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7화
최용규는 왜 자신이 이승에 머물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어이없네.]
저승사자들이 왜 자신을 보내주었는지 알게 된 것이다.
젊은 날의 실수.
하필이면 백현이 집안에 있던 성주단지 안에 자신의 부러진 손톱이 있었던 것.
그냥 장난이었을 뿐인데….
그게 죽어서도 이런 운명을 만들다니.
[어쩐지 천국 가기 싫다고 해도 안 잡더라.]
“이제 알았습니까?”
어느새 죽은 지 한 달이 지났다.
여전히 자신을 볼 수 있는 것은 강백현뿐이고, 걔가 손톱을 만지면 힘이 빠져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커다란 약점이다.
손톱만 만지면 힘을 못 쓰고 움직일 수도 없다니.
녀석이 시험 볼 때까진 자신이 전략적 우위에 서서 원하는 대로 조종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제와선 오히려 반대.
녀석이 물었다.
“이건 정답 뭐에요?”
PSAT 언어논리영역.
문제 8. 다음 글의 밑줄 친 부분에 대한 논평 중에서 랄프의 입장에 동의하는 사람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이 문제를 풀려면 여러 가지 관점에서 접근해야 했다.
자유주의 패러다임과 자유 지상주의에 관한 논점.
합법적 수단과 합리적 행위자.
정당한 취득의 원리.
평등주의 원칙과 정의로운 재분배 원칙.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풀 수 있는 문제.
유령이 과외선생을 하는 게 웃기긴 했다.
그래도 열심히 지식을 전달해주는데, 어느새 녀석은 꾸벅꾸벅 졸고 있다.
[자냐?]
“……”
[진짜 자냐?]
강백현이 설명을 듣다 자고 있다.
다행이다. 해방이었다.
그래서 얼른 자리를 옮겼다.
최용규는 1분에 400km도 이동할 수 있었다.
전국 어디라도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었다.
북한, 미국, 캐나다, 유럽, 일본, 태평양, 남극, 북극.
그가 못가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럼에도 방문하는 장소는 항상 동일했다.
정해져 있었다.
바로 전 여자친구. 김성현의 곁이다.
성현이는 해외 유학을 생각하고 있었다.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서였다.
스스로 남자친구 최용규의 죽음을 납득해보려 했지만, 그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아버지에게 이미 의사를 전한 바 있었다.
“꼭 그런 결정을 해야 했니?”
“네. 죄송해요.”
“아니야. 그런데 다시 한 번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해외에 가는 건 도피일 뿐이야.”
“아빠, 나 아직도 그 사람 생각나서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가 없어. 나가면 생각나고, 또 나가면 생각나는데 어떻게 해?”
자신이 죽지 않았다면 장인어른이 되셨을 성현이의 아버지.
딸을 곁에 두고 싶어 했지만, 성현이는 그걸 원하지 않았다.
“성현아.”
“응.”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해. 해외를 가든, 국내에서 잠시 쉬든 그건 알아서 해. 대신 아빠 부탁 하나만 들어줘라.”
무엇을 말하는 걸까?
“다른 사람 한 번만 만나보자. 그래서 용규 그 친구를 잊을 수 있다면, 너도 새출발하고 좋은 거 아니겠니? 떠난 연인은 새로운 연인으로 잊는 거야. 그러니까 아빠가 자리 한 번 마련해볼게.”
“알았어.”
여성, 혼기가 꽉 찬 30세의 나이.
물론 요즘에는 결혼을 늦게 하는 여성도 많다.
하지만 부모 입장에서 30세는 부담스러운 나이다.
부모들 걱정은 다 똑같다고 했던가?
거절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만나보고 싶었다.
연예하던 시절 항상 따뜻하게 대해주던 용규 씨.
자신을 위해서 헌신하던 용규 씨보다 더 좋은 남자가 정말로 세상에 존재할까? 확인해보고 싶었다.
김성현이 아버지의 부탁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그걸 지켜보던 최용규는 착잡한 감정을 품고 다시 자신의 후배 곁으로 돌아갔다.
“어디 갔다 와요? 문제 설명해주다가 사라지는 게 어디 있습니까?”
어느새 초롱초롱해진 눈빛으로 공부에 집중하는 후배.
[그냥… 좀 다녀왔어. 공부는 잘 되어 가는 거지?]
유령의 표정을 보면 이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아는 강백현.
‘선배도 바보네. 죽었으면서 뭐가 그렇게 그 여자한테 미련이 남는 건데?’
