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63 비수(匕首) =========================================================================
수천 개의 무기.
해일처럼 밀려들어오는 능력자들.
계속해서 하늘에 떠오르는 전설적인 아이템들.
자신을 조준한 수많은 무기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브는 테이블에 앉아 차를 홀짝거렸다. 포위당한 것은 그녀일 텐데 오히려 라이플을 그녀에 머리에 조준하고 있는 저격수들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찻잔에서 입을 뗀 이브가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모든 인간들에 귀에 들어오는 섬뜩한 물음이었다.
“너희들 말이야... 진짜로 이길 거라고 생각 하는 거야?”
권총을 잡은 철림의 손이 계속해서 덜덜덜 떨리는 모습이 보였다.
“생각을 좀 더 해보는 게 어때?”
“......”
“멸망해버릴 너희들에게 살 곳도 주고, 능력이 있다면 상상 속에서만 이룰 수 있는 무한한 생명도 가능하게 해 줬어. 수명코인을 만들어줬지. 뛰어난 사람은 더 오래 살아서 종족을 발전시킬 수 있고 쓸모없는 사람은 언제든 처리할 수 있게 해 줬어.”
철컥. 철림이 마지막 권총을 장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 맞춰 수천의 무기의 장전이 끝난 채 그녀를 겨누었다.
“너희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거짓으로 사회를 유지하지만 사실은 서로를 차별하고 무의식적으로 등급을 나누고 뛰어난 사람과 사귀려 하잖아. 도태된 사람은 격리하거나 무리에서 배제시켜 버리려고 노력하고. 안 그래?”
어디선가 인간은 그렇게 차가운 존재가 아니라는 음성이 터져 나왔다.
이브가 비웃음을 띈 채 찻잔을 들어 향을 음미했다.
“뛰어난 사람이 살아남아 인간전체에 도움이 되고 뒤처지고 쓸모없어진 사람이 없어지는 것이 뭐가 나빠?”
철림이 그녀의 말을 잘라 들어갔다.
“시간을 벌려는 것입니까? 이브?”
어이없다는 웃음이 그녀로부터 터져 나왔다.
“너희를 상대로, 시간? 아니, 오히려 너희를 위한 배려를 하고 있었어. 내일부터는 회색방의 천장을 볼 수 없게 될 테니까.”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의 끈이 도화선이 되어 누군가가 그녀를 향해 탄환을 발사한 순간. 수천 개의 무기가 동시에 불을 뿜었다.
끝도 없이 일어나는 검은 연기와 폭음 안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들이 좋아하는 행성에서 싸워볼까?”
[공간 변형 중. 기억 코어 재생. AAAAAAAA 구역. 기록된 지구와 동화 중.]
철림이 밟고 있던 기계의 땅은 사라지고 고층빌딩이 들어선 익숙한 서울 거리가 그의 발에 밟혀 있었다.
[차원관문 개방. 231133 건의 몬스터 이동 요청 승인.]
하늘이 열리며 끝이 보이지 않는 몬스터들이 지상을 향해 낙하해 오는 모습이 보였다.
“대공 능력자들은 몬스터에 대응하고 추적 능력자들은 이브의 위치를 파악할 것!”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수천마리의 드래곤이 일제히 입을 벌렸다. 동시에 수천 개의 방어 아이템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어디론가 피한다는 개념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눈에 보이는 모든곳에 드래곤 브레스가 쏟아져왔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오늘의 전투가 모든 인간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었다.
“이브의 위치 물질계에서 파악 불가! 전자계나 관념계로 스며든 것으로 보입니다!”
대공방어막을 뚫고 몬스터들이 지상으로 낙하해 들어왔다. 오크나 해골 등의 하급 몬스터가 아니었다. 크라켄, 언데드드래곤, 데스나이트 로드. 리치 킹. 하나하나가 신화 속에서나 등장할만한 존재들이었다. 그런 존재들이 천 단위로 계속해서 낙하하고 있었다.
금색 해골관을 쓴 리치킹이 손짓하자 주변에 있던 능력자들의 피부가 순식간에 썩어 들어갔다. 숨 한번 쉬지 못할 시간에 텅 빈 해골 수백구가 바닥에 굴러 다녔다.
