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58 비수(匕首) =========================================================================
불붙은 도심의 나무들이 이리저리 불을 옮겼다.
사라드 외곽에 떨어진 검은 태양은 거대한 크레이터 자국을 만들었다. 작은 소녀가 남을 지키기 위해 펼친 필살의 일격은 그녀가 원했던 것처럼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녀의 영혼의 한 조각도, 적이었던 헌터들의 시체조차도.
아무런 존재도 남기지 않았음에도 그녀의 화염은 누군가의 눈물에 옮겨 붙었다. 사라드의 상공을 날아가는 김철수의 커다란 눈동자에서 소리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등에 태운 케이시가 알지 못하도록 그는 그렇게 소리 없이 울었다.
그가 허공에 포효를 내뱉었다. 마음 한편이 계속 뜨겁게 달아올랐다. 불꽃이 김철수의 마음에 옮겨 붙은 것일지도 몰랐다.
또 다른 형태의 불꽃을 맞이한 자들도 있었다.
두려움의 불꽃.
헌터들이 공격을 멈추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옮겨 붙은 불꽃은 두려움이 되어 그들의 마음에 있던 여유로움과 승리에 대한 확신 모조리 태워버린 뒤였다.
[상대 헌터 병력, 퇴각 중.]
이미 대부분의 병력을 소진 한 헌터들이 부상병을 내버려둔 채 이곳저곳으로 사라져갔다. 전투 중이던 플레이어들이 무기를 바닥에 내려놓은 채 그 광경을 쳐다봤다. 누적된 피로가 헌터들을 추적하는 것 마저 포기하게 만들었다.
또 다른 불꽃.
세종대왕 함에서 쏟아져 나온 수많은 미사일의 불꽃이 하늘에 열려있는 마족 게이트를 때렸다. 새로 장착된 혜성3 미사일이 복제마법에 의해 수백 개로 분열되며 박쥐날개를 가진 마족들을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했다.
[마계의 문이 파괴됩니다.]
허공을 덮은 검은 구름이 사라지고 빛이 사라드에 쏟아졌다.
폐허가 된 사라드의 한 복판에서 멍 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플레이어가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이..이겼다.”
케이나의 불꽃이 그랬듯. 그의 말은 수많은 사람의 입으로 옮겨져 나갔다.
“이겼어...!”
“우리가 이겼다!!!”
“우리가 이겼어!!!”
플레이어들의 함성소리를 들으며 김철수는 계속 눈물을 흘렸다. 허공에 멈춰선 그에게, 등 뒤에 타고 있는 케이시의 음성이 들려왔다.
“김철수 오빠! 괜찮아요!?”
어떤 물음이던 실없이 대답하던 그였지만
묵묵히 입을 닫고 있을 뿐이었다.
케이시가 무엇인가를 물으려는 순간. 허공에서 철림이 나타나 김철수의 등 뒤에 내려섰다. 가슴속의 불꽃을 빨리 꺼뜨리라는 듯 철림이 말했다.
“상의 할 일이 있네.”
다시 천천히 날갯짓을 시작한 김철수가 애써 감정을 추스르며 작게 대답했다.
어떤 일입니까.
“회색방의 중앙 시스템인 이브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공공연하게 떠도는 이야기로 어느 정도 들었습니다.
“그녀가 우리와 거래를 하고 싶어 하네.”
예...?
사라드의 상공에 떠 있는 세종대왕함이 점점 가까워졌다. 김철수가 날개를 접고 전함의 위에 내려섰다. 어느새 인간으로 변한 그의 품에 케이시가 안겨있었다. 미사일 포대에서 경계를 서던 플레이어 몇 명이 김철수를 알아보고 겨눈 총을 내려놓았다.
철림은 이브와 만난 이야기를 했다.
헌터들의 왕을 죽이면 우리가 살 행성을 내어주겠다.
김철수가 철림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계약은 디펜더스가 다 죽더라도 유효한 것입니까?”
