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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탈출-341화 (341/373)

00341  균열(龜裂)  =========================================================================

계단식으로 배치되어있는 수백 대의 컴퓨터가 화면을 깜빡였다. 무선 이어폰을 낀 사람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정보를 조합해 갔다. 그곳의 꼭대기에 사라드의 중앙 회의실이 있었다.

둥그런 탁자에 모인 수뇌부들 사이에서 전쟁을 위한 브리핑이 반복되어 갔다.

작전명 사냥꾼 사냥.

흰색 모자를 쓴 비서가 철림의 앞에 커피를 놔두고는 지나갔다. 진한 커피향이 코를 간질였다. 수뇌부들끼리의 열띤 토론이 이어지고 있었다.

“핵폭탄 1200발 정도로는 화력이 부족합니다! 사라드의 운명이 걸렸는데 그 정도 지원도 안 된다는 말입니까!”

“그 물량도 수천 명의 플레이어가 간신히 모은 수준입니다! 당신만 그들을 죽이고 싶은 건지 아십니까? 저번 대악마의 공습으로 가족을 잃은 플레이어들이 짜내고 짜내서 모은 것이란 말입니다!”

“그 부분을 지적 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제 말은......”

열띤 토론을 보고 있던 철림이 자신의 옆을 힐끗 바라봤다. 곰돌이를 껴안은 주황머리 소녀. 철림이 그녀에게 커피 잔을 건넸다.

“에어프릴 양. 기억은 돌아오셨습니까?”

그녀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커피를 한모금 마신 그녀가 짙은 향을 풍기는 커피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누군가를 만났던 것 같은데요, 그에 관한 것이 전혀 기억나지... 않아요. 프린세스 디펜더님이 저를 구해주는 기억은 또렷한데, 그전에 어떻게 쓰러져 있었는지가......”

“차차 기억 날겁니다.”

“프린세스 디펜더님에게 연락은 왔나요?”

사라드에 들어오는 모든 헌터를 밀어내어

도시 전체를 방어하는 초능력자. 에이프릴.

그녀는 틈 날 때마다 프린세스 디펜더의 안부를 물어왔다.

에이프릴에게 있어서 그녀는 신과 같은 존재였다. 모든 능력을 잃은 채 사라드의 도로 위에서 생사를 헤맬 때. 프린세스 디펜더는 그녀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다독이며 수많은 전투를 넘어 지하시설까지 인도했었다.

대 악마가 사라드를 전부 부셔버리기 직전.

모든 것을 포기한 에이프릴에게 프린세스 디펜더는 금빛머리칼을 휘날리며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말을 내뱉었었다.

‘모든 헌터들을.. 무찌르겠습니다.’

불가능한 일이었을 텐데.

그녀는 황금의 별이 되어, 자신의 말을 지켰다.

에이프릴이 울렁이는 마음을 다잡았다.

눈을 감으면 계속해서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철림이 손가락을 들어 테이블 위를 두드렸다. 에이프릴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 역시 시현이 걱정스러웠던 것이었다. 반복적으로 움직이던 손가락을 멈추고 그가 우체통을 소환해 속을 바라봤다. 텅 빈 내부가 그를 반겼다.

‘...시현.’

한 장의 편지라도 써 주면 좋을 텐데.

시현이 누군가에게 패배 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그는 너무나도 인간적이었다. 그가 패배한다면 아마 상대편이 아니라, 같은 편의 배신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는 철림이었다.

그가 에이프릴을 바라보며 괜찮다는 듯 웃었다.

“곧, 올 겁니다. 아무리 지옥 같은 스테이지라도 그는 해결해 낼 테니까요. 전함 대악마도 단신으로 무너뜨렸던 그녀입니다.”

“...그렇겠죠.”

에이프릴의 개인적인 생각과는 달리 회의는 뜨거움을 더해가고 있었다.

“차원관문은 어떻게 열겁니까! 어차피 차원관문이 열리지 않으면 개미새끼 하나도 다른 공간으로 넘어갈 수 없다는 것 아시지 않습니까!”

테이블을 치며 열변을 토하던 수뇌부들이 목소리를 다듬으며 철림과 에이프릴을 바라봤다.

