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99 대가(代價) 하(下) =========================================================================
왜 우냐는 그의 말에 나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눈물들이 한없이 도화지를 적셔갔다.
기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디가..!"
처음으로 권 군을 떠나 혼자 미술실의 한편에 처박혔다.
붓을 들었다.
슬플때는 붓을 들어야 했다.
울면서 꾸역꾸역 그녀는 그림을 그렸다.
붓 한 번에 엄마의 얼굴과
또 한 번에 행복했던 단칸방을 그렸다.
그동안 해 왔던데로.
붓 한 번에 따뜻한 추억이 떠오르고
작은 행복이 손에 잡힐듯 다가왔다.
그렇게 하면 슬픔이 날아갈 테니까.
어머님의 마지막말은
즐겁게 그림을 그리라는 것이었다.
나연은 웃으려고 노력했다.
'웃어야 해.'
눈물방울을 도화지 위로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즐겁게 그림을 그리렴.
열심히 계속 그림을 그렸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어머니는 그 다음 말을 해주지 않았다.
붓이 멈추어지고 나연은 끅끅 거렸다.
처음으로 붓을 멈추었다.
더 이상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슬픔은 원망으로, 원망은 증오로.
증오는 복수심으로.
행복했던 단칸방은 이제 그림 속에서만 추억 할 수 있었다.
자신이 피흘리며 맨발로 걸어왔던 깨진 병이 가득한 길은 그녀가 가야 했던길이 아니라
누군가가 희희낙락하기 위해 떠밀린 길이었던 것이다.
용서 못 해.
다시 판결을 받으면 어떻고 범인을 잡으면 어떻단 말인가.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연이 눈물 젖은 도화지를 말아 미술용 가방에 넣었다.
그곳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
그 날. 단칸방에서 그림을 그리던 아이는 비로소 죽었다.
[회색방 복원시스템에 의해 스테이지가 100퍼센트 복원되었습니다.]
멍한 표정으로 나연은 학원 문을 열었다.
걸리적 거리던 파편들도, 뜯어진 커피믹스의 커피향도 모두 사라져 있었다.
“......”
물감 냄새와 종이냄새.
모든 것은 처음대로 돌아와 있었고 그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쓰러져있었다.
시현, 헬라, 노드, 나이아.....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었다.
오로지 중앙에 있는 시계만이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
[00년 48일 오전 00시 0분]
물끄러미 시계를 바라보던 그녀가 자신의 화실로 들어가 불을 켰다.
너무나도 비좁고
세상을 보기해도 부족했던
상처받기 싫었던 나연의 작은 보금자리.
“긴 하루였네......”
그녀는 한동안 화실의 안을 바라봤다.
시계가 오전 00시 01분으로 바뀌자.
시스템 음성이 무심하게 물었다.
[게임을 시작하시기 전에 용의자들의 과거 기억을 보시겠습니까?]
나약해 지면 살아남을 수 없다. 이것은 작은 마음의 정리일 뿐이었다.
“...해봐.”
자신은 누구인가.
그녀가 의자에 앉아서 캔버스를 바라봤다.
"멍청한 년."
나연이란 아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된 인생을 살았다.
마지막 순간만 빼고 말이다.
그녀는 캔버스를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 알량한 애정이 좋았어?”
[여 선생의 기억을 재생합니다.]
여 선생은 자신의 몸을 치장하며 휘파람을 불었다. 미끈한 허리라인 높이에는 나무 책상이 있었다. 올려저 있는 수많은 종이들은 그녀의 일감과 관계가 있었다.
"어디 보자."
적당히 소문에 따라 작성한 신상명세서들이 그녀의 손에 따라 한 장 한 장 넘어갔다.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경쾌했다.
“이번 작업은 어디로 할까?”
일생의 보물로 여기는 고급 진 핸드백을 조심히 내려놓고는. 그녀는 계속해서 종이들을 훑었다.
몇 탕만 더 뛰면 은퇴해도 될 것 같았다.
"음..."
보험사기를 위해서는 다음 대상을 골라야 했다.
