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얼음의 성
루드웨어 일행과의 싸움을 약속한 시스 일행은 대륙으로 가기 위해 배에 올라타고 항해를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차분하게 보이는 듯하지만, 루드웨어와의 잠깐 동안 만남이 시스 일행에겐 큰 충
격을 가져다 주고 있었다.
드래곤을 죽일 정도로 강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그들이었고, 그 때문에 상당한 자긍심을 가
지고 있었던 그들인데 루드웨어에게는 전혀 상대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강했다.?
시스가 자신의 할버드를 움켜잡으며 말했다.
?젠장!!?
파르가는 어디선가 들고 온 술병을 들고는 벌컥벌컥 마시며 화를 죽이다가 시스의 말을 듣
고는 다시 열이 오르는지 술병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라디안, 니가 느낀 그에 대한 느낌을 말해 봐!?
팔라딘인 크레이드가 침착한 얼굴로 루드웨어란 자에 대해서 묻자 라디안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말했다.
?마력 자체를 측정할 수가 없는 상대예요.?
그 말에 시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마력 자체를??
?예. 어차피 인간의 마력이라면 원소의 힘을 불러내기 전에는 한정된 힘을 몸에서 발산하
게 되죠. 마법의 탑에 있을 때 대륙 마법 길드의 최고의 마력을 지니고 있다는 길드장이신
크리우스님을 봤을 때도 어느 정도의 마력이란 것을 측정할 수 있었는데, 이번 경우에는 그
마력조차 측정할 수가 없었죠.?
?그럼??
?아주 거대한 마력을 지니거나 마력 자체가 없는 경우죠. 하지만 매직 실드를 사용하는 이
가 마력이 없을 리는 없으니 엄청나다고 할까요.?
?어느 정도??
?드래곤 급이요. 그것도 윔 급 이상의 드래곤 급의 마력이요.?
그의 말에 시안은 입을 벌리고 말았다. 마법의 생물체라는 드래곤의 마력이란 것은 인간으
로서 가질 수 없는 정도의 마력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라고 짐작할 수 있겠니??
시스가 묻자 라디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대륙 마법 길드 소속의 마법사는 아니에요. 그런 정도의 마력을 지닌 이를 알아보지 못할
리는 없으니까요. 아마 그가 조직에 속해 있다면 칠인회가 아닐까 생각해요.?
?칠인회라면……??
?예, 비밀에 싸여 있는 마법 조직이요. 현재 대륙 최고의 마법사라고 알려져 있는 인물은
칠인회의 대외 대리인이죠. 대리인이 그 정도니 칠인회를 이끌고 있는 인물들은 모두 대외
대리인 이상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마법계의 일반적인 시각입니다.?
?라디안, 너의 짐작은??
?대충 짐작을 해본다면 아마 칠인회의 일곱 회주 중 한 명이 아닐까 생각해요.?
비밀에 싸여 있는 마법 조직 칠인회. 단순히 대외 대리인이라고 알려져 있는 인물이 대륙
최고의 마법사라는 것은 그들로서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외 대리인의 실력은 어느 정도지??
?8서클 마스터 급의 클래스라고 알고 있습니다.?
?8서클 마스터 급의 클래스라면 어느 정도나 되지??
?도시 하나는 가볍게 날릴 수 있는 실력이라고 보면 돼요.?
그 말에 시스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말했다.
?라디안, 네가 앞으로 클래스를 최대로 올린다면 어느 정도나 되지??
?인간의 몸으로 마력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은 마법 길드에서는 8서클 익스퍼트가 한계
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칠인회가 나타나면서 깨진 학설이지만요. 아무튼 저
역시 능력을 향상시킨다고 해도 8서클 익스퍼트나 마스터 이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봐야
죠.?
?일단 마법 대결로는 녀석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이군. 그럼 너의 마력으로 녀석의 공격을
막는 건??
?어떤 공격 마법이냐에 따라 다르지만, 몸에 있는 마력을 총동원해서 부분적으로 실드를
집중해서 펼친다면 두 번 정도의 마법 공격은 막을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이건 그가 8서클
마스터라고 가정해서 말하는 겁니다.?
