴직신청 해도 상관없어요. 공무원에서 공무원으로 가는 거잖아요.”
“그래도 퇴직하고 싶네요.”
“알았어요. 접수할게요. 1주일 안에 연락 줘요. 그때까지는 철회 가능하니까. 알겠죠?”
“네. 감사합니다.”
“그래요. 백현 씨 대전으로 간다니까 서운하네. 20~30년 계속 같이 볼 줄 알았는데….”
“후후, 저도 서운하네요. 가보겠습니다. 선배님.”
“알았어요. 가서도 가끔 연락해요!”
“네. 알겠습니다.”
부주시 공무원 1,526명. 많다면 많지만, 3년 정도 지나보면 웬만하면 알게 되는 사이.
그래서일까? 그녀의 말이 조금은 슬피 들려왔다.
3일이 지났다. 최용규는 현재 유럽에서 휴식 중인 전 여자친구 성현이를 보러간다며 떠났다.
그리고 강백현은 여전히 주민센터로 출근중이다.
조금 다른 면이 있다면 이제 공부를 안 해도 되니 조금은 여유가 생겼다는 것.
그래서일까?
“오늘 식사는 오리훈제로 하시는 게 어떠십니까?”
“오리훈제?”
“네! 오늘 장악산 입구에 오리훈제집 새로 오픈 하거든요. 저희 지역 주민이 하시는 거고 해서, 인사도 드릴 겸 같이 가시죠! 첫날이라 50% 할인도 한다고 합니다.”
“그래도 비싸지 않아?”
“제가 쏘겠습니다! 저 이제 얼마 안 남았잖아요.”
“뭐가 얼마 안 남아?”
백현의 말에 동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백현은 이제 거침이 없었다.
5급 공채 시험에 합격했기에 입가에도 웃음이 걸렸다.
“아~ 동장님! 아직 모르셨어요? 저 퇴직 신청 했습니다! 다음 달까지만 다니고 그만 둡니다.”
그러자 다들 놀란 분위기.
원래 시청에서는 소문이 빨리 나는데, 주민센터까지는 아직이었나보다.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이따 식사하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 * *
오리훈제집은 오픈 첫날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았다.
장악산이 원래 유명한 등산코스이기도 하고, 지역 주민들도 주변 탐방로 산책을 많이 다니기에 유동인구가 많은 편이다.
메뉴는 생각보다 단촐했다.
오리훈제 대(大) 45,000원, 수제비 15,000원.
바쁜 와중에서 백현을 보며 반갑게 맞이해주시는 여사장님.
“우리 백현 씨 왔어?”
“네! 할머니는 건강 괜찮으시죠?”
“아~ 그럼. 요즘에는 백현 씨가 소개해준 사회복지사가 직접 집까지 방문해주니까 정말 좋아하시잖아.”
“그래요? 우리 복지사 재성이 형이 잘 하나 보네요!”
백현의 말에 여사장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누구 소개로 왔는데 잘~ 하지! 싹싹하니까 우리 할머니가 좋아하더라. 사실~ 우리가 음식장사하다 보니까 낮에는 집에 없어서 불안하잖아~ 그래서 할머니가 매일 혼자 계시는데 적적하기도 하잖아.”
“그래서 제가 복지사 형님, 소개해드렸잖아요.”
“그러니까 하는 말이지! 1주일에 한 번이라도 그 재성 씨가 집에 와 주니까 얼마나 좋아? 사실 노인네가 혼자 있으면 심심해~ 말 걸어줄 사람도 없고, 전화통화 할 사람도 거의 없잖아. 그러니까 좋아하지. 물론 울 할머니가 재성 씨 말고 백현 씨도 좋아해! 말이 길어졌네. 뭐 줄까?”
“여기 오리훈제 대(大) 하나 주시고요. 수제비는 따로 시켜야 되나요?”
“수제비는 당연히 서비스지!”
“서비스 금액 3만원 넘어가면 안 됩니다. 김영란 법에 걸려요!”
“후후~ 이거 안 걸려! 다른 사람도 수제비는 공짜로 다 주는 거야! 저건 오리훈제 안 시켰을 때만 만오천원 추가 받는 거고, 오리훈제 시키면 서비스로 다 나가! 그 정도 센스는 있어.”
