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55 Episode 2-16 개전(開戰) =========================================================================
벙커 안은 아수라장이었다.
수십 명의 한나가 헌터들의 공격을 몸으로 막아냈다. 한나를 찌르고 지나간 헌터의 대거가 또 다른 한나를 찔러갔다. 금속 부딪히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렸다.
한나의 온몸에서 땀이 비처럼 쏟아졌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조금만 더 버티면 지원군이 올 것이라는 생각만이 그녀를 버티게 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띠링.
[에이프릴의 초능력이 전개됩니다.]
'그래!'
이제 이 지긋지긋한 헌터들을 추방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한나의 얼굴표정이 밝아지는 순간 시스템음성의 뒷부분이 들려왔다.
[사라드에 있는 확인된 모든 디펜더스 요원은 추방됩니다.]
한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뭐라고?’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에이프릴이 플레이어들의 배반자였는지 헌터에게 잡혀 불가피하게 능력을 전개하는 것인지.
수많은 불길한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휘젓고 지나갔다.
[에이프릴. 능력 전개 중.]
거대한 투명한 막이 벙커의 안쪽에서 퍼져 나왔다.
"젠장!"
인벤토리에서 수류탄을 꺼내 허공에 던진 한나가 분신들을 놔둔 채 막을 피해 달리기 시작했다. 밀어내는 막과 벙커의 벽 사이에 끼이면 즉시 사망할 것이었다.
‘에이프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그녀의 발은 이미 벙커의 바닥을 밟고 뛰는 중이었다.
달리던 한나가 뒤를 돌아봤다.
팽팽하던 힘의 균형이 깨지고 있었다.
한나의 분신들이 에이프릴의 능력에 밀려 벽에 처박히고 있었고 헌터들은 신이난듯 벙커의 안쪽으로 밀려들어갔다.
‘젠장. 케이나!’
자신을 따라오는 몇몇 헌터들을 따돌리며 걱정어린 얼굴의 한나가 계속해서 달렸다.
폭음과 총성이 끊이지 않는 사라드를 뒤로 한 채.
철림은 마음을 안정시키며 두 눈을 감았다.
지금이 아니면 확인 할 수 없는 일을 하기 위해.
차원도약.
과연 이 능력으로 회색방을 빠져나가는 것이 실제로 가능할 것인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는 모르는 철림의 능력이 발휘되었다.
[차원도약]
그의 능력이 전개되며 순식간에 주변 공간이 찌그러져갔다.
철림은 온몸이 공간의 안으로 구겨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쏴아. 쏴아.
구겨졌던 세상이 펴지고
거짓말처럼 철림은 꿈에 그리던 장소에 돌아와있었다.
그가 한 번도 잊지 않고 있던 장소.
뜨거운 수중기의 느낌이 철림의 온몸을 감쌌다.
지구.
얼마나 다시 돌아오고 싶었던 곳인가.
'...이건..'
그의 시선이 이곳저곳을 바쁘게 쫒았다.
기억속과 달라진 모습.
도시가 펼쳐진 익숙한 지구의 모습이 아닌
끝없이 펼쳐진 펄펄 끓는 바다만이 발 밑에 펼쳐져 있었다.
"안돼......"
그가 순간이동을 반복해 바다가 아닌 곳을 보기위해 끊임없이 움직였다.
고도를 높이고 수평선이 아닌 다른 땅의 조각이라도 찾기 위해 계속해서.
순간이동을 반복하고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그의 뒤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 까지.
그는 하염없이 지구에서 발 디딜 땅의 존재를 계속 찾았다.
“네가 기억하는 지구는 이제 없어. 철림.”
인기척도 느끼지 못하는 바다의 허공 위.
파란 머리를 지닌 작은 소녀가 철림의 뒤에 둥둥 떠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철림이 반사적으로 권총을 꺼내며 소녀를 겨누었다.
'차원도약과 순간이동을 반복한 내 좌표를 읽어내고 찾아왔다고?'
그 생각이 떠오르자 철림의 호흡이 불안정하게 떨렸다.
엄청난 능력자.
‘천사? 악마? 최상위 능력자?’
철림이 겨누고 있는 총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소녀가 입고있던 드레스 자락을 털고는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천사들이 처 놓은 두 개의 결계로 이 행성의 반은 불지옥이, 나머지 반은 끓는 물의 행성이 되어버렸고."
그녀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거기에 주기적으로 감시중이니 위대한 천사분들은... 너 같은 지구인이 살아있다는 걸 눈치 채면 언제라도 이곳을 습격하러 올 거야.”
뜨거운 바다 증기가 올라와 땀으로 젖기 시작한 철림의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소녀가 바다를 바라보며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회색방을 벗어나면 당신들의 네 모 행성인 지구로 다시 돌아와 예전같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나봐?”