* * *
주민센터에 온지 벌써 한 달이 흘렀다.
공무원 9급 일반행정 직렬 시험이 벌써 코앞으로 다가왔다.
바로 토요일. 내일이다.
이제 강백현은 모두에게 인정받고 있었다.
“백현아, 너 좀 변했다?”
“네?”
“아니, 싹싹하고 일 열심히 해서….”
“그런가요?”
사실 부주시청에 있을 때와 비교하면 반도 안 하고 있다.
그때는 눈코 뜰 새 없이 일을 찾아서 했었으니까.
오늘 한 일은 새로 온 사회복지사 분하고 같이 마을 돌아다니면서 인사드린 것 하나뿐.
물론 그 일을 자진해서 한 건 사실이다.
독거노인 도시락 전달 사업은 자기가 꼭 해보고 싶었던 사업이었으니까.
처음에 삐딱했던 모습과는 달리 지금은 주민센터의 일원이 되어 일하고 있는 강백현.
공동의 목표를 향해 협조하는 그 모습은 전과는 전혀 다른 인상을 주었다
백현이 자리를 비운 사이, 사람들이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동장님, 백현이 볼 때마다 괜찮은 것 같은데요.”
“그렇지?”
“네. 주민들한테 싹싹하고. 말투는 좀 그런데, 지내보니까 꽤 진국이네요.”
“그래. 편하게 해주면 다 된다니까?”
“오늘 또 이장 만나신다고 조기퇴근 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후배 공무원의 말에 동장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그리고 다음 날.
9급 일반행정직렬, 대전 지역시험.
시험은 자신이 임용되었을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번 시험은 선배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스스로도 자신 있었으니까.
3년 전이지만,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해 시험에 합격했던 경험이 있으니까.
행정학, 행정법, 사회, 수학, 과학.
웬만하면 다 아는 문제.
그래서일까? 가채점 결과는 89점.
결과는 커트라인 88.2점으로 합격이다.
이제 면접만 붙으면 된다.
하지만 자신 있었다.
왜? 자신은 경력자니까.
면접에서 떨어질 일은 없는 거다.
부주시장한테 찍혔다고 해서, 그게 대전에서까지 먹히진 않는다.
시장? 부주시 공무원?
지들이 부주시에서만 잘 나가지. 대전이나 세종, 타 시도 군에서 잘 나가는 거 아니다.
그래서 상관없었다.
그 다음 시험은 7급이었다.
이건 좀 어렵다.
한 달 동안 죽어라 했는데도 쉽지가 않았다.
“좀 도와줘요.”
[나도 7급은 잘 몰라. 5급하고 7급은 문제경향이 다른데?]
“앞에 있는 애들 중에서 학벌 좋은 애들 있잖아요. 걔네 것 좀 봐서 답 알려주세요.”
[오케이오케이.]
그리고 결과는 안타깝게 탈락.
커트라인 85.7점.
획득점수는 83점.
거의 치트나 다름없는 시험이었는데, 탈락하고 말았다.
‘젠장… 쉽지 않네.’
분명 앞 놈도 떨어졌을 것이다. 모르는 문제는 앞에 있는 수험생의 답이랑 똑같이 했으니까.
백현은 후회했다.
하긴, 같은 시험장에서 시험 보는 사람 답안지를 본다고 합격하는 게 아닌데….
3주 뒤에는 9급 공무원 면접이었다.
그리고 그 전에 5급 공채 1차, 2차 시험도 있다.
백현은 휴가를 내고 5급 공채 시험에 몰두했다.
자신의 온 역량을 다 투자했다.
[뭘 그렇게 공부해? 답 알려준다니까.]
“또 모르죠. 선배가 알려줘도 7급 시험처럼 떨어질 수 있잖아요?”
[그럴 일 없을 텐데? 나 이래봬도 5급 공채 수석이야. 자신 있거든?]
“그래요? 근데 7급에선 왜 그랬대?”
강백현이 망자의 손톱을 눌렀다. 그러자 유령의 입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으아아아악!]
이제 4월. 드디어 5급 공채 필기시험 날이 다가왔다.
많은 준비를 했고, 실무와 접목되는 부분도 있어 이해하는데 어려움은 없었지만, 그래도 모르는 부분이 있는 건 확실했다.
3독, 5독, 10독까지 하며 독하게 준비하는 어린 친구들과 비교해보면 자신의 시험 준비가 많이 부족한 것은 사실.
그래도 선배가 도움이 되어 준다니까 조금은 위로가 된다.
수석이니까.
그리고 뛰어났던 것은 사실이니까.
