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장 사이야와의 만남
대륙 마법 길드의 북극령 사이온 지부의 지부장 레디가르드는 오늘 매우 기분이 좋았다.
중앙 지부에서 한참 잘 나가고 있던 그가 실험의 실수로 탑의 한 층을 날려먹고 북극령 지
부로 좌천됐을 때 정말 그에게는 생애 최악의 일이 터진 것처럼 느껴졌었다.
거기다 사랑하는 아내는 쓰러지고…….
하지만 그는 열심히 살았다.
북극령이 한적한 곳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 자신마저 쓰러질 수는 없
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북극령 지부의 지부장으로 좌천된 지 일 년째. 처음으로 지부에
일이 들어왔다.
그동안 너무 힘들었던 레디가르드였다. 이곳 지부에서 가장 팔팔한 건 접수처 아가씨뿐, 다
른 모든 이들은 거의 시체나 다름없었다.
북극령 지부는 마령의 이상 마물과 기후를 연구하는 곳이기 때문에 의뢰는 별로 받지 않는
곳이긴 했지만, 이상하게 이곳의 사람들은 마법 길드에 평범한 청탁조차 하지 않았다.
중앙 지부에 일 년 동안의 실적을 올려야 하는데, 단 한 부의 청탁도 없었다고 한다면 누가
믿어주겠는가? 중간에 청탁받은 대금을 삼켜 버렸다고밖에 생각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에
실적 보고일이 다가오는 게 불안해질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고민은 이제 사라진 것이다. 타 지부에도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마도
사급의 청탁이 부임 후 첫 개시 청탁으로 들어온 것이다.
보통 마도사급 정도 되면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처리하기 때문에 길드에 청탁 같은 것을
맡기기 위해 오는 일은 별로 없는 편이었다. 하지만 한번 청탁을 하면 그들이 처리할 수 없
는 일을 맡기기 때문에 거의 100골드 이상의 큰 청탁을 했다.
본부에 올리는 50%를 제외한 금액으로 앓고 있는 아내에게 약과 음식을 사다줄 수 있다는
생각에 하늘로 떠오를 같은 기분을 가눌 수가 없었다.
?룰룰룰… 아! 미스 리, 손님들 들여보내세요.?
?예.?
접수처 아가씨 리 인드라시아는 비서의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 물론 미스 리는 접수처와 서
무처, 자료처, 관리처 등등 거의 모든 것을 담당하고 있다. 왜냐고? 지부에서 가장 팔팔하니
까! 사실은 여기저기 다른 아가씨들 이름 붙이는 게 너무 힘들어서라는 작가의 말도 있다.
하지만 그가 한참 꾸던 즐거운 꿈은 곧 사라지고 말았다. 미스 리의 안내로 들어온 마법사
일행은 한마디로… 상거지 꼴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그들의 몰골을 설명하자면, 아이샤는 신관으로서 매일 깨끗한 옷을 갈아입었지만 이때
만은 크샤스의 군대에게 쫓기느라 지저분한 옷을 갈아입지 못하고 있었고, 그것은 루드웨어
와 로노와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행들은 씻을 엄두는 물론 옷 갈아입을 시간도 없었다.
레디가르드는 그들이 차라리 자신에게 돈을 우려내면 우려냈지 청탁 비용을 낼 만한 인물들
은 아니게 보였다.
눈물을 삼키며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믿어볼 것인가…….
레디가르드는 믿어보기로 결심했다.
?하하하하, 저의 지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자, 이리로 앉으시지요.?
레디가르드는 루드웨어 일행을 지부장실의 소파로 안내한 후 미스 리에게 차를 내오라는 무
언의 지시를 남겼다. 물론 눈썰미 좋은 미스 리는 첫 번째 손짓임에도 차를 내오라는 손짓
을 정확하게 알아들었다.
?커피 떨어졌는데요, 지부장님.?
?…….?
첫 손님에게 지부의 약점을 들키자 레디가르드는 조금 당황됐다. 현재 지부의 재정 사정은
거의 알거지 수준이었다. 북극령의 마물과 지형 연구를 하는 마법사들이 거의 대부분의 예
산을 쓸어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디가르드는 이내 중앙 지부에서 얻은 노하우로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하하하…….?
