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22 바다가 부르는 소리 =========================================================================
왼 촉수에는 뾰족한 성게 가시를, 오른 촉수에는 튼튼해 보이는 랍스타 방패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시현의 고민은 깊어졌다.
“......”
바다는 넓었고, 이 맵에도 시간제한이 걸려있을 것으로 추측이 되었다. 즉. 시간은 한정되어있다. 그렇기에 뭔가 해야 되긴 할 거 같았는데......
무섭다.
시현은 그런 감정을 느꼈다.
그가 언제 바다 속 깊은 곳에 먹힐지도 모르는 상황이 된 채로 있어 봤겠는가. 인간은 영원한 상위 포식자이기에 이런 느낌은 매우 생소했다. 그가 지느러미를 흔들어서 산호지대의 사이로 숨었다. 작은 물고기들이 그의 방문에 놀라 이리저리 피했다.
“......”
뭔가 해야 되는데 무섭다.
집이라도 만들까. 나는 왜 움직일 수 없는 걸까. 시현은 자신이 약간 한심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영화 같은 곳에서 보면 이 세계로 간 주인공은 잘만 돌아다녔다.
‘영화 다 구라였어.’
그는 자신의 미래를 상상했다.
패기 있게 지느러미를 이용해서 바다사이를 헤엄쳐간다. 지나가던 큰 물고기한테 먹힌다. 엔딩.
‘......’
물고기 입장에서는 괜찮은 엔딩이었지만... 오징어 입장에서는 좀 많이 쫄렸다. 굉장히 쫄렸다. 이건 오징어왕국이고 뭐고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 살아야 뭘 할 것 아니었던가.
'하아...'
산호의 주변을 작은 물고기들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산호, 산호...’
시현이 성게의 가시로 산호를 살짝 건드렸다. 아무 생각 없이 한 일이었지만 의외의 현상이 일어났다. 산호는 멀쩡했으나 뚝. 하는 소리와 함께 성게 가시가 부러져버린 것이었다.
(어이~ 오징어 청년~ 오징어 하면 전투 아닌가?! 내 독침 한방이면 전설속의 크라켄도 그냥! 뙇! 어떤가~? 조게 껍질 하나면 잔뜩 주겠네~)
‘......’
성게. 그는 사기꾼이었던 것이다. 조개 사기꾼. 성게의 가시는 너무나도 약해서 산호에 흠집조차 낼 수 없었다. 붙어있던 빨간 구슬들만 밖으로 우수수 떨어질 뿐이었다.
‘오자마자 당한 게 사기라니.’
하다하다 바다 속 멍게에게 사기를 당한 스스로가 미운 시현이었다. 부러진 가시를 바닥에 버리고는 그가 물끄러미 산호를 바라봤다. 회색 나뭇가지가 연속으로 이어져 있는 모양.
‘음..?’
가시. 나뭇가지. 물풀줄기들.
띵.
시현의 머리 위에 전구가 떴다. 그가 촉수와 다리를 뻗어 낑낑대면서 딱딱한 산호의 가지를 부러뜨렸다. 붉은 구술들을 털어내자 대충 긴 막대기가 하나 생긴 샘이 됐다.
그가 바닥에 있는 물풀을 뜯어 명주실처럼 꼬고는 막대기와 침을 물풀로 꼼꼼하게 묶었다. 뭔가 볼품은 없었지만 긴 산호 끝에 달려있는 성게 가시는 이렇게 말할 만 했다.
‘성게 창.’
“......”
왠지 누군가 자신을 보면서 비웃을 것 같았지만 방금 전의 돌도끼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이상한 짓을 하고 있는 이유가 생선들에게 잡아먹힐 것 같아서였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게 더 무서웠다.
산호 여러 개를 촉수로 감싸 부러뜨려서 성게 창 여러 개를 만든 그가 창 여러개를 등에 물풀로 묶었다. 삼국지에 나오는 전설속의 장수가 된 느낌이었다.
‘...아까보다는 좀 안심이 되네.’
손에 잔뜩 묻은 빨간 구술들을 털어내며 그가 물을 뿜어냈다. 뭔가 먹고 살기 힘들다는 생각이 드는 오늘이었다. 머리도 아픈데 기념품으로 빨간 구술이나 가져갈까 생각하던 시현은 그것이 구술이 아니라 산호의 작은 알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엄청 많네.’
마침 배가 고팠던 차라. 시현은 그걸 입에 넣고 깨물어보았다. 생각보다 맛이 괜찮았다. 큰 머리를 몇 번 끄덕인 시현은 이곳이 나쁘지 않은 보금자리라고 생각했다.
‘산호 사이로 몸을 피할 수도 있고. 알들도 먹을 수 있고. 일단 거주지는 정해진 건가.’
그가 고맙다는 듯이 산호를 살살 쓰다듬었다.
