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67 Episode 2-18 일상 =========================================================================
황금빛으로 조각난 해변위에서 이브의 몸이 여러 개로 나뉘어졌다.
[대천사의 영혼이 당신의 마력을 저지합니다.]
수백 개로 불어나던 이브의 몸이 멈춰지며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그녀가 양손을 들어 위쪽을 막았다. 황금망치가 머리위로 내려쳐지고 있었다.
거대한 굉음과 함께 물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또 한 번의 백사장을 만들어냈다. 비틀거리며 공격을 받은 이브가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칸나를 밀쳐냈다.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이브가 말했다.
“또 한 번 반복될 뿐......”
금빛 무기를 들고 쇄도해 들어오는 흰머리 여인을 보며 그녀가 손을 뻗어 땅을 짚었다.
“잘 가.”
[블루문 시스템 작동. 최종 안전시스템 작동. 범위 내 모든 이들에게 작동합니다.]
망치가 그녀의 머리에 떨어지기 직전.
플레이어와 헌터들이 차고 있는 금속 팔찌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몰려오던 파도가 멈추고
소리치던 김철수의 모습도 굳어버리고
세상이 한 폭의 그림이 된 듯 그대로 정지해버렸다.
Episode 2-18
일상.
이어진 노란 가로등 불빛을 따라 고급 승용차가 금빛 도로를 달렸다. 어두운 밤거리를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사람들을 차 뒷좌석에 탄 채 흔들리는 눈동자로 바라보는 여자가 있었다.
운전을 하던 백발의 신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결혼은 양 가문 모두에게 축복입니다. 쇼코 아가씨.”
“......”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쇼코는 천천히 흘러가는 창밖의 사람들을 바라봤다.
“아직도 검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십니까?”
“......할아버지가 들고 있던 그 검. 멋있던걸.”
“그룹을 이끌 공부를 먼저 하시고 나중에 취미생활로 어떠신가요?”
“...그 검 이름 뭐라고 했지?”
금빛 가로등이 계속해서 그녀의 눈동자를 스쳐 지나갔다.
“무라마사 말입니까... 아가씨. 죄송하지만...”
“알아. 여자는 한 번도 계승받은 적이 없다며.”
단 하룻밤의 만남이었을 뿐이었다. 귀검이라 불리는 무기를 휘두르는 검사의 모습을 단 한번 봤을 뿐이었다.
“많은 분들이 아가씨께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강한 마음 먹으셔야합니다.”
“......알아.”
몇 시간을 공들여 받은 화장과 머리.
쇼코는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예쁜 선물로 팔려가는 거 같네.’
하늘에 걸린 초승달이 예전에 봤던 검의 모습으로 보였다.
‘안되겠지. 재능이 없을 수도 있고. 배운다고 시간 허비도 할 것이고...또....’
검술을 배우면 안 되는 이유에대해서 계속 생각했다.
‘그룹 경영자가 검술대련에서 놔 뒹구는 모습은 영 아니겠지...... 거긴 남자 세계이기도 하고...’
한숨을 쉬며 쇼코는 창밖에서 눈을 거두었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자.
눈을 감아 버리자.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던 또 다른 쇼코가 그녀에게 물었다.
안될 게 뭐야?
‘바보야. 지금 사람들이 나한테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니야.’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살아야 해?
‘그런 건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야지 누가 저런 모습의 나를 인정 해 주겠어? 성공한 삶을 살아야지.’
인정받아야만 성공한 삶이야?
‘정말......’
눈을 뜨자 한 두 개씩 떨어지는 눈송이가 보였다. 창문에 붙은 눈송이가 차의 따뜻한 열기에 녹아내리며 물방울이 되어 흘러내렸다.
검도 복장을 하고 신호등을 건너는 아이가 보였다. 소중한 듯 검은색 죽도주머니를 품에 품은 채 즐겁게 뛰어가는 모습이었다.
“...아가씨?”
“...나도 검술에 재능이 있지 않을까?”
백발의 신사가 부드럽게 핸들을 돌리자 신호등을 뛰어가는 아이의 모습이 쇼코의 눈앞에서 사라져갔다.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지금 중요한 일은 아니잖습니까. 이번 합병이 성사되면 일본 최대의 그룹이 만들어 질 것입니다.”
“...응. 그렇지.”
“외람된 말씀이지만... 약혼자 분께서는 조신한 여자 좋아하십니다. 검술은 조금......”
“...알아.”
맞아.
난 아무런 재능도 없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처럼 잘 할 자신도 없어.
잊자.
다른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자.
쇼코는 눈을 감았다.
예전에 봤던 검이 사라질 때까지 눈을 감았다.
안전하고 무난한 인생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잊어야 했다.
***
유리로 이어진 고층빌딩의 사무실에서 넥타이를 맨 상사가 서류철을 내려놓았다. 책상위에 쌓인 서류철 앞에 단아한 여자가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좋아. 한나 씨. 이렇게만 해. 신입답지 않게 좋아.”
“......”
“뭐해? 다음 철거지역 밀어버릴 사람들 연락해.”
“......”
한숨을 쉰 상사가 넥타이를 약간 느슨하게 하고는 낮은 어조로 말했다.
“이봐요. 한나 씨. 일도 잘하면서 왜 그래. 우리가 뭐 불법적인 일 해요? 합법적으로 무단 점유한 사람들 법원에서 판결 받아서 법. 대. 로 철거하고 사람들 쫒아내고 그러거는거지. 오히려 억지로 안나가는 그 사람들이 이상한거지. 맞아요 아니에요?”
언짢은 표정이 한나를 바라봤다.
“알았으면 가서 일 봐요.”
“...알겠습니다.”
짧은 스커트를 조심스럽게 가리며 한나가 자신의 자리로 가 앉았다.
유리로 된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이지스함 프라모델이 그녀를 바라봤다.
“한나 씨 그런 거 좋아해요?”
사원 한명이 지나가며 물었다.
“그런 거 좋아하면 아쉽겠네요. 남자로 태어났으면 해군사관학교 지원하셨으면 됐을 텐데. 성적도 좋으셨을 거 같은데.”
“아...네.”
이곳저곳에서 회의하는 소리가 한나를 압박했다. 컴퓨터 자판소리들이 빨리 일하라고 재촉했다.
일자로 늘어진 천장의 형광등이, 자리마다 설치된 칸막이가, 끊임없이 울리는 전화기 소리가
빨리 일하라고 재촉했다.
서류를 적어 내려가는 한나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올라왔다.
여자 군인이라니 선 볼 때 인식 별로 안 좋겠지.
체력테스트 같은 거 할 텐데 난 윗몸일으키기도 못하잖아.
아무래도 차별 심하겠지?
나하고 안 맞을 거야. 태어날 때부터 체력 좋은 애들이 선택해야 하는 직업.
한나가 손을 뻗어 서랍을 열었다.
책상위에 있던 이지스함을 서랍에 넣고는 바로 닫았다.
누군가가 자신의 꿈을 본다는 게 부끄러웠다.
이루지도 못할 거. 잊자.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산다는 건 철부지 어린아이들의 생각일 뿐이야.
그렇게 한나는 모니터를 바라보며 업무를 시작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 일상에 묻힌 채. 키보드를 두드려갔다.
서랍속의 이지스함을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으려 노력하며
계속해서 키보드를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