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65 비수(匕首) =========================================================================
사람들이 해결법을 떠올리지 못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그들이 너무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너무 똑똑하기 때문에 효율적이지 못한 길은 자동적으로 외면하는 것이다.
솟아오르는 물보라를 바라보면서 김철수는 이브의 말을 반복적으로 떠올렸다.
-하위의 존재는 상위의 존재를 죽일 수 없어.
-그것이 이 우주의 법칙이야.
칸나의 주먹이 이브의 파란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김철수가 생각에 빠지는 속도만큼 세상이 느려졌다.
이길 수 있는 방법.
방법은 언제나 있다고 시현은 이야기 했다.
다만 생각해내지 못할 뿐.
-하위 존재는 상위 존재를...
생각의 방향을 바꾸자 무수한 선택지가 별처럼 떠올라왔다.
터무니없기에 애초에 배제해버린 선택지들.
천사에 의해 멸망되어버린 지구.
천사가 있다면 그 상위의 존재도 있을 것이었다.
그래 예를 들면
‘신.. 이라던가.’
터무니없기에 뇌가 자동적으로 지워버리는 선택지. 똑똑할수록 어처구니없다며 지워버리는 선택지.
이 우주에서 가장 상위의 존재인 신을 불러온다.
노을을 구경하며 느긋하게 물장구를 치는 이브의 모습이 보였다.
천사나 신을 불러올 수 있다면
그녀를 이길 수 있을 것이었다.
무슨 수로?
무전기가 지직 거리며 구조무전을 계속해서 보내오고 있었다.
(지원군이 필요합니다! 동쪽 상공에 새로운 몬스터 부대!)
(사라드에서 올 수 있는 대부분의 능력자들은 이미.. 아악!!)
천사나 신과 가장 가까운 존재는?
그 존재 중 지금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자는?
현재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현재의 사고수준으로는 해쳐나갈 수 없다. 눈을 감은 김철수의 머릿속에서 여러 사람의 영혼좌표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 중 그가 찾던 별이 바로 옆에 와있었다.
신관.
신과 이어진 존재 중 인간이 만날 수 있는 존재.
그 중 가장 상위의 직업군.
대신관.
대신관 이그네스.
미친 생각이라는 판단이 들었지만
김철수는 갈증에 허덕이는 사막 한 가운데서 작은 샘물줄기 하나를 발견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김철수가 착용하고 있는 무선 마이크에 대고 소리쳤다.
(이그네스 씨! 제 말 들립니까?!)
물장구를 치던 이브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녀가 고개를 들리며 김철수를 바라봤다.
“그게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
이그네스는 온몸이 금방이라도 찌그러진 캔이 되어버릴 거 같은 느낌을 받고 있었다. 아무리 그녀라지만 지금은 너무나 많은 신성력을 무리해서 억지로 짜내는 중이었다. 마른 수건을 계속해서 억지로 비트는 행위. 근육이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뒤틀리고 압력에 의해 뼈가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위태로웠다.
‘피드님.’
철없던 어린 시절.
이그네스는 마을 사람들의 죽음을 눈앞에서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다.
동생을 찾으려 찢어지게 내던 음성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한이 되어 마음속 한 켠에 머물러 있었다.
과거의 불타던 마을과 지금의 지옥도가 겹쳐져 보였다.
그때와 다른 점은 하나였다.
어린 소녀 네스는 아무것도 바꿀 힘이 없었지만
대신관 이그네스는 미래를 바꿀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의 신성력은 과거에 대한 속죄이자
치유되지 않는 아픔의 대가였다.
[3221개의 초능력. 일제히 방출 중.]
능력자들이 피로에 대한 걱정 없이 계속해서 초능력을 쏟아냈다. 땅이 하늘이 되고 명계와 서울이 겹쳐졌다 풀려나고 거대한 마그마가 솟아오르고 바람의 칼날이 빌딩과 몬스터를 찢고 지나갔다.
수많은 능력자들이 무릎 꿇고 기도중인 이그네스를 둘러쌓았다.
[차원관문 개방. 55421건의 몬스터 이동 요청 승인.]
무한이 밀려들어오는 몬스터와
이그네스의 무한한 회복력의 싸움.
그녀의 입에서 베어 나온 핏물이 바닥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피드시여. 만약 이들을 전부 살리고 제 한 몸이 부서진다고 하면... 그리 하겠습니다.’
수녀복 전체에 핏물이 올라왔다. 그럼에도 그녀의 신성력은 전혀 변함없이 능력자들을 감싸 안고 있었다.
‘신이시여...’
입술을 타고 핏물이 흘러내릴 때 누군가가 그녀의 등에 손을 댔다.
“그대의 기도가 우리의 희망이 되길.”
또 다른 신성력을 지닌 능력자가 자신의 신성력을 뽑아 이그네스에게 전해주었다. 따스한 느낌이 손에서 등으로 전달되어 왔다.
사제복을 입은 사람들.
수녀복을 입은 사람들.
다른 복장을 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손에 손을 맞잡고 이그네스에게 신성력을 전달해왔다. 강대한 신성력이 이그네스의 두 손에 모아지며 모든 능력자의 어깨위에 신의 가호를 내려주었다.
