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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배기 깨러 왔습니다-4화 (4/139)
  • 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4화

    선배 유령이 사라졌다.

    강백현은 별 신경 쓰지 않았다.

    아까도 봤으니까.

    ‘아마 자기 여자친구 자살하나 안 하나 감시하러 갔겠지.’

    오히려 유령이 안 보이니 기분이 좋았다.

    주민센터.

    옛 ‘동사무소’의 바뀐 이름이다.

    3년 선배인 김보석 주무관이 백현을 향해 물었다.

    “백현아, 심심하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주민센터는 처음이야?”

    “아니요. 임용 되었을 때 1년 정도 했었죠. 그 다음에는 시청 문화재과, 건설과, 허가과 이렇게 돌아다녔고요.”

    “그나저나 소문은 맞아? 뭐 내부 고발했다는 얘기가 들리던데? 네가 그런 거 아니지? 그냥 뜬소문이지?”

    김보석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모두가 궁금했던 사항이었기 때문이다.

    시청에서의 소문이 변방인 여기까지 오긴 하는데, 좀 걸러져 오기 때문에 확실하지 않아 당사자에게 직접 묻는 것이었다.

    강백현은 어차피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이미 찍혔는데 더 찍힐 것도 없다.

    이제는 귀신이 된 선배나 붙잡아서 5급 공채 되는 게 목표였다.

    아니면 다시 9급이나 7급 공무원으로 시험 보면 된다. 대전이나 세종 쪽으로 시험 봐서 점수도 세탁하고, 찍힌 것도 신분 세탁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어차피 공무원은 일 열심히 하나 대충하나 월급이 똑같다.

    1주일 전만 해도 희망을 가지고 일했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지금 이 상태로 열심히 일할 생각은 추호도 없는 강백현이었다.

    그래서일까?

    평소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대답이 툭툭 튀어나왔다.

    “네. 맞습니다. 충청남도 공직기강감사팀에 찔렀죠.”

    “그래. 안 찔렀지… 어? 뭐? 찔렀다고?”

    “네. 찔렀죠. 제대로 찔렀죠.”

    “소문이 진짜였어? 네가 직접 모시던 과장님을 찔렀다고?”

    “그럼요. 과장님만 찔렀나요? 국장님, 부시장님, 시장님 다 찔렀죠! 아~ 다 감방 보내버리고 편하게 좀 있나 했는데, 딱 걸려버렸네요. 그런데 김보석 주무관님?”

    “어?”

    “잠시 마을 좀 돌아다녀 봐도 되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마음이 답답해서 그렇습니다. 또 사고 칠 것 같아서요.”

    “뭐? 사고라니! 너 무슨 생각 하는데?”

    “아~ 아까 동장님은 15분 출근 늦으셨고, 팀장님은 오전에 한가하신지 휴대폰으로 경마하고 계시고, 김보석 주무관님은 일하다 말고 잠깐 나가셔서 여자친구랑 혼수 보러 갔다 오셨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대전까지요.”

    한량한 공무원들.

    같은 공무원으로서 그들의 민낯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강백현의 말에 김보석 주무관이 흥분해서 반론했다.

    “야! 너도 아까 옥상 가서 쳐놀았잖아.”

    “네. 저도 놀았죠. 그래서 좀 더 놀려고요.”

    “그게 말이야? 막걸리야! 너 왜 이렇게 망가졌냐? 너 안 이랬잖아. 이런 놈 아니었잖아.”

    “어차피 전 잃을 게 없지 않습니까?”

    “너 그러다가 찍혀.”

    “이미 다 찍혔습니다. 불만이시면 오늘 일 가지고 다 같이 감사실에 조사 받으러 갈까요?”

    “와! 이 미친 놈 봐라! 야! 야!”

    그런데 그렇게 막 나가도 주민센터 내에서 그를 막을 공무원은 없었다.

    뒤에 있던 동장이 강백현을 불렀다.

    “강 주무관.”

    “네. 동장님.”

    “너무 흥분하지 말어. 좋은 게 좋은 거잖어.”

    “네?”

    “좀 쉬다 와. 아니다. 오늘은 퇴근해!”

    “퇴근이요?”

    “집에서 좀 쉬다가 마음 풀고, 내일부터 천천히 일 해. 급하게 일할 거 없어. 시간 지나면 가슴 속 응어리진 거 다 없어져.”

    “알겠습니다. 그럼 퇴근하겠습니다.”

    동장님이 지시한 사항.

    설마 이렇게 쉽게 집에 보낼 줄은 몰랐는데, 진짜 너무할 정도로 썩은 집단이었다.

