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장 북극령 상륙 작전 (1)
야센시티의 시청, 마령에서의 해상 무역은 국가 단위로 이루어지고 있었기에 야센시티의 청
사실은 언제나 부산스럽기 그지없었지만, 요즘 들어서는 마령과 제국의 전쟁으로 인해 조금
한산해졌다. 한적한 청사실 안에는 조금 안색이 좋지 않은 노인 한 명이 자리에 앉아 있었
는데, 그가 바로 야센시티의 시장 파울로 남작이었다.
파울로 남작은 원래 로아냐드 제국의 사람이었으나 그곳에서 모함을 받아 도망 다니던 중
루덴스의 눈에 띈 사람이다.
/그는 마령으로 도망쳐 온 후 의외로 상업부분에는 인재가 없어 취약했던 것을 알고는 국가
를 상대로 엄청난 거금의 사기를 치다 걸렸었다. 본래대로라면 마령 내에서 국가를 상대로
사기 친 죄로 사형을 당해야 했지만, 상업부분의 인재가 급했던 루덴스는 그의 뛰어난 솜씨
를 높이 사 스카웃한 것이다./ 마령이 마족들이 세운 국가라고는 하지만, 인간들 역시 꽤 많
은 수가 살고 있었기 때문에 타국과의 무역을 통해 타국의 문물을 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
어 그 적임자를 찾고 있었는데, 그때 파울로 남작이 눈에 띈 것이다.
제국에서도 쫓겨난 자신을 받아준 것에 감격한 파울로 남작은 야센시티를 마령 제일의 무역
항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여 현재는 마령 중앙 정계에서도 상당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인
물이었다.
그 정도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안 좋은 안색으로 이곳에 앉아 있는 이유는 바로 그들의 앞
에 있는 몇 사람, 아니, 한 사람 때문이었다.
시장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바로 자신을 이곳의 시장으로 임명한 암흑의 황태자 루덴스였
다. 시장으로서는 싫어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존경하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루덴스에서서 풍
겨 나오는 카리스마는 그를 주눅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루덴스 외에 시청 청사실 안에는 몇 명의 사람들이 더 있었는데, 루덴스의 부관이자 하프
뱀파이어인 사라덴, 이번 북극 원정의 사령관을 맡은 크렌 장군과 대륙 마법 길드와 쌍벽을
이룬다는 마법 조직 칠인회의 6회주 로우나 같은 쟁쟁한 인물들이었다.
루덴스는 둘째 치고라도 이 정도의 인물들이 앞에 앉아 있으니 평소에 당당하던 파울로 남
작으로서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좌중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파울로 남작은 입을 열었다.
?폐하가 명하신 대로 마령에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함선을 모아보았지만 226척뿐이었습니
다. 50,000의 군대와 물품을 북극으로 움직이기에는 적어도 네 번 이상 왕복해야 하지만 최
대한 노력해 본다면 세 번 정도로 줄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파울로 남작은 지금까지의 준비를 빠짐없이 루덴스에게 보고했다. 쩔쩔매며 보고를 마친 그
의 모습에 루덴스는 잘했다는 듯이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수고했다. 해상 운송 수단을 쓰지 않는 마령에서 226척이나 되는 함선을 동원할 수 있다
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과연 파울로 남작이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솔직히 상황이 급박하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있는 파울로 남작으로선 이 정도의 함선밖에 동
원하지 못했다는 것이 상당히 불안했다. 로아냐드 제국이라면 이런 것으로도 충분히 경질을
받고도 남을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준비가 미흡하여 좋지 않은 형국으로 변한 현재의
상황에도 화를 내지 않고 그간 노력해 준 신하에게 칭찬의 말을 하는 루덴스를 보며 파울로
남작은 자신이 주군 하나는 정말 잘 만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제국에서라면 어찌 충분한 준비를 끝내지 못한 신하에게 황제가 칭찬을 했겠는가? 자국의
상황도 잘 알지 못하는 황제는 도리어 벌을 내렸을 것이란 생각에 남작은 모락모락 충성심
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루덴스가 일단은 힘써 준 파울로 남작에게 격려의 말을 하기는 했지만 상황은 좋은 것이 아
니었다. 칠인회 6회주 로우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조금 찡그린 얼굴을 보이며 말했다.
