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02 대가(代價) 하(下) =========================================================================
계속되는 출혈.
시현의 정신은 심연 속으로 가라앉았다.
피 냄새가 점점 옅어졌다. 출혈이 멈추는 것일까 후각이 마비되고 있는 것일까.
아무래도 좋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어찌 되던 좋았다.
어둠 속으로
어둠 속으로
그의 정신은 계속해서 끌어내려졌다.
틀렸어.
몸의 감각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어둠의 바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어둠 속 세계에서 그는 홀로 존재했다.
모든 패를 잃어버렸다.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미역국도 좋아했죠?)
나연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렸다. 청각도 점점 희미해 지는 것인지 그녀의 목소리가 멀게 느껴졌다.
미안해 칸나..
(저녁에는 일찍 들어오셔야 해요?)
대화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다. 칼에 찔린 이유도, 모두가 죽어있는 현 상황도 알 도리가 없었다. 온몸은 이미 망가져있고 두 손은 움직일 수 조차 없다.
방법이 없어.
포기하자.
그의 귓 속이 울렁거렸다.
(손 찌른 건 미안해요. 그런데 바람 피는 건 나쁜 거예요. 아주 나쁜 거라구요.)
통증이 점점 사라져갔다. 이제 와서는 아픔이 줄어드는 것인지 아니면 감각이 사라져가는지 불분명했다.
쉬고 싶어.
그의 의식이 계속해서 심연의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영원한 휴식이 기다리는 포근한 어둠속에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었다.
안 돼.
쉬고 싶어.
안 돼.
놓아 버려.
두개의 마음이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했다.
(제가 잘 할테니까...)
줄을 놓아버리면 끝장이었다. 싸움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팽팽한 줄이 끊어질듯 부풀어 올랐다.
한번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뜨니 이런 상황이었다.
또 한번 정신을 잃으면 지금보다 더 힘들어.
아니야, 이제 모든걸 내려놓아. 시현.
여러 기억이 팽팽한 줄 위를 스쳐 지나갔다.
그는 이곳에 원해서 온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구했고.
누군가를 죽였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뉴스를 들으며 총신대입구로 뛰어가던 그때. 그는 아무 것도 몰랐다.
친구들과 마시던 술자리가 다시는 돌아 올 수 없을 줄...몰랐다.
아스팔트 위를 걷던 그 발자국의 느낌이 아직도 생생했다.
많은 사람을 만났고 여러 고난을 뛰어넘었지만, 쉬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두려워.'
잠들기 전 가끔은 울었다. 두려웠기 때문에, 내일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두려웠기 때문에 울었고 자주 그런 생각을 했다.
수많은 난관을 뚫고 이곳까지 왔지만 이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를 지탱해주던 그 누구도 이곳에 없었다.
차라리 이대로 끝났으면 좋겠어.
입을 벌린 채 시현의 몸을 집어삼키려는 저 심연이 어떠한 빛보다 더 편안하게 느껴졌다. 마치 모든것의 끝을 품어주는 죽음의 신 같았다.
여러 마음이 점점 더 심하게 부딪혔다.
안 돼.
지금 포기하지 않는 다고 해도 무슨 방법이 있어?
정신 차려.
방법이 있다면 나에게 이야기를 해 줘.
.....
끝났어.
방법은 없어.
......
미안합니다. 모두.
그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언제나 그의 곁에는 동료가 있었고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다. 칸나가 있었고 케이시가 있었고 철림이 있었고 현식, 김철수, 이그네스... 수많은 동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로지 혼자였다. 아무도 그를 도울 수 없었고 그는 모든 것을 혼자 헤쳐나가야 했다.
심연이 그를 집어삼켰다.
......
......
'이것이 죽음인가.'
...
...
...
모든 것을 포기했음에도
그의 몸은 심연의 바닥에 닿지 않았다.
죽음이 다가왔음에도, 그는 죽음의 끝자락에서 마지막 한 발자국을 걷지 못했다. 그가 거부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인가가 그를 붙잡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심연으로 끌려가지 않고 멈추어져 있었다.
무언가가 그의 정신을 붙잡고 있었다.
누가 있었다.
심연의 어둠이 급속도로 밀려났다.
천사.
그래 천사였다.
[대 천사의 영혼이 그대를 보호합니다.]
대천사 피드.
온 세상을 감싸 안을 것 같은 거대한 천사가 시현을 향해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
그것은 오랜 기억이었다.
