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의 마법사-22화 (22/247)

21장 전쟁의 희생자

루드웨어 일행은 크샤스의 음모를 확인했지만, 크샤스와 대항하기에는 전력이 너무 약했다.

차라리 루드웨어 혼자서 잠입하여 게릴라전을 하면 했지, 어떻게 신관인 아이샤와 멍청한

해츨링 로노와르를 데리고 싸울 수 있겠는가?

그런 이유로 일단 대륙으로 가서 도와줄 사람들을 구하러 배를 타고 다시 마령의 땅으로 향

하려고 했지만, 이상하게 항구에는 마령으로 가는 배가 단 한 척도 없었다.

?얼래? 왜 배가 없어요? 야센시티로 가는 항로는 이곳 상인들의 밥줄이나 마찬가지잖아

요??

루드웨어의 말에 선장은 힘없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걸 왜 모르겠는가? 하지만 요 근래에 마령과 제국이 전쟁을 벌였다고 하네. 나도 지금

모든 교역로가 통제 중이라서 두 손 놓고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네.?

그 말을 듣자 루드웨어는 드디어 크샤스의 음모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음을 알 수 있었다. 궁

극의 마신 크레이져를 부활시킴과 동시에 마령과 제국의 국력을 약화시켜 대륙을 통일하려

는 크샤스의 음모. 일이 이렇게 풀린다면 루덴스에게서 도움을 받는 것은 조금 어려워져 루

드웨어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령으로 향하는 배를 구할 수 없었던 루드웨어 일행은 항구 주변을 돌아다니다 지쳐 술집

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맥주를 마시며 마령으로 갈 수 있는 다른 방법을 한참 생각하던 로노와르는 무슨 생각이 들

었는지 루드웨어를 보며 말했다.

?꼭 배를 타고 가야 하는 거야??

?뭔 소리여??

?니가 잘하는 거 있잖아. 디멘전 패스. 그걸로 대륙으로 건너가면 되잖아??

로노와르의 말에 루드웨어는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계까지 건너갈 수 있는 디멘전

패스라곤 하지만 올 때 배 타고 온 것을 보면 무슨 이유가 있다고 생각할 법도 한데 말이

다.

루드웨어의 로노와르의 무식함에 잠시 흘러내린 땀을 닦으며 말했다.

?북극의 땅과 대륙 사이에는 신의 장벽이란 것이 있다고.?

?신의 장벽??

갑자기 들어보지도 못한 지명에 로노와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응. 북극의 땅과 대륙의 땅 사이에는 신의 장벽이란 것이 있어서 자연의 반하는 기운을

통과시키지 않는 힘이지. 궁극의 마신 크레이져를 봉인시켰을 때, 인간들이 그것을 풀지 못

하게 하기 위해서 천신들이 만들어놓은 하나의 장벽이야. 그렇기 때문에 이곳으로 텔레포트

나 디멘전 패스로 오다가는 공간에 갇혀서 그 자신도 마나가 되어 흩어지고 말지.?

?하지만 마계의 군대는 이곳으로 디멘전 패스를 사용해 왔잖아??

?신의 장벽이란 것은 신의 신력으로 만들어놓은 일종의 방해 전파와 같은 거야. 그것을 해

독할 수 있다면, 그것을 뚫고 마력을 사용하는 것도 어렵지는 않지. 마계의 군대에는 마신

라스타가 있으니 그 공식을 정확히 알고 있어 디멘전 패스를 사용할 수 있는 거야.?

?이상하네. 루드웨어, 너도 이곳에서 디멘전 패스로 마계로 건너갔었잖아??

?그건 다행히 내가 마계의 군대가 올 때 그곳에 있어서 마계의 성과 이곳으로 흐르는 장막

의 공식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지. 하나의 암호가 있어서 그것을 어쩌다가 해독할 수 있었

다고 해서 다른 암호까지 쉽게 해독하는 건 아니라고. 애석하지만 내가 여기서 나갈 수 있

는 것은 마계의 성까지였어.?

?마계로 갔다가 경유해서 마령으로 가면??

/?거참, 끈질기네. 미안하지만 신의 장벽은 하루에 한 번씩 그 공식이 변한다고. 어제와 같

은 공식으로 마계로 같다간 공간에 갇혀 죽기 쉽상이란 말이야.?/

루드웨어의 말에 로노와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퍼브 안에는 많은 선원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들 대부분이 야센시티로 떠나야 하지만

가지 못하고 남아 있는 선원들이었다.

?어쨌든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까 야센시티로 몰래 가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루드웨어의 말에 마시고 있던 흑맥주 잔을 내려놓은 아이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야센시티 교역로가 유일한 수입원인 사람들이니까요. 아마 어느 정도의 돈만 지불한다면

대륙으로 배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있으리라 생각돼요. 물론 만만치 않은 돈을 지불해야

되겠지만 말이에요.?