?생각보다 안 좋은 상황이군요. 네 번 정도라… 첫 번째 도착할 병력이 최소한의 군량과
함께 도착한다면 1만 5천 정도로 예상할 수 있겠군요.?
로우나의 말에 크렌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마병이 전투에 참여할 수는 없지만 운송은 가능합니다. 군수 물자들을 마령의 비병단으로
하여금 운송시킨다면 3만 정도의 병력을 1차로 보낼 수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북극에서 군수 물자를 운송할 비병들을 공격할 경우에는 상당한 문제가 생기지 않
을까요? 잘못하다가는 1차 병력에게 향할 보급품이 중간에 모두 끊어질 수 있을 텐데요??
로우나는 크렌의 의견을 들으며 문제점을 짚고 나왔다.
?비병의 핵심인 와이번 라이더들은 수송 비병을 호위해야 하겠군요. 1차로 가는 정벌대가
3만의 경우라면 군수 물자의 조달이 상당히 힘들겠고, 적어도 일주일 이상 버틸 수 있는 물
자가 도착해야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1차 병력의 수가 2만 이상은 힘들 것 같군요.?
루덴스가 아끼는 사람답게 사라덴은 현재 마령의 상황과 북극령의 군대에 관해서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1차 정벌군의 수를 짚어내고 있었다.
똑똑한 그를 보며 칭찬이라도 해줄만 하련만 현재 사라덴의 보고는 그렇게 좋은 소식이 아
니기 때문에 좌중의 안색은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크샤스는 해안에서부터 이미 수중 마물들과 함대를 대기시키고 있습니다. /북극령의 함대
는 남방의 해적들이기 때문에 해상병력이 취약한 저희보다 함대전은 /능숙하리라 생각합니
다. 그런 이유로 이들을 모두 처리하고 함대가 해안에 도착한다 해도 그 피해는 엄청날 것
입니다.?
루덴스는 함대의 접근이 쉽지 않을 것이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초반부터 이렇게 벽에 부딪
히자 답답함에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는 어느 성인의 말씀이 있었듯 루덴스에게 하나의 희망이 다가
왔다.
?북극령 해안가 정리만이라면 우리가 도와줄 수도 있네.?
좌중에 있던 사람들이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초록색의 머리칼을 지닌
묘령의 아가씨가 서 있었다. 루덴스는 그녀를 보자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말했다.
?드래곤 일족의 원로이신 프로란스님을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프로란스!!?
루덴스의 말에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륙에 하나밖에 없는 에이션트 드래곤 중
가장 나이가 많다고 알려져 있는 에이션트 그린 드래곤 프로란스가 자신들을 도와주기 위해
왔기 때문이다.
?귀찮긴 하지만 우리 일족의 해츨링을 데리고 있는 루드웨어란 녀석의 부탁 때문에 어쩔
수 없었고, 또 일족의 심장으로 장난질 치는 녀석을 가만히 내버려 두기도 뭐해서 겸사겸사
오게 됐네. 어떤가, 우리들의 힘이 도움이 되겠는가??
루드웨어가 북극령에서 150골드나 되는 비싼 정보를 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서 드
러났다. 일단은 마령과 칠인회의 마법 병단이 북극령으로 침공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루드웨어는 분명 크샤스가 해안가에 상당한 마물들과 병사를 배치할 것이라 생각하고는 로
노와르를 빌미로 드래곤들을 협박한 것이다.
잠시 그 당시에 있던 루드웨어와 프로란스 간의 통신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레어에서 숙면을 취하고 있던 프로란스는 난데없이 울리는 화상 전달기의 벨소리에 짜증을
내면서 수화기를 잡았다.
?누구요.?
?흐흐흐흐흐.?
