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장 알 수 없는 전세
라우렌과 라디안은 로우나의 지시대로 주둔지에서 3킬로미터 정도 앞에 병사들을 집결시킨
채 기다렸지만 1시간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었다.
로우나를 믿고 있는 라우렌이라고는 하지만 지나가는 시간이 아까웠다. 이 정도의 시간이면
병사들에게 더 많은 훈련을 시킬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애석하게도 라우렌이란 자는 뼈
속까지 기사였다.
?낌새도 보이지 않는군.?
?잠시만요.?
라디안은 라우렌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는 마법을 시연했다. 이글아이. 독수리의 눈
으로 먼 곳을 볼 수 있는 마법 중 하나였다.
마법을 시연한 라디안은 먼 곳에서 일고 있는 흙먼지를 볼 수 있었고, 즉시 마법을 해제한
후 라우렌에게 말했다.
?북쪽 4킬로미터 정도쯤에 일단의 병력들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주변에 많은 흙먼지가 일
고 있군요.?
아직 안개가 다 사라진 것이 아니어서 라우렌은 볼 수가 없었다. 때문에 그는 라디안의 눈
을 믿고 병사들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한 시간 후쯤 라우렌의 눈에도 보이기 시작했다.
?전군 전투 준비!?
라우렌의 명령에 병사들은 전투 준비를 하고 당장이라도 돌진할 준비를 마쳤다. 마법사들과
마법이 걸린 화살을 지니고 있는 병사들 역시 적들을 향해 공격 마법과 화살을 날릴 준비를
마쳤다.
?예상대로라면 마령군은 아마 쫓기고 있을 겁니다. 일단은 적들의 기세를 멈추게 하고 반
격할 수 있게 준비해 주십시오.?
라디안의 말에 라우렌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정도쯤은 예상하고 있단다.?
옆집 애를 다루는 듯이 라디안의 머리를 쓰다듬는 라우렌은 기병들을 보며 지시했다.
?기병들은 동쪽으로 움직이며 적의 옆구리를 칠 것이다. 나를 따르라!?
라우렌이 말을 몰아 앞으로 뛰어나가자 그의 뒤를 이어 수많은 기병들이 따르기 시작했다.
라디안 역시 가만히 있을 수는 없기 때문에 뭔가를 한참 생각하고는 마법사들을 향하여 소
리쳤다.
?전 마법사들은 하이 림피디니스(대단위 투명 주문) 주문을 사용하여 모두의 모습을 감추
십시오!?
라디안의 명령이 내려짐과 동시에 마법사들은 대단위 투명 마법을 사용하여 군대의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칠인회 소속의 마법사들은 하나하나가 뛰어난 마법사들이었기에 얼마 안
있어 수백 명의 병사들이 모습을 감추었다.
한편 크렌 장군은 후퇴하는 병사들의 뒤쪽에서 기병들과 함께 북극령의 군대를 막아서고는
있었지만 피해는 줄어들지 않았다. 역습에 성공한 북극령 병사들의 사기는 최고조에 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기병들은 후퇴하라!?
어느 정도 보병 부대들이 멀어지자 크렌 장군은 옆에 있던 적기병 한 명을 검으로 베어버리
고 소리쳤다.
안티아노는 크렌의 명령이 떨어지자 기병들을 독려하며 후퇴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접전지의
왼쪽에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한 떼의 기병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적인가??
/안티아노는 놀라 그들의 모습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는데 다행히도 그들은 로우나의 명령으
로 후퇴하는 아군을 돕기 위해 온 크렌과 기병들이었다.(크렌의 기병은 먼저 출발했고 투명
마법을 사용한 이들은 라디안과 함께 있는 복병들입니다. 따라서 수정불가)/
?아군이다! 전군은 역습하라!!?
크렌 장군은 적의 옆구리로 몰려오는 기마대가 아군임을 확인하고 역습을 지시했다. 북극령
의 병사들은 갑자기 몰아닥친 적의 기병대에 놀라고 있었고 그것을 틈타 크렌은 기병들을
독려하며 적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크렌 장군과 함께 후퇴해 온 기병들과는 달리 라우렌의 기병들은 충분한 휴식을 취한 상태
였기 때문에 피로해 있는 북극령의 군사들은 상대가 되질 않았다.
?장군! 일단 후퇴하십시오!!?