이런 불법 항로로 움직이는 배에 타기 위해서는 보통 배 삯의 열 배를 내야 한다는 통상 요

금 책정 안이 있기 때문에 대륙으로 가는 정규 여객선의 일 인 요금이 5골드이니 적어도 50

골드 이상의 돈을 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것은 엄청난 폭리로 루드웨어와 로노와르의 재산을 어느 정도 없애려 하는 작가의

농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나저나 우리 땀 빼며 도망가야 할 시간이 돌아온 것 같다.?

루드웨어가 흑맥주를 원샷하고는 아쉽다는 얼굴로 말하자, 아이샤 역시 한숨을 쉬면서 탁자

에 있는 땅콩을 만지작거렸다.

?편하게 쉬고 싶은데… 아! 이것이 여신께서 내리시는 고난이란 말인가!?

?글쎄.?

로노와르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잠시 몸 푸는 동작을 취했다.

그런 그를 보며 루드웨어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땅콩을 튕겨 입속에 던져 넣고는 자리

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리숙한 해츨링도 이제 분위기를 탈 줄 아는군. 자, 이제 시작해 볼까. 파이어 볼!?

술집에서 술을 퍼마시고 있던 선원들은 갑자기 마법사 한 명이 퍼브의 반대쪽 문을 파이어

볼로 깨뜨리자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주인장은 자기 가게를 아무 이유 없이 파괴한 망나니 마법사를 멍한 얼굴로 쳐다보며 얼굴

을 일그러뜨렸다.

?자, 이건 수리비와 맥주 값! 주인장, 안녕!?

루드웨어는 금화를 주인에게 던져 주고는 잽싸게 뚫어진 구멍을 향해서 내달렸는데 시간이

라도 맞춘 듯이 퍼브의 문을 부수며 수십 명의 정규 기사들이 밀어닥쳤다.

?슬립!?

루드웨어의 마법이 터지자 밀어닥치던 기사들은 물론 멍하니 쳐다보던 사람들도 자리에서

쓰러져 잠들어 버렸고 이때다 싶은 루드웨어 일행은 골목 안으로 숨어 들어갔다.

하지만 여기저기 정규 기사들이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망가기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

다.

?아! 크샤스가 단단히 준비했나 보다.?

?그러게 잽싸게 배 타고 튀던지 했어야지.?

아이샤는 루드웨어의 한탄에 투덜거렸지만 여기서 잡히면 영영 크샤스의 얼음 감옥에서 나

오지 못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전력을 다해 뛰고 있었다.

시스 일행은 전쟁으로 마령의 국경이 봉쇄되자 북극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

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통행증은 크샤스 영주가 발행한 국제 통행증이었지만, 전쟁터가 아

님에도 마령의 국경 관리소에서는 마령 본토에서 발행된 통행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제외

하고는 아무도 통과시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참, 북극령은 30년 전 마령과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고 들었는데, 왜 안 된다는 거예

요.?

시안은 국경 관리소의 병사들을 향해 따져 보았지만, 무뚝뚝하기로 소문이 난 마령의 병사

들이었기에 시안의 말은 별 소용이 없었다. 병사들은 표정도 변하지 않은 채 같은 말만 되

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본국에서 발행한 통행증을 제외한 어떠한 통행증도 소용이 없습니다.?

마령의 병사들은 뇌물조차 통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기에 시안으로서는 한숨만 쉴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결과물도 얻지 못한 채 시안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돌아오자 크레이드는 이

사태가 너무나 안타깝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아! 마령 국경의 병사들은 아름다운 아가씨의 청조차 거절한단 말인가. 시안, 나의 품 안

에서 울분을 식히시구려!?

물론 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시안의 주먹은 크레이드의 안면에 작렬했다. 시스는 바위에 앉

아서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가 시안이 실패하고 돌아오자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마령에서도 이 전쟁을 북극령에서 이끌어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군.?

?북극령으로 가려면 전장을 빠져나가는 방법밖에 없는 건가??

나무 위에 앉아 있던 파르가는 가볍게 몸을 날려 뛰어 내려왔다.

?목숨 걸 필요까지는 없는 것 아냐??

전쟁터를 빠져나간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두 국가에 적을 담고 있는 사람이 아니

라 해도, 병사들에게 들키면 영락없이 적군의 첩자로 오인받기 때문이다.

전쟁터를 가로질러 간다는 것은 어찌 보면 거의 죽으러 가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에 시안은

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보고 있던 크레이드는 조용히 그녀의 손을 잡고는 비장한 표정을 지으

여 말했다.

?이미 망쳐 버린 인생, 좋은 일 한번 하자는 건데 뭐. 세상에 태어나서 목숨 걸 만한 일 한

번 하는 것도 좋지 않겠어??

?흥! 난 오래 살고 싶다고!?

크레이드의 손을 뿌리치며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짓고는 있지만 이미 그녀는 크레이드의

의견에 따르기로 생각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던 파르가는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

했다.

?아! 라디안의 예언은 이루어진단 말인가.?

?라디안의 예언??

?언젠가 시안은 크레이드의 유혹에 넘어갈 거라는 예언.?