일한지 얼마 됐다고 벌써 마을 주민과 친근하게 지내는 강백현.
그걸 보며 동장은 의아한 표정이었다.
강백현이 씩 웃었다.
“사장님~ 이 분이 저희 동장님이세요. 5개월 전에 부임하셨고요. 내년까진 아마 계실 거예요.”
“아! 동장님이시구나. 반갑습니다.”
“하하, 네! 잘 부탁드려요.”
“네!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인사성 밝은 백현이 때문일까?
주민의 밝은 인사에 동장의 얼굴에 미소가 피었다.
오리훈제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동장이 백현에게 말했다.
“오늘은 내가 살게.”
“네?”
“내가 산다니까.”
동장의 말에 백현이 말했다.
“아뇨. 제가 사야 합니다. 제가 사게 해주시죠.”
“왜?”
“아시잖아요! 저 징계위원회 못 들으셨어요? 그것 때문에 동장님 곤란하셨다면서요.”
백현의 말에 동장이 빙그레 웃었다.
“아… 그거 난리친 거?”
“네. 정말 죄송했습니다.”
“아니야. 오히려 잘했어! 백현이 너 한방 제대로 터트렸다며? 그것 때문에 내가 한이 풀리더라.”
동장은 신이 난 듯 말을 이어갔다.
“그것 때문에 시장 난리 났다면서! 큭큭. 선관위에서 뇌물 받았는지 계좌 추적하고 있다던데? 잘못하면 선거법 위반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는 얘기도 들리더만.”
동장의 말에 팀장이 말을 보탰다.
“백현이 네가 뇌물 관련 이야기, 국장 앞에서 터트렸다고 해서 나하고 동장님하고 얼마나 기분 좋았는지 아냐? 사실 쉬쉬해서 그렇지. 뇌물 그거 다 알잖냐! 나도 그렇고, 동장님도 그렇고. 뇌물 안 주면 끈 떨어지는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응?”
그들도 어떻게 보면 피해자.
뇌물을 주지 않아 변방으로 밀린 것.
이제야 그걸 이해한 백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
백현을 보며 팀장이 미소 지었다.
“아무튼 그것 때문에 다들 난리 났어. 면장, 읍장 나간 녀석들! 지금 다 돈 누가 줬나 눈치 엄청 보고 있던데! 올해 국장 승진 예정자가 20명이거든?”
“20명이나 됐나요?”
백현의 질문에 동장이 신이 났다.
“그래. 내가 그 중에 승진 서열이 19등이야. 무슨 말인지 알지? 그동안 승진 하고 싶어도 못 했단 말이야. 그런데 이제 상황이 달라졌지. 이제 뇌물 준 놈들이 난리 나는 거고, 뇌물 안준 놈은 승진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 이거지. 크크크, 그러니까 밥은 내가 사야지? 오히려 고마운 건 나인 걸?”
항상 느긋하고, 열의 없는 동장님에게서 밝은 얼굴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일까?
“네. 그럼 부담 없이 잘 얻어먹겠습니다.”
백현은 씩 웃으며 얻어먹기로 했다.
동장님이 그동안 왜 한량하게 살고 있었을까?
왜 의욕 없이 근무하고 있었을까?
사실 그가 처음부터 일 안 하고 나태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뇌물을 싫어했으니까.
돈 받는 것도 싫어하고, 돈 주는 것도 싫어하고.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었기에 받은 차별이다.
적폐세력으로 가득 찬 공무원 사회에서 오로지 실력으로 승부했다 좌절한 그런 모습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긴, 누가 승진하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뇌물을 주지 않으면 절대 승진하지 못하는, 이런 구조 때문에 의욕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매일 땡깡 치고 오후 2시에 퇴근하는 것이 용서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동장의 본심이 흘러나온다.
“강주무관! 사실 5급 승진하는데 30년이나 걸렸다. 이 자리까지 올라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이 바닥 존나 썩었잖아? 팀장! 어떻게 생각하냐?”
“어휴~ 동장님 말씀 그대로죠. 저도 25년 근무하면서 올해 근속으로 6급 달았는데요. 진짜 더러워 죽겠네요. 백현이 덕분에 저도 빨리 승진해서 동장 나가려나요?”
“헤헤, 그럼 좋겠네.”
능력 때문이 아니라, 돈을 안 줘서 승진을 못하는 사람들.
