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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배기 깨러 왔습니다-9화 (9/139)
  • 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9화

    집에 돌아온 백현은 민법의 판례를 보며 2차 시험 역시 합격권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1차 시험에서 느꼈던 배신감이 남아 있다.

    그래서 그의 얼굴엔 심드렁한 표정뿐이다.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것.

    감사의 표시는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백현이었다.

    “고마웠어요. 덕분에 합격권이네요.”

    [그래. 나 때문에 합격한 거 맞지? 그럼 빨리 약속 잡자. 성현이랑 만나자고 전화해.]

    백현의 말에 초조한 얼굴로 최용규가 원하는 바를 말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안 되겠는데요?!”

    [뭐?]

    “안 되겠다고요! 선배도 이제 나한테 쓸모가 없잖아. 결국 알려준 건 민법 문제 하나였고 나머진 내 스스로 해결한 거잖아요. 안 그래요?”

    최용규는 바로 몸을 수그리며 태도를 바꿨다.

    [제발 만나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백현 님? 제 전 여자친구가 탐욕의 희생양이 되려 하고 있습니다.]

    강백현은 고민했다.

    세상은 기브 앤 테이크.

    일단 받았으니, 돌려줄 것은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

    “좋아요. 대신 하나만 물을게요. 선배는 그 꽃뱀이 뭐가 좋아?”

    [꽃뱀?]

    “어. 선배 등골 빨아먹으면서 벤츠 끌던 여자가 뭐 그리 좋다고 죽어서도 못 잊냐고요?”

    최용규는 고심했다.

    역시 이 녀석도 위험한 녀석이다.

    하지만 고기웅과 비교하면 그래도 이 녀석이 100배 이상 나은 것이 확실.

    이 녀석이 성현이에게 연락하도록 해야 하고, 그러자면 어떻게든 얼버무릴 필요가 있었다.

    [그게 중요하진 않잖아? 한 때 내 여자였고, 무조건 천국 갔으면 하는 바램뿐인데?]

    “선배도 참 답 없네. 그래서 내가 뭐 해주면 되는데요?”

    [만나서 진실만 전해주면 돼.]

    “진실이요?!”

    [응. 원래는 기운 차리도록 한 거짓말이었다고, 사실 만나는 여자는 없었고, 다 자기를 빨리 잊게 하기 위해서였다고만 말해주면 돼.]

    “내가 왜 그렇게까지 해줘야 하는데요? 선배도 참 생각 없다. 그 여자가 돈 때문에 남자 만나는 게 어때서? 그 여자 원래 그렇다면서요! 선배는 그냥 성불해서 천국 가는 게 낫지 않아요? 지금이라도 천국갈 수 있다면서요!”

    [기다릴 거야.]

    “뭘 기다려요?”

    [성현이가 천계 갈 때까지, 수명 다할 때까지 몇 십 년이고 기다려서 같이 천계로 갈 거야.]

    강백현 입장에서 최용규의 말도 이해가 갔다.

    자살하면 천국(천계)에 못 가고, 타락해도 못 간다.

    여자는 그래서 남자를 잘 만나야 하고, 남자 또한 여자를 잘 만나야 한다.

    혹여나 죽는 거 따라가다가 천국에 못가는 수가 있다.

    그런데 의문이 들었다.

    얘 원래 꽃뱀이라며!

    돈 밝히는 속물이잖아.

    그런 여자가 뭐가 좋다고 죽어서까지 이렇게 미련을 갖는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선배의 취향은 독특하다.

    아니지! 한때 자신도 그런 적이 있다.

    백현은 김성현을 미진이와 같다고 생각했다.

    미진은 백현이 공무원 사회에서 팽 당하니까 곧바로 내팽개치듯 버렸다.

    그리고 일주일도 안 되어서 어떤 놈인지 딴 놈한테 붙어먹고 있다.

    그놈은 누굴까?

    면상 한 번 봐야 할 텐데.

    아니다.

    백현은 고민을 관두었다.

    지금은 쓸데없는데 심력 낭비할 필요가 없다.

    일단 5급 공채 붙는 것만 집중하자. 그거면 돼.

    이제 남은 것은 최종면접.

    “면접도 도와주실 수 있는 거죠?”

    [당연하지! 너 1등 만들어줄게.]

    그래. 조금이라도 합격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면 하루 정도 유령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도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한 백현이 결국 전화를 걸었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여자였다. 김성현.

    - 여보세요?

    미진이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와는 확연히 다른 부드러운 목소리.

    목소리에서 청순함이 느껴졌다.

    허나 그게 다 남자를 등쳐먹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 백현은 마음을 다잡았다.

    내숭, 그게 여자들의 무기. 여기에 속으면 안 된다.

    강백현이 침을 꿀꺽 삼키고 대답했다.

    “최용규 선배님의 후배, 강백현입니다. 잘 지내셨죠?”

    강백현의 말에 유령 최용규가 씩 웃었다.

    [‘그래. 잘한다. 잘해!’]

    - 네. 저번에 뵈었었죠. 무슨 일이시죠?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 네? 할 이야기가 남았나요? 그때 충분히 하신 것 같던데요?

