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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배기 깨러 왔습니다-11화 (11/139)

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11화

태웅이와 만나기로 했다.

자초지종을 듣고 싶었다.

그리고 미진이의 실체를 알려주고 싶었다.

항상 칭찬만 해 왔지만 원래 걔는… 천하의 망할 년이었으니까.

그런데 선배인 최용규가 말린다.

[안 만나는 게 좋을 거야. 그냥 놔둬.]

“네?”

[안 만나는 게 좋을 거라고.]

“끼어들지 맙시다~! 어디서 인간들 사이에 끼어들려고 그럽니까?”

[그래. 남이사, 난 경고했다. 만나지 말라고.]

“우와! 이제 볼일 끝나니까 세게 나오시네요. 이제는 김성현이 자살 안한다는 확신이 있어서입니까?”

[에휴! 삐뚤어진 놈!]

포장마차, 닭발에 소주.

남자 둘이 만나는데 이것만큼 좋은 건 없다.

오랜만에 본 김태웅.

녀석의 얼굴엔 환한 기색뿐이다.

강백현이 말했다.

“뭐냐?”

“그냥 미안하기도 하고, 좋기도 해서.”

“나한테 미안할 건 없어. 난 그냥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 온 거야.”

“뭔데?”

“미진이랑 헤어지라고, 걔 천하에 몹쓸 년이니까, 너랑 안 맞아. 중앙부처 7급 공무원 나으리께서 뭐하러 지방 공무원하고 만나? 아니 그걸 떠나서 걔는 쓰레기 중 쌍 쓰레기야. 남자 뜯어먹으려고 환장한 년이라고.”

강백현의 말에 김태웅이 웃음기를 지우며 말했다.

“일단 한잔 하자.”

“그래.”

소주잔을 흔들며 묘한 기운이 흘렀다.

강백현은 자신의 불알친구인 김태웅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헌데 술에 취한 김태웅은 강백현의 속을 뒤집어놓았다.

“미진이하고 만나는 거 이해해줘.”

“말 하지 마. 너하고 인연 끊을 수 있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미진이가 예쁘잖아.”

“……”

“왜 말을 못 해? 너 걔한테 흠뻑 빠졌었잖아. 전 재산을 줘도 안 아깝다고 말했었잖아.”

“그거야 내가 여자를 처음 만나봤으니까 그런 거지. 지금은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얼마 전에도 전화했었잖아.”

강백현은 태웅이의 말에 눈썹을 치켜올렸다.

미진이한테 전화했던 날, 익숙한 남자 목소리의 정체가 이 녀석이란 것을 알게 되니 울분이 터진다.

하지만 녀석은 정공법으로 다가왔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미진이 좋아했다. 네가 같이 임용된 동기라고 소개하던 날, 진짜 첫눈에 반해서 미칠 것 같더라.”

강백현은 당황했다. 친한 친구의 고백이 낯설었다.

“뭐? 야! 너 그런 기색 없었잖아.”

“그래. 없었어. 아니, 그럴 기색을 낼 수가 없었던 거지. 네가 나한테 미진이하고 잘 되게 도와달라고 했었잖아. 밀어달라고, 칭찬해달라고.”

“내가 그랬다고?”

“기억 못하냐? 그날 너 나 불러놓고 기껏 하는 소리가 그거였잖아. 그래서 일단 난 마음을 접고, 그날 너 엄청 띄워주면서 말했지. 너는 엄청 성공할 놈이라고, 미진 씨는 백현이 반드시 잡으셔야 한다고. 미진 씨랑 백현이 너 너무 잘 어울린다고. 그리고 그날 바로 모텔 가더라?”

헌데 대화 중에 최용규가 갑자기 나타나더니 씨익 웃었다.

[흥미로운데?]

강백현이 무심결에 화를 냈다.

“조용히 합시다!”

“뭐?”

“아니야. 혼잣말 나왔어. 계속 하자. 그래서?”

