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54 Episode 2-16 개전(開戰) =========================================================================
사라드의 후방벙커.
어린아이와 노약자 등이 피신해 있는 이곳도 전쟁의 포화를 비켜가지 못했다.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폭음.
흔들림.
비명소리.
절망의 눈동자.
그리고 썩은 피 냄새.
총성을 뒤로 한 채 케이 나는 필사적으로 에이프릴을 잡아끌었다.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에이프릴을 잡고는 계속해서 질질 끌어 뒤쪽으로 옮기고 있는 것이었다.
방어선이 무너지고 헌터들이 계속해서 침입해 들어왔다.
에스퍼가 들고 있는 권총이 계속해서 불을 뿜었다.
수없이 많은 어린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벙커의 구석으로 도망쳤다.
아비규환.
사람이 사람을 밟고 도망치는 모습이 연출되고 있었다.
"당황 하지 마! 질서를 지키면서 피신해!"
소리를 지르는 에스퍼였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계속해서 허공을 쫒았다. 투명능력을 지닌 헌터들이 끝도 없이 벙커 쪽으로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탕. 탕. 탕.
흐릿한 쪽을 향해 계속해서 권총을 쏘아댔다. 금속탄피가 바닥과 부딪히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렸다.
사라드 방어의 핵심은
헌터를 밀어내는 에이프릴의 능력과
아이템 사용을 무효화 하는 에스퍼의 능력.
그 정보는 이미 헌터들에게 노출된 것이 분명했다.
"......"
이미 에이프릴은 능력전개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에스퍼가 무너진다면 급격하게 전세가 기울 것이었다.
"당황 하지 마!"
헌터의 칼에 어린아이 한명이 쓰러지며 비명을 내질렀다.
한발 늦게 에스퍼의 총알이 그 헌터의 몸을 꿰뚫었다.
'젠장.'
철컥. 총알을 재장전 하는 사이
에스퍼의 등이 총을 들고 있는 어린아이와 닿았다.
"꼬맹이는 뒤로 가있어!"
"저희도 싸울 수 있어요!"
탕. 탕.
허공에 총을 사격하는 아이의 가슴으로 흐릿한 비수가 파고들었다.
"조심..!"
에스퍼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이미 아이는 쓰러져 피를 쏟아냈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고는 계속해서 권총을 발사했다.
헌터와 능력자. 그리고 아이들의 피가 범벅이 되어 벙커 안은 피바다가 되어갔다.
도망치는 케이나의 눈앞에 한나의 군용대검이 지나갔다.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며
케이나를 노리던 대검이 바닥에 박혔다.
에이프릴을 옮기던 그녀의 온몸에 소름이 올라왔다.
군용 대거를 든 한나가 도망치는 케이나의 앞을 막아섰다.
"한나 언니.."
"어서 가!"
"한나 언니!"
날아오는 또 다른 무기를 쳐 내는 한나. 헌터들의 검은 케이나와 에이프릴을 노려왔다. 금속소리가 벙커 안에 이리저리 울렸다.
"케이나!!"
점점 더 많은 숫자의 헌터들이 한나의 앞에 나타났다.
"케이나! 그녀를 꼭 살려야 해. 어서 가!!"
아무리 한나라고 해도 수많은 헌터들을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한나 언니!”
“가! 케이나!”
결국 케이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케이나의 눈에 여러 개로 나눠지는 한나의 모습이 보였다. 왜인지 나오는 눈물을 참으며 자신의 몸보다 큰 에이프릴을 질질 끌어 계속해서 옮겼다.
"죽지마세요! 한나 언니!"
그 부질없는 작은 소망을 들으며 한 작게 웃었다.
안 죽어.
여러 명의 한나가 수많은 헌터들을 앞에 두고 습관적으로 작게 읊조렸다.
두려움이 밀려올 때 하는 습관적인 말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떠한 적도
어떠한 난관도
우릴 막을 수는 없다.
그녀의 두 손과 두 눈에서 투쟁심이 솟아올랐다.
밀려오는 헌터들의 물결과
그것을 막아내는 한나를 바라보며 케이나는 한없이 무력하게 도망쳤다.
이런 것일 줄 몰랐다.
전쟁.