데스나이트 로드가 손을 들자 수천의 망자들이 지상에서 나타나 빌딩숲 사이를 장악했다.
언데드 드래곤이 날개를 한번 휘두르자 수백의 능력자들이 쓸려나갔다.
뱀파이어 로드가 피를 뿌리자 감염된 능력자들이 순식간에 핏물로 화해 기체로 변해버렸다.
불굴의 용기를 끌어올렸던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마저 죽음과 패배라는 단어가 계속해서 떠올렸다.
이브의 속삭이는 듯 한 음성이 사람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좋아. 이렇게 하자.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주변의 다른 인간들에게 데미지를 주면 나에게 대항했던 사실을 없애줄 뿐만 아니라. 그에 걸맞은 보상을 줄게. 수명. 지위. 명예. 부. 어때. 괜찮은 제안이지?”
헌터의 왕이 거대한 검으로 날아 들어오는 그리핀을 찌르며 허공에 계속해서 고함쳤다.
“그녀의 말을 듣지 마라! 전력을 분산시키려는 속셈이다! 하나가 되어야만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
그의 다독거림과는 달리 두려움과 불안감이 인간들 사이에서 퍼져나갔고 몬스터들에게 학살당하는 인간들뿐만 아니라 동료의 검에 가슴을 뚫리는 모습이 눈에 잡히기 시작했다.
“현혹되지 마! 낙하하는 적들을 막아!!”
거대한 몬스터들의 공격에 수많은 빌딩들이 무너지며 수많은 인간들이 잔해 사이로 계속해서 사라졌다.
절망이 가득한 서울의 허공을 찢고 거대한 전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전기에서 연속적인 무전음이 반복되었다.
(우주전함 세종대왕 도착! 전 포문 개방 중!)
(신 이지스 시스템 타겟 한계치까지 조준 완료! 동시 타겟 32만!)
세종대왕함의 모든 포문이 열리며 수백발의 미사일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미사일에 걸려있는 복제마법에 의해 수백발이 수천발로 수천발이 수만 발로 나뉘어지며 시야에 보이는 모든 공간을 때렸다.
몬스터의 시체가 비가 되어 서울 상공에 쏟아져내려왔다. 발포 직후 하늘을 날아다니는 몬스터들이 쉴 새 없이 세종대왕 함을 들이받기 시작했다. 한 마리 열 마리 백 마리 천 마리.
속수무책으로 쓸려가는 인간들을 보며 헌터의 왕이 검을 부여잡았다. 그의 온몸에서 어두운 기운이 뿜어져 나와 부서져있는 콘트리트 바닥에 카펫처럼 깔렸다. 양손에 잡힌 검에서 마력이 뿜어져나오며 그가 검을 횡으로 베었다.
“[일도양단(一刀兩斷)]!”
그가 휘두른 궤적을 따라 서쪽 하늘 끝에서 동쪽 하늘 끝까지 공간자체가 잘려나가며 검은색 긴 상처를 만들었다. 수천의 마물이 공간과 함께 찢겨나갔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왕의 위로 건물만한 괴물의 앞발이 떨어져 내렸다.
왕이 거대한 검을 들어 올리며 공격을 막아내었지만 그가 서있던 지역 전체가 굉음과 함께 땅속으로 박혀 들어갔다.
핏물이 되어 땅으로 떨어지는 괴물들의 숫자가 무색하게 서울상공에 계속해서 새로운 몬스터들이 나타났다. 시스템 음성이 인간들의 귓속에 절망적으로 계속해서 파고들었다.
[차원관문 개방. 231133 건의 몬스터 이동 요청 승인.]
[차원관문 개방. 745318 건의 몬스터 이동 요청 승인.]
[차원관문 개방. 923115 건의 몬스터 이동 요청 승인.]
[차원관문 개방......]
“이대로는 끝이 없습니다! 철림님!”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우를 피하던 김철수가 철림과 칸나의 손을 맞잡았다. 철림이 폭음 속에서 고함쳤다.