그들이 한참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호호호, 라디안도 이젠 다 컸네. 어리광만 부리는 줄 알았더니.?
?누구냐!?
파르가가 검을 뽑고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자 희미한 기운이 나타나며 한 명의 여마법
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스 일행의 앞에 나타난 여자는 루드웨어 일행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던 크샤스의 오
호사 소속의 마법사 엘레이나였다.
?엘레이나 누나.?
그녀가 나타나자 라디안은 웃으며 엘레이나에게로 뛰어갔다.
?라디안, 고생했구나.?
?고생은 뭐.?
?루드웨어를 만났는데 고생을 안 했다는 건 말이 안 되지.?
?루드웨어??
?그래, 니네 일행이 상대했던 마법사의 이름이야.?
그 말에 시스는 놀라며 엘레이나에게 물었다.
?그를 아는가??
?자세히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는 알고 있죠. 물론 그것도 그가 가지고 있는 껍
데기 중의 하나겠지만요.?
?그거라도 말해 줄 수 있겠나??
?뭐, 상관없죠. 이름은 루드웨어. 정식 이름은 루드그레인 크리오드 본 아시오스라고 하지
요. 금단의 서의 주인인 라지베헤루의 유일한 제자라는 것이 그가 밝힌 자신의 정체 중 하
나죠.?
?라지베헤루라면… 유일한 9서클 익스퍼트 클래스??
라디안이 놀란 얼굴로 말하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는 라지베헤루의 유일한 제자지.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이미 라지베헤루
의 실력을 넘어섰다고 하는 거야. 뭐, 그가 말한 것이라서 조금 신빙성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말이야.?
?그럼 9서클의 마스터??
라디안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혀를 내두르며 말하는데, 사이야는 그것도 아니라는 듯이 고
개를 저으며 말했다.
?10서클의 마스터. 온 세상의 마법사들이 꿈꾸는 궁극의 경지를 넘어선 사람이야.?
?말도 안 돼!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경지잖아!!?
라디안이 절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하자 사이야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 사람의 나이가 얼마나 돼 보이니??
?스물다섯 정도??
?라지베헤루가 죽은 지는??
사이야의 다음 질문에 라디안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라지베헤루가 죽은 지는 적어도 칠십
년은 지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궁극에 이른 마력으로 이미 노화가 멈춘 상태야. 대륙 마법 길드 학술 회의에서 나온 마
력에 의한 영생이 가능한 자가 바로 루드웨어란 사람이지.?
마력에 의한 영생. 그것은 궁극의 마력으로 인해 네 가지의 원소가 규칙적인 교체를 반복하
면서 인간의 생명력을 증대한다는 학설에서 나온 것으로, 인간의 노화는 4원소의 규칙적 교
체가 세월이 지나가면서 탁한 기운을 흡수하면서 느려지고 그것이 멈추게 되면 죽게 된다는
것인데, 네 가지 원소의 힘을 이용하는 마력이 궁극의 경지에 이르면 규칙적 교체를 원활하
게 하여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시스가 묻자 사이야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직까지는요. 불사의 몸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알겠지만 그 이상은 알아낸 것이 없어
요.?
?도대체 그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있기는 한 거예요??
시안이 묻자 사이야는 한동안 생각을 하더니 말했다.
?그와 비슷한 능력을 지닌 자라면 가능하겠죠.?
?그와 비슷한 능력이라면??
?마령의 주인인 암흑의 황태자 루덴스라고 할까요.?
그녀의 말에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시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루덴스의 능력 정도라면 그를 죽일 수 있는 자가 한 사람이 더 생기는군.?
?누구??
?얼음성의 주인인 크샤스 하르베이드. 그 역시 대리자의 힘을 지녔으니까.?
대리자의 힘. 그것은 마왕에게서만 가능한 힘으로 불사의 몸을 지닐 수 있게 하는 최고의
마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하르베이드 크샤스. 그는 누구의 힘을 이은 대리자인가.