원래 전화기를 들자마자 음흉한 웃음소리를 내는 부류의 인간들은 장난 전화이거나 변태일
공산이 컸기 때문에 프로란스는 바로 끊어버리려고 했지만, 그 목소리를 어디서 많이 들어
본지라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흐흐흐흐, 프로란스님, 저 루드웨어입니다.?
?…….?
변태의 정체를 파악한 프로란스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리고 싶었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루드
웨어의 말에 수화기를 내려놓을 수 없었다.
?그린 일족의 해츨링이 사라진 이유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로노와르 말인가? 자네가 데리고 가지 않았는가??
?그렇지요. 뭐, 처음에는 적적하기도 해서 같이 놀아줄 사람을 찾다가 데리고 나오긴 했지
만 이제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무슨 소린가??
?남성체인 줄 알고 있었던 로노와르가 사실 여성체 해츨링이더군요.?
그 순간 프로란스는 덜컥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루드웨어의 바람기를 잘 알
고 있던 프로란스는 지금까지 로노와르를 남성체를 지닌 해츨링이라고 속이고 있었기 때문
이다.
?자, 자네, 무슨 짓을 하려고!?
?뭐, 별거 아닙니다. 로노와르를 데리고 다니면서 성체가 되어 여자로 변하면 마누라로 삼
을까 생각했는데, 요즘 들어 저의 애를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더군요.?
?자네, 설마…….?
?흐흐흐흐, 이제야 저의 이 음흉한 웃음의 정체를 아셨습니까??
?안 되네, 이 사람아! 아무리 500살에 가까운 해츨링이라고 해도 드래곤 나이로는 아직 애
야, 애!?
?흐흐흐, 전 인간입니다.?
?자네…….?
프로란스로서는 뭐라 해볼 도리가 없었다. 급하게 칸 국 통신에서 장난 전화를 예방하기 위
해 요즘에 들여온 발신지 추적 장치를 켜 녀석의 장소를 알아보곤 텔레포트하려 했지만, 이
상하게 녀석에게 오는 전파를 추적하지 못하고 있어 불안감은 더욱 커지고 있었다.
?뭐, 저의 부탁을 한 가지 들어주신다면 그것을 조금 미룰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부탁??
루드웨어가 무엇을 부탁하려 하는지 조금 불안해지는 프로란스였지만, 드래곤 역사상 단 한
번도 해츨링이 애를 낳는다는 불미스러운 일은 없었고, 그것이 그린 일족에게서 나오게 할
수는 없는지라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자네가 하려는 부탁이 뭔가??
?헤헤헤헤, 뭐, 심한 걸 부탁하는 건 아니고요.?
프로란스가 절대 거짓을 말하지 않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루드웨어는 평상시와 같이 비굴한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루드웨어의 비굴한 웃음소리는 음흉한 웃음보다 더 불안하
게 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프로란스는 인간에게 농락당했다는 치욕감을 참으면서도 눈물을 흘리며
드래곤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다.
?위대한 종족이신 드래곤의 힘이라면 큰 도움이 되지요. 자, 여기에 앉으시지요.?
루덴스의 말에 프로란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사양하겠네. 드래곤이란 놈들이 워낙 귀찮을 것을 싫어해서 냅두면 도망가는 놈들이 속출
해서 말이야. 내가 잠깐만 자리를 비워도 안 될 것 같네.?
?그러십니까? 그럼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그러지. 그럼 출발할 때 연락하게나.?
?예.?
걱정으로 눈물을 삼키며 온 프로란스가 나가자 사라덴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행입니다. 드래곤 일족이 도움을 준다면 아무런 문제 없이 병력이 북극령의 해안에 도
착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밖에서 느껴지는 수론 드래곤 일족들이 백 이상. 충분하다. 사라덴, 크렌 장군.?
?예.?
?출발은 내일 오전이다. 지시해 두도록.?
?예.?
뜻밖에 드래곤들의 도움으로 원만하게 회의를 마칠 수 있었던 이들은 루덴스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칠인회의 로우나가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자 개운한 마음으로 청사실을 나가자 일단의 사람
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우나님.?
