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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배기 깨러 왔습니다-8화 (8/139)
  • 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8화

    최용규가 없는 상태에서 5급 공채 1차 시험이 시작되었다.

    영어 점수와 한국사 능력검정시험은 미리 합격해두었기에 다행이었다.

    늘 자기계발을 꾸준히 하던 강백현에겐 이미 따놓은 점수나 마찬가지다.

    문제는 공직적격성평가(PSAT).

    언어논리와 자료해석 능력을 평가하는 시험.

    다행히 1차 시험은 얼마나 많이 공부했냐보다는 얼마나 짧은 시간에 올바른 상황판단을 하느냐에 따른 점수다.

    강백현은 실망했다.

    선배는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굳게 믿으라던 선배의 말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순식간에 끝난 시험.

    감독관의 말이 야속할 지경이다.

    “시험 종료, 답안지에서 전부 손 떼 주세요.”

    시험을 보고 나온 사람들은 만감이 교차했다.

    “이번 시험 진짜 쉬웠네.”

    “대박! 장난 아니었어. 시간 부족해 미칠 뻔 했는데….”

    “그래도 7배수는 뽑는다니까 너무 실망하진 마. 뽑히겠지.”

    반면 백현의 입에서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내가 너무 의지했던 건가? 이건 약속이었잖아. 약속 지키기로 해놓고 결정적인 순간에 날 이렇게 버리려던 거였어?’

    돌아오는 길.

    문제의 유령이 나타났다.

    [백현아.]

    “……”

    [야! 나 좀 도와줘. 큰일 났어.]

    “……”

    강백현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선배라는 인간.

    죽어서까지 자신을 엿 먹이는데 자신이 뭐라 신경 쓰겠는가?

    솔직히 귀신의 도움을 받는다는 발상 자체가 웃겼다.

    뭐가 좋다고?

    내가 저 사람한테 신경 써서 낭비한 시간, 심력. 그게 다 뭔데?

    생각해보면 이제까지 저 인간이 유령이 된 후 자신에게 도움이 된 적이 없었다.

    시끄럽게 말이나 걸고, 자기 심부름만 시키고.

    원하는 곳에 이용만 해먹고.

    [야! 성현이가 이상한 놈 만나게 생겼단 말이야. 전화 좀 해봐! 야! 야! 모른 척 할 거야? 야!]

    강백현은 결심했다.

    더 이상 유령을 신경 쓰지 않겠다고.

    자신의 길을 걷겠다고.

    그게 마음이 편하니까.

    그게 정상이니까.

    최용규는 계속 강백현의 주변을 왔다갔다하며 시선을 끌고자 노력했다.

    백현의 뱃속을 통과하기도 하고, 갑자기 앞에 나타나 놀래키려고도 했다.

    하지만 강백현은 철저히 그를 무시했다.

    밥을 먹고, 혹시 모를 합격에 대비해서 바로 2차 시험 준비를 했다.

    [야! 너 나 무시 할 거야? 도와달라고! 도와달라고!]

    의미 없는 외침.

    강백현이 무시하면 더 이상 말상대가 없는 존재다.

    [백현아, 내가 잘못했다. 어? 아는 척 좀 해줘. 여보세요? 여보세요? 진짜 안 보여?]

    [까꿍! 까꿍!]

    [야! 강백현! 강백현!]

    [백현 님? 저 진짜 안 보이시나요? 안 들리시나요? 저기요?]

    그러나 강백현이 취한 행동은 침대에 누워버리는 것.

    자는 건 아니었다.

    핸드폰에는 동영상 강의가 떠올라 있고 귀에는 이어폰을 꽂았다.

    눈을 감고, 귀신의 소리 대신 헌법 강의에 집중한다.

    다음날, 그 다음날도 같았다.

    강백현은 똑같은 행동을 반복할 뿐이었다.

    평일에는 출근해서 평소와 같이 민원인을 상대하고, 퇴근해서는 공부했다.

    주말에는 아침, 점심, 저녁 꼬박꼬박 챙겨먹고 요점을 정리한 노트를 1독, 2독 반복하며 머리에 새겼다. 다른 행동은 일절 하지 않았다.

    핸드폰도 꺼놓았고, 친구들은 물론 직장 동료인 공무원들과의 식사도 일절 금했다.

    최용규는 점점 지쳐갔다.

    강백현이 상대해주지 않는 사이, 성현이와 그 빌어먹을 재벌 3세 놈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성현이한테 말해주고 싶었다.