쪹 쪹 쪹
루드웨어 일행은 사이온의 항구에 있는 여관인 ?세이렌의 노래?에서 얼음성으로 들어가기
전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세이렌의 노래가 뭐야??
?선원들이 들을 수 있는 최고의 노래라고 할 수 있지. 물론 한 번 들으면 그대로 세상하고
는 작별이지만 말이야.?
로노와르가 술집의 이름을 들으며 묻자 루드웨어가 자상하게 설명을 해주었는데, 근처에서
듣고 있던 선원이 그 소리를 듣고는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이곳에 처음 온 분 같군요. 세이렌의 노래를 못 들었다니 말입니다.?
그 말에 아이샤가 의아해하면서 물었다.
?세이렌의 노래를 들으셨어요??
그 말에 선원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물론 마물인 세이렌의 노래는 듣지 못했죠. 선원이 세이렌의 노래를 들었다면 세상을 하
직했을 텐데 어떻게 이곳에서 술을 마시고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곳 북극의 땅에서는 어디
서든 세이렌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답니다.?
?말도 안 돼요.?
?허허, 못 믿으시나 본데요. 아! 시간이 거의 다 됐으니 한번 들어보면 알겠네요.?
?네??
그 말에 아이샤는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여관에 있는 식당의 식탁은 이미 꽉 차 있었다. 그
런데 모두들 음식을 먹을 생각은 안 하고 가만히 앉아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었
다.
?뭐지??
로노와르도 그제야 느낀 듯이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그때 어디선가 은은한 노랫소리가 들리
기 시작했다.
?어??
?조용히 해봐.?
로노와르가 노랫소리에 놀라자 루드웨어는 그를 조용히시키고 귀를 기울였다.
은은하게 들려오는 노랫소리는 자세히 듣지 않는다면 놓칠 수 있을 만큼의 작은 소리였다.
곱고 아름다운 음성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식에 잠길 수 있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은 노랫소리에 심취해 눈물을 흘리는 자가 있는가 하면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노래에 심취해 있는 자도 있었다.
아이샤도 노랫소리에 빠져 있는지 눈을 감고 있었기에 로노와르 역시 노랫소리를 경청할 수
밖에 없었는데 아름다운 노랫소리에 금방 빠져들고 말았다.
?세이렌의 목소리군.?
루드웨어는 정신을 집중하고 그 목소리를 듣고 있는데, 과거에 그가 여행 중에 들었던 세이
렌의 노래와 마력 패턴이 너무나 흡사했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세이렌의 노래 속에 있는 마력은 뇌를 자극하여 환각 현상을 일으킨다. 이 환각 현상으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가장 행복했을 때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 탓에 바다에서 세이렌의 노래를 듣는 이들은 그들에게 이끌려 배를 몰고 가다가 세이렌
의 밥이 되곤 했다. 그런데 지금 들리고 있는 이 노래는 세이렌의 노래가 가지고 있는 마력
패턴을 고스란히 갖곤 있었지만,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은 미약했기에 조용히 경청할 수 있
었던 것이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노래가 끝났고 사람들은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식탁에 있는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와! 정말 아름다운 소리야.?
로노와르가 감격했는지 눈물을 닦으며 이야기하자 아이샤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여관 이름이 왜 세이렌의 노래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루드웨어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어 그 모습을 본 두 사람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왜 그래??
로노와르가 묻자 루드웨어는 그를 보며 말했다.
?이 노랜 진짜 세이렌이 부르는 노래다.?
?응??
루드웨어의 말에 두 사람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노랫소리에 실려 있는 이 마력은 세이렌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마력이야. 그것은 인간
들이 흉내 낼 수 없는 마법이지.?
?그럴 리가… 세이렌의 노래라면 사람들이 그것에 끌려들어야 되는 거 아니야??
?그렇지. 하지만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력이 약할 뿐 세이렌의 목소리임에는 틀림이 없다.?