물론 파르가 역시 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시안의 주먹에 안면을 강타당한 것은 당연한 일이

었다. 하지만 어쩌면 죽으러 가는 것일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있는 그들

의 모습에 시스는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돈만을 추구하며 살아온 인생이지만 한번쯤은 큰일을 해보고 싶었던 그였는데, 세상을 구한

다는 삼류 로망에서나 나올 법한 일을 직접 할 수 있게 되자 힘이 솟구쳤다.

이미 30이 넘어서는 나이이지만 정의의 용사라는 것은 군침당기는 메뉴였던 것이다.

?적당히 떠들고 가자고.?

?세계의 평화는 우리가 지킨다.?

?…바보…….?

파르가를 보며 한숨만 쉴 수밖에 없는 시안. 싸울 때는 진지하지만 평상시에는 정말 바보라

고 해도 과언이 아닌 파르가였기 때문이다.

워낙 실력자들의 집단인지라 이동 속도 또한 빨랐기에, 시스 일행은 제국 1차 정벌군과 마

령의 수비군이 싸우는 안트라드 평야의 국경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처음 그들이 도착한 곳은 국경 부근에 작은 마을이었다. 저녁 시간 연기가 오르는 것을 본

시안은 단번에 그것이 마을이라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마을이다!?

시안은 마을을 확인하고는 지친 몸을 마을의 여관에서 목욕하며 풀 생각으로 좋아하고 있었

지만, 마을로 달려가려는 시안을 크레이드가 막았다.

?뭐야!?

자신을 막는 크레이드를 보며 시안이 성질을 부리려 하자 크레이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

다.

?연기가 이상하다. 음식을 할 때 나오는 연기가 아니야.?

크레이드의 말에 다시 한 번 연기의 모습을 확인한 시안은 그 순간 말을 잊고 말았다. 크레

이드의 말대로 그 연기는 밥 짓는 연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시스는 파르가에게 주변을 살펴보게 한 뒤 천천히 일행들과 함께 연기가 나는 쪽으로 걸어

갔다.

크레이드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이미 마을은 제국 1차 정벌군에 의해 폐허가 되어 있었

다. 시안이 본 연기는 병사들에게 공격당하여 불에 탄 마을의 집에서 나는 연기였던 것이다.

불에 타 검게 그슬린 화재의 흔적만 남은 마을 여기저기에는 공포로 얼굴이 굳은 주민들의

시체가 널려 있어 지옥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

마을로 들어선 시안은 시체가 타는 노린내에 질려 계속 토하고 있었고, 그런 그녀가 안쓰러

운지 크레이드는 그녀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이런 광경은 보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야.?

로아냐드 동남부의 위치한 소국들의 내전에 용병으로 참전한 적이 있는 파르가는 이런 광경

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니어서 시안보다는 덤덤하게 봐 넘길 수 있었지만, 결코 좋은 광경은

아니기에 미간을 찌푸렸다.

시스는 파르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시했다.

/나라간의 전쟁이란 어차피 권력이 있는 자들의 게임과도 같은 싸움이다. 그 와중에 아무런

죄 없는 백성들은 죽어가는 것이니, 거부감이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시스가 마령과 북극령에서 용병 생활을 했던 것은 마령이나 북극령이 로아냐드 제국을 비롯

한 다른 나라에 비해서 영주들의 수탈이 적고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었

는데, 권력자들의 야욕으로 마령에까지 탐욕에 물든 손길이 미치자 안타까울 뿐이었다.

크레이드는 시안의 등을 두드리면서 주위를 돌아보다가 말했다.

?아무래도 제국은 파이드 강 서부의 모든 주민들을 이단이란 이름으로 학살하고 있는 것

같군. 이 마을은 그 시작이겠지.?

?유온 족 토벌 때처럼??

유온 족은 로아냐드 국의 동쪽에 있는 소국 중의 하나로 유목 생활을 하는 민족이다. 척박

한 기후에서 생활하는 그들에게 다섯 신의 성교회는 그리 크게 전파되지 못했고, 거의 대부

분의 사람들이 일종의 토속 신앙을 믿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제국에서 보면 이들은 야만

인이고 이단인 것이다.

로아냐드의 아리시아 성전에서는 이들을 교화시킨다는 목적으로 수만의 성기사단을 파견했

는데, 사실상 이것은 교화라는 목적이기보다 약탈과 학살이란 말이 적합했다.

유목 생활을 하는 유온 족에게 전투 무기란 것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성기

사단은 먼 원정의 군량을 마련하기 위해 힘없는 유온 족들을 학살하며 그들이 키우고 있던

가축을 약탈한 것이다.

크레이드는 성기사단에 소속되어 있던 자였지만, 유온 족 토벌에 참여했다가 이런 성기사단

의 횡포를 참지 못하고 군대를 이탈하여 용병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유온 족 토벌 때도 초반에는 교화를 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강압적인 포

교가 더 쉽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유온 족의 마을들을 약탈하며 학살했지. 하나의 본보

기라고나 할까? 하지만 이번은 상황이 다른데도 이런 식으로 무차별한 학살을 하다니… 마

령의 백성이 순순히 따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보 같은 생각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군.?