    너 놀아나고 있다고.

    너랑 헤어지면, 바로 마약 파티를 열고 유흥업소에서 여성과 놀아나는 게 바로 그 놈이라고.

    너는 그냥 성공을 위한 발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단순한 사업 파트너.

    거래를 위해 맺어지는 관계.

    그 남자가 너를 만나는 건 비즈니스가 목적이라고 똑바로 이야기 해주고 싶었다.

    [백현아. 제발 내 말 좀 들어주라. 어? 제발! 제발! 제발!]

    유령은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백현의 마음은 절대 돌릴 수 없었다.

    외면하고 또 외면한다. 처음에는 조금씩 놀라며 반응하는 거라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조차도 없었다.

    강백현은 진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1차 시험 결과가 나왔다.

    강백현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합격했다.

    대단했다.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에 1차 합격하다니.

    그리고 2차 준비.

    그는 주민센터에서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두 공부에 투자했다.

    식음을 전폐하는 수준이었다.

    어느새 그가 본 책이 너덜너덜해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만 무려 5번.

    그걸 5독이라고 한다.

    5독은 합격을 가르는 기준점이다.

    보통 5독부터 합격자가 많이 나오기 시작하니까.

    강백현은 이제 최용규가 도와주지 않아도 될 만큼 지식량이 방대해졌다.

    최용규는 어느새 자신이 강백현의 곁에 있는 게 무의미하다고 느껴졌다.

    후배는 스스로의 인생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최용규.

    [‘그래. 이제 떠나자. 미련 없이 떠나는 거야.’]

    결심을 굳힌 날.

    최용규가 백현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간다. 백현아. 그동안 고마웠다.]

    하지만 여전히 무응답.

    [간다고! 인사 안 해줘? 이제 천국 올라간다니까! 성주단지 모셔도 천국 올라가면 다시 못 와. 알지?! 어? 진짜 간다!]

    그래도 강백현은 그를 무시했다.

    시험 당일.

    행정법, 행정학, 경제학, 정치학.

    강백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어느 정도 기초가 잡혀서 다행이었다.

    논술형.

    그가 공무원으로 지내며 접한 수많은 문서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대제목, 중제목, 소제목. 그리고 서술형으로 판례에 더해 자신의 생각을 정리, 써내려야 하는 문제들.

    자신이 사무관이 된다면 어떻게 행동해야겠다는 결론까지 필요하다.

    강백현은 육하원칙에 의거, 빠르게 논지를 기술해나갔다.

    그리고 마지막 시간.

    첫 4과목은 잘 봤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 선택과목인 민법이 문제였다.

    아는 문제가 하나도 없다.

    그렇게 많이 준비했는데, 그렇게 많이 공부했는데, 자신이 공부한 사례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처음에 멋도 모르고 민법을 선택과목으로 정한 게 잘못이었다.

    민법은 선택과목 중 난이도가 가장 높은 과목.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민법을 고르지 않는다.

    ‘하아….’

    강백현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제 합격이라고 생각했는데 민법에서 이렇게 뒤통수를 맞을 줄은 몰랐다.

    째깍째깍. 시간이 흘러간다.

    다른 사람들은 쉼 없이 펜을 돌려가며 답안을 적는데, 백현은 자신이 적을 수 있는 문제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은 시간 40분입니다.”

    감독관의 말에 강백현이 좌절했다.

    지금부터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적어내도 부족한 시간.

    ‘내년에 도전해야 하나?’

    그때,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대제목 : 관습법]

    ‘어?’

    [부르는 대로 적어. 시간 없잖아.]

    ‘선배…’

    [법적확신설에 대한 태도는 관습법의 성립시기에 대하여 통설과 판례를 준용한다.]

    [가정의례준칙에 의거하여 인정과 관습이 관습법이라는 취지라면 열후적, 보충적 성격에 비추어 가정의례준칙에 위반되는 사항은 민법 제 1조에 위반되는 사항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관습법의 적용은 법적 지상권, 분묘 기지권, 동산의 양도담보, 사실혼 등에 적용될 수 있다.]

    선배가 불러준 답은 거의 판례집에 가까웠다.

    그만큼 완벽한 답안이었다.

    그렇게 선배와 소통한 시간이 40분.

    결과는?

    5급 공채.

    1차 7:1, 2차 6:1.

    강백현은 최종 42:1의 경쟁률을 뚫고, 1.3배수 안에 들었으며, 그에 따라 5급 공채 최종 3차 시험을 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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