1. 사회적으로 힘없는 사람을 고를 것.
2. 연고가 없을 것.
3. 사람을 잘 믿을 것.
그런 의미에서 이 동네는 기분이 좋았다.
"음~ 여기도 밑바닥 인생들이 참 많네~ 어디보자."
그중에서도 나연의 아버지는 불행하게도 그 조건에 잘 들어맞았다. 그녀는 종이에 써져있는 취미 : 커피 라는 단어들에 붉은색 동그라미를 쳤다.
“빙고.”
그녀가 화장대의 앞에 섰다.
"유부남 쯤이야 껌이지."
마스카라를 바르며 그녀는 이번에도 쉽겠다는 생각을 했다.
눈썹을 깜빡였고.
"아, 번졌네. 하여간 싸구려 인생이 다 이렇지."
잘 안풀렸는지 그녀가 화장대에서 다른 도구를 꺼냈다. 번지지 않는 마스카라.
손이 바쁘게 움직였고, 외모는 점점 더 매혹적이게 바뀌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작전 개시 해 볼까요~"
목표 지점은 그의 직장 근처였다. 커피향이 진하게 퍼지는 카페였다. 그는 이곳에 자주 왔다.
계속해서 같은 자리에서 눈도장을 받으러 서성였고
머지않아 기회가 왔다.
“커피, 좋아 하시나 봐요?”
그녀가 싱긋 웃었다.
"아, 그쪽도 이 커피 좋아하시나 보죠?"
그녀는 전문가였다.
첫 번째는 매력으로, 두 번째는 새로운 삶에 대한 동경으로.
우연을 가장한 계속된 만남으로
그런 여자에게 당신은 너무 아깝다는 말투로.
여 선생은 그를 계속해서 녹여나갔다.
곰 같은 바보 한명 구워 삶아서 보험을 따내는 것 따위, 아무것도 아니었다.
중계업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봐, 슬슬 삼별도 감옥에서 나왔고, 작업 들어가는 게 어때?)
삼별. 얼굴은 모르지만 중계인이 소개해주는 살인청부업자였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곰에게 보험증서를 주고
그를 살해할 타이밍이었다.
"음....조금만 기다려주실래요?"
(마담, 왜 그래? 설마 그 남자한테 빠진 건 아니겠지?)
문제는 뜨거운 열기에
"제가 설마 그럴리가 있나요."
한쪽 만 녹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커피는 말이죠. 제가 혼자였던 시절에 카페 사장님이......”
남자는 정말로 따뜻한 사람이었다.
어느 샌가 여선생은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활을 그만 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커피향과 함께 무언가가 바뀌었다.
(마담, 대체 언제 실행할거야?)
"잠시만..."
핸드폰을 내려놓은 채, 그녀는 아내와 함께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봤다.
(마담?)
비로소야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 깨달았다.
그와 함께 살고 싶다.
저 여자가 아닌 내가 그의 옆에 서고 싶다.
‘미쳤어..? 정신 차려!’
보험사기 업자가 아닌, 한 명의 여자로.
‘정신차려. 뭐하는 거야.’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었다. 그 만은 여태까지의 거짓된 남자들과 달랐다. 언제까지 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그것이 그녀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파국은 그에게서 부터 시작되었다.
“미안, 이제 그만하자. 내가 잠시 잘못 생각했던 거 같아.”
그런 남자였다. 커피향과 함께 시작된 인연은 떠날때도 같은 향을 냈다. 그녀는 그가 잠시는 흔들릴 수 있어도 결국 돌아갈 거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커피를 선물해주며 그는 떠나가려했다.
그에게 미안하다고 해야했다.
정상적이라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보험을 권유했을 것이었다.
평소처럼 작업을 하면 된다. 기술은 아무 문제가 없다. 그녀는 차갑게 이성적으로 행동하려고 했지만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다.
문제는 기술이 아닌 감정. 그녀의 마음에 있었다.
더러운
"정리하고... 이제.."
더러운 자식!
여 선생의 마음속에서 불길이 올라왔다.
아내와 행복하게 걷고 있는 모습이 증오스러웠다.