30여 분의 전투 끝에 도달한 라우렌은 크렌 장군에게 다가가 말했고 라우렌의 말에 작전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챈 크렌 장군은 후퇴를 지시했다.
?전 기병대 후퇴!?
크렌의 명령에 따라 기병대는 후퇴하기 시작했고 마령 측의 병사들이 후퇴하자 북극령의 군
사들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그들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쫓고 쫓기는 관계가 어느 정도 지속될 무렵 라우렌은 라디안의 텔레파시를 들을 수 있었다.
[투명 마법으로 숨어 있으니 기병대를 뒤쪽으로 돌리십시오.]
라디안의 말에 따라 기병대는 투명 마법으로 숨어 있는 궁병과 마법사들을 뒤로한 채 후퇴
했고 그의 뒤를 쫓아 북극령의 군사들이 몰아닥쳤다.
?공격!?
라디안의 마나가 담긴 목소리가 터지자 궁병과 마법사들은 활과 마법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비 오듯 퍼부어지는 화살과 마법은 멋도 모르고 쫓아온 북극령 병사들의 진형에서
폭발하기 시작하고 순식간에 북극령의 진형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전 기병대는 공격!!?
크렌 장군은 폭발과 함께 도망가던 기병들을 다시 돌려 적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북극령의 병사들을 지휘하던 크로드는 궁병과 마법사들의 공격으로 분위기가 역전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전군에 후퇴를 지시했다.
궁병과 마법사들의 원조로 시작된 전투는 마령 측의 우세로 이어졌지만 이미 기세가 기울어
졌다는 것을 파악한 크로드의 재빠른 판단으로 북극령의 군사들이 재빠르게 후퇴하여 그렇
게 큰 전투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크렌 장군 또한 아군의 병사들의 피해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리한 공격은 하
지 않고 전 병사들에게 후퇴를 지시하였다.
모든 전투가 끝나고 크렌 장군이 이끄는 마령의 병사들은 주둔지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안
티아노의 보고로 시작된 피해 상황은 크렌 장군으로 하여금 절망감을 안겨줄 정도였다.
?아! 한순간의 방심이 이런 결과를 초래하다니…….?
피해 상황은 이러했다. 이번 작전으로 출전한 중갑 기병은 거의 전멸, 일천 기 중 생존자는
겨우 백여 명. 그나마 거의 모두가 중경상을 입고 있었다. 경갑 기병은 이천 중 전사 천이백
오십여 명, 중경상 육백여 명, 중장갑 보병 3천 중 전사 이천백여 명, 중경상 칠백오십여 명,
경갑 보병 3천 중 전사 육백오십 명, 중경상 천이백여 명, 궁병 2천 중 전사 오백삼십여 명,
중경상 천이백여 명.
그나마 경장갑 보병과 궁병은 북극령 역습 전투에서 전투 참여가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이 정도였고, 기병들의 피해가 심한 것은 북극령의 공격을 방어하면서 후퇴하였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장갑이 무거운 중장갑 보병의 기마들은 오랜 전투 끝에 지쳐 있어 많은 수의 피
해가 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원조를 나갔던 마법사 50여 명 중 한 사람만이 죽었을
뿐 모두 부상 정도에 그쳤다는 것이다. 만약 마법사들의 피해가 컸다면 로우나에게 얼굴조
차 들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튼 이번 전투에서 마령 측은 오천 이상의 병사을 잃고 중상자들이 견디지 못하고 죽어
가는 것으로 보아 6천 이상, 즉 출전 병력의 반 이상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북극령의 피해는 그들보다 배 이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후방에 본군이 있는 그들로서는 문
제될 것이 없었다.
?사라덴 공의 원군은 얼마 정도 후에 도착할 것 같은가??
?연락 온 비병의 말에 따르면 앞으로 이틀 정도면 도착할 것 같습니다.?
?이틀이라…….?
현저히 줄어든 북극령의 병사들을 생각하면 이틀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됐다.
?안티아노.?
?예.?
?이제부턴 사라덴 공이 이끄는 원군이 올 때까지 철저한 방어전에 돌입한다. 병사들에게
명령하여 주둔지에 방책을 쌓도록.?
?예.?
분지 안에서 야숙을 하고 있는 루드웨어 일행은 간간이 들려오는 웨어울프의 비명 소리를
들으며 잠을 자고 있었다.
크레이드는 이 시간 야간 근무를 서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런 그에게 시안이 다가왔
다. 무슨 일일까? 크레이드는 시안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속으로는 기분
이 째질 지경이었다.