“흠, 작전의 개요는 데릴님이 설명해주실 겁니다.”

따분한 듯 긴 머리를 이리저리 꼬고 있던 과학자 복장의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회색 방으로 들어간 시아페씨를 대신해 전략에 관한 브리핑을 맡은 데릴입니다.”

사라드의 직원은 언제나 3교대였다. 사라드에 있는 플레이어라고 할지라도 일정시간이 지나면 회색방 스테이지로 끌려가서 목숨을 건 전투를 해야 했기에 그들을 대신할 후임들이 언제나 몇 명씩 있는 것이었다.

“입수된 정보에 의하면 헌터들은 대형 퀘스트를 통해 회색방 관리자에게 4시간 동안 차원관문을 열 수 있는 아이템을 받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측에는 그런 아이템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공격을 하자는 말입니까!”

흥분해서 삿대질을 하는 남자에게 그녀가 진정하라는 듯 양손으로 제스처를 취했다.

“그게 저기 있는 철림님을 부른 이유입니다.”

그녀의 말과 함께 회의장에 있는 모두의 이목이 철림에게 집중되었다.

“그의 능력은 비밀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강제로 차원관문을 열 수 있습니다.”

“...뭐라고?!”

회색방의 공간과 공간을 단절시키는 시스템 차원관문. 공간이동 능력이나 동료의 공간으로 이동하는 능력이 있어도 회색방의 이동관리 시스템인 차원관문이 닫혀있으면 어떤 것도 회색방의 투명한 벽을 넘을 수 없었다.

“정말로, 차원 관문을 열 수 있다는 말인가?”

집중되어있는 시선에 철림이 장내를 훑어보고는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회의실 전체가 웅성거렸다. 진행을 맡은 간부 한명이 조용히 해달라며 이리저리 소리쳤다. 흠. 흠. 헛기침을 한 데릴이 말을 이어갔다.

“그의 능력의 단점은, 차원관문을 여는 동시에 회색방 전역에 있는 헌터들을 강제로 끌어들인다는 것입니다. 사라드의 플레이어들과 마찬가지로 헌터들 역시 살인자의 마을보다는 회색방에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들까지 혼합되어 끌려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모든 작전은 철림 때문에 가능했다.

차원 도약.

예전에 시현과 이그네스의 실험으로 알아낸 사실이었다.

차원 도약 능력을 개방시키면 회색방은 차원관문을 강제로 열고 수많은 헌터들을 철림의 위치로 이동시킨다. 아마 그의 능력이 회색방에 있어서 시스템적으로 큰 위험이 되기 때문이리라.

데릴이 레이저 포인터를 이용해 회의장 전광판에 표시된 자료들을 가리켰다.

“우리는 회색방 시스템의 방어시스템을 역 이용할 것입니다. 철림 씨가 능력을 이용해서 헌터들을 소환해 내면 에이프릴양의 능력으로 헌터가 사라드로 들어오지 못하게 함과 동시에 헌터들이 소환된 공간에 수천발의 핵폭탄을 퍼부을 것입니다.”

꿀꺽. 누군가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핵탄두라고 해도 헌터들의 방어 아이템을 전부 뚫을 수는 없을 것 아닙니까?”

“네, 우리 편에 그녀가 없다면 말입니다.”

“누구 말인가?”

찰칵. 하면서 전광판의 화면이 넘어갔다.

“상위 랭커. 에스퍼.”

긴 검은 머리를 지닌 날카로운 인상의 여자가 모니터에 비추어졌다.

“모두들 아시겠지만. 에스퍼님의 경우 그 공간에 존재하시는 것만으로 모든 마법력, 과학력, 이능력을 포함한 모든 아이템을 사용 불가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녀가 모든 방어 아이템을 무용지물로 한 사이에 핵탄두를 허공에 퍼부을 것입니다.”

“도시 피해는 어떻게 할 작정인가?”

데릴이 허공을 바라보았다.

“마더.”

사라드 전체를 제어하는 슈퍼컴퓨터. 마더가 그녀의 명령에 따라 브리핑을 시작했다.