    강백현은 주저 없이 가방을 챙겨 퇴근했다.

    현재 누리고 있는 한량함을 잃지 않겠다는 동장님의 의지.

    그게 강백현의 입장에서는 너무 썩고 추해보였다.

    한편, 강백현이 나가자 동장님이 어이없는 말을 했다.

    “다들 강 주무관, 건들지 말어.”

    “동장님, 아~ 너무 풀어주시는디. 저 친구 4년차예유. 저렇게 막 나가면 안 되는데?”

    “에이, 상처 받았대잖어. 그리고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 있어? 그냥 대충 대충 1년 하다가 다른 데로 보내야지. 우리가 뭐 어쩔 것이여? 괜히 건드렸다가 지금 이렇게 편한 생활 다 없어질지 모르니께 다들 가만히 있어. 알겠지?”

    이해할 수 없지만 이게 현실.

    그렇다. 지방직 공무원은 한량하다.

    특히 번화가가 아닌 변두리에 있는 주민센터는 너무나 할 게 없어서 문제였다.

    5분 뒤. 주민센터의 동장이 말했다.

    “마을 이장이랑 밥이나 먹고 올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전화 줘.”

    “아~ 동장님, 이장님은 오늘 서울 병원 간다고 갔어유. 어디 가셔유?”

    “그려? 그냥 바람 좀 쐬다 올게.”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거리는 동장.

    그는 후배공무원의 질문을 얼버무리며 밖으로 나갔다.

    오후 2시, 주민센터에서 나와서 그가 간 곳은 바로 집.

    그 역시 일찍 퇴근할 목적이었던 것이다.

    * * *

    강백현은 집에 왔다.

    일찍 들어온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는 경비원, 어머니는 식당 일을 나가신다.

    그래서 낮에는 아무도 없다.

    백현이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공무원 시험을 보기 위해 일정을 확인했다.

    9급, 7급, 5급.

    일단 있는 일정은 다 접수했다.

    천안, 청양, 세종, 대전, 서울. 기간이 맞는 건 다 신청했다.

    가장 빠른 시험.

    9급 시험은 한 달 뒤, 7급은 9주 뒤.

    우연일까?

    다행히 5급 공채까지 시기가 맞았다.

    그런데 공직기강 감사관은 어디로 지원해야 하는 걸까?

    생각해보니 감사라는 직무는 없었다.

    일반행정인 것 같긴 한데, 선배가 지역으로 지원했는지, 중앙으로 지원했는지 알지를 못하겠다.

    5급 공채.

    일반행정 중앙은 경쟁률 55:1.

    일반행정 지역은 44:1.

    지역으로 지원하면 유리할 것 같긴 한데….

    아, 정보가 없다.

    이럴 때는 합격자의 말을 듣는 게 최선.

    자신을 5급 공무원으로 만들어주겠다던 선배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최용규! 선배! 어디에요? 나와요!”

    선배를 부르는 강백현. 근데 유령이 보이질 않는다.

    “최용규 선배! 나 5급 공채 시험 보려는데 나와 보라니까요!”

    그런데 진짜 안 나온다.

    백현이 머리를 굴렸다.

    ‘도대체 선배는 어디 간 거야? 유령이면서 뭐가 그렇게 바빠?’

    바쁘겠지. 그래. 여자친구가 유서 쓰고 난리 났다는데 바쁘겠지.

    그럼 여자친구 옆에 있겠네.

    아니, 뭐가 그렇게 이승에 미련이 많은 건데? 여자친구는 여자친구고, 내 인생도 책임져야 할 거 아니야?

    사람 이렇게 병신 만들어놓고 난 생각도 안 하는 거야?

    백현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전화기를 들었다.

    전화를 걸었다.

    아까 옥상에서 건 그 번호였다.

    - 여보세요?

    “네. 또 전화 드렸네요. 최용규 선배님 후배 강백현입니다.”

    - 네! 안녕하세요.

    “문제가 생겼네요.”

    - 네? 문제요? 어떤 문제가…?

    “편지를 잃어버려서요.”

    - 네? 용규 씨가 맡긴 편지를 잃어버렸다고요?

    “네. 분명 있었는데 찾을 수가 없네요. 죄송합니다. 못 만날 것 같습니다.”

    - 아니에요. 어쩔 수 없죠. 흑흑… 흑흑.

    강백현의 말에 흐느끼는 여성의 목소리가 수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왔다.

    그런데 선배가 여전히 나타나질 않는다.

    “네. 그럼 끊겠습니다.”

    - 네. 찾으시면 꼭 연락 주세요. 꼭이에요.

