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탈출-362화 (362/373)

00362  비수(匕首)  =========================================================================

피 향기가 진득하게 칸나의 피부로 달라붙었다.

수없이 단련해왔던 칸나의 무술들은 눈 깜짝하는 사이에 간파당했고 강력한 힘은 그의 손 안에서 안개처럼 흩어져버렸다.

“겨우 이 정도인가 플레이어?"

그는 다른 자를 찾았다.

"...프린세스 디펜더는 어디 있지?”

왕이 물은 이름이 그리움이 되어 칸나의 가슴에 흘러들어왔다. 따뜻함과 그리움 미안함 감정들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복잡하게 엉켜갔다.

프린세스 디펜더. 헌터들에게는 증오의 이름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추억이 깃든 이름이었다.

슬픈 웃음이 그녀의 입에 걸렸다.

“너 박살내고 만나러 가야지.”

퉤. 하고 붉은 침을 뱉어낸 칸나가 입가에 피를 손등으로 훔치고는 햄버거를 하나 꺼내 베어 물었다. 상처가 빠르게 아물어갔다.

“쉽게 말하는군. 플레이어.”

왕이 거대한 검을 허공에 몇 바퀴 돌리고는 앞으로 내밀어 칸나를 겨누었다.

“슬슬 끝내주지.”

검에 겨누어진 칸나는 우두커니 검신의 끝을 바라봤다.

손에 쥐어진 빈 햄버거 종이가 어그러져 손안을 슬프게 간질였다.

익숙한 장면들이 그녀의 눈앞에 스쳐지나갔다.

처음 그녀를 이해해주었던 아케넨인 파논.

그는 칸나를 지켜 주었지만. 칸나는 그를 지켜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시현.

좋은 사람은 언제나 아무 대가 없이 그녀에게 무언가를 주고

마음을 연 그녀가 무언가를 돌려주고자 할 때면 어느새 기억 속에서만 만날 수 있게 흐려져 있었다.

누군가 예전에 물었다면 그녀는 스스로를 이렇게 말했다.

아케넨의 제왕. 칸나.

겨누어진 검을 바라보며 두 눈을 감은 그녀가 입술을 열었다.

“난......”

야생의 전투법이 아닌 무술자세를 취하며 그녀가 말했다.

“난 디펜더스의 칸나. 어떤 적에게도 지지 않아.”

왕이 검을 들어 올렸다고 생각한 순간 칸나도 땅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두 명의 사이가 좁혀져갔다. 왕의 눈에 같은 패턴으로 달려오는 칸나가 보였다. 너무나 익숙한 움직임에 그의 손에 들린 검이 자연스럽게 따라 나갔다.

어리석은 여자라는 생각이 왕의 머릿속에 스쳐지나가는 순간 칸나가 외치는 단어가 왕의 귀를 통과해 지나갔다.

“물 생성!”

칸나의 초능력.

허공에서 나타난 거대한 물 덩어리가 왕의 안면을 강타했다.

“큭. 잔재주를...!”

수압으로 눈에 큰 충격을 받은 왕이 반사적으로 거대한 검을 횡으로 휘둘렀지만 손에 아무런 느낌이 전해지지 않았다. 섬뜩한 느낌이 그의 척추를 타고 찌르르 흘렀다. 왕의 등 뒤로 넘어간 칸나의 팔다리가 가시덩굴처럼 왕의 온몸을 감았다.

자신보다 힘과 체격이 큰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무술.

관절기.

왕을 지켜주던 튼튼한 갑주가 오히려 왕의 뼈와 관절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아악! 가속!”

묶인 양 팔은 검을 들어 올릴 수 없었고 다리관절에 걸려있는 칸나의 발은 왕이 대지에 서 있을 수 없게 했다.

검을 놓친 왕이 칸나와 한 덩어리가 되어 바닥을 뒹굴었다. 이를 악물며 잡은 온 몸에 힘을 주는 칸나의 코에서 핏물이 동시에 줄줄 흘러나왔다.

“으아아아아악!!!”

온몸에 전해지는 비틀려지는 감각에 왕이 계속해서 비명 질렀다.

칸나의 앙 다문 이 사이에서 핏물이 배어나온다고 생각한 순간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왕의 양팔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자지러지는 비명소리와 함께 왕의 투구가 벗겨져 바닥을 굴렀다. 어느새 칸나의 양 팔이 왕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칸나의 입에서 나온 괴성과 왕의 입에서 나온 고통 섞인 음성이 뒤섞인 채 한 덩어리가 된 그들이 계속해서 바닥을 굴렀다.

이리 구르고 저리 굴러도 칸나의 양 팔을 뜯어낼 수 없었다.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왕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봤다.

