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00 대가(代價) 하(下) =========================================================================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30분 후에 새로운 스테이지가 시작됩니다.]
나연은 여전히 혼자였다.
[여 선생의 기억을 더 보시겠습니까?]
“아니.”
분명히 아무것도 아닌 기억들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옥죄여 오는 마음에 그녀는 기억을 더 읽기를 거부했다.
학원의 공기가 서늘하게 느껴졌다.
[다른 기억을 보시겠습니까?]
“그래.”
[원장의 기억을 재생합니다.]
나연이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
굳게 닫힌 철문은 그가 들어왔을 때와 다름없이 잠깐 열렸다 닫혔다. 벽돌로 높게 쌓아올린 담벼락은 그가 나온 곳이 사람을 가두는 곳이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드디어, 나왔네."
환대나 그런 것은 없었다. 문 안과 밖은 그냥 똑같은 세상이었다. 도로가 있고, 사람이 있다. 다른 것은 안에는 자유가 없고 이곳에는 자유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크게 숨을 들이쉴 무렵.
끼익. 하고 하얀 승용차가 길가의 옆에 섰다.
"여어."
문이 열리고 원장의 눈에 낯익은 사람이 나타난다. 고급 승용차에 어울리지 않은 투박한 검은색 비닐봉투가 눈앞에서 흔들렸다.
“특별 사면, 힘 좀 썼지. 요즘 쓸 만한 애가 없어서 걱정했는데 고생했어.”
“...사식이나 좀 넣어주시지 그랬습니까?”
“무슨 소리야. 많이 넣었잖아?”
“1년에 한 번을 많이 라고 생각할 줄은 몰랐습니다.”
휙, 하고 그가 봉투를 집어던졌다. 별 것도 아니었지만 검은색 봉투속의 두부덩어리가 자유인이라는 실감을 불러 일으켰다. 작은 감옥의 안에서 죽은 듯이 살아가는 것도. 허여멀건 한 국에 질려 다른 죄수들과 이상한 음식들을 만들어 먹는 것도 이제 안녕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자유다.
“아 근데 말이야.”
“네?”
“한 건만 더 하자 삼별아.”
원장, 삼별이라 불린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마지막이라고 했잖습니까.”
“진짜 마지막이야. 이제 더 이상 시키면 날 찔러도 별 말 안할게. 삼별아.”
“삼별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아, 안 불러! 그래, 그래. 일단 타.”
도망이라도 치듯. 그는 자동차 안으로 사라졌다.
뒤를돌아 교도소의 붉은 벽돌 담장을 바라보던 원장이 발걸음을 옮겼다.
흰색 자동차의 바퀴가 세차게 도로 위를 굴러갔다.
"꼭 네가 해줘야한다니까."
초장부터 재수가 없다고 원장은 생각했다.
“병원비 안 넣은 건 아니죠?”
“네가 너한테 죽을 일 있냐?”
“요즘은 어떻데요?”
“똑같지 뭐, 식물인간이 그런 거 아니겠냐.”
이 말을 할때는 아무리 간이 큰 사람이라도 말수를 아꼈다.
“...제 돈이라고 어머니에게 이야기 안했죠?”
“내가 그런 눈치도 없을 사람으로 보여! 이래 뵈도 선량한 중계업자라고!”
살인교사나 하는 주제에 참으로 선량하네. 콧방귀를 뀌며 원장이 창밖을 바라봤다. 지나가는 사람하나하나가 신기하고 그저 밖에 있다는 것 자체로 가슴이 뛰었다.
‘참 좋다.’
창을 반쯤 내리자 바람이 그의 얼굴을 간질였다. 그는 그런 기분이 너무 좋았다.
이 바람을 맞으려고 여태까지 그 고생을 한 것일까.
“그래서 이제 뭐 할 거야?”
"작업 하나 더 해달라면서요."
"아니, 그거 끝나고 말이야."
새삼스럽다는 듯. 원장이 대답했다.
“아저씨가 해달라는 일 까지만 하고, 학원을 차려볼까 해요.”
“학원? 태극권 학원?”
그가 고개를 절래 절래 저었다.
“그럼 무슨 학원?”
“미술 학원이요.”
중계업자가 운전을 하다 말고 미친 듯이 웃어댔다.
원장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왜 웃어요?"
"니가 무슨 그림을 그려?"
"그림 잘 그리는 사람들 고용하면 되죠.”
“미친 놈.”
그 말을 끝으로 중계업자는 한동안 운전에만 신경을 썼다. 갈길이 급한지 그는 교통 법규를 자기 마음대로 써내려갔다.
빵빵.
(어떤 미친놈이 도심에서 역주행이야!)
개의치 않고 그가 말문을 열었다.
“너희 어머님이 미술 하셨다 그래서 그런 거냐?”
“...잘 그리셨다고 하던데요.”
“미친 놈.”
“왜요.”
“고아원에 버려져서 평생 엄마 얼굴도 모르던 놈이 뭘 엄마 따라하겠다는 거야.”