‘너는 나의 집이자 보호막.’
그런데 너무 세게 쓰다듬은 것일까. 산호가 갑작스럽게 붉은 구술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시현은 자기가 또 뭔가 사고 친 것일까. 내가 어디 가면 안 만진다고 했는데 그세 사고를 친 것일까 생각하다가 다른 산호들도 붉은 알들을 뿜어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산호 지대 전체가 붉은 알들을 물에 띄웠다.
산호지대 전체가 눈에 들어왔다.
‘와...’
그것은 마치. 눈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칸나가 이 장면을 같이 봤어야 하는데...’
산호지대가 하늘로 날려 보내는 붉은 눈은 시현의 피로감을 한 번에 날려버렸다. 예술가가 한땀 한땀 그린 바다 속 풍경화도 이에 비할바는 못될 것이었다.
풍경에 취해서 눈을 감고 있던 시현은 무언가 이상한 감각이 느껴짐을 깨달았다.
해류의 움직임이 조금 달랐다. 시현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는 감각이 느껴지는 곳을 쳐다봤다.
작은 물고기들. 수백 마리의 작은 물고기들이 시현이 있는 쪽을 향해 헤엄쳐오고 있었다.
‘...알 먹으러 오나? 하긴 작은 생선들 입장에서는 잔칫상이네.’
바다 속을 날아다니는 수많은 알들을 입에 허겁지겁 넣는 작은 물고기들. 시현이 그 물고기를 보며 침을 흘렸다.
‘...물고기도 맛있겠네.’
어느새 사람이 아니라 오징어의 식성이 옮은 듯 했다. 한참 물고기들을 바라보던 시현은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작은 물고기의 뒤쪽으로 약간 더 큰 물고기가 나타났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갑자기 스텔스 전투기 같이 생긴 거대한 물고기가 저 멀리서 날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커헉.’
시현은 최대한 산호 뒤에 숨었다. 거대한 가오리가 바다를 날며 물고기들을 쓸어가려고 했다.
‘시바. 이러다 초능력자들 다 이겨놓고 가오리에 먹혀서 죽겄네.’
절로 욕이 나오면서도
왠지 눈물이 났다.
물고기 떼가 순간적으로 뭉쳐들었다. 마치 거대한 상어 형상이라도 만들 듯. 순식간에 전열을 가다듬은 듯 했다.
시현은 그 변화를 감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시각으로는 작은 물고기 떼로 보이나 감각은 거대한 상어로 판단했던 것이다.
(전 대원 회피 대형으로!)
‘...말 할 수 있어?’
수백의 물고기가 하나가 된 듯 한 느낌이 들었다. 거대한 물고기의 형상이 그곳에 있었다. 거대한 형상이 가오리를 위협했다.
마치 그것을 비웃듯이 그 사이로 가오리가 치고 들어갔다. 물고기들은 중앙 진형을 무너뜨리며 순식간에 대열을 바꿨다. 가오리는 입에 아무것도 물지 못한 채 물고기 떼 가운데를 지나갔다.
마치 물로 만든 상어를 공격하고 있는 행색이었다. 상어가 되었다가 돌고래가 되었다가. 흩어졌다가. 모였다가.
질세라. 가오리가 몸을 흔들며 물고기들을 쫒았다. 잡힐 거 같은데 잡을 수 없는 술래잡기가 이어졌다. 시현이 그 광경을 넋 놓고 바라봤다.
물고기 떼들이 물속에서 카드섹션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의 대치가 이어지고 있을 때. 무언가가 또 오는 느낌이 들었다.
'...저건.'
가오리만큼이나 큰 물고기가 어디선가 나타나 작은 물고기의 회피 경로를 막았다.
‘설마.’
가오리와 큰 물고기는 작은 물고기들의 이동경로를 서로 막으며 협력하고 있었다. 물고기 떼의 진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거대한 상어의 형상이 깨어지는 것이다.
그 것이 승패의 갈림길이었다.
가오리가 입을 벌렸다.
한 번에 수십 마리씩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시현이 물을 꿀꺽 삼켰다.
경외감이 들었지만 한편으론 무서웠다.
자신이 저 상황이라면 저들과 싸워 이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오리 꼬리에 달린 긴 독침이 금방이라도 시현을 쏠듯이 흔들렸다.
들은 적이 있었다.
(사람도 쏘이면 죽는다던데.)
사람도 죽는데, 오징어인 시현이 쏘이면?
‘......’
왜인지 산호 안으로 더 들어가는 시현이었다. 작은 물고기들이 도망치려고 이리저리 움직였지만 가오리는 우아하게 날아다니며 배를 계속해서 채웠다. 작은 물고기 떼는 최대한 상어의 형상을 유지하려고 했으나 이미 돌파되어 버린 후였다.