강백현은 짜증이 났다.

옆에서 최용규가 자꾸 쫑알쫑알 거리는 게 신경 쓰였기 때문. 하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미친 놈 취급을 당할 테니.

“네가 미진 씨를 모임에 데려올 때마다 솔직히 환장하겠더라. 성격 좋지. 얼굴 반반하지. 싹싹하지. 친구들한테 잘 하지. 거기에 안정적인 직업까지, 다 갖췄잖아.”

“야! 일단 알았고, 한잔 먹어. 나 조금 빡쳤다. 거짓없이 가자. 알았지?”

“좋아. 솔직히 너랑은 한 번 풀고 가야 되니까.”

“풀고 말고는 내가 결정해. 일단 마셔.”

소주 잔 말고 글라스 잔에 소주 반 병을 따르는 강백현.

그리고 그걸 주저 없이 받아주는 김태웅.

“그래서? 언제부터 사귄 거야? 나 만나는 동안? 아니면! 나 헤어지고 사귄 거니?”

“그건 모르겠네. 우리 애기랑 얘기해 본 적이 없어서.”

“애기? 미진이를 애기라고 부른 거야?”

“그래. 귀여우니까.”

“와! 미치겠네. 취했냐? 아주 돌았구나?”

“뭘? 너처럼 물질적인 것만 주면 여자들이 다 OK할 줄 알았어? 미진이가 너한테 엄청 상처 받았더라. 너 미진이 친구들 앞에서 모욕 줬잖아. 마레 레스토랑에서 기억 안나?”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그리고 모욕 아니었어. 그날은 선배 장례식장에 있던 날이었어. 제대로 알아보고 얘기해라. 모욕? 내가 모욕을 줬다고?”

“선배 뒈진 날인 건 나도 알아. 네가 미진 씨 버리고 간 날, 내가 대신 마레 레스토랑에 갔었으니까.”

충격이었다.

그 레스토랑에 갔었다고? 그 날?

“이 새끼, 진짜 나쁜 새끼네. 너 씨발! 장난 하냐? 알면서 갔다고? 너 나 왜 불렀어? 왜 연락했어?”

“미진이 친구 현희가 전화하더라. 오빠가 와 줘야겠다고. 미진이 울고 있다고.”

“현희?”

“그래. 인마. 네가 나 소개시켜준 그 현희.”

현희는 미진이의 친한 친구였다.

지금은 결혼했지만 3년 전에는 현희도 남자친구가 없었고 태웅이도 여자친구가 없었다. 그래서 기꺼이 좋은 마음으로 연결해주었다.

물론 서로 이상형이 달라 연락처 교환뿐으로 진전은 없었지만…

“현희가 왜 전화했는데? 왜?”

“왜긴, 미진이가 날 마음에 두고 있었으니까 현희가 전화한 거지. 나 또한 현희한테는 항상 내 속마음 얘기했었으니까. 내가 미진이 좋아하는데, 백현이 너 때문에 그 마음 숨기고 있다고 여러 번 통화했었으니까.”

남녀 관계에는 정답이 없다하지만, 이건 거의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언젠가는 이렇게 될 일이었다.

불알친구라서 믿고 지금까지 교우관계를 맺어왔는데, 천하의 망할 놈이 바로 앞에 있었다.

강백현이 옆에 있던 소주를 나발 불었다.

생소주 한 병이 입 안으로 쑥쑥 들어갔다.

조금이라도 썼으면 좋겠는데, 그런 게 없었다.

만취라도 했으면 녀석의 얼굴에 주먹이라도 날려주는 건데 정신은 오히려 멀쩡했다.

씨발놈. 개새끼!

최용규 선배한테 저 새끼 칭찬을 얼마나 했는지 모르겠다.