?라디안이구나. 그래, 잘 놀다 왔니??
라디안은 얼마 전에 2회주인 헤른드 라비에타의 제자가 된 소년이었는데, 귀엽게 생긴지라
그녀가 상당히 예뻐하고 있었다.
?예. 아!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요.?
?이분들 말이냐??
?예. 제가 칠인회에 오기 전에 같이 여행하던 사람들이에요.?
?아! 네 녀석이 매일 지겹게 이야기하던 사람들 말이냐??
?예.?
라디안의 말에 로우나는 그들에게 다가갔는데 할버드를 든 30대의 전사가 그녀의 앞으로 다
가와 말했다.
?미흡하게나마 일행의 리더로 있는 시스 안티아노라고 합니다.?
?칠인회의 로우나 크리스티앙이라고 합니다.?
아! 이게 어찌 하늘의 운명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시스는 라디안의 말에 별로 기
대하고 있지 않았었는데, 자신의 앞에 있는 여자는 그가 이상형으로 삼고 있는 모든 조건이
충족되어 있는 여자였다.
?이쁘당…… 흐흐흐흐.?
지금까지 시스는 정말 건실한 중년 남자로 나왔지만, 새삼 그의 본성이 드러나고 있었다. 시
스같이 강한 결단력과 놀라운 무력을 지닌 이가 용병으로 머물러 있는 이유를 잘 모르던 분
들은 이제야 그 면모를 알게 된 것이다.
사실 시스는 과거 로아냐드의 삼 대 기사단 중 하나인 황실 기사단 소속이었다. 십대의 나
이로 뛰어난 검술과 함께 한때는 차기 기사단장의 후보로까지 불리우던 그였지만, 어느 날
공작가의 미망인을 보고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당시 열아홉 살의 젊은 청년인 시스에 비해 상대 미망인은 젊을 때 남편을 잃어 십 년 간을
홀로 살고 있는 삼십이 세의 중년에 들어서는 미망인이었다.
금발의 아름다운 미모에 부드러운 미소를 가지고 있는 미망인을 보며 시스는 한눈에 반하고
말았지만, 그녀는 시스를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있었다. 어린 시스를 단순히 남동생처럼 여기
고 있었기에 그녀와 시스의 사이는 가까웠지만 결코 연인이 될 수 없었다.
자신의 고민을 밝힐 수 없었던 시스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고민해 오다 어느 날 술김에
일을 벌이고 말았으니… 하지만 시스가 사랑하여 실수를 한 그 미망인은 황실 기사단장의
딸이었기에 시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황실 기사단을 떠나 도망 나온 것이다. 그 후로 대
륙을 돌아다니며 헤매다가 용병의 신세가 되기는 했지만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이미 모든
일은 끝났기 때문이다.
뭐, 그 일이 있은 후 미망인은 시스를 용서했다는 후문도 있긴 하지만 도저히 돌아갈 자신
이 생기지 않은 시스는 모든 것을 집어치우고 마령으로 도망 와 용병질을 하며 잘 살고 있
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마음속에 그녀의 환상을 가슴에 담고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는 그에게 가슴
에 불을 질러놓는 여자가 지금 다시 나타난 것이다. 예로부터 처녀가 시집 안 간다는 말은
두 가지 다른 예와 함께 삼 대 거짓말로 통한다곤 하지만, 사실 총각도 장가 안 가겠다는
말을 합쳐야 할 것이다.
?호호호홍!!?
앗! 이 기분 나쁜 웃음소리는? 물론 들리지 않는다. 보면 모르는가? 홑따옴표가 되어 있는
것을? 이 독백의 주인공은 로우나.
끼리끼리 모인다는 말인가. 당당함과 멋진 체격, 드래곤의 목을 벨 정도의 뛰어난 무력을 지
닌 남자, 거기다가 멋지게 생겼으니 이는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라는 로우나의 생각은 독
백 안에서 활개를 치고 있었다.