웃음으로 대충 때운 그는 루드웨어 일행이 앉은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앞에 보이는 것은 더러운 로브의 젊은 청년. 레디가르드는 그가 미스 리가 말한 골드 카드
의 주인 7서클 익스퍼트의 마도사란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물론 아이샤는 신관 차림, 로노와르는 평범한 여행복 차림이니 그 와중에 루드웨어가 마법
사라는 것은 누가 못 알아맞추겠는가.
격세지감이다. 동방에 전해지는 말로는 장강의 앞 물결은 겁도 없는 뒷 물결이 쓸어버린다
라고 했는데 정말 옛사람 말 치고 틀린 것은 없다고 생각되는 레디가르드였다.
올해 쉰다섯에 근접한 노인이 되어가는 레디가르드는 6서클 러너에 지나지 않는데 어디서
굴러먹은지도 모르는 새파란 젊은것이 7서클 익스퍼트였기 때문이다.
괜히 젊은것이 미워지는 레디가르드였지만 어떡하랴, 아내가 아픈데.
?저의 지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손님은 왕! 띠껍지만 서비스 정신에 충실한 그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이야기했고 지부장의
느끼한 미소에 잠시 혹한 지역을 지나왔던 루드웨어는 간신히 정신을 추스르고 말을 할 수
있었다.
?북극의 마물들을 연구할 겸 한 달 전에 이곳으로 왔는데, 그사이 대륙에서 전쟁이 터졌다
고 하더군요.?
?아! 마령과 로아냐드 제국과의 전쟁을 말씀하시는군요.?
?예. 그 덕분에 배가 끊겨 버려 이곳에 발이 묶여 있는 처지입니다. 일주일 후에 야센시티
에서 만나려는 사람이 있는데 이렇게 묶여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지요.?
루드웨어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분명 대륙으로 가는 배를 구하기 위해 온
손님인데, 사실 능력없는 레디가르드로서는 이곳에서 배를 구하기는 상당히 힘들었다.
맨 처음 그가 이곳으로 부임해 왔을 때는 몰랐지만, 요즘 들어서는 북극령의 사람들이 조금
야박하게 변해 웬만해서 비밀스러운 이야기는 거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가. 아내를 위해 자신을 위해 이 척박한 대지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위
대한 가장이 아니던가.
?사실 저의 능력으로도 이곳에서 배를 구하기는 어렵습니다만, 단지 소식을 전하는 것이라
면 한 가지 다른 방법을 가르쳐 드릴 수 있습니다.?
?다른 방법이시라면……??
떡밥에 현혹된 루드웨어. 레디가르드는 이제 미끼를 조금씩 드리워야 할 때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예, 바로 신의 장벽을 통과해서 이미지 트랜스포트(화상 전달 마법)를 가능하게 하는 것입
니다. 길드의 특급 비밀에 속하는 안건이지만, 손님께서 골드 카드 회원인 것을 감안한다면
적당한 가격에 넘겨드릴 수 있습니다.?
드디어 얼빠진 루드웨어에게 미끼를 던진 레디가르드, 과연 루드웨어는 그 미끼를 물 것인
가? 물론 길드의 특급 비밀이란 말은 순 뻥이다.
북극령 연구 기관에서 10년 간의 연구 끝에 삼 일 전에 도착한 보고서에 들어 있는 방법으
로, 얼마 안 있어 마법 길드의 연구 발표회에서 발표될 논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발표회 전까지 비밀이기는 하지만 특급 비밀 축에는 끼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루드웨어는 지부장의 말에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그가 대륙으로 가려고 하는 것은
북극령에서는 대륙에 있는 사람에게 연락이 되지 않기 때문인데, 이미지 트랜스포트를 가능
하게 한다면 굳이 대륙으로 넘어가지 않고 이곳에서 일을 처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얼마 정도를 원하십니까??
?물었다!!?