무전기가 바쁘게 계속해서 울렸다.
(기적입니다! 모든 부상자가 완전히 회복되고 있습니다!)
기도를 하고 있는 이그네스의 발아래 핏물이 웅덩이가 되어 고여 갔다. 바꿀 수 없는 과거에 대한 기억. 파편화된 기억들이 그녀의 몸이 부서지는 걸 막아주고 있었다.
[차원관문 개방. 55421건의 몬스터 이동 요청 승인.]
거대한 몬스터에 의해 휘둘러진 전철이 능력자들을 때리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갔다.
끝없는 줄다리기.
(이그네스 씨! 제 말 들립니까?!)
주변에서 들려온 무전에 그녀는 대답할 수 없었다. 집중력이 조금이라도 흩어지면 흘러들어오는 강대한 신성력에 의해 온 몸이 찢겨나갈 것이었다.
(이그네스 씨! 이브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김철수의 급한 음성에도 이그네스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가 사라지는 순간 능력자들 전체가 죽어나가기 시작할 것이었다.
김철수를 도와주면서 동시에 이들을 살릴 수는 없었다.
(이그네스 씨!)
‘피드시여, 저에게 길을 알려 주시옵소서.’
두 손을 타고 흘러내리는 핏물이 바닥으로 이어졌다. 끝없이 이어지는 폭발들은 이미 그녀의 청각마저 흐릿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의 복잡한 무전 소리가 폭음과 함께 들려왔다.
(이그네스씨가 이곳에서 이탈하는 순간 순식간에 무너질 겁니다!)
(멍청아! 이브를 잡지 못하면 어차피 안 끝나!)
(플레이어 새끼들아 똑바로 안하냐!! 시발 동쪽 뚫린다고!!)
(시이이발 어디서 헌터새끼가! 우린 수많은 회색방을 넘어온 플레이어들이라고!! 못 버틸 거 같냐!!)
(그녀를 디펜더스 쪽으로 보내야 해! 이 시발 놈들아!! 대책 좀 내놔!! 아 내 팔!!!)
남산타워가 쓰러지며 몬스터와 능력자들을 머리 위를 덮쳤다.
도시에 설치된 가스 배관들이 연속적으로 폭발하며 불바다를 유지시켰다.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을 방패로 삼은 채 마법사가 공격마법을 쏟아냈다.
(이그네스 씨! 이브에게 물리나 마법적인 공격은 통하지 않습니다..!)
(그녀를 이기려면 사람이 아닌 대천사나 신을 강림시켜야 합니다!!)
대공포를 쏘고 있던 능력자 한명이 무전기에 대고 소리쳤다.
(뭔 미친 소리야!! 이 시발 말이 되는 주문을 해! 으아아악!)
‘대천사 피드시여..’
(무전 친 새끼 누구야? 돌았어?! 이 급한 상황에 전도질이냐?!)
이그네스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신들의 전쟁이후 인간뿐만 아니라 악마들도 대천사 피드를 찾을 수 없었다.
일단은 버텨야 했다.
두 손을 맞잡은 채 그녀는 계속해서 기도했다.
***
(이그네스 씨는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무전을 받아든 김철수는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정녕 방법은 없는 것인가?
“왜? 그 터무니없는 계획 잘 안되나 봐?”
푸른 머리의 소녀는 기지개를 펴며 조롱했다. 공격을 멈춘 칸나가 이브의 옆에 앉아 격한 호흡을 토해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케이시가 자신의 작은 두 손을 쳐다봤다. 한 번 능력을 개방한 그녀는 내일까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동료들에게 거치적거리지 않게 멀리 서 있는 것이 최선이었다.
생각해 내.
김철수는 계속해서 되뇌었다.
생각해 내. 멍청한 도마뱀아.
(새로운 디펜더스 요원! 그쪽으로 이동합니다!)
존스?
공간 이동 능력자의 손을 잡은 두 명의 여자가 김철수의 눈앞에 내려섰다.
처음 보는 얼굴에 김철수가 물었다.
“누구..?”
여자 한명이 종이를 꺼내들어 펼쳐보였다.
“은혜 갚으러 왔습니다!”
종이에 쓰인 익숙한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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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fender's 네라.
Defender's 피리아.
-추천인. 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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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라.
피리아.
시현이 자신의 목숨과 바꿔 지킨 새로운 디펜더스 요원.
불가능한데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
시현의 필체를 보는 순간 김철수는 그런 마음을 느꼈다.
[네라 님이 인벤토리 링크를 요청합니다.]
시현이 가지고 있던 수많은 무기를 그대로 전해 받은 네라였다. 핵미사일을 비롯한 수많은 무기의 목록이 김철수의 눈앞에 펼쳐졌다.
목록을 읽어 내려가던 김철수의 눈동자가 커졌다.
잊고 있던 무언가가 떠올랐다.
시현이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무기.
황금의 황제가 너에게 모든 것을 걸겠다며
그에게 건네주었던 무기.
‘맞아..!’
멈추었던 희망의 시계바늘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