단지 나쁜 적들을 빠르게 물리치고 꿈 많은 미래가 펼쳐질 것으로만 생각했다.
위대한 영웅들의 이야기가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죽어나가는 아이들의 비명소리와 죽음을 외면한 채.
죽어가는 동료를 외면한 채.
단지 전략적으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한 사람의 목숨을 억지로 연장시키는 것.
총을 든 아이들.
살려달라고 우는 아이들.
각오를 한 듯 자리에 서 있는 아이들.
도와달라고 케이나에게 소리치는 아이들.
그들을 모두 지나쳐 케이나는 계속해서 에이프릴만을 질질 끌고 도망쳤다.
모든 사람의 가치는 평등한 거야.
그렇게 말해주었던 시현이 야속했다.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이런 임무가 주어졌음을 안도했다.
에이프릴을 옮겨야 한다는 핑계로
아이들의 죽음과 비명소리를 외면할 수도
죽을지도 모르는 전투에 나서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케이나는 괜찮다고 계속해서 되뇌었다.
배신은 이미 저질렀었다.
자신이 살기위해 남을 죽인적도 있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모든 사고방식은 케이시의 것이었다.
만약 케이시였다면
만약 케이시였다면
케이나는 입술을 깨물고 계속해서 에이프릴을 질질 끌었다.
에이프릴의 다리에서 이어진 긴 핏물이 복도를 따라 계속해서 이어져 있었다.
흔들림과 폭음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헌터들을 막아서던 한나와 에스퍼는 어떻게 되었을까.
케이나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들이 엉켜 굳어졌다.
복도의 끝.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앉아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쿠조 씨!"
회색피부의 남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시체들의 사이에 앉아.
"어~? 케이나 아직 잘 살아있었구나~? 거 참 재미있는 상황이야. 그렇지~?"
소름끼칠 정도로
정말 즐겁다는 듯이 시체들의 사이에서 웃고 있었다.
다급하게 너무나도 다급하게 케이나는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에이프릴을 살려야 돼요!"
쿠조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웃으며 케이나를 바라봤다.
"에이프릴? 아. 그 여자. 걱정-마. 단순 부상 같으니 내가 이곳을 지키며~ 같이 봐 주면 되니까~ 그렇지~? 거기 내려 둬~"
피 흘리는 에이프릴을 쿠조의 근처에 둔 케이나가 격한 숨을 계속해서 토해냈다.
땀이 비 오듯이 흘러 긴 머리칼을 엉망으로 엉키게 했다.
두려움과 안도감 불안감이 그녀를 괴롭혔다.
도망치고 싶다.
도망쳐서는 안 된다.
두 가지 마음이 그녀의 안에서 계속해서 부딪혔다.
흔들리던 그녀의 눈동자에 쿠조의 음성이 부딪혔다.
"케이나~? 이제 다시 가봐야 할 곳이 있지 않아~?"
쿠조의 말이 비수가 되어 그녀를 꿰뚫었다.
"어서~ 가보는 게 좋지 않을까? 두 번은 좀 그렇지 않을까~?"
케이나의 온몸이 차갑게 굳었다.
한 번은 동료를 배반하고 동료의 목숨을 이용해서 살아났다.
그리고 이번에는....
두 번째가 될 것이었다.
쿠조가 품속에 있던 군용 대거를 케이나에게 던졌다.
"우리 케이나~이번에는 어떻게 할 거니~?"
대거를 받아든 케이나.
그녀의 눈에 자신을 받아주었던 시현과 한나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그래. 이번에는.
마치 떠밀리듯.
그녀가 한발자국 한발자국 전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 그녀의 작은 발은 복도를 밟고 뛰고 있었다.
'이번에는....'
이곳에 없는 케이시가 할 수 없는 일.
동료를 구해내는 일.
한나를 돕고.
시현을 찾아서.
그들이 원하는 미래를.
케이나의 호흡이 점점 격해지며
발자국 소리가 빨라져갔다.
달려가는 케이나를 보며 쿠조가 기괴하게 웃었다.
쿨럭 거리며 정신을 차리려는 에이프릴의 기침소리가 시체 사이로 퍼졌다.
쿠조가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그래~그래~ 이제 좀 괜찮나~? 사라드의 희망 소녀 씨~?"