?크샤스 하르베이드, 그의 짓일까??
마물을 움직일 수 있는 힘.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벅차기는 하지만 마왕의 힘을 빌리는 자
들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힘이다.
암흑 마법을 쓰는 자가 크샤스 하르베이드에 진영에 있다면 가능하다고 할 수 있지만 무슨
이유로 사람들에게 세이렌의 목소리를 들려주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마력 분석학에도 일가견이 있는 루드웨어였지만 세이렌의 목소리에서 추억을 되살리는 힘
이외에 무엇이 있는지는 루드웨어도 잘 알 수 없었다.
?가까이에서 노래를 듣는다면 알겠는데 여기에서는 잘 알 수가 없군.?
루드웨어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다 아까 세이렌의 목소리에 대해서 말해 주었던 선원에게 다
가가 물어보았다.
?방금 전의 노래는 여기서만 들립니까??
그 말에 선원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지는 않죠. 노래는 여기 북극의 대륙 어느 곳을 가도 들을 수 있습니다.?
?어디에서나라…….?
광범위의 마법. 세이렌의 힘으로는 거대한 북극의 대륙 전체에 노래를 들릴 수 있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뭐야! 너만 알겠다는 거야??
로노와르가 투덜거리자 루드웨어는 한심하다는 듯이 손짓을 하며 말했다.
?뭐라도 좀 느껴봐라. 최강의 생물체라는 드래곤이 이렇게 무식해서야.?
?뭐!?
로노와르가 열을 내려고 하자 루드웨어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말했다.
?강아지만도 못한 머리. 잘 들어. 세이렌의 마력은 뇌를 자극하는 마력 패턴을 가지고 있
다. 즉, 인간들을 세뇌할 수 있는 힘을 지녔다고 볼 수 있지. 그렇다면 대륙 전체로 그런 노
래가 들린다면 어떻게 생각하겠니??
루드웨어의 말에 아이샤는 놀란 얼굴을 보이며 말했다.
?설마??
?설마가 아니야. 아마 이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은 크샤스 하르베이드에 대한 충성이
상당할걸? 아마 신처럼 숭상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거다.?
?……??
루드웨어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로노와르는 선원에게 다가가 물어보았다.
?크샤스 하르베이드란 사람을 아십니까??
그 말에 선원은 크게 화난 얼굴을 보이며 말했다.
?젊은것이 예의가 없군. 외지에 온 손님이라 화를 내지는 않겠네만, 다시 한 번 이 나라 폐
하의 성함을 함부로 부르면 당장 불경죄로 고소해 버리겠네!?
일국의 왕도 타국의 사람이라면 이름 정도는 부를 수 있기에 그렇게 큰 죄는 아니지만, 자
국 내에서 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다는 것은 불경죄에 걸릴 수 있는 일이다. 호탕한 성격
의 그 선원은 기분 나쁜 표정을 하며 대꾸했지만, 그런 사정을 잘 아는지 고발할 생각은 하
지 않고 조심하라는 말만 한 것이다.
말투의 억양으로 봐서 그는 북극령의 백성이 아닌 듯하지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고는 로노와르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더니 저 녀석을 두고 하는 말 같군.?
그 말에 아이샤 역시 동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크샤스의 얼음성에 들어가야 할 텐데 어떻게 들어갈 거예요??
아이샤의 물음에 루드웨어는 한참을 생각하다 말했다. 물론 루드웨어가 제대로 말하리라곤
기대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정문으로 가면 안 되나??
?멍청이! 우리 같은 신분도 없는 평민들을 왕국에서 어서 오십쇼 하고 받아들일 것 같아
요? 그건 그렇고 얼음성에 가는 이유는 또 뭐예요.?
?응??
?무슨 용건으로 가냐고요! 얼음성에 무슨 기보라도 있으니까 가는 거 아니에요??
아이샤의 다그침에 루드웨어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몰라. 루덴스가 얼음성에 가보라고 하던데.?
?휴!?