큰 물고기와 가오리가 작은 물고기 몇 번 쓸어가고는 만족스러운 듯이 이리저리 몸을 뒤틀었다. 작은 물고기 떼는 낙오된 물고기들을 버리고 돌고래 모양으로 변해서 멀리 사라져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
사냥을 마친 가오리가 시현에게 점점 다가왔다.
그의 머리위에 가오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숨이 막혔다. 성게 창이고 뭐고 시현은 산호의 안쪽으로 붙어 섰다.
‘제발 일로 오지 마라. 제발 일로 오지 마라.’
시현은 지구 수족관에서 봤던 가오리들을 떠올렸다. 바다 밑을 흐느적거리며 다니다가 조개고 뭐고 다 쓸어 먹는 포식자.
‘그런데 왜 오늘은 바다를 날고 있냐고. 아 좋은 건가.’
만약 작은 물고기들이 아니었으면 가오리는 바닥을 기어왔을 수도 있었고, 그랬다면 포식 대상은......
‘하느님 이제부터 욕 하지 않고 착하게 살겠습니다.’
가오리는 시현의 머리를 지나쳤고, 우아하게 날아 어디론가 사라졌다. 시현의 등에 꼽혀있는 성게 창들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빨판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긴장은 곧 풀렸지만 이성이 아우성쳤다.
‘위험해...여기 위험하다고!!’
그 짧은 시간에 맞짱뜨면 바로 요단강 건널 거 같은 포식자들을 두 마리나 봤다. 즉. 바다라는 곳에는 상위 포식자들이 발에 차일 정도로 많다는 뜻이었다. 바다 생물의 입장에서는 이런 느낌이라는 것을 처음 안 것이었다.
‘나...돌아갈래!!!!’
클리어고 뭐고 살아야 했다. 시현이 산호가지들을 부러뜨려 기둥을 세우기 시작했다. 최소한 집이라도 만들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우우우우우우운)
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시현이 흠칫 하고 몸을 멈췄다.
(우우우우우우운)
‘뭐지.’
불길했다. 그의 촉수가 열심히 성냥개비로 집을 짓듯 산호로 집을 만들어갔다. 대충 사이즈를 맞춰서 산호를 쌓던 시현이 뒤를 돌아봤다. 무언가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꼬챙이를 코에 단 것 같은 물고기가 시현을 향해 급속도로 가까워져오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총탄이라도 된 듯한 모습이었다.
‘으어어어어어!’
한 치도 방심 할 수 없는 바다 속 세상.
시현이 산호조각을 내 던지고 성게 창을 들었다. 상대는 거리를 순식간에 좁혀오고 있었다.
‘못 피해!!’
시현의 머릿속이 핑글핑글 돌았다.
산호로 막아질까? 성게 창으로 찔러야 하나? 그냥 이대로 도망쳐?
답은 모두 엑스로. 설날 꼬치처럼 꿰어져서 실려 가는 미래가 눈에 잡혔다.
"으아아아!!"
혼란에 잠긴 시현의 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 피하라고.”
웬 오징어 한 마리가 흑색 광선 검을 들고 산호의 위에 서 있었다.
“...누구..”
청새치가 오징어를 꿰뚫으려는 찰나. 산호 위에 있던 오징어가 앞으로 뛰어나가며 온몸을 팽이처럼 회전시켰다. 핑그르르 돌던 그가 원심력을 이용해 쏘아져 오는 청새치와 부딪혀갔다. 검은 검이 끊임없이 회전했다.
“하하하아아앗!”
커다란 기합성이 산호시대를 채웠다.
거짓말처럼. 오징어의 검에 의해 청새치의 꼬챙이가 절단되었다. 피가 바다에 흩뿌려졌다. 그에 질세라 오징어가 검을 순식간에 여러 방향으로 휘둘렀다. 청새치의 몸에 순식간에 긴 상처들이 생겨났다.
시현은 그 장면을 넋 놓고 보고 있었다.
‘저거 오징어 맞아?’
청새치가 급하게 꽁무니를 뺐다.
불규칙적인 이동을 반복하던 오징어가 멀어지는 청새치를 바라보고는 천천히 지느러미를 움직여 산호의 위로 다시 내려왔다.
“야.”
“..예?”
“나는 갑오징어 기사단. 1중대 2소대다.”
“.....?”
“알았으면 가자.”
“...네?”
당신이 갑오징어 기사단인거랑 내가 가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냐고 묻고싶은 시현이었다.
그가 흑색 광선 검을 들어 올리며 까닥거렸다.
“따라와.”
주먹은 법보다 강하다. 적어도 이곳에서는 그 말이 진리였다.
바다 속은 왜 경찰이 없는 것일까. 초딩 시절 일진누나들에게 끌려갔던 기분을 느끼며 시현은 갑오징어에게 어디론가 이끌려갔다.
어두운 곳으로.
더 어두운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