“에이 씨발! 할 수도 있지 뭐!”
“니네 엄마는 너 있는지도 몰라.”
원장이 발로 차의 안쪽을 뻥 걷어찼다.
“야이! 너 이 차가 얼마인줄 알고!”
그는 고아원이라는 단어가 싫었다.
(미안해, 엄마가 꼭 찾으러 올 테니까. 꼭 기다려. 내가 꼭..)
그것이 어머니에 대한 그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나 고아 아니라니까요. 그냥 오래 맡겨진 것뿐이지.”
“에이씨. 말을 말자. 이거나 받아.”
중계업자가 준 파일에는 한 여자의 신상명세가 적혀있었다.
“아줌마에요?”
“뭔 소리야. 그냥 처자야.”
“흠.”
“거의 다 작업해 놨으니까 날짜만 기다리면 돼.”
“콜.”
차가 멈추어서고
두 명은 각자 갈길을 갔다.
'어디보자. 어느 모텔이 좋으려나..'
얼마만의 푹신한 침대인지 그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바깥의 생활은 매우 기분 좋았다.
모텔의 침대에 누운 그는 눈을 다시 뜨면 차가운 감옥의 바닥이 아니기만을 빌었다.
'이게 꿈은 아니겠지.'
뚜르르르르.
(삼별아. 준비해라.)
작업은 곧 시작된다고 했다.
"훔..."
남은 시간동안 여자나 품으며 대기하면 될 것이었다.
"내일 바로 하죠 뭐."
(일단 대기 해.)
비가 오고,
해가 뜨고,
비가 오고,
또 다시 해가 떴다.
답답한 그가 전화기를 들었다.
“뭐예요. 도대체 언제 작업한다는 겁니까?”
(엄...)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요?"
(......)
"뭔대요?"
(그게... 마담이 남자한테 꽂힌 거 같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여자가 갑자기 돌았어요? 그냥 잘못 생각하시는 거 아니에요? 그런 적 없었다면서요.”
(넌 마담을 본 적이 없어서 그래... 이번엔 좀. 아무래도 이탈 할 것 같아. 그럼 앞으로 너 돈 못준다.)
“......”
(야)
“왜요.”
(목표물 작업하고 마담 남친 같이 보내버려.)
“뭘로요. 돈 많이 들 건데?”
(......)
푹신한 침대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아니 그럼 이 기회에 돈줄인 마담 날 릴 거야? 잔말 말고 작업이나 준비해! 지문은 내가 준비해 줄테니께.)
뚝.
후우.
“누군진 모르지만 미안하게 되었수다.”
평범한 가정집에서 볼 수 있는 칼을 끼익끼익하며 갈기 시작하는 원장이었다.
비가 오는 날은 범행하기 좋다.
금방 어두워지며.
인적이 드물어지고.
사건현장 역시 훼손되기 때문이었다.
목표는 평소와 같이 행동했다.
우산을 쓰고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저기요."
그 단순한 말에, 간단히도 걸려들었다.
생명이 끊어지는 순간은 짧았다.
“나연아......”
피해자의 마지막 말이었다. 빗방울을 따라 차갑게 식어갔다.
원장은 왠지 기분이 나빴다. 모든 작업은 잘 이루어졌고 모든 범행은 남자친구라는 작자가 뒤집어 쓸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마지막말에 마음에 걸렸다.
사건현장을 떠나 얼마 걷자. 빗속에 우두커니 있는 아이가 보였다. 원장은 잠시 멈춰 서서 아이를 바라봤다.
“여기서 뭐 하니?”
“아.... 그냥 빗속을 뛰어다니고 있었어요.”
“그래?”
한동안 아이를 바라본 그가 조용히 말했다.
“재미있게 노려무나.”
모텔에서 짐을 꾸려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려고 할 때.
그의 머릿속에 나연이라는 아이가 계속 걸리적거렸다. 핸드폰을 든 그가 딱딱한 전화번호 판을 눌러댔다.
“아저씨.”
(왜?)
“그 여자 애 있는데 왜 없다고 하셨어요?”
(뭔 소리야! 난 모르는 일이야!)
넘겨 집기.
“아 씨. 애새끼들 달린 사람은 작업 안한다고 했잖아요!”
(나도 몰랐다니까!)
그가 핸드폰을 내팽개쳤다. 부서진 부속품들이 모텔의 이곳저곳에 흩어졌다.
“씨...몰라! 학원이나 차리자.”
축. 개업.
그의 꿈은 생각보다 어려운 길이었다.
파리만 날렸다.
“생각보다 어렵네. 아무래도 예쁜 여자 선생이 있어야......”
뚜르르르. 간만의 핸드폰 소리에 그가 수화기를 들었다.
“네, 미술학원...”
(야.)
“아, 전화하지 말라 그랬잖아요. 이제 일 안 해요.”
(그게 아니라, 저번에 마담이 돈 먹여서 막은 아이 있잖아.)
“그 새끼가 불었어요?”