?이런 야심한 밤에 아녀자가 혈기 왕성한 남정네를 찾아오다니. 흐흐흐!?
음침한 웃음소리가 크레이드의 가슴속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내면 곧
바로 시안의 주먹이 안면을 강타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겉으로는 태연함을 가장한 그
는 시안을 보며 물었다.
?시안, 안 자??
?잠이 안 와.?
무슨 영문인지 모르지만 은 쟁반에 옥 구슬 굴러가는 소리―물론 이것은 크레이드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지만―를 내며 시안은 크레이드가 앉아 있는 바위에 앉았다.
?우리들끼리만 다닐 때는 몰랐는데, 나 이상하게 방해만 되는 것 같아.?
시스들과 드래곤 슬레이어를 하며 다닐 때는 보물들을 챙기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했지
만, 현재는 로노와르와 같이 정말 딸려오는 허접들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괜히
의기소침해졌다.
/?무슨 소리야. 좀 있으면 도둑이 할 수 있는 일이 생길 거라고. 던젼 같은 곳이 나와서 함
정이라도 있으면, 그것을 눈치채고 처리할 수 있는 것은 도둑 출신인 너밖에 없잖아.?/
크레이드는 의기소침한 시안을 보며 조금은 기를 세워줄 목적으로 그렇게 말했고, 그런 크
레이드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는지 시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크레이드, 나 좋아??
?엉??
시안의 갑작스러운 말에 크레이드는 얼굴이 시뻘게진 채 당황하고 말았다. 평상시에는 시안
에게 추근덕거리며 다가서는 크레이드였지만 당사자가 이런 말을 하자 당황한 것이다.
?나 좋냐고.?
?…좋아…….?
간신히 크레이드는 좋다는 말을 할 수 있었다.
?사실 파문 사제로 있을 때는 몰랐지만, 너희들과 같이 다니면서 난 사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됐어. 그 와중에 너를 만나게 됐지. 마음속으로는 아픔을 가지고 있지만 겉으로
는 밝은 시안. 그 모습이 정말 나를 보는 것 같아서 한눈에 반해 버리고 말았지.?
?…….?
?언젠가 모든 일이 해결되고 평화스러운 시간이 지속된다면 나… 나 너에게 …청혼하고 싶
었어.?
그 말을 들은 시안 역시 얼굴이 시뻘게진 채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크레이드는 막상 말을
하긴 했지만 뒤처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지라 고개를 들어 애꿎은 별만을 노려보았
다.
?바보…….?
?응??
?그런 말을 하면서 딴 데만 보고 있음 어떡해.?
?그럼??
크레이드가 되묻자 시안은 크레이드를 바라보면서 눈을 감았다. 크레이드는 시안의 행동이
무엇이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기에 검을 옆에 내려두고 그녀의 어깨와 허리를 감싸 안고
는 입을 맞추었다.
크레이드의 품에 안겨 입을 맞추며 시안은 엘프의 마을에 있었던 때를 생각해 보았다.
고귀한 종족인 엘프. 시안은 그런 엘프 중에서도 자긍심이 높은 서엘프 족의 상당히 이름
높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 태어남이 시스에게는 큰 고통으로 다가왔다.
피의 역류, 그것은 엘프의 사회에서 악마의 저주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직도 그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피의 역류는 엘프의 사회에서 백 년마다 한 번씩 있는 일
이었는데, 보통 엘프의 부부 사이에서 엘프 중 악마의 자식이라고 일컬어지는 다크 엘프가
태어나는 것이다.
시안은 그 피의 역류로 인하여 다크 엘프로 태어났고, 자라나면서 다른 엘프의 아이들과는
전혀 어울릴 수 없었다.
악마의 자식. 그 말은 어린 시안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단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피부가 검을 뿐이었는데 다른 엘프들은 자신을 악마의 자식이라
며 손가락질했고, 그것은 부모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의 자식인 시안이 피의 역류로 다크 엘프로 태어났다는 것은 고귀한 그들에겐 큰 치
욕이었기 때문이다.
20세가 넘었을 때, 시안은 스스로 서엘프의 마을을 빠져나왔다. 물론 마을을 빠져나가는 것
을 부모와 다른 엘프들이 보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들은 시안이 빠져나가 마을의
우환거리가 사라졌다는 것을 기뻐하고 있었다.