어쩌면 이 둘의 만남은 심심지 않게 등장하는 시스에 대한 작은 선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만, 성격마저 이렇게 어울리는 것을 보니 인연은 인연이었던 모양이다.
혹자들은 웃음소리 하나로 때운 이런 말없는 독백의 시간이 그리 긴 시간은 아닐 것이라 생
각하는 이가 태반일 테지만, 놀랍게도 이들의 이런 모습은 10분을 넘어서고 있는 상태였다.
서로의 얼굴을 보며 아무 말도 안 하기를 10분여. 라디안은 하품을 하며 지켜보고 있었고,
다른 이들도 이 사태에 대해서 뭐라 할 말이 없는지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지만, 언제 끝
날지 모르기에 지쳐 포기하고 라디안을 따라 사라졌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 둘은 서로 간에 아무 말도 없이 상대의 얼굴만을 쳐다보는 상태로
한 시간 가량을 더 있었다고 한다.
시스와 로우나를 내버려 두고 온 일행은 두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설마 했는데…….?
라디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숙소로 걸어갔다.
?천생연분인가 보지. 하긴, 시스도 이제 가정을 꾸릴 때가 됐잖아.?
시안의 말에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크레이드의 가슴은 깊이 들어가고도 남아
드릴로 파는 것 같았다. 애석하게도 자신도 시스와 같은 외로운 남자였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외로움을 참지 못하겠다고 생각한 크레이드는 하소연할 겸 시안에게 얘기해 보기
로 결심하고 조심히 입을 열었다.
?시안, 나도 외로운…….?
괜히 사서 한 대 맞은 크레이드였다. 라디안은 쓰러진 크레이드를 보며 잠시 묵념한 후 앞
서 걸어가는 시안에게로 뛰어갔다.
?시스 형, 나의 출셋길을 열어줘.?
어찌 이 어린것이 벌써부터 이런 안 좋은 계략에 눈을 떴단 말인가?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
지만 애석하게도 헤른드의 제자로 예정되었을 때부터 라디안의 변화는 예정되어 있었다. 그
냥 귀여운 미소년으로 남았으면 좋으련만.
모두가 사라지고 한 시간의 무언의 만남이 끝나자, 시스는 로우나 회주와 함께 조용한 밤의
항구를 걸었다.
?밤 바다… 오랜만이군요.?
?예.?
시스는 잠시 로우나 회주를 보았다. 아름다운 여인, 바닷바람에 휘날리는 금발은 눈이 돌아
갈 지경이었다.
그녀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시스는 그녀의 몸이 조금 떨리는 것을 보고는 망토를
벗어 로우나의 몸에 걸쳐 주었다.
?바닷바람이 싸늘합니다.?
시스의 행동에 로우나 회주는 얼굴이 시뻘게져 버렸다. 그녀의 나이를 라디안은 삼십 대라
고는 했지만, 원래 칠인회 회주들의 나이는 겉보기와 다르다는 것을 감안하면 적어도…―여
자의 나이를 묻는 것은 비밀이기에 감춰두기로 한다―아무튼 좀 먹은 나이가 된 로우나는
너무나 외로웠다. 밤마다 바늘로 허벅지를 꼭꼭 찌르며 참아왔던 수많은 시간들. 쓸 만한 남
자를 찾아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헤매었던가. 한때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칠인회 미사모(미소
년을 사랑하는 마법사의 모임)에 가입하기도 했지만, 이제 그녀의 앞에 이렇게 멋진 남자가
서 있으니 미사모는 멀리 사라져 갔다.
듬직한 그의 모습을 보며 로우나는 조용히 시스의 팔에 팔짱을 끼고는 가까이 붙었다.
?아싸!?
속으로 환호성을 지른 시스는 한마디로 미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드러낼 수는 없는
일. 그는 그녀의 행동을 받아주며 밤 바다를 거닐었다.
둘의 사랑의 영원하기를 바란다.
?납치할까??
?아서라! 크샤스 폭주한다.?