“1200발의 핵미사일이 13000명의 헌터에게 쏟아졌을 경우 폴트레트 디펜스 급의 방어벽이 없다는 가정 하에 1/10 정도의 미사일만이 통과하게 될 것입니다. 그 경우 3200개의 방어 아이템과 1400명 정도의 플레이어라면 사라드에게 밀려오는 반작용을 상쇄시킬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대악마와 같이 폴트레트 디펜스가 있을 경우는?”

“정면으로 부딪힐 경우 단 두 명의 능력자만이 그 방어벽을 뚫을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첫 번째 능력자. 프린세스 디펜더. 그녀의 출력이라면 99.9999%의 확률로 돌파가 가능합니다. 두 번째 능력자. 디펜더스의 칸나. 먹은 열량만큼 그대로 쏟아낼 수 있는 그녀의 능력을 기반으로 계산했을 때, 충분한 식량만 확보되면 99.9999%의 확률로 돌파가 가능합니다.”

회의장이 소란스럽게 변했다. 데릴이 마더에게 감사인사를 한 뒤 브리핑을 이어갔다.

"핵 미사일로 헌터들을 궤멸시킨 후, 열린 차원관문을 통해 살인자들의 마을로 진입. 모든 헌터들을 제압하고 회색방 중심 시스템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

웅성거림이 극도로 커졌다. 모든 플레이어들의 명운을 건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비서가 다가와 철림의 앞에 커피를 하나 더 놓아주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한 그가 커피를 벌컥벌컥 마셨다.

‘이게 잘하는 일일까.’

시현과의 연락이 되지 않는 사이. 사라드의 수뇌부들이 디펜더스에게 접촉을 해 왔다. 프린세스 디펜더에 의해 헌터들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상황. 지금이야말로 헌터들에게 역공을 가할 절호의 기회라는 것이었다.

‘헌터들을 치고 그 기세를 이어받아 회색방의 중심부를 공략. 단번에 회색 방 관리시스템인 이브를 공격. 회색방의 제어권을 넘겨받는다....라.’

사람의 가장 큰 적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이었다.

플레이어들이 회색방의 시스템을 향해 반기를 들 때마다 그 앞을 헌터들이 막아섰던 것이다.

반복적으로 탁자를 두드리고 있던 철림에게 비서가 다가왔다.

“철림 님. 동료 분께서 오셨습니다.”

“음?”

철림이 고개를 돌리자 회의실의 문 앞에 서있는 김철수의 모습이 보였다.

“아. 감사합니다.”

그가 잠시 양해를 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굳은 낯빛을 한 김철수가 눈에 들어왔다.

철림이 문을 닫고 나오는 순간 딸깍하며 문소리가 또 한 번 들렸다.

데릴이 김철수에게 인사하며 문을 닫고 있었다. 김철수가 두 명을 동시에 불렀던 것이었다.

“무슨 일이죠?”

후우. 한숨을 쉰 김철수가 머뭇머뭇 거렸다. 한동안 이마와 눈 주변을 만지던 그가 결심을 한 듯 입을 열었다.

“시현이 죽은 것 같습니다.”

공기가 얼어 붙는 느낌이 장내를 휘감았다.

“네?”

“뭐라고?”

얼마 지나지 않아 털썩.하고 철림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데릴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계속해서 김철수를 쳐다봤다.

"...그가 죽었다고요?"

“몇 시간 전부터 그의 좌표가 읽히지 않습니다. 몇 번이고 확인을 했지만, 거의 확정이라고 생각됩니다...”

“아...”

철림이 두 눈을 감았다.

"...시현."

시현이 없었다면 그는 오래전에 죽은 목숨이었다. 차원 도약능력을 얻어서 시현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뻤던가.

철림이 위험했을 때 시현은 그를 도왔지만.

시현이 위험했을 때 철림은 아무것도 도와주지 못했다.

주저앉아 있는 철림을 바라보는 데릴의 머릿속도 복잡해져갔다.

‘프린세스 디펜더가 죽었어?’

그녀의 머릿속에서 전투가 시뮬레이션 되었다. 대악마에 장착되어 있는 폴트레트 디펜스가 상대방에게 있을 경우. 그것을 뚫을 수 있는 능력자는 이제 단 한명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칸나.’