“그녀를 잡아야 하네 김철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전멸은 시간문제였다. 집채만 한 괴물의 앞발을 거대한 검이 뚫고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헌터의 왕이 끊임없이 소리치며 검을 휘둘렀다.
(인간의 미래를 위하여!!)
그의 외침소리가 연쇄반응이 되어 수많은 인간들이 허공에 소리치며 자신의 초능력을 계속해서 뿜어냈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하여!!)
하늘을 가로지르는 붉은 빛.
(두려움에 잠들지 않는 내일을 위해!!)
거대한 태풍이 몬스터들의 중앙을 때리고 지나갔다.
(으아아아아!)
수천 개의 초능력이 하늘에서 이리저리 엉키며 서울의 상공은 지옥이 되어있었다.
-띠링
[차원관문 개방. 657784 건의 몬스터 이동 요청 승인.]
[차원관문 개방. 448474 건의 몬스터 이동 요청 승인.]
......
전설적인 몬스터들과 수많은 회색 방을 뛰어넘었던 플레이어, 헌터들이 서로 먼지조각처럼 쓸려나갔다. 이를 악 물고 있던 김철수가 철림을 향해 소리쳤다.
“찾았습니다!”
그의 외침소리에 수십 명의 플레이어들이 서로 손을 맞잡았다. 다음 순간. 그들의 몸은 해안의 모레를 밟고 있었다.
파도가 밀려와 해변에 부딪히는 소리가 플레이어들의 마음에 고요하게 다가왔다. 푸른 머리 소녀는 낮은 바닷물에 발을 담근 채 바다 너머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이브!!”
플레이어 몇 명이 기관총을 꺼내들어 순식간에 갈겨댔다. 드르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발사된 총탄은 이브의 몸 근처 허공에서 일제히 멈춰 섰다.
“예의 없긴.”
그녀의 말과 함께 방향이 바뀐 총탄이 총을 발사했던 플레이어의 온몸에 꽂혔다. 몇몇 플레이어들이 대검을 뽑아든 채 괴성을 지르며 그녀에게 달려갔다. 이브가 살며시 손을 뻗자 손가락 끝에서부터 번개가 뿜어져 나와 플레이어들을 태우고 지나갔다.
파도가 밀려오는 고요한 소리가 공간을 감쌌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꾸는 게 어때? 원한다면 시현이라는 아이도 다시 살려줄 수 있는데.”
“당신을 물리치겠습니다 이브.”
발로 물장난을 몇 번 친 그녀가 한숨을 쉬며 한 발 한 발 철림에게 다가왔다.
“법칙 1. 하위 존재는 상위 존재를 죽일 수 없다.”
그녀가 양팔을 벌린 채 철림의 앞에 섰다.
“원하는 대로 해 봐.”
괴성소리와 함께
플레이어들이 겨누어 놓은 수십 개의 총구가 순간적으로 불을 뿜었다. 사격은 수 분간 계속되었다. 쏘고 쏘고 또 쏘고.
총구가 뜨거워져 연기가 계속해서 뿜어져 나올 때까지 플레이어들은 사격을 멈추지 않았다.
가격이 끝나고 다시 해변에 밀려오는 파도소리가 가득해졌을 때 이브는 처음과 똑같은 모습으로 양팔을 벌린 채 해변에 서 있는 채였다.
수평선을 바라보며 그녀는 눈을 감은 채 밀려오는 파도의 느낌을 즐기고 있었다.
“게임속 등장인물이 게이머를 죽일 수 없고, 영화 속 인물이 아무리 강해도 영화관의 관객을 죽일 수 없어. 너희의 발버둥이란 그런 것.”
소금기 가득한 바닷바람과 함께 최후의 통첩이 전해져왔다.
“그곳에 서서 인간의 멸망을 보고 있으라고, 다 너희들이 초래한 결과일 테니까.”
괴성과 함께 남아있던 플레이어들이 자신의 능력을 개방한 채 이브에게 뛰어들었다.
평온한 표정의 이브는 그저 수평선의 끝을 바라보며 파도소리를 듣고 있을 뿐이었다.
작은 입술이 조소하듯 미묘하게 열렸다.
“꿈이라는 불꽃에 현혹되어 스스로 뛰어드는 불나방들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