(아니, 아무래도 그 가족이 불안해서)
"걔 죽이라고요?"
(아이 미친새끼가! 옛날 버릇 못 버렸냐! 마침 미술 하는 애라고 하니까 니네 학원에 넣고 감시하라고!)
“우리 학원이 무슨 재주로 애들을 잘 받아요.”
(니네 학원가면 수강료 면제라고 했어.)
“아니 이 노망난 할아범이...”
(내가 돈 내줄테니까 걱정 말고.)
“훌륭한 선택이십니다. 어르신.”
(그리고, 예전에 작업한 부모 아이 말인데, 걔도 니네 학원에서 같이 감시해.)
“뭔 소리에요.”
(걔가 나중에 대가리 커서 이상함을 느끼고 뉴스 같은 곳에 제보하면 어떻게 막으려고? 미리 옆에서 감시하란 말이야.)
“......”
(선생도 한명 추천해 줄 테니까 잘 해보라고.)
“영감이 무슨 미술선생을 추천해요!”
수화기를 바닥에 집어던지며 그는 화를 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반성했다.
거짓말처럼 영감은 정말 미녀 선생님을 데리고 왔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일하게 되었네요. 반갑습니다.”
여 선생과 원장의 첫 만남이었다.
서로 고아였던 지라. 그 둘은 금세 가까워졌다.
그녀는 완벽해보였지만 어떻게 보면 무언가 불안해 보였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무언가 불안한 사람은, 그것을 채워주는 사람을 떠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이는 계속해서 가까워졌고
침대에서 한 이불을 덮게 되었을 때
그녀는 그의 쇄골에 새겨져 있는 문양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음..문신에 거부감이 있나?'
“벼..별이 세 개네요?”
“아아, 어렸을 때부터 있던 건데."
"그..그래요?"
"이거 때문에 고아원 애들이 삼별이라고 불렀어.”
“......”
“그..그렇군요. 나연 이한테 잘 해주시던데.”
그녀는 문신 이야기가 싫은지 화제를 돌렸다.
“후.. 그냥 개인적인 부탁 때문에 잘 해주는 척 하는 거지. 마음 같으면..
자기 발로 나가줬으면 좋겠어.”
나연은 그의 거짓 웃음을 믿어서는 안되었다.
[기억을 더 보시겠습니까?]
“아니.”
나연이 화실의 위에 꽂혀있는 원장선생님과의 사진을 빼내어 휴지통으로 집어 던졌다.
거짓 기억일 뿐 일텐데.
놀이동산에서 같이 찍은 사진도, 서로 웃으며 브이자를 그린 사진도, 생일날 여선생과 원장이 그녀를 축하해주며 케익 불을 끄던 사진도 모두 버렸다.
너희들이 살인자를 만든 거야.
자신도 모르게 그녀는 기억속의 나연을 옹호했다.
헌터의 기억과 소녀 나연의 기억이 이리저리 뒤섞였다.
“내 머릿속에서 나가. 둘 다...”
그녀가 자신의 머리를 양 손으로 짚었다.
두통이 끊이지 않았다.
머리 전체가 끓는 물속에 들어있는 것 처럼 뜨거웠다.
그녀는 이제야 노드나 나이아, 헬라나 다른 헌터들이 자신에게 기억을 돌려주지 않은 또 다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정신붕괴에 따른 위험성.
그들은 기억이 교차되며 이미 그런 것들을 느꼈을 것이었다.
소녀 나연의 정신적 허기짐이 지탱해줄 누군가를 계속해서 원했다.
그 위로 헌터 나연의 생각이 곁가지에 얽혀서 복잡하게 꼬여갔다.
소녀는 나연이자 헌터이다.
허나 같지 않다.
혼자서는 이 감정을 감당할 수 없었다.
누군가 내 결핍을 채워줘.
마음이 끊임없이 비명 질렀다.
머리가 펄펄 끓어오를때.
그녀는 문득 어떤 생각을 했다.
‘그래.’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배신하지 않고 그녀를 따르게 될 사람.
결핍을 채워 줄 사람.
‘있잖아.’
그녀가 머리를 부여잡은 채 화실을 박차고 나가 유리문을 열었다.
단 하나뿐인 아이템을 거리낌 없이 사용했었다.
소녀 나연에게도 필요하고
헌터 나연에게도 필요한 사람.
'그렇게 만들거야.'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머지 앉아 영원히 내 것이 될 사람."
쓰러진 시현의 곁으로 다가간 그녀가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안아들었다.
============================ 작품 후기 ============================
[원장의 기억]
삼별이라는 이름으로 나연의 어머니를 살해하였으며
선의를 가장한 채 권군과 나연을 계속해서 감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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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분들은 열심히 잠을 잘 것이지만
저는 부엉이 상태로 15시간째 글을 쓰고 있습니다.
박카스가 효능이 좋긴 좋군요.
근데 이제 자고 싶습니다.=_= 일어나서 또 쓰죠 뭐.
어느새 300회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