모든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그녀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가장먼저 해야할 일은 명백했다.

“그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퍼져 나가서는 안 됩니다.”

프린세스 디펜더는 사라드 플레이어의 희망의 상징이었다. 또한 그는 칸나와도 연관이 있었다. 만약 칸나가 그를 찾으러 회색방으로 들어가겠다고 한다면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것이었다.

“김철수 씨. 칸나 양도 이 사실을 알고 있나요?”

“아직...모릅니다.”

“그녀가 알아선 안 됩니다. 헌터를 몰살할 수 있는 기회를, 회색방을 점령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 겁니다.”

“......”

“부탁드립니다...그녀가 우리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데릴이 김철수의 어깨를 잡았다.

"...김철수 씨."

무언의 부탁에 김철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알겠습니다.”

한숨을 내 쉰 데릴이 그의 어깨에서 손을 땠다.

“후우... 감사합니다.”

김철수와 데릴이 철림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괜찮으십니까?”

철림이 대답을 하지 않은 채 그들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인정해야 했다. 회색방 플레이어라면 언제 어디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언제나 내일의 해를 보지 못할 것을 가정하며 잠드는 일상, 상상했던 일이 현실로 다가왔을 뿐이었다.

“...괜찮네.”

비서가 문을 열고는 데릴에게 들어와야 된다고 이야기 했다. 데릴이 김철수와 철림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

“프린세스 디펜더의 지원은 힘들 것이라고 이야기 해 놓겠습니다.”

“...알겠네.”

딸깍.

회의 실로 들어간 그녀가 새로운 브리핑을 시작했다. 프린세스 디펜더에게 문제가 발생하여 언제 회색방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고 돌아올지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자연히 모든 관심은 전광판에 올라와있는 칸나를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문 밖에서 철림을 부축하던 김철수가 입을 열었다.

“한나 씨가 칸나에게 시현의 소식을 알리려고 합니다. 그것을 막아야 합니다.”

철림의 머릿속이 복잡해져갔다. 그는 가장 오랫동안 시현과 칸나를 봐 왔던 사람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칸나가 홀로 디펜더스를 이탈하며 죽는 모습이 그려졌다. 시현뿐만 아니라 칸나마저 잃게 된다면......

“철림 씨.”

김철수가 애원하듯 그의 대답을 독촉했다.

철림이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회의를 진행하고 있던 데릴이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진행하던 말을 끊고는 화제를 자연스럽게 돌려왔다.

“..그런 의미로 회의에 참석해주신 철림 씨가 칸나양이 사라드에 도착하는 시기를 알려주실 것입니다. 철림 님?”

사라드의 모든 수뇌부가 고개를 돌려 철림을 바라보았다.

굳은 얼굴을 한 철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내를 몇 번 둘러본 그의 눈에 수많은 감정들이 읽혀들어왔다.

당장이라도 헌터들에게 쳐들어가고자 하는 분노한 사람들의 표정. 대악마의 공격에 가족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 그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

“철림 님?”

눈을 감았단 뜬 철림이 입을 열었다. 후. 하고 심호흡을 한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

다.

결정을 내려야 했다.

“칸나 양은 2일 이내에 사라드에 도착할 것입니다. 그리고 작전은 아무 문제없이 진행될 것입니다.”

짝짝짝. 수뇌부 한명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수많은 박수소리가 철림을 감쌌다.

그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데릴이 그를 대신해 회의의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칸나 양이 도착하는 날. 우리는 플레이어의 새로운 역사를 쓸 것입니다.”

개발이 안 된 사라드의 외곽 지역.

진흙투성이인 추방자의 마을 어귀에서 남자 흑인이 아이들과 놀아주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뒤로 검은색 긴 생머리의 여자가 다가오며 물었다.

“마스터 쿠조.”

“응~ 에스퍼~ 무슨 일이야~?”

“사라드로부터 도움 요청이 왔습니다. 며칠 내에 헌터들과의 일전을 치룰 예정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호오~?

즐겁다는 듯 쿠조의 입에 웃음이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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