그래서 믿어보려 했다.
시험장.
다양한 사람들.
카이스트도 있고, 박사 출신도 있다.
그들의 노트를 보니 낡았다.
수백 번도 더 넘긴 게 티가 난다.
‘내가 합격할 수 있을까?’
현재 8급인데, 대전까지 출근해가며 9급이 되고 싶진 않았다.
기반을 잃어버리는 거니까.
시험장 앞에까지 같이 온 엄마를 향해 백현이 말했다.
“엄마, 다녀올게요.”
“그래. 시험 잘 보고, 꼭 합격해야지.”
“네. 그래야죠. 아빠도 같이 오면 좋았을 텐데, 또 혼자 기다리시지 말고 집에 계세요.”
“그래.”
시험장으로 가는 길, 백현이 엄마가 챙겨준 음료수를 들고 주차하고 걸어간다.
수많은 인파가 몰렸다.
걸어가며 생각했다.
‘그래. 믿자. 선배 믿고 시험 편하게 치자.’
“선배, 어디에요?”
그런데 오늘 선배가 보이질 않는다.
유령의 몸으로 도대체 어딜 간 건데? 백현이 당황하며 선배를 찾았다.
“아! 장난치지 말고 나와 봐요. 나 시험 좀 붙자. 나 붙여주기로 했잖아! 그게 계약조건이잖아. 응? 선배! 최용규 선배!”
길을 걸으면서도 불안감이 지속되었다.
여전히 선배가 나타나질 않는다.
“장난치지 마. 뭐해? 선배! 용규 형! 선배!”
마침 안내 방송이 나온다.
[5분 뒤 시험이 시작되오니 시험생 여러분들은 자리에 착석하여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강백현은 좌절했다.
절대적인 도움이 될 줄 알았던 선배의 배신. 오늘은 성주 단지 안의 손톱을 들고 오지 않았건만 그것이 이런 결과를 가져올 줄이야.
백현이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내가 이지랄 할 줄 알았다. 나쁜 새끼! 진짜!’
* * *
같은 시각.
최용규는 유령인 상태로 여자친구의 곁에 머물러 있었다.
오전 10시부터 상견례로 시작하는 만남이었다.
“기웅아, 뭐하니? 인사드려야지. 메리야트 호텔그룹 김도한 회장님이셔.”
“안녕하세요. 고기웅입니다. 현재 미국 뉴욕대에서 MBA과정 밟고 있습니다.”
“그래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어렸을 때 한 번 봤죠?”
“네. 회장님께서는 아버지랑 서울대 최고경영자 과정 동기라고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사업 파트너로 20년간 함께 하고 계시고요.”
자신의 여자친구와 만나는 남자.
바로 성한그룹 재벌 3세, 고기웅.
생긴 건 멀쩡하지만 미국에서는 여성 편력에 권력 남용, 약물까지 각종 향락에 푹 빠져 인생을 낭비하는 녀석이다.
그래도 대단한 것은 자신의 생활을 남들에게 들키지 않게 입단속을 철저히 한다는 점. 그래서 더 무서웠다.
쟤한테 엮인 여자는 다 버림 받는다.
저 놈은 여자를 쓰고 버리는 도구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최용규는 성현이가 저 녀석과 엮이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성현아, 저 새낀 안 돼! 안 된다고! 저 악마 같은 놈에게 속으면 안 돼!]
물론 최용규의 외침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다.
최용규가 부르짖고 있는데도 활짝 웃으며 고기웅의 어머니에게 인사를 올리는 김성현.
“안녕하세요. 김성현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김성현의 예의바른 모습에 고기웅의 어머니가 미소를 지으며 맞이했다.
“네. 일단 앉죠. 뭐라도 먹으면서 이야기 나눕시다.”
“네!”
성현이 밝은 어조로 대답하자 고기웅의 어머니가 칭찬을 늘어놓았다.
“근데 성현이는 관리 너무너무 잘했다. 피부가 정말 고운데? 애기 같아.”
“감사합니다. 부회장님도 여전히 아름다우세요!”
성한그룹 부회장인 고기웅의 어머니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후후, 그래야지. 한 회사를 책임지는 사람이면 관리해야지. 안 그래요? 회장님?”
김성현의 아버지에게 대화의 바톤을 넘기는 고기웅의 모친.
최용규는 이들의 대화를 들으며 생각했다.
오늘 얘네들이 나누는 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듣고 작전을 짜야겠다고.
김성현이 이 집안과 가까워지는 것을 철저하게 막아야겠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