아무것도 모른 채 위험천만한 얼음성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둘을 보며 아이샤는 한심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루드웨어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이야기하자 아이샤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문으로 걸어
갔다.
?어디 가??
넋 놓고 있던 로노와르가 묻자 아이샤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다시 돌아가려고요. 난 이렇게 허무맹랑한 여행에 계속 동참해서 아까운 목숨 날리고 싶
은 마음은 없으니까요.?
?정말? 그럼 같이 가자.?
로노와르 역시 바보 같은 여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이샤를 쫓아 돌아가려고 했는데 그
순간 루드웨어의 눈빛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느낀 아이샤와 로노와르는 루드웨어의 얼굴을 쳐다보았는데 루드웨어는 불타는 듯한
눈동자를 한 채 입으로 무엇인가를 읊조리고 있었고 얼마쯤 있자 로노와르의 안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젠장! 아이샤, 신성 방어벽을 치든지 도망가든지 해라.?
?왜요??
아이샤가 의아해하며 묻자 로노와르는 급한 얼굴로 소리쳤다.
?루드웨어, 저 자식이 또 디멘전 패스를 쓰려고 한단 말이야!?
말 안 듣는 헤츨링을 강제로 데리고 다니기 위한 루드웨어의 최고의 이동 주문 디멘전 패스
(암흑 마법에 속하는 이동 마법으로 목적지까지 도착하기는 하지만 그 좌표점은 타의 추종
을 불허할 만큼 엉터리인 데다가 마계로 이동하여 다시 인간 세상으로 돌아오는 것이기 때
문에 실수하면 마계에 떨어지고 마는 공포의 이동 주문). 몇 번이나 디멘전 패스로 고생을
해야 했던 로노와르는 이제 단순한 읊조림으로도 디멘전 패스의 주문은 알아볼 수 있었다.
물론 모든 주문과 마력 패턴을 온몸으로 익힌 로노와르는 디맨전 패스를 사용할 수 있는 경
지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디멘전 패스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던 아이샤의 반응은 느렸고, 로노와르는 아이
샤를 제쳐 두고라도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늦어 있었다.
?디멘전 패스!?
?으아악!!?
로노와르의 처절한 울부짖음은 검은 구름과 함께 사라져 갔다.
쪹 쪹 쪹
북극의 대륙에서도 가장 북에 위치해 있다는 얼음성은 성 자체가 얼음으로 만들어져 있지만
그다지 춥지는 않은 곳이었다.
그것은 얼음성의 성벽에 보존의 마법을 걸어놓았고 얼음성 주위의 땅에는 곳곳에 열기를 뿜
고 있는 작은 화구가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한겨울에도 얼음성 주위에서는 푸른 나무를 구경할 수 있었다.
얼음성 성벽에서 근무를 서는 파드에게 있어서 얼음성의 병사가 되어 가장 즐거웠던 점은
푸른 나무들을 일년 내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파드, 근무는 안 서고 또 나무 구경이냐??
?난 푸른 잎이 좋거든. 푸른 잎을 보고 있으면 언제나 마음이 안정되지.?
파드는 근무 교대를 하러 나온 병사가 한마디 하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거참.?
파드의 말에 희한하다는 생각을 하며 교대를 하려 하는데, 그때 파드의 머리 위에서 검은
구름이 형성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파드! 위를 봐!?
?응? 왜??
그의 말에 파드가 위를 쳐다보자 검은색의 짙은 구름이 머리 위에서 낮게 생성되어 팽창하
더니 세 개의 물체가 떨어져 내려왔다.
?으악!?
물체에 깔려 버린 파드는 성벽 바닥에 자빠져 버렸고, 그 위에 떨어진 물체는 그제야 움직
이기 시작했다.
?아, 젠장! 또 떨어졌잖아! 여긴 어디야!?
그들은 디멘전 패스로 이동해 온 루드웨어 일행이었는데, 로노와르는 이번에도 곤두박질치
자 화를 내며 소리쳤다.
?아이, 허리야. 빌어먹을 루드웨어. 할 줄 아는 이동 주문이 이것밖에 없는 거예요!?