?다르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파르가가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크레이드는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유온 족의 경우는 유목 생활로 집단 간의 유대감이 적지. 그들은 부족 단위로 생활하고

있는 자들이니까. 그에 반해 마령의 백성들은 상황이 달라. 백 년 간의 마령의 역사는 이곳

에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루덴스를 하나의 신앙으로 보며 돈독한 유대 관계를 유지하게 만

들었지. 한 존재를 향한 그들의 유대는 유온 족들과 전혀 다르다는 거야. 이런 식으로 계속

사람들을 학살해 간다면, 아마 로아냐드 제국의 정벌군은 마령의 정규 군대뿐 아니라 민병

마저 상대해야 될 거야.?

크레이드의 말은 정확한 것이었다. 실제 파이드 강 서부의 모든 주민들이 로아냐드 정벌군

에 의해 학살되었다는 소문이 마령 본토에 퍼지자 백성들은 분노했고, 각지에서 일어난 민

병의 숫자는 마령 정규군의 3배에 이를 정도의 숫자였다고 한다.

크레이드가 잠시 설명한 마령의 이러한 유대 관계는 사실 당연한 것이었다. 마령은 대륙에

마계의 마족들이 세운 나라라는 것이 알려져 있지만, 그 백성 모두가 마족은 아니다. 마령은

마계가 아닌 지상계에 속해 있기 때문에 마족들은 이 땅의 주인은 인간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마신 라스타는 이곳의 지도자를 인간인 루덴스에게 맡긴 것이다.

멸망해 가는 마계를 대신할 영토인 마령에는 마족들의 거처와 함께 인간들의 생활 터전도

존재했지만, 마족들은 지상계의 주인들을 쫓아낼 생각은 없었다. 이 때문에 마신 라스타에게

권리를 받은 지도자 루덴스가 펼친 정책은 유화 정책, 즉 마령에 살고 있는 인간들을 인정

하는 정책을 폈기 때문에 마령 자체에는 마신 숭배 외에도 다섯 성신을 믿는 신앙의 자유가

존재했다. 물론 마령의 상황 때문에 성전이 들어서지는 못했지만, 백성들은 마령이 들어서기

전의 종교를 그대로 믿을 수 있었다.

/이러한 유화 정책 외에 마령은 대륙의 타 국가들에 비해 세금이 낮았다. 또 마령의 정규군

은 일단 마족들이 맡고 있으므로 병사들의 강제징용도 없었기에,/ 대륙의 어떠한 국가보다

인간이 생활하기에 좋은 국가였다. 이런 이유로 마령이 세워진 100년 후에는 마령의 거의

모든 백성이 젊음을 잃지 않는 불로불사의 존재로 마령의 제일좌에 군림하는 루덴스를 하나

의 신으로 숭배하며 진정한 하나의 국가라는 믿음이 이어지게 된 것이다.

?어쨌든 우리의 목표는 이곳을 통해 마령으로 진입하는 거다. 시안, 물의 정령으로 우리의

모습을 감춰줄 수 있겠니??

시스의 말에 시안은 간신히 구토하는 것을 멈추고는 크레이드의 부축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

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크레이드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시안은 용병 생활을 오랫동안 해오긴 했지만 여자였기에 전쟁터가 아닌 일반 도시에서 생활

했다. 그래서 이런 끔찍한 전쟁터의 광경을 구경해 본 적이 없었다.

?파르가는 마을을 뒤져 식량을 찾아봐라. 현재 우리가 가진 식량은 국경을 넘어서기에는

상당히 부족하다. 아마 파이드 강을 넘어선 후에야 제대로 된 마을을 만날 수 있을 테니

까.?

?오케이!?

파르가가 식량을 찾으러 떠나자 시안은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더니 정령술을 시행했다. 그것

을 보던 크레이드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안이 물의 정령을 소환하려는 것은 떠날

때 몸을 감추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지금 그것을 시행하려 하다니. 하지만 잠시 후 시안은

바람의 정령을 소환했고, 크레이드는 시안이 정령을 소환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시안은 바람의 정령을 소환해 마을 주변에 흩어져 있는 시체들을 한곳에 모으고 있었던 것

이다.

시스는 시안의 행동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를 도와 그녀가 정령으로 끌고 올 수 없는 시

체들을 한곳으로 모아왔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폐허가 된 마을의 광장에 제국의 군대에게 죽어간 마을 사람들

의 시신을 모두 모을 수 있었다. 자신의 차례라고 생각한 크레이드는 시신들의 무더기 위에

우연히 구한 성기사의 성검을 꽂고는 두 손을 모아 신성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태양신 아리시아여! 당신의 불쌍한 어린 양에게 평안한 안식을 주시옵소서.?

그의 신성 주문이 끝나자 크레이드의 몸에서는 눈부신 광휘가 치솟아오르더니 마을 사람들

의 시체를 뒤덮어갔다. 시안은 평소에는 여자만 밝히는 크레이드의 몸에서 눈이 부실 정도

의 신성력이 발휘되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내뿜는 빛은 얼핏 보아도 아리시아 신전의 고위 사제 수준은 월등히 넘어서는 광휘였

기 때문이다.