최초로 회색방 시스템을 뛰어넘고자 했던
대 영웅.
황금의 황제 그리고 시현.
이제야 기억이 났다.
(이 무엄한 놈!!!!!)
- 쾅! -
황제가 침대를 내리치는 모습이 보였다.
(네놈이! 나와 동료들을 뛰어넘어 보겠다고 했느냐!! 산이 높다고 해도 한 발자국 씩 걷다보면 언젠가는 도달할 수 있다는 허망한 꿈을 품는 것이냐!!?)
그가 신하를 향해 손짓했다.
(가서 황금의 망치를 가지고 와라!!)
그 말에, 놀란 듯 신하가 황제에게 다시 물었다.
(...황금의 망치 말입니까?)
(어서 가지 못하고 무엇 하느냐!!!!)
너에게 모든 걸 걸겠다.
(썩 꺼져라! 나를 뛰어 넘어 모두를 구해 보거라!)
그 날, 황제는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은 것처럼 웃었다.
[황금의 망치가 그대를 영혼을 보호합니다.]
금색의 빛이 어둠을 물리쳐갔다.
작은 십자가가 그 빛에 반응했다.
[쿠에시의 낡은 십자가 목걸이가 그대를 영혼을 보호합니다.]
따스함이 시현의 온 몸을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그래.
여러 기억들이 계속해서 밀려들어왔다.
많은 동료를 만났다.
(이봐 식량 1호. 친구할래?)
(존스라고 불러. 전문 격투가야.)
(나는 세종대왕호의 함장. 김 현식일세.)
(우리가 막을 수 없다면 아무도 막을 수 없잖아요?)
돌아간다.
(자네를 믿네.)
아직 할 일이 남았어.
돌아갈거야.
돌아갈거야.
동료들이 시현에게 손을 뻗었다. 그 손을 시현이 붙잡았다.
시현의 손아귀에 힘이 돌아왔다.
'돌아갈거야!'
심연을 뿌리친 채.
그가 가뿐 숨을 토해냈다.
빛이 보였다.
그의 시야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어머? 큰 일 나는 줄 알았어요.”
나연은 시현의 무릎에 걸터앉은 채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속삭이는 말들이 간질이듯 귓가를 스쳤다.
공포는 어느새 사라지고 투지만이 시현을 감쌌다.
정신은 돌아왔지만
방법은 보이지 않았다.
돌아 간다.
고개조차 움직이기 힘들었고. 상대는 시현의 말을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양 손은 움직이지 않았고 정신은 희미했다.
동료들이 기다리는 그 자리로.
시현이 거칠게 숨을 토해냈다.
‘반드시 돌아간다.’
거짓말처럼 정신이 또렸해졌다.
‘반드시 돌아간다.’
나연이 시현을 꼬옥 껴안았다. 진득한 핏물이 그녀의 머릿결을 타고 흘러내렸다. 역겨운 냄새가 시현에게 달라붙었지만 그의 눈빛은 점점 더 강해져갔다.
'할 수 있는 일을 해. 시현.'
그는 칸나보다 약하고
김철수처럼 용으로 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이그네스처럼 신성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
케이시처럼 모든 상황을 한방에 뒤집을 수 있는 초능력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오로지.
반드시 길이 존재한다는 그 작은 자신감 하나로
그 믿음 하나로 모든 것을 뛰어넘어왔다.
모든 정보를 종합한다.
나연의 허벅지가 시현에게 뱀처럼 얽혀왔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이제 곧 우리들만의 낙원으로 가요.”
그녀의 머리카락을 탄 핏물이 시현의 눈동자를 타고 내려왔지만 그의 눈썹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손의 아픔도 부서질듯한 온몸의 고통도 중요하지 않았다.
생각 해.
생각 해.
"그 곳에서, 우리 영원히. 영원히 사는 거에요."
너에게 주어진 것은 언제나 그것뿐이었어.
포기하지 마.
몸이 움직이지 않아도, 이길 수 없다는 절망이 계속 떠올라도.
생각 해.
"기분 좋죠? 저도 정말 기분 좋아요."
그의 눈이 방 전체를 훑었다. 그림, 비뚤어진 사랑. 아픔. 배반. 살인. 왜 그녀는 화목한 집의 그림을 그렸는가. 어째서 나머지 여자들을 모두 죽였는가. 마지막 그림에서는 왜 두명 빼고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가. 저 그림은 현실인가 꿈인가.