《용규 형, 태웅이 진짜 괜찮은 놈입니다. 부하직원으로 갔다면서요. 잘 챙겨주세요.》

《그래. 인마! 내 사람은 내가 알아서 챙길 테니까 걱정하지 마.》

과거에 최용규와 했던 이야기.

그게 지금은……. 배신감으로 돌아온다.

강백현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말했다.

“개새끼! 다시는 연락 하지 마!”

“15년 우정, 이렇게 끝낼 거야?”

“꺼져!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 너는 양심이 없냐? 그러고도 친구 새끼냐?”

강백현이 포장마차를 나왔다.

더러운 기분이 한순간에 몰려왔다.

그러자 최용규가 따라붙어 말을 걸었다.

[내가 뭐랬냐? 만나지 말랬지?]

“선배는 입 좀 다물어요. 불난 집에 부채질 할 거예요?”

[뭐,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기분이 풀리겠냐? 그냥 쳐 자라. 쳐 자.]

“그만! 알았으니까 그만.”

강백현이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윤미진의 전화번호가 보인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걸었다.

근데 차단했다.

메시지를 보냈다.

읽지를 않는다.

숫자 1이 없어지질 않는다.

개 망할! 뼛속까지 비틀어진 년이라고 생각했다.

속이 풀리지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털어놓고 싶었다.

그래서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미진이 친구 현희의 번호가 보였다.

- 여보세요?

“아, 나 강백현인데, 현희 맞지?”

- 아… 백현 오빠가 웬일이에요?

“야! 너 미쳤냐? 태웅이를 미진이한테 붙여? 너 미친 거 아니야?”

- 오빠가 평소에 잘 했으면 미진이가 울며불며 안 했을 거 아니에요. 그리고 오빠는 그날 여자친구 생각도 안 하고 그냥 가버렸지만, 태웅 오빠는 거기서 1차에 2차 노래방에 3차 포장마차까지 자기가 다 내주면서 미진이 곁에서 지켜줬어요. 오빠는 그동안 뭐했어요? 뭐했는데요?

“와! 이게 소리를 지르네? 여보세요? 너 돌았어? 네가 뭔데 나랑 미진이 사이를 이간질하고 끼어드는데? 네가 뭔데?!”

그때, 현희 대신 다른 사람이 받았다. 남자였다.

- 야! 너 누구야? 어떤 미친놈이 밤늦은 시간에 남의 마누라한테 전화해서 술주정이야? 너 누구야? 아니! 너 어디야? 내가 잡으러 갈 테니까 말해! 어딘지 말해 이 새끼야!

“여기 부주시청 엄마포장마차 앞이니까 당장 와! 와 이 새끼야! 내가 그렇게 말하면 쫄 줄 알았냐?”

- 간다. 너 잡으러 간다. 그대로 있어! 그대로 있어라. 너 족쳐 죽여불랑게! 어?

전화가 끊겼다.

모든 것을 빼앗긴 기분이 들었다.

여자도, 직업도. 그리고 모든 것을.

그런데 전화가 걸려왔다.

유럽에 갔다는 김성현, 선배의 전 여자친구다.

강백현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뭡니까? 국제전화는 왜 했고요?”

- 미안해요. 계좌번호를 몰라서 페이로 송금했어요. 이걸로 기분이 풀리진 않으실 것도 알고 직접 찾아뵙고 드리는 게 예의지만 제가 해외라서 어쩔 수 없었어요. 받기 버튼 누르시면 계좌로 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

김성현의 느닷없는 전화.

헌데 강백현은 흥분한 상태. 최용규가 걱정스레 소리쳤다.

[와! 야! 끊어! 끊어. 이 미친 새끼!]

하지만 이제야 취기가 돈 강백현은 자신의 감정을 무작정 쏟아냈다.

“저기요.”

- 네.

“여자들은 원래 그럽니까? 남자들 등골 빼먹고, 지겨워지거나 쓸모없어지면 버립니까?”

- 네?

“거기 김성현 씨! 모른 척 하지 마.”