평소에 뇌물을 주고 잘 하면 인사고과를 잘 받고, 아니면 못 받고.
돈으로 시작해서 돈으로 끝나는 파탄난 지방직 공무원.
한 두 해의 일이 아니라 벌써 50년도 더 된 관행.
그걸 막으려고 했던 용규 선배는 의문의 죽음을 당했고, 그것을 고발하려던 자신은 이렇게 좌천된 상태.
하지만 지금이라도 선관위에서 조사를 한다니까 기분은 좋았다.
그때 오리훈제가 나왔다.
이번에는 여사장님 남편 분이시다.
대(大)자를 시킨 것은 맞는데, 많아도 너무 많았다.
“어?! 사장님! 이거 양이 너무 많은데요?”
“많이 먹어! 부족하면 말하고. 배부르면 남기면 되지.”
“감사합니다.”
“백현 씨, 우리 집에 자주 와! 우리 가족들은 다 백현 씨 좋아해.”
“하하, 몇 번이나 봤다고 그러세요?”
“3번 봤나? 저번에 우리 할머니 어깨 주물러 주면서 옛날 얘기 하나부터 열까지 다 들어줬잖아. 지겨울 만도 한데…….”
“제가 들어줬나요? 재성이 형님이 들어주신 거죠. 저는 옆에만 있었고요.”
사회복지사 재성 형님에 대한 이야기.
마을 자체가 좁다보니, 얼굴은 다 아는 상태라 소소한 이야기들이 많다.
그래서 더욱 더 친근감이 가는 동네 어르신들이다.
여사장님은 백현과 동장 일행에게 한껏 친절하게 대해주셨다.
“아무튼 많이 먹어요! 요즘 나이 구십인 우리 할머니 표정이 너무 밝아져서 내가 기분이 좋아.”
“헤헤, 감사히 먹겠습니다.”
오리훈제는 맛있었다.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 맛.
어느 정도 배가 차자, 동장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백현에게 말했다.
“진짜 퇴직하게? 아쉬운데? 좀 더 다녀봐. 시장 바뀌면 또 어떻게 될지 몰라.”
하긴, 시장이 바뀌면 라인이 바뀐다.
시장은 임기직이지만, 공무원은 그렇지 않다. 버티면 되는 것이다.
동장의 말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백현은 자신 있는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에요. 저 대전 일반행정직 합격했습니다.”
“그래도 집은 부주잖아. 부주에서 대전은 멀어.”
“그렇죠. 그래도 뭐, 여기에서 찍힌 상태로 있는 것보다는 그래도 대전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백현은 미안하지만 대전으로 출근할 생각은 없었다. 이미 합격이 결정된 5급 공채.
이제는 동장님과 같은 5급. 사무관인 것이다.
백현은 표정을 감추며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동장님, 아직 5급 공채 발표가 나오지 않아서요. 발표 나오면 그때 자신 있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팀장은 이런 어색한 분위기를 바꿔보고 싶었나 보다.
“대전 가면 다 도심지고, 출퇴근도 편하고. 대도시라 승진도 빨리 하겠네.”
“그렇죠.”
“그래. 고생했다. 매일 일찍 퇴근하고, 술 약속도 빠진 게 시험 때문이었구나?”
“눈치채신 겁니까?”
“흐흐, 그래도 7급으로 승진한 거나 다름없으니 난 기분이 좋다.”
팀장의 말에 모두가 즐거워했다.
그런 분위기를 깨고 싶진 않았지만, 사실대로는 말해야 했다.
“팀장님, 저 9급 합격했습니다. 7급 아닙니다.”
현재 8급인 강백현이 9급으로 간다고 하자 한숨을 내쉬는 팀장.
“흠… 올해 몇 살이지?”
“서른둘입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공직생활.
막내부터 시작하는 게 못마땅하지만, 그게 백현의 선택이라면 말릴 자신이 없다.
그래도 팀장은 애써 위로해주고자 말을 돌렸다.
“서른둘이면 뭐! 아직 젊으니까. 승진에서 2~3년 손해보는 거지. 월급에서는 호봉 다 쳐주니까, 나쁜 선택은 아닌 것 같네. 대전 가면 자리도 많고, 승진도 빠르니까.”