레디가르드는 얼굴에 피어나는 웃음을 간신히 자제한 다음 말을 이었다.
?골드 카드의 회원인 것을 감안한다면 10% 청탁 비용이 깎이기 때문에 300골드에서 30골
드를 제한 270골드만 주시면 저희가 서류를 넘겨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음…….?
270골드, 이건 엄청 비쌌다. 아! 어찌할 것인가. 로노와르와의 결혼 자금을 열심히 모아온
루드웨어에게 이 지출은 너무나 엄청났다. 물론 루드웨어의 이런 생각에 어떤 이들은 루덴
스의 보물 창고에서 텔레포트 게이트에 처넣은 2억 골드는 뭐란 말인가란 생각을 하기도 하
겠지만, 루드웨어는 알뜰 주부인 것이다.
/?100골드 어떻습니까??/
황당했다. 270골드짜리를 100골드에 넘기라니… 레디가르드는 잠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
다.
일단 어느 정도 깎일 것을 예상해서 엄청 많이 부른 액수이기는 하지만, 자신 앞에서 정면
으로 도전해 온 젊은 마도사에게 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흥정에
들어갔다.
하지만 어떡하랴. 자신의 앞에 있는 마법사, 그는 알뜰 주부 루드웨어, 에누리의 황제인 것
이다.
?250골드 밑으로 안 됩니다.?
철저하게 자르자고 생각한 레디가르드는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지만 루드웨어에게 그것은 깎
을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으로 들렸다.
?지부가 좀 허름한 것 같다. 아, 손님에게 내줄 커피도 없는 지부라니… 정말 끔찍해.?
루드웨어의 동조자는 가까이에 있었다. 옆에서 당사자가 듣는 줄 뻔히 알면서 약점을 꼬집
는 아이샤. 루드웨어는 역시 자신에 버금갈 정도의 인물이라고 생각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120골드는 어떻습니까??
?손님이 사정이 어렵다면 200골드까지는 가능하지만 그 이하는…….?
지부장이 더 이상 깎아주려고 하지 않자 루드웨어는 주변을 훑어보았다. 보아하니 미스 리
라고 하는 비서와 지부장 단둘밖에 없는 것 같았기에, 그는 어쩔 수 없이 로노와르를 이용
한 협박전으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로노와르.?
?왜??
?얼음성에서 드래곤이 나왔다는데, 들어본 적 있니??
?무슨 헛소리야. 그거 나잖아!?
루드웨어의 뜬금없는 한마디에 로노와르는 역시나 생각없는 대답을 했지만, 사실 이것이 바
로 루드웨어가 노리고 있던 것이었다.
?그래? 지부장, 150골드는 어떻습니까? 아참, 로노와르, 니 브레스로 여기서 가장 높은 건
물을 쏘면 어떻게 될까??
/?놀리는 거야? 아무리 내가 약하다고 해도 이런 길드 건물쯤은 단숨에 날려 버릴 수 있다
고!!?(수정불가입니다... 루드웨어는 가장 높은 건물이 길드건물이라는 것을 알고 말한 것이
고, 눈치 없는 로노와르는 그가 말하고 있는 건물이 길드건물이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말한
것이니까요.)/
루드웨어의 말에 로노와르가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레디가르드는 자신의 패배를 인
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50골드에 드리지요…….?
이 지부마저 날리면 레디가르드는 제국의 I.M.F실업자처럼 길바닥에 눌러앉을 형편이었기에
눈물을 머금고 150골드에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아! 약한 자 그대 이름은 남편인가……. 아내를 위해 오늘도 직장 전선에서 투쟁하는 레디
가르드는 냉혹한 사회에 무릎을 꿇으며 오늘도 하루 해를 접어가고 있었다.
?룰루랄라!!?
극비 문서라는 것을 반값에 산 루드웨어는 왠지 기분이 좋았다. 역시 에누리는 루드웨어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청량제 중 하나인가 보다.
숲 한편에 앉아서 문서를 펼쳐 보던 루드웨어는 재밌는 부분을 발견했다.
?오호, 마나의 기운을 막는 것이 아니라 왜곡시킨단 말이지??