마치 모든 상황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그녀를 향해 철림이 처음으로 물었다.
“당신은..누구 입니까.”
그녀는 대답대신 자신의 손목을 들어 올리고는 검지로 톡톡 쳤다. 철림이 자신의 손목을 반사적으로 바라봤다. 어느 플레이어도, 헌터도 벗을 수 없는 손목의 금속 팔찌.
“...회색방 관리자?”
“아니. 회색방 관리자는 지금 공석이야.”
“....악마 입니까?”
“악마면 번거롭지 않게 당신을 바로 죽였겠지.”
철림의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땀방울이 턱에 송골송골 맺혔다. 흠. 하고 숨을 뱉어 낸 소녀가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이브. 당신의 처리방향을 고민 중이야.”
‘이브?’
철림이 기억 속을 더듬었다. 이브.
이브.
사라드에서 사람들과 했던 회의 중.
회색방을 돌아다니면서 들었던 이야기들 중.
익숙하게 들렸던 이름이었다. 이윽고 그는 이브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회색방의... 중앙 시스템..?”
“그래. 회색방의 시스템이 곧 나야.”
철림이 침을 삼켰다. 시스템이라면 철림 같은 능력자를 살려 둘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리자가 있다면 너를 바로 죽이라는 명령을 주입했겠지만, 귀찮게도 지금 관리자는 공석이니까. 너 같은 이레귤러에 대한 규정은 없거든.”
“......”
“그러니까.”
그녀가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내자. 지구의 모습은 사라지고 어느새 철림과 이브는 작은 의자 두 개와 테이블 만이 존재하는 회색의 방에 서 있었다.
“거래를 하자고.”
그녀가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커피 잔을 철림 에게 내밀었다.
“네 행위는 내 명령 패턴에 오류를 일으킬 소지가 높아. 그렇다고 명령도 없는데 너같이 특수한 이레귤러 초능력자를 즉결 처분을 허락되는 것도 아니니. 이렇게 하자.”
그녀가 허공에 커피 잔 하나를 더 만들어 내고는 손을 뻗어 커피 잔을 집었다.
“만들어 줄게. 지구인들이 살 만한 새로운 행성.”
그녀의 제안에 철림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브가 말을 이었다.
“단, 회색방의 안에.
어때? 괜찮은 조건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철림은 입을 열지 못하고 눈을 깜빡이며 이브를 쳐다볼 뿐이었다.
“뭐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시스템의 불안정성을 감안하고라도 너를 죽여야겠지. 다수를 회색방 밖으로 탈출시킬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뭐 돌아갈 모 행성도 없어진 마당에 어디를 기웃거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철림은 커피를 마실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끊임없이 고뇌를 반복했다.
“저 혼자 생각할 사안이...”
“내가 관찰한 바로는 네가 디펜더스의 핵심이야. 한나나 김철수가 지능적으로는 더 뛰어나겠지만 그 둘을 설득할 수 있는 멤버는 너 뿐. 사라드 사람들 역시 죽은 시현의 활약으로 디펜더스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주고 있고. 물론 이 거래 사실은 우리 둘만 알겠지.”
소녀를 바라보며 철림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시현을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까.”
소녀는 대답하지 않고 피식 웃으며 김이 올라오는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잠시간의 침묵. 커피를 음미하던 그녀가 작은 손을 들어 검지로 철림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오....”
진하게 웃으며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오래전 은인에게 들었던 성경구절이었다.
시현과 철림을 구해주고 대신 죽었던 은인에게 들었던 구절.
이마에서 손을 땐 그녀가 회색의 벽을 바라봤다.
“너에게만 이런 제안을 한 것은 아니니 분발해야 할 걸.
이번 전투에서 살아남는 다면 나를 다시 볼 수 있을 거야.”
철림의 인상이 굳어가는 순간.
바닥이 투명해지며 구름 위에서 사라드를 내려다보듯이 전쟁 중인 사라드의 모든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가 곧 올거야. 헌터들의 왕. 디펜더스와 그 중. 살아남는 쪽의 소원을 들어줄 예정이거든. 어때. 이대로 혼자 사라질거야? 아니면 또 한 번 모든 걸 걸고 싸워볼래? 물론 이번에는 너희들이 좋아하던 시현이란 녀석뿐만이 아니라 모든 멤버들이 다들 죽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
커피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소녀가 연하게 웃었다.
“잘 생각하라고,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는 법이니까.”
철림이 눈을 깜빡이는 순간. 회색의 방이 아닌
수증기의 바다가 어느새 철림의 발밑에 있었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이브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끓어오르는 죽은 행성만이
철림의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