그래서 백현은 고마웠다. 이제 저 분들에게도 정이 들었나보다.
백현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가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러자 동장이 갑자기 눈빛이 초롱초롱해지더니, 백현에게 물었다.
“서운한데, 막걸리 한 잔 먹을까?”
강백현은 깜짝 놀라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
“아~ 안 됩니다! 동장님, 업무시간이잖아요.”
그런데 동장님과 팀장님은 이미 결심이 선 모양이다.
“박 팀장, 뭐해?”
“네. 동장님, 유명한 찹쌀막걸리로 주문하겠습니다.”
“그려! 시켜!”
“저기 사장님?!”
“넵?”
“찹쌀막걸리 하나 주세요! 얼음 동동 띄워서요!”
“네!”
‘아, 업무시간에 술을 드시면 어떻게 합니까?’
결국 동장을 비롯한 공무원 일동은 공무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막걸리를 바닥까지 비웠고, 강백현은 술 한 잔 입에 대지 않았지만 그들을 고발하진 않았다.
* * *
징계위원회 당일, 9급 최종 발표가 있었다.
물론 예상대로 합격.
그리고 다음달이 바로 5급 발표 날이다.
그렇다고 불안한 건 없었다.
최종합격이란 것은 유령 녀석이 이미 10번도 더 확인했기에 이변은 없었다.
어느새 퇴근 시간.
아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강백현은 당황했다.
‘뭐야? 얘가 왜 전화했지? 아, 오늘이 미진이 생일이었구나.’
전 여자친구인 미진이의 전화. 강백현은 스마트폰을 들어 대답했다.
“여보세요?”
- 백현 오빠? 지금 어디야!
그녀의 쌀쌀맞은 목소리에 빈정이 상한 백현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오빠라곤 불러주네. 우리 헤어진 거 아니야? 왜 전화했어?”
- 뭐야? 그 말투는?
“전화 차단할 때는 언제고, 뭐 때문에 전화했는데? 카드 막은 것 때문에 전화한 거야?”
- 내가 네 카드를 왜 써! 장난해? 오늘 시간 되면 나와.”
“뭘 만나서 얘기해? 너하고 할 말 없어.”
- 난 할 말 있으니까, 내가 찍은 문자 장소로 나와.
여전히 쌀쌀맞은 말투. 자기 할 말만 쏙 하고 끊어버리는 싸가지까지!
2년 반을 넘게 만났는데 헤어질 때는 칼 같더니, 자기가 아쉬울 때는 저런 식으로 나온다. 백현의 속이 터지는 게 당연하다.
그래도 옛정을 생각해서 나갔다.
혹시 모를 진전, 화해.
그런 것들을 기대했던 것.
둘이 자주 만나던 커피숍.
도도한 얼굴로 혼자 아메리카노를 마시던 그녀가 백현을 보고 눈을 치켜 올렸다.
“왔어?”
“그래. 할 이야기가 뭐야? 뭔데 이렇게 만나서까지 얘기해야 되는데?”
그러자 그녀가 보자기에 싼 무언가를 내민다.
“이거 가져가.”
“이게 뭔데?”
“뭐긴 뭐야! 오빠 어머니가 우리 사무실로 가져온 거지. 왜 날 쪽팔리게 만들어? 오빠네 엄마는 내가 거지로 보여? 음식점에서 일하다 말고 와서, 음식물 옷에 질질 묻힌 상태로 나한테 이거 건네주면 사무실 사람들이 날 뭐라고 생각할 거야?!”
그녀의 말에 강백현이 고개를 숙였다.
설마 엄마한테 헤어진 것을 말하지 않은 게 이런 결과를 만들 줄이야.
솔직히 그녀의 입장이 이해가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미안하다. 내가 엄마한테는 말을 못했어. 그 부분은 사과할게. 그런데 우리 엄마 욕은 안했으면 좋겠어.”
“누가 오빠 엄마를 욕 했어? 오빠, 제대로 좀 살아. 어떻게 뭐 하나 똑바로 하는 게 없니? 오빠 나이 몇이야? 남자 서른둘에 집도 없고, 부모님 집에 얹혀 살고, 부모님도 50, 60대 되시는 분들이 능력 하나도 없고! 그런 집안에 내가 결혼할 생각을 했었다는 게 정말 한심하다. 한심해!”