그래.
시현의 눈동자가 커졌다.
거짓말처럼.
그는 길을 찾았다.
남자와 여자만이 존재하는 화목한 집.
모든 퍼즐이 하나로 맞춰지듯 정확한 상황이 차례대로 정리되었다. 모든 정보가 일렬로 늘어서면서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뀌어갔다. 복잡한 미로에 단 하나의 진실의 길이 열렸다.
길이란, 찾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이었다. 그것이 정말 작은 틈이라도.
포기 하지 않으면 언젠가 보인다.
시현이 입을 열었다.
“...그 남자는 누구야.”
“..달링?”
시현의 입장이 아닌 상대방의 욕망을 기준한다.
그것을 토대로 내부로부터 무너뜨린다.
나연의 머리카락이 작게 흔들렸다.
"달링..?"
분위기가 바뀐 시현의 목소리에 나연이 껴안은 자세를 풀고는 그를 바라봤다.
“아까 그 남자. 누구냐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나연을 찔러갔다.
모든 논리와 행동은 그 사람이 옳다고 믿는 가치에서부터 나온다.
그것이 맞던 맞지 않던 상대방을 움직이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남자를 남겨두고도 내가 의심하지 않을 줄 알았어?”
그 사람 스스로의 생각이었다.
나연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아, 저.. 저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저를 도와줘서 우리 가정을...”
시현은 그녀가 흔들리는 것을 즉시 감지했다.
나연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녀와 똑같이 행동하면 된다.
“우리 둘 만의 낙원이라고 하지 않았어?!”
“진정해요."
" 왜! 누군가가 또 있는거야!"
"지..진정해요 제가...”
시현은 자신의 존재를 버리고 그림 속의 남자가 되었다.
“나만을 사랑한다고 했잖아! 나를 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도! 나 몰래 그 자식하고 만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야?!”
시현은 진정으로 분노했다.
나는 그림 속의 저 남자다. 나는 그림 속의 저 남자다. 나연의 세계에 진정한 역할을 담당한다.
상대방의 마음아 부서져라.
부서져라.
계속해서 소리쳤다.
“아니에요. 내 사랑, 그게 아니라. 내 사랑.. 그게..”
“너도 나를 떠날 거잖아!! 왜 그는 살려둔거야! 왜 그를 살려둔거냐고!!!”
나연이 온몸을 덜덜 떨었다.
아니라는 듯 손사래쳤다.
“아니에요. 진정해요. 진정하고, 걱정말아요.. 제가.. 제가 지금."
창백한 얼굴의 그녀가 시현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제가.. 증명할테니까. 우리만의 낙원을 위해..그를..”
“그의 목을 가져와!! 그의 목을 가져오라고!!"
"진정해요.. 죽이고 올테니까.. 제발 나한테 소리치지 말아요. 제발.."
"내가 어떻게 너를 믿을 수 있지!! 내가 어떻게 너를 믿을 수 있어!!!”
풀썩. 나연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입 전체가 떨리며 이빨 전체가 딱딱 소리 내며 부딪혔다.
“지금 갈테니까. 잠깐 기다려요 내 사랑. 저는 당신을 버리지 않아요. 절대 안 버릴테니까. 그의 목을 가지고 올 테니까. 제발 저를 버리지 말아요. 제발 저를 버리지 말아요. 제발..”
파랗게 질린 그녀가 허겁지겁 식칼을 집어들고는 몇 번이고 뒤돌아 시현을 반복적으로 바라봤다.
“제발..절 버리지 말아요.. 금방.. 금방 갔다올게요.. 금방...”
그녀가 문을 박차고 나갔다.
시현은 미로의 끝에 도달해 있었다.
바닥에서 굳어가는 딱딱한 피를 바라보며
시현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나연이 허겁지겁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밀려오는 피로에 감긴 온 몸을 다독거리며 그가 입을 열었다.
투지에 찬 눈동자가 번뜩였다.
“인벤토리 오픈.”
============================ 작품 후기 ============================
[황금의 망치]
대천사 피드의 영혼 조각이 들어있는 신기.
황금의 황제로 부터 건네받아 시현이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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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잠들었지만 저는 글을 씁니다.
어떤 독자가 10연참을 하면 1위를 할 수 있다고 저에게 헛된 희망을 품게 했기 때문이죠.
휘릭 휘릭 뚜껑을 열고 박카스를 하나 더 마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