?진정한 믿음이라고나 할까? 탐욕에 물들어 버린 아리시아 성교회의 사제들과는 달리 용병

생활로 떠돌아다니기는 하지만, 아리시아님의 믿음만은 어떠한 고위 사제들보다 숭고하니

까.?

시안의 궁금증을 알기라도 하는지 시스는 신성력을 발휘하는 크레이드를 보면서 중얼거렸고

그녀는 크레이드의 모습에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찬란한 광휘를 뿜으며 죽어간 이들에게 진심으로 기도드리는 자의 모습을 보며 어찌 감동하

지 않을 수 있겠는가.

?크레이드…….?

시안은 또다시 기도하는 크레이드의 모습을 보며 눈물이 흘릴 지경이었다. 언제나 치근덕거

리기나 하고 진지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던 크레이드는 이 한번으로 완전히 시안의 마음을

꿰어차 버린 것이다.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 축복의 기도를 마치자마자 그는 멀찍이 서서 자신의 얼굴을 황홀한

표정으로 보고 있는 시안을 보며 말했다.

?시안, 화장을 부탁해.?

?응.?

전쟁터에서 불을 지른다는 것은 레인저들에게 들킬 위험이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을 묻어줄

만한 시간이 없기 때문에 크레이드는 화장을 부탁했고, 시스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암묵적으

로 그것을 허락했다.

조용히 눈을 감은 시안은 불의 상급 정령을 소환하여 억울하게 죽어간 마을 사람들을 화장

했다. 자연의 힘인 불의 상급 정령의 힘은 그들의 시신을 자연으로 돌려주리라는 것을 의심

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의 화장이 끝나자 시스는 건물 벽에 세워두었던 할버드를 들고는 시안과 크레이

드에게 말했다.

?여기서 오래 지체할 수는 없다. 연기 때문에 제국의 병사들이 몰려올 테니, 파르가가 오면

바로 이곳에서 빠져나간다.?

그의 말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 사람들을 학살하는 것으로 봐선 자신들을 발견

했을 때 역시 제국의 병사들이 살려두지 않을 것은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병사들에 의해 죽을 정도의 실력은 아니지만, 제국의 병사들을 죽인다면 그들의 행로

는 조금 버거울 것이기에 그것을 피하려고 하는 것이다.

얼마 후 파르가는 커다란 밀 주머니를 등에 지고 돌아왔다.

?타버린 창고 지하에 숨겨져 있더라고. 이제 빨리 이곳을 뜨자.?

파르가는 그간에 있었던 일을 짐작이라도 하는 듯이 말했고 시스 일행은 병사들이 몰려오기

전에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마을을 빠져나가는 시스 일행은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언제나 농담을 하던 파르가 역

시 이상하게 조용히 있었다.

어느 정도 지났을까. 숲을 통해 지나던 시스 일행은 다시 다른 마을을 찾을 수 있었다. 시안

은 아까와 같이 마을을 찾았다는 기쁨과 함께 쉴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마을로 뛰어가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시스가 그런 그녀를 잡았다.

?왜??

?기다려라. 살기가 느껴진다.?

시스의 말에 시안은 얼굴을 굳히며 마을 쪽을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마을의 광장 쪽에서 사

람들이 모여들고 있었고, 그들의 뒤에선 마을 사람들을 광장으로 끌고 가는 백여 명의 병사

들과 한 명의 기사가 있었다.

기사는 일일이 지시하며 병사들에게 마을 사람들을 광장으로 몰아붙이며 소리치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본 시안은 안심인 듯 한숨을 쉬었지만 파르가의 얼굴은 굳어지고 있었다.

드래곤 슬레이어를 쥔 손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기에 그것을 본 크레이드는 파르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파르가, 참아라.?

하지만 파르가는 참을 수 없었다. 과거의 일이 생각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전에 들렸던 마을의 상황 그것이 이 마을에서 다시 일어나며 잊으려 했던 그의 슬픈 과

거가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파르가는 유온족 사이에서 자라났다.

물론 출생은 로아냐드 제국이었다. 어렸을 때 부모에게 버림받아 고아가 되어 대륙을 떠돌

아다니다 사막에서 쓰러져 죽어가고 있었는데, 그때 죽어가는 그를 구해준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이교도들이라 천시받던 유온 족이었다.

/파르가의 사정을 알게 된 그들은 따뜻하게 파르가를 받아주었고, 오랜 시간 겪어보지 못했

던 사랑을 나누어주었다. 하지만 행복해지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불행에 빠지고

말았다./

/그때도 성기사들은 유온족 부락의 사람들을 한곳으로 모았었다. 겉으로는 자신들을 따르면

살려줄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달랐다./

/황색의 메마른 대지로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땅. 대륙에서 가장 척박한 땅이라고 알려져

있는 이곳이 바로 유온 족 자치령이다./

파르가는 유온 족 자치령에서 유목 생활을 하고 있는 수백 개의 부족 중의 하나인 아비드

족과 같이 생활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낯선 공간이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유온 족들의 생활에 익숙해졌고, 몇

명의 친구들도 사귈 수 있었다.