- ……

“당신도 꽃뱀이잖아. 당신도 남자 빨아먹는 여자잖아. 내가 모를 것 같아?”

- 무슨 일 있으셨어요? 저 때문에 상처라도 입으신 건가요?

“당신 같은 사람이 혐오스러워. 사랑이라는 말 앞에 물질만 요구하고, 친구들 이용해서 이상한 소문내고. 사람 이용해 먹고. 이제 다시는 먼저 연락하지 마. 알았어?”

-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김성현은 마지막까지 예절을 지켰다.

전화가 끊기고 강백현은 정신을 잃었다.

그걸 지나가던 시민이 보고 경찰에 신고했다.

여기 술 먹고 쓰러진 사람 있다고.

그걸 보며 최용규는 한숨을 내쉬었다.

[병신 같은 놈, 성현이는 너 따위랑 비교도 안 될 사람이야. 얼마나 망가질래? 얼마나 더 속에 담아둘래?!]

* * *

다음날 아침.

강백현은 유치장에 들어가 있었다.

‘아, 이건 뭐지?’

머리는 부스스하고 바지는 주름이 잔뜩, 와이셔츠는 흘러나왔다.

누가 봐도 알콜중독자의 몰골이다.

“저기요?”

“아저씨, 일어났어요? 이제 괜찮아요? 아니~ 바깥에서 자고 있으면 어떻게 해. 그러다 얼어 뒤져요.”

경찰서의 조상욱 경사가 유치장 문을 열어주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닌 것 같던데, 혹시 몰라서 유치장 안에 넣어뒀어요. 신원 확인해보니까 주민센터 주무관님이시던데, 왜 그랬어요?”

“그냥 여자친구랑 헤어지고, 술 좀 먹다가 그랬네요.”

“에이! 뭐 그럴 수도 있죠. 지금 8시니까 얼른 씻고, 출근해요. 차 끌지 말고요. 얼마나 마셨나 술 냄새가 아직도 나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강백현은 일단 가까운 목욕탕에 들려 간단히 씻은 후 곧바로 택시를 타고 주민센터로 출근했다.

술 냄새가 진동을 해서 그런지 팀장님이나 동장님이 고개를 저었다.

“백현!”

“네. 동장님.”

“인마! 어제 얼마나 쳐 마신 거야?”

“죄송합니다.”

“한 시간 동안 동네 돌면서 술 깨면 와.”

“아… 넵!”

동장님의 지시에 주민센터 밖으로 나온 백현.

그런데 유령 최용규가 심각한 얼굴로 강백현의 곁에 나타났다.

[강백현.]

“뭔데요?”

[어제 그 일 있고 나서 김태웅이랑 네 여자친구 뒷조사 좀 해 봤는데…]

“어휴~ 그러셨어요? 쓸데없는 일 알아보셨네요.”

[쓸데없는 일 아니야. 태웅이는 내 밑에 직원으로 있었잖아.]

“그랬읍죠. 그런데요? 나 놀리려고 뒷조사 했나요?”

[끝까지 들어 봐 인마! 워터마크 붙은 자료. 그거 부주시로 유출한 거 아무래도 김태웅인 것 같다.]

“네? 지금 뭐라고 했어요?”

[김태웅, 그 새끼가 일부러 네가 나한테 자료 넘긴 거 알면서도 부주시에 유출했다고.]

“그게 진짜야?! 진짜에요?”

부주시에서 강백현이 내부고발자로 찍히게 된 원인이 김태웅이었다.

최용규 선배의 말을 100% 신뢰할 순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일 가지고 거짓말 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만큼 친했으니까.

이런 일 가지고 장난치진 않을 거다.

[근데 백현아!]

“네?”

[너, 다시는 성현이한테 전화하지 마라. 알았냐? 성현이 어제 네 전화 받고 외국에서 하루 종일 울었다. 다시 전화하지 마.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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