위대한 드래곤 일족인 주제에 비열하게 사이야를 납치하자고 말한 로노와르를 보며 루드웨
어는 고개를 저으며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타락했다. 이 모든 것이 나의 탓이란 말인가…….?
어느 정도 책임을 숙지하는 루드웨어였다.
잠시 앞의 내용을 보충하자면 로노와르는 메테오 모드에서 깨어났고, 루드웨어에게 통한의
한 방을 먹인 다음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눴는데, 루드웨어가 앞에 보이는 귀여운 아이인 사
이야가 못된 악당 크샤스의 동생이라고 말하자 이렇게 제안한 것이다.
?왜! 동생의 목숨이 아깝다면 크샤스도 멈출 게 분명하잖아!?
?노노, 크레이져의 힘을 얻는다면 창조주가 내리신 제1클래스의 신의 능력을 얻게 된다.
즉, 어쩜 부활의 힘을 얻게 될 수도 있어. 다시 말하면 동생이 죽는다고 해도 다시 살릴 수
있다는 말이야.?
?정말??
?그래. 마신의 힘을 우습게 보지 말라고. 크레이져의 힘을 크샤스가 얻는다면 정말로 크샤
스의 바램대로 그는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최강의 힘을 얻게 되는 거지. 천신 레이뮤가 없는
지금 모든 천계와 마계의 힘보다 더 큰 힘을 말이야.?
그 말에 로노와르는 조금 실감이 난다는 듯이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그렇게 강한 존재가 패배하게 만든 원인에서 조금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었기 때
문에 루드웨어를 보며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옛날에 천신 레이뮤와 궁극의 마신 크레이져가 싸울 때 고오크 한 마리 땜에 크레이져가
패했다고 했잖아. 근데 어떻게 오크 한 마리의 힘으로 역전시킬 수 있었지? 거대한 힘들의
충돌에 약한 힘이 하나 끼어들었다고 해도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잖아??
?천신 밑의 태양신이나 대지모신, 정의의 여신 같은 제2클래스 신, 아니, 현재는 제1클래스
인 신들이 끼어들어 승리할 수 있었다면 조금 이해가 갈 테지만 오크는 아니다라는 거지??
?응.?
루드웨어는 로노와르가 좋은 질문을 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 보통 오크라면 부족하지. 하지만 알아야 될 것은 고오크와 그냥 오크는 다르다는 거
야.?
?다 같은 오크 아니야??
?아니지. 오크는 인간과 같은 지성이 있기는 하지만 지능이 떨어지는 족속들이니까. 고오크
는 멸종된 오크의 한 종족으로 보통 오크들보다는 뛰어난 지능과 힘을 지녔다고 알려져 있
지. 천신전쟁 때 도움이 된 고오크는 그런 고오크들 중에서도 최고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오크 로드였으니 보통 오크와 비교하는 건 안 되는 거라고. 내가 듣기로 그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는 말도 있었어.?
?하지만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고 해도 제1클래스 신에게는 미약한 힘에 지나지 않잖아!?
?그렇긴 하지. 하지만 그에게는 창조주의 검이 있었거든.?
?창조주의 검!?
창조주의 검이란 소리를 듣자 로노와르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창조주의 검. 이것은 창조주가 아직 지상 세계에서의 일이 남아 있었을 때 모든 이종족들을
다스리고자 사용한 검이다.
중요한 것은 보통의 창세기에는 이것이 창조주가 만든 엄청난 힘을 지닌 검으로 나와 있을
지 모르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드래곤 종족들만이 알고 있는 사실, 드래곤 사상 최고의 연령을 자랑하기에 에이션트라는
이름 자체를 붙이지 않은 한 마리의 드래곤이 있었으니, 그는 실버 드래곤 실레이드였다.
추정 연령은 45억 년. 도저히 가능하지 않은 시간을 살아온 그는 이 세계가 만들어지던 당
시부터 살고 있던 존재다.
보통의 드래곤들이 다른 종족이나 동물들로 폴리모프하여 유희를 즐기는 데 반해 그는 바로
단 하나의 물건으로만 생의 전부를 폴리모프하며 살았는데, 그것이 바로 검이다.