그날도 친구들과 함께 언덕에서 놀고 있던 파르가는 숨바꼭질 놀이를 하다 벌판에서 자욱하

게 흙먼지가 일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놀라 친구들을 불러 언덕의 바위 뒤로 몸을 숨겼

다.

유목 생활을 하는 유온 족들에게는 말이 없었기에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 정도로 말을 몰아

오는 자들은 도적들이거나 제국의 기사들일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둘 모두 좋은 부류들

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파르가는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고는 언덕 뒤로 숨어 그

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그와 함께 숨어 있는 아이들 중 가장 어린 여섯 살의 소녀 뮤란은 무서운지 파르가에게 떨

면서 다가왔다. 파르가는 무서워하는 뮤란을 다독여 주며 가슴에 안았다.

?파르가, 무서워…….?

?괜찮을 거야. 조금만 참아.?

뮤란을 안심시키기 위해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파르가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흙먼지

가 일고 있는 모습을 살펴보면, 적어도 일백 기 이상의 기마 기사단이 이곳으로 오고 있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기사단을 보며 놀라기는 했지만, 척박한 대지의 유온 족

자치령에선 가끔씩 있는 일이기 때문에 대처하는 방법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

큰 세력을 가지고 있는 사막의 도적 떼의 약탈도 겪어보았기 때문이다. 통례상 가진 것의

반을 내놓으면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고 부족민들을 보내주는 것이 보통이었기에, 족장은

기마 기사단이 보며 한숨을 쉬고는 마을 사람들에게 지시하여 기르던 가축들의 반을 모아오

게 했다.

마을 사람들이 기사단에게 바칠 가축의 반을 모으고 있을 때, 멀리서 보이던 기사단들은 마

을의 입구에 도착하여 도열했다.

족장은 그들의 백색 갑옷의 가슴에 보이는 태양의 문장으로 미루어보아 그들이 제국의 성기

사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단의 성기사들 중 대장인 듯한 자가 앞으로 나와 소리쳤

다.

?우린 태양신 아리시아님의 믿음을 전파하는 성기사들이다! 이곳의 족장을 만나고 싶다!?

그 기사의 말에 족장은 고개를 숙이며 천천히 그의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태양신 아리시아님의 성기사님께 인사드립니다. 제가 이들을 이끌고 있는 족장 휴크라고

합니다.?

?본인은 이 사교의 땅에 아리시아님의 교리를 전파하기 위해 왔다. 우리의 말만 따른다면

아무 일 없을 테니 사람들을 한곳에 모아오도록 하라.?

?예.?

족장은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는 신성 기사단 대장의 말을 믿고 서둘러 마을 사람들을 한곳

으로 모이게 했다.

사막에서 선량하게 사는 마을 사람들로서는 100명이 넘는 기사들에게 대항할 힘이 없기 때

문에 시키는 대로 행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 사람들이 다 모이자 족장은

기사대장에게 걸어가 말했다.

?성기사님께서 말씀대로 마을 사람들을 다 모아왔습니다.?

족장은 그때까지도 마을 사람들을 모이라고 하는 이유가 아리시아를 믿으라는 포교를 하기

위해서인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예상이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여 있는 마을 사람들을 한번 훑어본 그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수고하셨소. 우리가 할 일을 덜어줬으니 당신은 제일 마지막에 죽여주리다!?

?헉!?

마지막에 죽인다는 말을 들은 족장은 놀라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족장의 당황하는 얼굴

을 보며 미소를 지은 기사대장은 뒤에 있는 기사들을 향해 손을 올렸다.

기사대장의 지시가 떨어지자 성기사들은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뽑아 들었고, 마을 사람들

은 그 사태를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해했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순간, 기사단의 대장이 손을 내림과 동시에 성기사들은 마을 사람들을

향해 말을 몰아갔다.

?꺄악!?

?도망가라!!?

그제야 성기사들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며 도망가기

시작했고, 젊은 청년들은 숨겨두었던 단검을 꺼내어 들었다.

그것을 보며 성기사들의 대장은 미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역시 사교들의 집단이었군! 감히 성스러운 아리시아님의 성기사들에게 검을 들이대다니!

사교의 검은 물을 뺄 수 없는 자들이다! 모두 죽여라!?

성기사들의 검에서 마을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꺼내 든 단검을 보며 사교들의 집단이라고

몰아붙이며 그는 음침한 미소와 함께 기사들에게 학살령을 명했고, 사람들은 그 기사들의

무자비한 검날 아래 죽어가기 시작했다.

언덕 위에 숨어 있던 파르가는 성기사들이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것을 보며 할 말

을 잃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파르가는 심하다고 해도 가축들을 모두 뺏거나 마을의 여자들

이 끌려가는 것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들은 부족의 사람들을 한 명도 살려두지 않을 생각이

었던 것이다.