“그 부분은 당사자에게 물어봐야겠지. 이브님 듣고 계시면 대답해 주십시오.”
김철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철림이 다시 한 번 허공에 말했다.
“이브님. 이건 우리에게 중요한 사안입니다. 부디.....”
처음부터 있었다는 듯이 갑판에 장착된 대공용 기관총에 파란머리의 소녀가 삐딱하게 기대어 있었다.
“너희들이 다 죽어도 계약은 이어져.”
그녀의 등장에 김철수와 케이시가 자기도 모르게 한발자국씩 뒤로 물러났다.
“더 물을 것 있으면 빨리 묻지?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는데 말이야.”
기관총의 탄피를 하나씩 어루만지며 그녀가 허공에 말을 던졌다. 김철수가 침을 삼키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기관총 손잡이를 잡고 이리저리 움직이던 이브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난 회색방의 시스템 그 자체야. 시스템은 한번 내뱉은 룰은 어기지 않아. 그동안 많이 해봤을 텐데?”
수많은 회색방들을 넘으며 만났던 규칙들.
약속된 보상들.
“왜 우리에게 그런 제안을 거는 것입니까?”
이브가 피식 웃었다.
“난 언제나처럼 내 할 일을 할 뿐이야. 모든 방들에서 그랬듯. 이번에도 게임의 규칙을 제안하는 것. 그럼 충분히 대답이 되었겠지. 그럼. 안녕.”
그녀가 들고 있던 탄피가 자유낙하하며 갑판의 철판을 때렸다. 이브는 신기루처럼. 그렇게 사라졌다.
어벙한 표정으로 서 있는 케이나의 머리칼을 김철수가 쓰다듬었다.
“아! 오빠! 머리 망가져요!”
평소대로면 그만두었을 김철수가 그녀의 긴 뒷머리를 당겨 케이시의 얼굴을 가려버렸다.
“아! 김철수 오빠!!”
케이시가 앞이 안 보이는 상태에서 투닥거리는 순간. 그가 철림에게 쪽지 하나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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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나가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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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림이 쪽지를 품에 넣으며 헛기침을 했다.
갑판의 반대쪽에서 이겼다는 승무원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김철수 주변에 있던 해치가 열리며 몇 명 승무원들이 올라오는 모습이보였다. 그들이 일자로 도열하며 철림과 김철수를 에워쌌다.
“함장님 오십니다.”
우주전함의 함장 김현식. 그가 해치위로 올라오며 디펜더스 멤버들에게 미소 지었다.
“힘든 전투였군. 철림. 살아서 볼 수 있어서 좋군.”
철림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다 김철수에게 받은 쪽지를 현식에게 건넸다. 잠시 쪽지를 바라보던 현식이 사라드의 상공을 바라봤다.
따스한 햇볕이 사라드를 내리쬐는 모습이 보였다. 현식은 애써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좋은 날이었으니까.
적들을 불태웠던 태양은 어느새 하늘 저 편에서 사라드를 따스하게 비추고 있었다.
현식이 승무원들을 불러 모았다.
폐허가 된 사라드를 바라보며 수많은 승무원들이 일렬로 섰다.
꼭 해야 할 일이었다.
현식이 자세를 바르게 하며 오퍼레이터의 구호를 기다렸다.
오퍼레이터가 사라드를 바라보며 외쳤다.
“사라드를 지키기 위해 쓰러져간, 진정으로 위대한 영웅들을 위하여! 경례!”
세종대왕함의 전 승무원이 하던 일을 멈추고 사라드를 향해 예를 갖추었다.
일제히 경례를 하며 사라드를 바라보는 승무원들.
누군가의 형제이자 자매. 부모님이자 자식이었던
평범하지만 위대한 영웅들을 향해.
예를 갖췄다.
우리를 지키기 위해 쓰러져간 무명의 영웅들.
이날 보았던
영웅들의 작은 불꽃은 영원히 꺼지지 않고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