검으로 폴리모프하여 유희를 즐기던 그는 한 번 폴리모프하면 보통 1만 년 이상을 지내기
때문에 드래곤의 세대가 한 번 바뀌어야만 볼 수가 있었다.
오죽하면 드래곤 사회에서 실레이드를 생애 두 번 볼 수 있다면 오래 살았다는 말이 나돌았
겠는가. 아무튼 이 괴짜 드래곤의 힘으로 크레이져가 당했다는 것을 듣자 로노와르는 더 이
상의 의문점이 생기지 않았다. 그만큼 실레이드가 폴리모프한 검은 엄청난 힘을 지닌 신검
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말하면, 크레이져를 쓰러뜨리는 데 일조한 고오크 콜리드와 실버 드래곤 실레
이드는 이곳에서 나오지 않는다. 2부에 출현하는 캐릭터이지만 기대하라는 입장에서 잠시
맛보기로 설명한 것이다. 서로 대단한 앙숙 관계이자 절친한 친구로 나오게 된다.
이쯤에서 읽고 계신던 분은 하나의 의문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로노와르와 루드웨어가 이야기하는 것까진 좋은데 다른 출연자들 아이샤와 사이야는 어디로
갔느냐 하는 것이다.
대답하자면 둘은 정말 사이좋게 놀고 있었다.
수정궁의 꽃밭에서 서로 꽃 왕관을 만들어주며 놀고 있는 두 사람은 누가 보더라도 자매로
볼 만큼 친근해져 있었다.
이를 위하여 한 명은 사이야, 한 명은 아이샤라는 이름을 지었는지도 모른다.
로노와르가 자신을 납치하자는 말을 했는지도 모르는 사이야. 어떻게 보면 불쌍한 소녀였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왜 사이야를 찾는 시녀들이 안 나타나는가인데, 물론 나타났다. 다만 루
드웨어의 일루션에 걸려 빗자루를 사이야로 알고 그것을 들고 사라졌을 뿐이다.
루드웨어는 더 이상 이곳에 지체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사이야와 아이샤가
놀고 있는 꽃밭으로 갔다.
마령의 군대가 몰려온다면 이곳은 전시 체제로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샤, 떠날 시간이다.?
?알았어.?
아이샤는 만들어놓은 꽃 왕관을 루드웨어의 말을 듣고 아쉬워하는 사이야의 머리에 씌워주
면서 말했다.
?지금은 조금 심심하지만 언젠가는 사이야가 다 커서 이 언니를 만나러 올 수 있을 거야.
이 언니는 사이야가 커서 더 예쁘게 변한 모습을 보고 싶으니까. 참을 수 있지, 사이야??
아이샤의 부드러운 말에 사이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 아름다운 레이디가 돼서 언니를 만날 거야.?
?착한 사이야, 그럼 언니는 갈게.?
?응. 언니, 잘 가.?
사이야는 루드웨어에게 가는 아이샤를 보며 손을 흔들었고, 아이샤는 그런 사이야를 보며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후일담이기는 하지만 성안으로 들어간 사이야는 자신으로 변해 있는 빗자루와 일대 격투를
벌였다. 가까스로 승리를 쟁취하기는 했지만 가장 아끼는 외출복은 복구 불능이 되어버렸기
에, 사이야는 일루션만 씌울 것이지 쓸데없이 이지까지 부여한 루드웨어를 생각하며 이빨을
갈았다고 한다.
?너무 친해지면 안 된다고 했잖아.?
아이샤는 루드웨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지만, 이런 말을 하는 그에게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아이샤가 인상을 찌푸리자 루드웨어는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적이 될 사람이다.?
?그리고 어쩌면 죽여야 될 사람일 수도 있고…….?
루드웨어는 알 수 없는 독백을 이으며 고개를 돌려 디멘전 패스의 주문을 외웠다. 본격적인
북극령 전쟁의 시작지가 될 사이온 항구 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