반항도 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검을 휘두르는 기사들을 보며 파르가는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엄……!?

뮤란은 마을 사람들이 기사들에게 학살당하는 것을 보고는 놀라 소리치며 달려가려고 했지

만, 파르가는 뮤란을 품에 안고는 소리치던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마을로

뛰쳐나가기 위해 발버둥쳤지만 파르가는 그녀를 놓아줄 수 없었다. 지금 나갔다간 마을 사

람들처럼 기사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참아… 참으란 말이야.?

자신들이 아무런 힘도 될 수 없는 것을 알고 있는 아이들은 마을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며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성기사대장의 악랄한 속임수로 인해 한곳으로 모인 후였기에 마을 사람들은 단 한 사람도

그들의 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처음부터 그들은 이 마을 사람들을 몰살하려 작정하고 온 것이었다.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성기사의 잔악한 학살이 시작된 지 3시간여 정도가 지난 후였다. 기사

대장은 마을 사람들이 모두 검에 죽어간 후에도 확인 사살까지 지시하며 시체에 검을 꽂았

고, 모두가 죽었다는 것을 확인하자 유온 족의 이동용 파오(유목민들의 이동용 집)에 불을

지르곤 가축들을 몰아 사라졌다.

그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파르가는 뮤란을 놓아주었고,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마을로 뛰어갔다.

역한 피 냄새와 함께 타오르는 파오들. 아이들의 눈에선 슬픔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너무나 큰 슬픔 때문인지 어느 하나 큰 소리로 울지 못했다. 심한 격정에 숨이 막혔기 때문

이다.

그날 파르가와 함께 살아남은 아이들은 모두 일곱 명이었다. 어머니의 시체를 발견하고 매

달려 우는 뮤란을 제외하고는 모두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다.

?더러운 자식들……!?

파르가는 아무 죄도 없는 마을 사람들을 학살하며 웃고 있던 성기사들의 모습을 생각하며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다. 더러운 자들을 죽일 수 없는 자신의 약함을 욕하면

서.

어린 그들에게는 마을 사람들을 묻을 힘도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시체를 한곳에 모

아두는 것뿐. 파르가와 아이들은 그들의 시신 위로 타다 남은 파오의 잔재를 쌓아놓고 남아

있는 불씨를 이용하여 사람들의 시신을 화장했다.

부모들을 모두 잃어버린 아이들은 그 후 서로를 의지하며 떠돌아다녀야 했다. 하지만 냉혹

한 대지는 어린아이들을 쉽게 받아주지 않았다.

이들 중 가장 나이가 어렸던 뮤란은 슬픔으로 인해 병을 얻어 쓰러졌고, 그 일이 있는 후

일주일도 안 돼 풀 한 포기 없는 벌판에서 싸늘한 시체로 변해갔다.

뮤란의 죽음을 시작으로 남아 있던 그의 친구들은 한 사람씩 죽어갔다. 어떤 때는 맹수의

먹이가 되어, 어떤 때는 배고픔에 굶주려 그렇게 친구들은 사라져 갔고, 시간이 흘러 파르가

가 혼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땐 단 한 사람의 친구도 남아 있지 않았다.

또다시 혼자가 됐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지금이라면 한 사람도 잃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때와 똑같은 상황… 그때와 같이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람과 숨어 있었지만, 이제 파르

가는 숨어 있지 않아도 되었다.

?꺄아악!?

?으악!?

성기사들의 거짓말에 속아 아무런 무기도 들지 않은 채 한곳에 모여 있던 마을 사람들은 아

무런 반항도 못하고 병장기를 든 병사들에게 허무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으악!!?

더 이상 참지 못한 파르가가 뛰어나가자 다른 동료들 역시 각자의 무기를 꺼내 들고 마을로

달려 내려갔다.

성기사들의 숫자는 백여 명 정도로 넷밖에 안 되는 일행에 비해 월등히 많은 숫자였지만,

일행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드래곤을 죽일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성기사들을 상대할 수 있다고 파악한 시스는 뛰쳐나가는 파르가를 막지 않았다.

/"으아앗!!!"

언덕 위에서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오는 시스 일행을 본 기사는 숨어 있던 마을 사람들이라

생각하고는 일부의 병사들에게 지시하여 그들을 공격하게 했다.

4명 정도의 숫자야 쉽게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달려드는 일행에 몰려 온 것은 성기사단의 병사는 스무명에 가까운 숫자. 많은 수의 병사

들을 상대하기에는 숫자가 적은 일행에겐 이정도의 숫자라면 부상 없이 처리할 수 있는 숫

자였지만, 파르가로서는 남아 있는 다른 병사들에게서 학살이 계속되고 있는 것을 보며 참

을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시간이 지체되었다가는 마을 사람들의 피해가 더 커질 것을 우려

한 파르가는 빠르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일단 학살을 멈추게 하려면 병사들을 멀찍이에

서 지시하는 기사를 죽여야 한다고 판단한 파르가는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병사들은 베어가

며 기사를 향해 뛰어갔다.