윤미진의 말에 강백현이 눈을 부릅떴다.
그런데 그녀는 화가 단단히 났는지 더 쏘아붙였다.
“내가 틀린 말 했어? 오빠 생각해 봐. 오빠 공무원 돼서 굉장히 성공한 줄 아는데, 내가 볼 때는 오빠 완전 거지야. 패션 감각도 없고! 경제관념도 없고. 적어도 집은 있어야지! 응?”
백현은 미진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들어주려고 했지만 도저히 화가 나서 더 이상은 불가능했다.
사귈 때까지는 분명 인내심을 가지고 그녀를 대했지만, 헤어지고 나니 그 행동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윤미진! 그만해! 너도 잘 한 거 없잖아. 나랑 사귀는 도중에 양다리나 걸치고! 태웅이랑 들러붙어서 혼사 이야기까지 오간다며! 너 나한테 헤어지잔 말이라도 했니? 우리 제대로 정리한 것도 아니잖아.”
백현의 반박에 미진이의 눈이 돌아갔다.
“오빤 진짜 어이없다. 어떻게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해? 오빠, 내 나이 봐. 이제 결혼해야 될 나이야. 태웅 오빠 말이 나와서 말인데, 태웅 오빠는 벌써 세종시에 아파트도 32평짜리 샀다더라. 나한테 몸만 들어오래. 자기가 혼수까지 다 하고, 나를 위해서 뭐든 다 할 거래! 근데 오빠는 뭐라고 했어? 부모님과 같이 1년만 살자고? 돈 좀만 모아서 그때 분가하자고? 미친 거지? 세상 돌아가는 게 어떤지 구분이 안 가지? 오빠 같은 사람을 누가 좋아하냐고! 어?”
그녀는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더 이상 얘기해봐서 무엇을 할꼬.
강백현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둘이 결혼하든, 말든 알아서 잘 해봐. 너희 원망하진 않을 테니까. 우리 각자 인생 살자!”
“그래. 말 잘 했네. 오빠야말로 내 인생에서 사라져! 그리고 오빠 어머님한테 똑똑히 전해. 앞으로 그렇게 초라한 꼴로 나 찾아오시지 말라고! 오빠 아버님도 마찬가지야. 다시는 아는 척 하지 말아달라고 똑바로 전해! 알았어?!”
그녀가 언성을 높이자, 커피숍에 있던 다른 손님들이 줄줄이 쳐다보았다.
백현은 큰일로 번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 미안하다. 생일인데, 이런 일 생겨 미안하니까 그만하자.”
“됐어! 내 생일, 오빠랑 이제 하등 관계 없으니까 내 인생에서 사라져!”
그녀가 떠났다.
백현은 자존심이 상했지만, 애써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죽 바라보던 최용규가 입을 열었다.
[쟤 성깔 좀 있네. 그런데 후회할 거다. 걱정 마라.]
“선배는 상황 파악이 안 되시나 봐요. 지금 그런 말로 위로가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냥 성현이 그 여자 옆에나 있는 게 낫겠네요. 나 혼자 있게 해주세요.”
[야! 난 너한테 좋은 소식 들려주려 온 건데?]
“좋은 소식이요? 뭔데요?”
가끔 귀중한 정보를 물어오는 최용규. 그리고 그가 오늘 물어온 정보는 백현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태웅이 그 녀석, 경찰 조사받으러 갔다.]
“네?! 태웅이가요?”
[네가 준 자료들, 걔가 무마시켰잖아. 내부고발 접수한 자료를 무단 폐기했는데, 그거 하면서 부주시장으로부터 뇌물 받은 모양이야. 보니까 나 부임하기 전에도 그런 짓 많이 했었나봐. 선관위에서 계좌 추적하는 과정에서 모르는 돈이 많이 나왔더라구.]
“진짜요?! 태웅이가 그런 놈이었다고요? 시장한테 돈까지 받았다고요?”
[내가 너한테 거짓말을 왜 하겠냐? 금액도 상당한가 봐. 억대라는데? 하긴 내부고발 무마하려면 돈 좀 써야지.]
자신을 버리고, 태웅이를 선택한 윤미진.
하긴, 그 자식이 돈이 많을 리가 없는데, 어디서 집을 샀나 했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다니!
상황이 재미있게 흘러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