슬픔. 그것은 시안에게 사랑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게 만들었다.
대륙의 어느 한곳도 다크 엘프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는 노예 상인들에
게 잡혀가 십여 년의 세월을 인간들에게 휘둘리며 몸을 팔아야 했다.
인간들 모두가 무섭고 두려웠다. 그리고 원망스럽고 증오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하나의 희망이 찾아왔다.
300살이 넘는 루브란이란 다크 엘프가 우연히 7번째 새로운 주인을 만나기 위해 팔려가는
시안을 발견하고는 구출한 것이다.
처음 루브란에게서 구출되었을 때는 그 역시 다른 이들과 달리 자신을 학대하고 괴롭힐 것
이라 생각해 그를 멀리했지만, 그에게서 한 가지 말을 들었을 때 드디어 자신과 같은 사람
을 만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루브란, 그는 시안과 같이 피의 역류로 태어난 다크 엘프였던 것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시안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엘프 마을을 빠져나왔다면, 루브란은
엘프들의 기술 중 하나인 정령 소환술을 배운 후에 스스로 마을을 나왔다는 것이다.
300여 년의 세월을 시안과 같이 다른 사람들의 눈총을 받으며 살아왔던 루브란은 시안에게
정령술을 가르쳐 주었고, 10년이 지난 후 시안은 루브란에 버금갈 정도의 정령술을 익힐 수
있었다.
그 후 루브란과 헤어진 시안은 자칫 신성의 이름을 가진 국가에서는 살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악의 땅이라고 일컬어지는 마령의 땅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시안은 드디어 자신의 살 수 있는 땅을 찾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령. 그곳은 루덴스란 걸출한 왕의 밑으로 마족과 인간이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는 땅이었
다.
고귀한 자 중 신에게 버림받고 악마에게 씌워진 자, 다크 엘프 역시 이곳에선 평범한 종족
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시안은 어느 누구와도 사랑을 주고받지 못했다. 과거의 고통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새로운 동료를 만났을 때 그녀는 드디어 사랑을
알 수 있었다.
패러딘 크레이드, 그는 자신이 가장 증오하는 5대 신 중의 한 명인 아리시아 성교회의 패러
딘이었다. 그를 처음 보았을 때 시안은 너무나 증오스러운 종자였기에 그가 가까이 오는 것
조차 거부했다.
하지만 크레이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신에게 집요하게 접근했고,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서 그가 다른 자와는 달리 자신을 아껴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오늘에서야 시안은 크레이드의 마음을 받아준 것이다. 그리고 자신 역
시 크레이드에게 사랑을 건네주었다.
이 시간 잠자리에 누워 있는 상태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시스는 입가에 미소
를 짓고 있었고, 역시 그러한 중요한 장면을 놓치지 않는 루드웨어는 나중에 써먹을 요량
으로 그 장면을 마법 카메라에 녹화하며 역시 자신의 옆에서 깨어 있는 로노와르를 보며 이
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잘 봐. 어차피 우리도 해야 되는 거니까.?
?뭘??
?설마 언약의 키스도 모른단 말이야? 우리 결혼하면 저런 뜨거운 키스를 나눠야 한다고.?
?…….?
루드웨어와 로노와르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아이샤는 한심한 듯 다시 눈을 감아버렸
고, 역시나 깨어 있던 암흑 신관 유리마는 조용히 마신 라스타의 이름으로 그 둘을 축복해
주었다. 물론 두 사람이 이것을 알고 있었다면 이렇게 소리쳤을 것이다.
?야! 그건 저주야! 저주!!?
마지막 한 사람 암흑의 황태자 루덴스는… 잠에 빠져 있었다(피곤한 루덴스…).
다음날 난데없는 러브신 덕에 잠을 못 이룬 일행들은―물론 여기서 숙면한 루덴스는 제외한
다―시뻘게진 눈들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노와르, 눈이 빨갛다.?
?마찬가지…….?
얼마나 진한 러브신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일행들에 비해 당사자인 크레이드와 리안은 의기
충천, 피곤한 줄도 모르고 탱탱하게 잘 살아 있는 것으로 보아 역시 사랑이란 어떠한 보약
보다 좋은 건가 보다.
잘 나가는 두 사람과 잘 나가려고 하는 한 사람 외 나머지 일행들은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악당 같지 않은 악당 크샤스를 향해 나아갔다.