?크악!?

마나가 뿜어내는 푸른빛을 지닌 드래곤 슬레이어는 쉴 새 없이 병사들을 베기 시작했고, 그

제야 나타난 이들의 실력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챈 /성기사단의 지휘관은/ 마을 사람

들의 학살을 멈추고 모든 병사들에게 공격을 지시했다.

그들의 머리 위로 궁병들이 쏘는 화살이 비 오듯 쏟아졌지만, 시안이 바람의 정령들을 사용

하여 활의 방향을 비틀어 버렸기 때문에 일행은 아무런 상처 없이 병사들에게 달려들 수 있

었다.

?하앗!!?

/성기사단의 머리를 베어야 된다고 생각한 파르가는 지휘를 내리는 기사를 향해 세도해 들

어갔다.

지휘관을 지키기 위해 줄지어 달려드는 병사들을 베며 세도하던 파르가는 드디어 눈 앞에

병사들을 지휘하는 기사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이자만 벤다면 학살이 멈출 것이라 생각한/ 파르가는 고함을 치며 공중으로 뛰어올라 네 명

의 기사 중 가장 앞에 있는 자를 말과 함께 수직으로 두 동강을 내버렸다.

?막아라!?

순식간에 부하 기사가 죽는 것을 보며 /지휘관은/ 나머지 두 명에게 파르가를 상대하라 지

시했다. 기사들은 말 위에서 파르가를 향해 검을 휘둘렀지만 그들의 검이 닿기도 전에 파르

가의 검이 기사들 말의 다리를 잘라 버렸다.

말의 다리가 잘리자 검을 휘두르던 기사들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말과 함께 땅으로 널브러

졌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파르가의 검은 두 기사의 목을 잘라 버렸다.

/자신을 호위하던 세 명의 기사가 순식간에 당해 버리자, 당황한 지휘관/은 말을 돌려 도망

가려 했지만 파르가는 몸을 날려 통한의 검을 휘둘러 그의 몸을 수평으로 베었다.

?끄악!?

그의 검에 허리가 베인 지휘관은 고통의 비명을 지르며 말 위에서 떨어졌고, 지휘관이 쓰러

진 것을 알게 된 병사들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그 뒤부터는 일행들의 일반적인 살육이 시작되었다. 이십여 분 간의 싸움… 모든 싸움이 끝

났을 때 마을의 광장에는 로아냐드 제국 기사들의 시체가 덮여 있었고, 그 가운데는 아직도

분을 참지 못한 파르가가 드래곤 슬레이어를 들고 서 있었다.

주위를 살펴본 일행들은 자신들의 공격이 다소 늦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의 모든 주민들이 병사들의 손에 죽었고, 남은 사람들이라곤 몇몇의 아녀자들과 어린아이

들뿐이었기 때문이다.

?젠장!?

크레이드는 잠시 지체했던 자신들의 실수를 탓했다. 한때는 자신의 동료이기도 했던 로아냐

드 제국의 성기사단에 속한 자들이 사람들을 학살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그래도 조금은 가

지고 있었던 그였기에 이 현실의 잔혹함은 큰 충격이었다.

크레이드는 시체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죽은 자의 기도를 올렸다.

크레이드의 손에 닿아 죽은 자의 기도를 받은 이들은 눈부신 빛에 감싸였다. 병사들의 학살

에 공포와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은 조금씩 안식의 미소를 지은 얼굴로 변해갔다.

?엄마!?

?으엉……!?

하지만 남아 있는 자들에겐 그런 미소가 더욱 슬퍼지고 있었다. 여기저기 들려오는 아이들

의 울음소리. 파르가는 과거의 일이 생각나 참을 수가 없었다. 시스는 그런 파르가를 이해하

기에 어깨에 손을 얹고 위로해 줄 수밖에 없었다.

?가자…….?

더 이상 자신들이 이곳에서 할 일은 없다고 생각한 시스는 격정에 몸을 떨고 있는 그에게

말했지만, 파르가는 고개를 저었다.

?난 이곳에 당분간 남아 있겠어.?

파르가의 예상외의 결정에 일행들의 시선은 모두 파르가의 향했다.

?분명 병사들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알고 다른 자들이 파견될 텐데, 여기 남아 있는 사람

들은 그들의 검을 피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한 명은 남아 이들을 피신시켜야 되지 않겠

나.?

파르가의 말에 시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파르가, 할 수 있겠나??

?응.?

?그렇다면 남아라. 선택은 네가 하는 것이니까.?

?고맙다, 시스 대장.?

파르가의 입에서 대장이란 말이 나오자 시스는 미소를 지으며 다른 일행들에게 소리쳤다.

?파르가는 이곳에 남는다. 가자.?

시스의 말에 크레이드는 파르가에게 다가가더니 말했다.

?너의 선택은 옳은 것이다.?

크레이드는 자신의 말에 미소 짓는 파르가와 악수를 나누고는 앞서 걸어가는 시스의 뒤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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