?물론 많지. 하지만 너희 같은 녀석들을 강제로 데리고 오기엔 디멘전 패스가 가장 좋다고
생각했지. 하하하하.?
아이샤의 투덜거림에 루드웨어는 웃음을 지으며 반격했다.
?누구냐!?
?응??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병사는 그제야 이들이 불법으로 침입한 자라는 것이 생각이 났는지
루드웨어 일행에게 소리쳤다.
로노와르는 그런 병사를 도대체 시끄럽게 소리치는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눈으로 쳐다보았
다.
?로노와르, 밑에 있는 녀석도 이젠 해방시켜 줘라.?
루드웨어의 말에 밑을 보자 병사 한 명이 깔려 있었다. 로노와르는 멋쩍은 듯이 일어나 그
를 일으켜 세워주며 말했다.
?사람을 깔고 앉아 있었다니… 미안합니다.?
로노와르의 예의 바른 사과에 정신을 차린 파드가 손을 내저으며 괜찮다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이 사람들은 불법 침입자인 것이다.
?네 녀석들은 누구냐!?
파드가 그제야 그것에 생각이 미쳤는지 창을 주워 들고 갑작스럽게 나타난 침입자를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로노와르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렇군요. 처음 보는 사람에게 우리 소개도 안 하고 있었다니. 후후, 미안해요. 우리
소개를 하면 저는 그린 드래곤의 헤츨링인 로노와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 마법사는 루
드웨어라고 하고요. 이쪽 아이네스 여신관은 아이샤라고 하지요. 이젠 됐죠??
로노와르의 말에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게 되어버린 파드와 다른 병사는 멍한 얼굴이 됐고
아이샤는 한심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루드웨어는 로노와르를 옆으로 밀고는 병사들에게 다가가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얼음성의 성주를 뵈러 온 로아냐드 제국의 사신이오.?
루드웨어는 품에서 서신을 빼 들었는데 서신에는 로아냐드 제국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아
이샤는 그것을 확인하고는 놀라 소리쳤다.
?그게 뭐야!?
?제국의 인장이 찍힌 공식 서한.?
?대체 그런 것이 있었으면서 왜 마법으로 불법 침입하는 거야!?
?응? 그렇군. 그냥 정문으로 걸어왔으면 되는데 말이야. 푸하하하하.?
루드웨어의 말에 두 사람은 억울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이 악독한 마법사를 도대체 어
떻게 처리해야 한단 말인가란 생각이 그들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잠시 루드웨어가 내민 제국의 공식 서한을 보고 있던 파드는 옆에 병사를 보고는 조용히 속
삭였다.
?저거 로아냐드 제국의 인장이 맞는 거야??
?글쎄, 본 적이 있어야지…….?
마령으로 가려진 북극령이었기에 건국 이후 단 한 번도 제국의 공식 서한이나 사신이 온 적
이 없는지라 고개를 갸웃거리던 두 사람은 몇 번 이야기를 숙덕거리더니 말했다.
?사신이라면 왜 얼음성으로 불법 침입한 거지??
파드는 믿지 못하겠다는 투로 말하고는 옆에 있는 종을 치기 시작했다.
?저 종이 뭐야??
로노와르가 두 사람이 신들린 듯이 종을 치는 것을 보며 묻자 루드웨어는 대충 상황을 알
수 있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음, 아마 예상컨대 불법 침입자가 나타났다는 소리가 아닐까 싶다.?
?우리가??
?뭐, 남의 성에 허락도 안 받고 들어왔으니 불법 침입자가 아닐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긴 도망가야지. 슬립!?
루드웨어가 주문을 외우자 주위에 초록색의 안개가 만들어지더니 루드웨어 일행을 향해 창
을 뻗고 있던 파드들이 잠들어 버렸다.
?늦었어요. 이미 병사들이 몰려오고 있다고요.?
성 밑을 바라보던 아이샤의 말에 루드웨어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뭘 걱정하시나. 우리에겐 필살의 기술인 디멘전 패스가 있지 않나.?