그렇다. 신의 장벽은 공간을 막는 개폐식 둑과 같은 것. 마나 자체를 유통시키지 않는다면
마나 팽창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움직인 마나를 왜곡시켜 통과시킨다는 것이
다.
여기서 북극령의 연구자는 신의 장벽의 왜곡 패턴의 변화를 알아낼 수 있었다.
왜곡 패턴을 역으로 하여 신의 장벽으로 보낸다면 장벽 너머에서는 제대로 된 마법을 실행
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본 루드웨어는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마법의 마나 회로를 역으로 돌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루드웨어는 새로운 주문을 만드는 것에 버금갈 정도의 집중력을 투자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고난도의 작업은 보통 마법사들의 지하실에서 혼자 며칠 동안 작업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집중력이 뛰어나다면 어디에서 해도 상관은 없었다―루드웨어는 자신의 실력으로 충분히 해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외로 주변의 시끄러움보다 더 문제되는 존재가 있었다.
그는 철저하게 루드웨어의 집중력을 분쇄시키고 있었으니…….
?루드웨어, 뭐 하는건데? 힘들어? 재밌어??
한두 번은 참을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열이 뻗쳐 오르는 그였다.
어찌 이 빌어먹을 해츨링은 500살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도 이렇게 철이 없단 말인가(물론
드래곤 입장에서는 500살 나이면 아직 애다)!
?로노와르…….?
?왜??
?이 주문 들어본 적 있니? 중얼중얼중얼…….?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주문. 로노와르는 갑자기 생각나지는 않았지만, 주문이 진행될수록 무
의식적으로 등에 식은땀이 났다.
세상에서 로노와르가 가장 싫어하는 주문… 최악의 좌표 설정을 자랑하며 제대로 된 착지
자세를 가질 수 없게 만드는 이동 주문, 디멘전 패스였던 것이다.
?루드웨어!!?
?디멘전 패스 아더!?
검은색의 안개는 급속하게 로노와르를 감싸더니 처참한 비명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지기 시
작했다.
수정궁의 생활은 너무 단순하다.
시녀가 주는 대로, 시녀가 하라는 대로 따라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언제나 같은 시간에 언제나 같은 일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에게 상당한 거부감을 안겨
주는 행동일 것이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 이런 상황에 빠진 비련의 소녀가 있었으니 우리가 가끔씩 이름을 듣는 어여쁜 보라색
머리의 앳된 소녀로, 이름하여 사이야라 한다. 그녀는 대륙의 혼란을 야기시킨 최대 악당으
로 등장하는 크샤스의 하나뿐인 여동생이었다.
사이야는 점심이 끝난 시간을 틈타 시녀들의 손길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
물론 슬립 스크롤이라든지 홀드 스크롤 같은 몇 가지 치밀한 준비가 있어야 했지만, 어려웠
던 준비 과정은 사이야에게 꿀과 같은 자유를 안겨준 것이다.
?아! 시원해라!!?
귀찮은 시녀들을 따돌려서 시원한 건지 바람이 시원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사이야는 수정궁
밖의 화원에서 모처럼만의 자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안식의 시간에 어둠의 그
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으니.
?어둠의 그림자??
말 그대로 정말 어둠의 그림자였다. 어디서 생겼는지 모르는 짙은 어둠이 하늘을 가리우더
니 사이야가 있는 곳에 드리우고 있었다. 공중에서 갑작스럽게 출현한 검은 안개를 보며 두
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으나 그 두려움은 잠시 후 황당함으로 이어졌다.
?꾸엑!?
상당히 볼품없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한 명의 인간, 아니, 한 마리의 해츨링이 땅으로 떨어
졌으니, 그는 루드웨어의 디멘전 패스에 날려온 우리들의 마스코트 로노와르였다.
로노와르는 땅에 처박히자 회전하는 별들을 머리에 이고 헤롱헤롱거리고 있었다.