    “네. 이번에도 중요한 이야기여서요. 만나서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내일 저녁 6시, 저번하고 같은 장소 어떠세요?”

    - 죄송해요. 부주시는 너무 멀고, 제가 내일은 점심에 선약이 있어서요. 제가 아는 호텔이 있는데, 서울로 와주실 수 있나요? 와주시면 저녁때는 시간이 될 것 같아요.

    그녀의 대답에 강백현이 음성차단을 누른 다음 유령에게 말했다.

    “와~ 대박! 나보고 서울까지 가라고? 이걸 해야 돼?”

    [일단 만나. 만나서 나에 대한 오해만 풀어줘.]

    “아, 다 해결됐잖아요! 뭐가 그리 미련이 남는데요?”

    [만나주시면 다음 최종 시험 꼭 합격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한 번만 소원 들어주자. 응?]

    “알았어요.”

    다시 음성차단 해제 버튼을 누른 강백현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내일 찾아뵙는 걸로 하죠.”

    - 네. 저도 문자로 호텔 위치랑 시간 보내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다음날. 서울 올라가는 날.

    아버지가 일하시는 날이라서 백현은 아버지 차를 운전했다.

    경부선을 타고 올라가는데 길이 엄청 막힌다.

    “서울 올라가는 길 엄청 막히는데?”

    [원래 주말 이 시간은 고속도로 많이 막혀.]

    “아! 화나려고 하네.”

    [……]

    최용규는 오늘만은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성현이를 그놈으로부터 어떻게든 떼어내야 하니까.

    올라가는 길.

    최용규는 강백현을 보며 고개를 절로 저었다.

    언제 샀는지 모를 허름한 양복.

    10년은 되어 보이는 구두와 해어진 양말.

    그야말로 짠돌이.

    [‘자기한테 돈 좀 쓰지.’]

    패션만 보자면 여자한테는 매력 꽝이다.

    특히 저런 패션이라면 절대 성현이가 좋아할 스타일이 아니다.

    왜 저번에는 백현이가 멋있어보였던 걸까?

    외모와 체격 때문이었나?

    일단 지금은 그의 모습에 안심이 되는 최용규였다.

    메리야트 호텔 1층.

    발렛파킹을 해주는 직원들이 앞에 나와 있다.

    그런데 강백현은 그런 거 몰랐다.

    “주차장 어디에요?”

    “내려가셔서 오른쪽입니다만, 키 주시면 발렛파킹 대신 해드리겠습니다.”

    “발렛파킹 얼마죠?”

    가격을 물어보는 강백현의 질문에 최용규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건 바로 쪽팔림.

    [그냥 발렛파킹 맡기면 돼. 여긴 공짜야.]

    하지만 강백현은 이런 거에 하나하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저희는 무료로 해드리고 있어요.”

    “네. 그럼 부탁드릴게요.”

    호텔은 화려한 외관답게 안쪽도 상당했다.

    금색빛이 나는 내벽에 입구부터 안쪽 끝까지 카페트가 깔려 있다.

    웨이터는 말끔하고 좋은 인상의 사내였고, 안내직원 또한 친절한 미소를 잃지 않는다.

    충청남도 부주시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럭셔리하고 화려한 호텔.

    조금만 지나면 약속장소인 레스토랑이다.

    백현은 1층 레스토랑에 가기 전에 화장실에 들렀다.

    호텔 외관만 봐도 대단하다고 느꼈는데, 화장실은 아주 미쳤다.

    사실 대한민국 공중화장실은 최고의 시설을 자랑한다.

    전 세계 어떤 국가와 비교해도 대한민국이 최고다.

    그런데 여기 화장실은 그것보다 더 좋다.

    가보지 않았지만, 두바이와 비교해도 부끄럽지 않을 수준이다.

    천사가 하늘에서 데려왔을 법한 아이가 소변기 위에 조각되어 있고, 대변기는 화려한 금관 의자로 장식되어 있다.

    거기에 고풍스러운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온다.

    다소 과한 듯도 하지만 이게 메리야트 호텔의 컨셉.

    누군지 모를 재벌이 만든 세계.

    찰칵찰칵!

    너무 신기해서 스마트폰으로 화장실 사진을 찍는 강백현의 얼굴엔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레스토랑, 직원이 백현을 보며 묻는다.

    “예약하셨나요?”

    “아… 김성현 님이라고 혹시 예약되어 있을까요?”

    김성현이라는 이름에 직원이 강백현의 위아래를 훑는다.

    강백현은 기분이 나빴다.

    상대가 행색으로 자신을 평가하는 것만 같았다.

    “안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다섯 발자국 앞서 걷는 직원.

    강백현이 직원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야? 선배! 저 사람이 나 훑으면서 평가한 거죠? 호텔은 원래 그래요?”

    [원래 그런 건 아니고.]

    “그런데요?”

    [‘말 못해. 성현이가 여기 호텔 회장 딸이라는 거 죽어도 말 못해! 신분 밝히면 좋다고 대쉬할 거잖아. 너.’]

    재벌 3세 고기웅도 나쁜 놈이지만, 강백현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보면 자신을 사망에 이르게 한 놈. 성현이와의 장밋빛 미래를 빼앗아간 놈이다.