루드웨어는 입에서 그 말이 나옴과 동시에 로노와르와 아이샤의 통한의 주먹 세례를 받아야
했다.
?뭔가 빠져나올 방법이 없나??
로노와르가 올라오고 있는 병사들을 보며 말하자 아이샤는 한참을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한바탕 싸워야 할 것 같은데요.?
?어쩔 수 없군.?
로노와르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뭐야??
아이샤가 묻자 루드웨어는 간만에 로노와르가 주문을 외운다는 것과 드디어 로노와르의 활
약이 나타난다는 데에 남편 예정인으로서 상당한 만족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폴리모프를 푸는 거야. 아름다운 드래곤의 곡선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지. 후후.?
말이 끝남과 동시에 로노와르의 몸은 섬광과 함께 커지기 시작하더니 드래곤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갔다.
성벽 밑의 병사들은 불법 침입자가 나타났다는 종이 울리자 소리가 난 쪽으로 모여들고 있
었는데, 난데없이 드래곤 모습이 보이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드래곤이다!!?
드래곤이란 거대 생명체에게 병사들이 가지고 있는 창 같은 것이 통할 리가 없었고, 드래곤
을 상대하기에는 힘이 약한 많은 병사들은 방해만 될 뿐이었다.
로노와르는 드래곤의 무기 중 하나인 드래곤 피어를 내질렀고, 인간에게 극한의 공포감을
안겨다 주는 드래곤 피어의 공격을 받은 얼음성의 병사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떨기 시
작했다.
?멍청한 녀석들, 보아하니 헤츨링 같은데 저딴 것의 피어에 패닉 상태에 빠져 버리다니. 북
극령의 병사로서 한심스러운 노릇이군.?
엄청난 목소리.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식으로 그는 말하고 있지만, 놀랍게도 그것은 드래곤
피어를 압도하는 힘이 서려 있었기에 드래곤 피어에 의해 패닉 상태에 빠진 병사들도 정신
을 차릴 수 있었다.
?와우! 꽤 하는 놈이 나타났는데??
루드웨어는 드래곤 피어로 패닉 상태로 빠져버린 병사들을 깨운 자의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수준이 높은 전사들이 사용하고 있는 음성으로 내뿜을 수 있는 마나의 일종
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아군에게 사기를 높여줄 수도 있었다.
?날 우습게 보는군!?
물론 병사들 중 그가 헤츨링이라고 무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괜한 자격지심에 빠진
로노와르는 혼자 열내며 자신이 헤츨링이라고 우습게 보는 것이라 생각하고는 화가 났는지
숨을 삼키며 브레스를 내뿜었다. 그린 드래곤의 액시드브레스는 강렬한 독을 내포하고 있어
브레스에 당한 자들은 그 자리에서 녹아 없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로노와르가 노린 자의 곁에는 브레스가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마나를 발산해서 방어벽을 만든 것이로군.?
그는 브레스의 독기가 다가오자 몸에 있는 기를 발산시켜 독기가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것
이었다.
?그깟 헤츨링의 브레스가 나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고 생각했나! 얼음성의 경비대장 사가
트를 우습게 보지 말아라!?
그 말에 루드웨어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는데, 기를 발산시켜 브레스를 막는 정도의 실력을
가진 이가 기껏해야 경비대장이었다는 것에 놀란 것이었다.
?고작 경비대장의 실력이 이 정도면 크샤스의 기사들을 상대하려면 상당히 어렵겠는걸.?
루드웨어는 새삼 얼음성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더 놀란 것은 로노와르였는데,
자신의 브레스가 이렇게 약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젠장! 프로란스 할머니 정도의 브레스라면 이 성 전체를 녹여 버렸을 텐데!?
헤츨링치곤 충분히 강한 브레스였지만 새삼 에이션트 급인 프로란스의 힘이 부럽게 생각되
는 로노와르였다.
아무튼 별것도 아닌 걸로 시작된 싸움은 점점 더 치열해져 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