얼음성. 크샤스의 성이자 북극령의 수도이기도 한 이곳에 난데없는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반란. 북극령의 유일한 공작이자 크샤스에게 마령의 침입자를 상대하기 위해 위임받은 자리
인 전군 사령관이기도 한 안트워 공작의 본군 24만 명이 갑자기 마령과의 대전 중에 회군하
여 얼음성을 공격한 것이다.
얼음성을 지키고 있던 친위대의 기사 200여 명과 얼음성 황성 경비대 1만은 안트워 공작의
대군을 맞아 이틀 동안 버텼지만 수적인 열세에 눌려 패하고 안트워 공작은 자신의 친위병
들을 이끌고 얼음성의 수정궁에 와 있었다.
수정궁 안에는 크샤스의 여동생인 사이야와 그녀를 보호하는 이십여 명의 친위대가 안트워
공작의 친위병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무슨 짓인가요!?
사이야는 수많은 병사들을 끌고 와 자신의 궁을 침범한 안트워 공작에게 소리쳤지만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안트워 공작은 크게 웃을 뿐이었다.
?하하하! 역시 크샤스 왕의 여동생답군. 이런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다니. 뭐, 무슨 짓이
라고 할 것도 없이 공주께서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이……!?
사이야는 안트워 공작의 말에 화가 났지만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란 것을 알기
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크샤스 왕이 궁극의 마신의 힘을 차지하는 것까지는 별로 말릴 것은 없지만, 그렇게 된다
면 저의 입지가 약간 흔들릴 것 같기에 저도 뭐 하나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공주님
을 모시러 왔습니다. 어떻습니까? 저와 함께 당신의 오빠를 만나러 가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에 사이야를 보호하고 있던 친위 대원들은 사이야의 앞을 막아서며 죽어도 그녀를
그에게 보내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친위 기사의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안트워 공작이 거느린 병사들의 수는 월등히 많았고, 안트워 공작 자신도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기사였다.
?쳐라!?
안트워 공작의 지시가 떨어지자 그의 뒤에서 시립하고 있던 기사들이 뛰어나와 사이야를 보
호하고 있는 친위 기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사이야는 피가 튀기는 이 혈전 속에서 덜덜 떨며 뒤쪽에 숨어 있었고, 이 싸움은 수적인 열
세로 인하여 얼마 안 있어 그 끝을 맺었다.
사이야를 보호하고 있던 이십여 명의 친위 기사들은 모두 죽임을 당한 것이다.
안드워 공작은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가 연약한 어깨를 잡았다.
안드워 공작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어깨를 잡힌 사이야는 연약한 신음과 함께 끌려올 수밖에
없었다.
?사이야 공주, 뭐 나이 차이가 조금 나지만 나 안트워 공작이 당신의 낭군이 되실 것이니
너무 미워하지 말구려. 하하하하!?
현재 56세의 반늙은이 안트워 공작은 원조 교제의 무서움을 모른 채 사이야를 향하여 정말
무서운 말을 해댔고, 눈물을 흘리는 사이야는 세상에 있는 로리콘이란 자를 모두 증오할 수
밖에 없었다.
?리브란트 경.?
?예.?
안트워 공작의 말에 뒤에 서 있던 한 명의 기사가 앞으로 나오며 대답했다.
?프레드 경에게서 소식은 왔는가??
?예.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는 하지만 피해는 상당한 것 같습니다.?
?쯧쯧, 한때는 영민했기에 받아들여 줬더니 권력의 맛에 너무 취해 영민함이 떨어졌어. 아
마 마령의 군대는 지원될 것이다. 리브란트 경은 마병 8만을 동원하여 프레드 경을 지원하
도록 하라.?
?예.?
리브란트가 명령을 받고 나가자 안트워 공작은 뒤에 서 있던 부관 레오나르도를 손짓으로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마병들은 얼음성의 방어로 이곳에 남겨두고 인간으로만 이루어진 군대를 조직해라. 크샤
스가 있는 레허드 분지로 떠날 것이다.?
?예.?
?아, 또 이 아리따운 레이디를 잘 모시도록. 크샤스에게 보여줘야 어느 정도 거래가 성립될
테니까.?
?알겠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안트워 공작에게서 사이야를 건네받고 밖으로 나갔다.
?크크크, 크샤스, 네 녀석은 이제 나의 마리오네트 인형으로 추락하게 될 것이다. 하하하
하!?
안트워 공작, 그는 크샤스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그를 조종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