    “그럼요. 연락 드려야죠.”

    전화가 끊기는 순간까지도 유령이라곤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다.

    “와, 뭐지? 이 인간 어디 갔어? 여자친구 옆에 있었던 거 아니야?”

    3분 뒤, 그때서야 유령 특유의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너 왜 여기 있어? 너 왜 집에 있냐고! 주민센터랑 그 마을 존나 뒤졌잖아 새끼야! 그리고 편지 잃어버렸다는 건 뭐야? 있지도 않은 편지를 왜 잃어버려?]

    그런데 강백현은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어요 용규 씨? 근데 편지는 누가 쓰죠?”

    [뭐?]

    “얼렁뚱땅 편지로 위기 모면하려고 한 건 아는데, 그 편지 누가 써 주냐고요? 누가 전달하는데요?”

    [백현이 네가 전달하지.]

    유령이 정신을 못 차렸다. 강백현은 더 이상 따지기도 싫었다. 그래서 차분하게 물었다.

    “지금 만나자고 할까요? 편지 내용에 같이 살고 같이 죽자는 내용 써서 여자친구 분한테 드려요?”

    그의 말에 선배 유령이 정신을 바짝 차렸다.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지금 백현의 말 한 마디에 여자친구의 운명이 달렸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백현아, 진정하고. 응?]

    “5급 공채 합격 시켜준다고 했잖아요. 약속했으면 지켜야죠! 내 인생 책임지라고요!”

    [알았어. 지금이라도 다시 전화해서 편지 찾았다고 말해주면 내가 너 5급 공채 합격시켜줄게. 그러니까 제발! 흥분하지 말자.]

    최용규의 말에 강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자신의 일이 먼저였다.

    “일단 일반행정 중앙인지, 일반행정 지역인지부터 알려줘요.”

    [뭐? 그걸 지금 왜 해?]

    “선배는 지금 여자친구한테만 관심 쏠려 있잖아요. 내 인생은 하루하루가 지옥인데! 빨리 대답해요! 중앙이에요? 지역이에요? 어?!”

    [일반행정 중앙으로 해.]

    “그럼 충남으로 못 오잖아요. 나 부주시로 와야 되는데? 그래야 내가 공직기강감사자료 가지고 여기 다 부숴버릴 수 있는데?”

    [그건 올해 합격하면 가능할 거야. 내가 죽어 생긴 공석 자리에 신입을 뽑을 거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할 거고. 그러니까 중앙이나 지역이나 큰 차이는 없어. 주소지가 충남이니까 이곳에 올 수 있어.]

    “그래요? 선배만 믿을게요. 잘 해 보죠.”

    [그래. 전화해주는 거지? 편지 찾았다고 전화 주는 거지?]

    “선배 하는 거 봐서.”

    저 한 마디. 최용규 입장에서는 너무나 화가 나는 말투.

    자존심이 너무나 상했지만, 그를 버릴 순 없었다.

    유령이 된 상태라 말이 통하는 상대가 없었다.

    전국 방방곡곡 찾아봐도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은 물론이고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아 씨발, 나 왜 이렇게 꼬였지? 죽어서 나처럼 이렇게 꼬인 새끼 있나?’]

    귀신은 표정을 감출 수 없다. 그래서 강백현이 물었다.

    “기분 나빴습니까? 편지 내용도 말해주세요. 내가 처음부터 쓸 순 없잖아요.”

    [기분 나쁘다니, 내가 그럴 포지션이 아닌 건 너 자신도 잘 알잖아.]

    “좋아요. 그 태도 유지해요. 지금 선배하고 나는 서로의 이익을 위해 대화하는 겁니다. 그 관계가 깨지면 전 선배하고 대화를 거부할 겁니다. 그러니까 선배도 나한테 이익이 되도록 노력하세요.”

    [그래. 그럴게.]

    강백현이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네. 강백현입니다.”

    - 네!

    “편지 찾았네요. 3일 뒤 저녁 7시에 저희 집 앞에서 봐요. 그 시간 괜찮죠?”

    - 네. 그럼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는 뭘, 식사라도 한 끼 하면서 전달해드리고, 최용규 선배 과거 얘기도 좀 해드리겠습니다.”

    - 넵! 알겠습니다.

    전화가 끊기고, 강백현이 스마트폰을 보란 듯이 흔들었다.

    “잘 하세요. 한 번이라도 삐끗하면 선배 과거 다 까발릴 테니까!”

    강백현의 말에 최용규가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그래. 서로 이익을 위해! 나도 잘못한 건 있으니까.]

    “네. 그겁니다. 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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