    다른 놈하고 말만 통했어도 녀석에게 이렇게 의지하진 않았을 거라 생각하며 최용규는 끝내 말을 아꼈다.

    VIP만 들어갈 수 있다는 안쪽 별실.

    레스토랑 내에서도 가장 비싼 곳이다.

    김성현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백현을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셨어요?”

    “네. 많이 늦었습니다. 바쁘실 텐데 죄송하네요.”

    “괜찮아요. 음식이 늦게 나올 것 같아서 먼저 시켰어요. 괜찮죠?”

    “네. 괜찮습니다.”

    김성현의 나긋나긋한 말투에 고개를 끄덕이는 강백현.

    김성현은 백현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웨이터에게 말했다.

    “매번 주문했던 것으로 가져다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정통 이탈리안 코스 요리.

    이름 모를 생소한 요리들이 계속해서 나온다.

    강백현은 사실 부담스러웠다.

    이게 얼마일까?

    얼마나 뜯어먹으려는 건데?

    솔직히 한 6~7만원 선이면 내주려고 했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미진이하고 얘가 다를 게 뭐야?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은 듯 자연스러운 얼굴로 강백현을 바라보았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미진이보다 더 대단한 선수일지도 몰랐다.

    “이거 맛있어요. 드세요.”

    “네.”

    웃음 띤 얼굴로 감정을 숨기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오늘이 그녀를 상대하는 마지막 날. 어차피 이 여자는 안중에도 없다.

    차후의 일정을 위해 잠시 놀아나주는 것뿐이니까.

    “저번 편지 관련해서 진실을 전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아서요.”

    “네?”

    아뮤즈부쉬를 겨우 먹고, 이제 전채요리가 나올 참이었다.

    “사실 최용규 선배한테 다른 여자 분은 없었습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성현 씨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선의의 거짓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솔직히 싸대기라도 날아올 줄 알았는데, 김성현은 의외로 침착했다.

    “선의의 거짓말이요? 사실 백현 씨가 음식점에서 떠나고 혼자 남은 저는 곰곰이 생각했어요. 백현 씨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사실 알고 있었어요. 백현 씨 말과는 달리 용규 씨는 바람 피고 그럴 사람은 아니에요. 제가 모를 리가 없죠. 제 연인이었는데.”

    “아, 알고 계셨나요?”

    강백현은 다소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김성현은 그걸 알면서도 왜 자신을 만났을까?

    “사실 그동안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용규 씨를 잊으려고 해도 쉽게 잊혀지지 않아서 방황을 많이 했죠. 그때는 백현 씨가 전화 주셔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몰라요. 당시 감정이 극단적으로 치닫기도 했는데, 그 말 듣고 잠시라도 개운해진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오히려 제가 더 고맙죠.”

    “아… 죄송합니다. 보험금 이야기는 정말 실수였던 것 같습니다.”

    백현은 반성했다.

    “보험금 얘기도 괜찮아요. 저 돈 욕심 없어요. 사실 돈 때문에 힘든 것은 사실이긴 하지만, 다 이겨낼 수 있을 거예요.”

    꽃뱀이라고 들었지만, 나름 깨어있는 사고방식을 가진 김성현의 말에 강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입니다.”

    “백현 씨는 용규 씨한테 부탁받았던 거죠?”

    “네?”

    “제가 극단적인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런 행동하신 거잖아요. 말 안 해도 알아요.”

    “아…….”

    어색한 분위기에서 메인 요리가 도착했다.

    그런데, 앞에 있는 성현의 스마트폰이 계속해서 반짝거린다.

    “전화 오신 것 같네요. 저 괜찮으니까 전화 받으셔도 됩니다.”

    “아니요. 괜찮아요. 우리 용규 씨는 어릴 적에 어땠어요?”

    최용규의 어린 시절에 대해 궁금해 하는 김성현.

    백현은 최용규 선배의 좋았던 점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다.

    성격도 밝고 정의로운 사람이었다고 칭찬해주었다.

    그러자 김성현도 공감하며 밝은 웃음을 내보였다.

    백현은 솔직히 김성현에게 절로 호감이 갔다.

    기품 있고, 예쁘고, 말 곱게 하면서도 솔직하고, 저런 여자 흔치 않은데….

    아무리 씀씀이가 헤프다고 해도, 마음이 사로잡힐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 웨이터가 들어오더니, 그녀에게 귓속말을 했다.

    “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그런데 김성현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진다.

    그녀의 격앙된 목소리.

    “저 있는 거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이미 차량이 주차된 걸 보셔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5분 안에 도착하신 답니다.”

    그녀는 백현에게 당황 반, 미안 반의 얼굴로 양해를 구했다.

    “잠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네?”

    “죄송합니다. 금방 돌아올게요. 식사하고 계세요. 계산은 하지 마시고요.”

    황급하게 자리를 뜨는 그녀.

    그래도 계산하지 말라는 말에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혼자 남은 강백현은 그녀가 다시 오길 기다리며, 앞에 나온 메인 요리를 냠냠하고 맛있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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