사이야는 쓰러져 있는 자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자 꽃의 덩굴이 타고 오를 수 있게 꽂아
둔 나무 막대를 하나 뽑아 로노와르의 몸을 건드려 보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사이야는 조금 무섭기는 했지만 용기를 내어 계속 나무 막대기로 찔러보았는데, 그 순간 갑
자기 그자는 벌떡 일어서더니 하늘을 보며 크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루드웨어! 이 ××새끼야!!?
갑작스런 욕의 난무에 어벙벙해진 사이야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로
노와르는 그제야 자신의 곁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라? 누구지??
로노와르는 그 특유의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열받아 소리치던 얼굴에서 갑자기 어
벙한 얼굴로 바뀌자 무섭기도 했지만 재밌기도 한지라 사이야는 웃음을 떠뜨릴 수밖에 없었
다.
?호호호, 아저씨, 표정이 참 재밌어요.?
?응? 그런가? 근데 넌 누구냐? 아! 그래, 인간들은 먼저 자기소개를 한다고 했지. 난 로노
와르라고 한다. 넌??
사이야는 인간들이란 말이 조금 이상하기는 했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제정신 가진 사람은
아닌 듯해 넘어가기로 했다.
?전 사이야라고 해요.?
?사이야. 예쁜 이름이네. 근데 여기가 어디지??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떨어지셨어요??
물론 보통 사람들에게는 어딘지 모르고 오셨냐고 물어보겠지만 사이야가 보기에 로노와르에
겐 오셨다는 표현보다 떨어졌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았기에 그렇게 말했고, 그 말을
들은 로노와르는 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어떤 빌어먹을 ××새끼가 날 여기다 떨어뜨리는 바람에 어딘지도 모르고 왔다고.?
?어머! 숙녀 앞에서 그렇게 상스러운 욕을 하면 안 돼요.?
?그래? 그럼 참고하지. 아무튼 여기가 어디야? 좀 말해 달라고.?
로노와르가 자신의 충고에 단순히 참고만 한다고 하자 사이야는 기분이 나빠졌는지 뾰로통
한 얼굴로 말했다.
?숙녀의 충고를 참고만 한다니… 휴~ 어쩔 수 없군요.?
역시 사이야의 눈에는 그가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이 희생하
고 이곳이 어딘지를 가르쳐 주기로 했다.
?여긴 수정궁이라고 해요. 북극령의 왕성인 얼음성에 있는 10개의 궁전 중 하나죠.?
?얼음성…….?
로노와르는 다시 한 번 루드웨어에게 욕을 하고 싶었지만, 앞에 있는 소녀가 자신이 욕하는
것을 싫어하는 표정이 역력했기에 속으로만 욕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대신으로 정말
보통 사람이 듣기 거북한 욕은 다 했다.
조금 이상한 사람 같긴 하지만 좀처럼 만나보기 힘든 외부의 사람이었다.
사이야는 그에게 바깥 세상의 이야기에 대해서 들어보기로 결심하곤 물어보려고 했는데, 멀
리서 자신을 찾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사이야가 고난도의 준비 작업을 통해 마법으로 처리한 시녀들이 그제야 자신을 찾기 시작하
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로노와르를 숨기기로 했다.
?앗! 여긴 외부인이 오면 안 되는 곳인데! 로노와르라고 했죠? 빨리 숨어요. 좀 있음 사람
들이 온단 말이에요.?
로노와르 역시 이곳에서 병사들에게 들킨다면 좋은 꼴은 못 당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중요한 한마디는 잊지 않았다.
/?가는 거야? 일단 시키는데로 숨긴 숨는데, 지금 엄청 배고프거든. 이따 올 때(현재 사이
야는 시녀들 몰래 빠져 나온 상태인지라. 시녀의 목소리가 들리자 돌아가는 거에염..역시 수
정불가. 앞에 한마디만 추가 함다.)/ 먹을 것 좀 갖고 와.?
?알았어요. 하지만 먹을 거 가져다 주면 제게 바깥 이야기 좀 해줘요.?
?바깥 얘기? 그러지 뭐.?
아무 생각 없이 밥 준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 로노와르는 천천히 꽃밭 뒤로 몸을 숨겼고,
사이야는 자신을 찾는 시녀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