에이프릴의 눈꺼풀이 흔들렸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일까. 온몸에 힘이 없고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웃고 있는 쿠조의 모습이었다.
"당..신은...."
"사라드의 희망 씨가 눈을 떴으니~ 이제 다시 헌터들을 밀어 낼 수 있을 거 같네~?"
“하아...하아.. 전 괜찮습니다. 지금 당장... 다시 능력을 전개 시킬게요.”
쿠조가 잠시 흐음- 하고 혀를 몇 번 차더니 손을 펼쳐 에이프릴의 이마를 움켜잡았다.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마침 재미있는 참인데~?"
"무..무슨.. 당신."
"아~ 그간 고마웠어. 꼭두각시 양~.”
그 순간. 잊혀졌던 에이프릴의 기억이 모두 돌아왔다.
과거에 있던 일들이 조각조각 끼워 맞춰졌다.
--------------------------------------
안녕. 난 쿠조라고 해~.
사라드의 총 사령관을 죽인 게 나냐고? 그는 내가 죽인 게 아니라 스스로 자살한 것일 뿐이야~ 어차피 다 잊어버릴 텐데. 뭐 그걸 알려고 해~?
어차피 나중에 모든 기억이 돌아오면 너도 그와 같은 길을 걷게 될 텐데 말이야~
----------------------------------------
“..당신..!”
-띠링.
에이프릴의 귓속에 시스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사용자 쿠조의 능력이 당신의 정신을 잠식해 들어갑니다. 완전 잠식까지 10초..9초..]
에이프릴의 코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흐릿해지는 세상에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쿠조의 음성뿐이었다.
“지정된 대상을 그 공간에서 추방시키는 능력~ 확실히 대단해~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는 내가 한번 다르게 사용해 보려고.”
[8..7..6.. 에이프릴. 당신의 정신과 신체의 제어권이 타인에게 넘어가고 있습니다. 3....]
“불쌍한 헌터들을 한번 밀어냈으니~, 공평하게 이번에는 우리의 꿈과 희망이신...”
[2..]
에이프릴의 피 묻은 손이 쿠조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디펜더스들을 모두 사라드 밖으로 추방시키고 헌터들에게 능력자들을 모두 죽일 기회를 준 다던가 말이야~ 어때? 재미있는 이야기지~?”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 에이프릴이었다.
‘내 능력은..오로지.. 사라드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수호를 위해서...’
“아니아니~ 틀렸어요~ 오늘 네 능력은 네가 좋아하던 그 사람들을 모두 죽이는 데에 사용될 것이랍니다~”
[에이프릴. 당신의 정신계에 강제적으로 새로운 명령이 주입됩니다. 침식을 방어하십시오. 1....]
쿠조의 손목을 잡고 있던 에이프릴의 손이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0...침식 완료.]
쿠조가 소녀의 얼굴에서 피범벅이 된 손을 때냈다.
멍한 표정의 에이프릴이 쿠조를 바라봤다. 그가 물었다.
“자~ 네 적은 누구지~?”
에이프릴은 침묵했다.
"어라~ 잘 안됐나 그럴 리가 없는데~?"
"제 적은..."
에이프릴의 눈에서 눈동자가 한 방울 한 방울 흘러내렸다.
머리에서 흐르는 피와 눈물방울이 만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파랗게 질린 입술이 좌우로 계속 떨렸다.
"제 적은....."
에이프릴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제 적은...모든 디펜더스.”
쿠조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네가 할 일을 해야겠지~?”
흐르는 피를 지혈하지 않은 채. 에이프릴이 기계처럼 입을 열었다.
그녀의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손을 허공에 뻗은 그녀가 계속해서 몸을 떨며 능력을 발동 시켰다.
“현재까지.. 확인된 모든 디펜더스 요원을... 사라드에서 영구 추방시킵니다....
이것으로... 이제 참혹한 전쟁은... 끝나게 될 것입니다.”
그녀의 몸에서부터 거대한 원이 퍼져나갔다.
쿠조의 손이 바닥을 굴러다니던 죽은 아이의 피 묻은 이마를 매만졌다.
모든 헌터들을 막아내던 힘이
이제는 모든 디펜더스를 추방시키는 푸른 원이 되어
사라드 전역으로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