초크를 푼 칸나가 멍한 눈으로 거친 숨을 쉬었다. 입 안 잔뜩 고여 있는 핏물에 콜록콜록 몇 번 기침했다. 자신의 몸 위에 있는 왕의 몸을 옆으로 밀어낸 뒤 대자로 뻗어서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배고파.”

회색 천장이 왕의 눈에 들어왔다. 뽀드득 뽀드득 두꺼운 초콜릿 갉아 먹는 소리가 들렸다. 부서진 양 팔의 통증에 움직일 수 없었다.

‘...내가 진 것인가...’

그가 피식하고 웃었다. 전투에는 패했지만 잡을 수 없던 미래를 본 듯한 기분이 보였다. 철림이라는 자의 자신감에는 이유가 있었다.

“[인벤토리 오픈].”

A급 아이템인 천사의 깃털이 그의 양팔에 깃들었다. 부서진 뼈가 빠르게 치료되며 통증이 잦아들어갔다. 우걱우걱 계속해서 무언가를 먹고 있는 칸나를 향해 그가 말했다.

“일이 끝나면 헌터가 되어 보지 않겠나?”

입가에 묻은 초콜릿을 닦으며 칸나가 대답했다.

“그거 되면 먹을 거 많이 줘?”

공간단절의 능력이 해제되며 칸나와 왕의 모습이 능력자들의 눈앞에 드러났다. 수많은 플레이어들과 헌터들의 눈동자가 일제히 쏠렸다. 철림이 꿀꺽 침을 삼켰다.

쏟아지는 비 아래에서 헌터들의 왕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와 철림의 앞에 섰다. 그가 오른손을 내밀어왔다.

“네 제안에 응하지. 은폐 능력자를 모두 데려와라.”

회색방의 시스템 이브는 철림에게 거절하지 못할 제안을 해 왔었다. 헌터들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왕을 죽이면 플레이어들이 살 수 있는 행성을 만들어 주겠다고.

그에 따르면 철림은 모든 플레이어를 모아 그와 전쟁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그러지 않았다.

왕과 플레이어들의 앞으로 수많은 은폐 능력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회색방의 시스템을 피할 수 있는 이레귤러들이었다.

철림이 김철수를 바라봤다.

“준비되었나?”

고개를 끄덕인 김철수가 은폐능력자들과 손을 이어 잡았다. 그들의 맞잡은 손에 공간이동 능력자들의 손이 더해졌다.

김철수가 능력을 발현시켰다.

“[좌표추적]!”

한 번 만난 상대의 영혼의 본체를 추적하는 능력.

그의 머릿속에 수많은 영혼들의 좌표가 스쳐지나갔다. 이윽고 가장 강력한 방문자의 숨겨진  좌표가 찬란하게 빛났다.

김철수가 바라보는 공간좌표를 향해 수많은 능력자들이 동시에 능력을 발현시켰다.

“[공간이동]!”

왕이 철림에게 받은 종이.

그곳의 마지막 줄에 적혀있는 문장이 바람에 하늘거렸다.

(후대의 아이들에게 우리와 같은 비극을 경험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사라드에서 전투를 대기하던 모든 병력들의 무전으로 이동해야할 공간좌표가 전송되어 왔다.

다급한 무전이 사라드 전체에 계속 울렸다.

(작전명 비수. 발동되었습니다. 전투 가능한 모든 대원. 지정된 장소에서 공간 이동 능력자와 합류. 가능한 모든 장비 동원 작전지역으로 이동할 것.)

플레이어들뿐만 아니라 헌터들의 무전에서도 특정 좌표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사라드와 헌터들의 모든 능력자들이 끊임없이 모습을 감추었다.

작전명 비수.

거대한 기계장치가 가득한 세상의 안에 수천 명의 헌터와 플레이어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탁자에 앉아 차를 마시던 파란머리의 소녀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앉아 그들을 바라봤다.

“...제정신이야?”

허상인 이브의 더미들이 아닌 진짜 이브의 본체가 거주하는 방.

아무도 알 리 없는 회색방의 제어 시스템 이브의 공간좌표였지만

김철수가 그녀를 만나는 작은 방심의 순간.

그는 그녀의 본체 위치를 알아내게 되었다.

“그래서 철림, 어쩔 생각?”

찻잔을 내려놓은 이브가 플레이들 사이에 서 있는 철림을 바라봤다. 권총 여러 개의 탄환을 장전하며 철림이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

“당신을 제압하고...

인간이 회색 방을 손에 넣겠습니다. 이브.”

여섯 면을 가진 주사위를 던져

숫자 하나를 맞추는 도박은 1/6의 확률을 가진다.

나약한 인간이 회색방 시스템을 이기는 목숨을 건 도박은

얼마의 확률을 가질 것인가?

낮은 확률에 목숨을 걸고 도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어떤 이유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여기.

그 주사위를 기꺼이 던진 수많은 플레이어와 헌터들이

끝도 없이 이브의 방 안으로 이동해오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