자신도 깨끗한 거 하나 없으면서! 이제까지 잘만 즐겨 왔으면서!
지금 와서 혼자 깨끗한 척 하겠다고!
"미안해."
그녀는 남자의 뺨을 올려치지 않았다.
그저, 원래의 보험사기인으로 돌아와서, 남자를 협박했다.
"당신, 이대로 끝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보험을 들어 주지 않으면 여태까지의 일들을 가족에게 전부 말해버리겠다고 날 선 말들을 던졌다. 결국 협박의 말들에 그는 굴복했다.
그럼에도 그녀의 마음은 계속해서 폭주했다.
중계업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삼별 준비시켜요. 목표는...”
보험이고 무엇이고 이제 상관이 없었다.
모든 것은 그의 옆에 있는 여자 때문이었다.
그 여자가 그를 변하게 만든 것이라고, 그 여자만 없으면 모든 것이 잘 풀릴 거라고
아내와 행복하게 걸어가는 그의 모습을 볼때,
이제 여선생은 남자가 아닌 아내의 뒷모습만을 바라보게 되었다.
‘저 년만 없으면 돼.’
광기 어린 미소가 그녀를 입가를 간질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살인사건이 있는 날.
여선생과 그는 마지막으로 술을 마셨다.
독한 술냄새가 진탕되도록 그들은 술을 마셨다.
“오늘이 마지막이네요.”
두 명은 모두 기뻐했다. 한 명은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있음을, 한 명은 자신이 그 자리로 가게 된다는 사실에...
그녀가 물었다. 계산된 물음이었다.
아내가 없어진 그의 마음을 잠식하기 위해서.
“꿈이 뭐에요?”
그가 원하는 미래를 알기 위해서.
꿈이 뭐냐는 말에, 그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매만졌다.
“나연이가, 즐겁게 그림을 그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멍청한 대답이었다. 큰 돈을 벌고 싶다던가, 좋은 집에 살고 싶다던가 그런 대답이라면 얼마든지 그녀가 이루어 줄 수 있었다.
“그런 거 말고, 당신의 미래에 대한 것 말이에요.”
술잔을 들이킨 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 갈 시간이에요."
비틀비틀 거리면서도 안녕이라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꿈이 뭐나구요!"
화내는 듯 소리치는 여자의 질문에 그가 잠시 뒤돌아봤다.
“그냥.. 지금보다 더 열심히 살고 싶어요. 지금까지는 좋은 아빠가 아니었으니까, 도화지도 더 많이 사주고, 물감도 더 많이 사주고... 그게 제가 살아가는 이유에요. 어느 부모든 그렇지 않을까요?”
그의 웃는 얼굴이 야속했다.
핸드폰이 울렸다.
컬러링 소리가 씁씁했다.
(마담? 삼별이 작업 끝났데, 경찰 윗선에도 찔러줬으니까 이제 그만 빠져나와.)
여 선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떡 얼마 찔렀어요?"
(2 덩이)
"해결은요?"
(미제로 해준데. 당신 제외하고.)
그녀가 작게 웃었다.
용의자에서 제외될 것이고, 이 것은 미제사건으로 처리 될 것이었다.
그녀가 통화를 끊고는 자신의 분신과 같은 핸드백을 들어올렸다.
가게를 나가는 그녀의 핸드폰이 또 한 번 울렸다.
(아아, 마담. 삼별이가 범행도구에 남편 지문 찍어놨다고 하니까.)
툭.
(걱정 말고 들어가서 쉬어.)
값비싼 핸드백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미제로 하는 거 아니었어?
(무슨 소리야. 일은 확실한 게 좋지.)
핸드폰 마저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녀가 가게 밖으로 뛰쳐나가 달렸다. 물건 놓고 가셨다는 점원의 말소리도 무시한 채 뛰었다.
구두굽이 부러져도, 애써 만든 머리가 망가져도 계속 달렸다.
안 돼.
경찰이 폴리스 라인을 긋는 모습이 보였다.
안 돼.
‘이럴려고 그런게 아니었어요.’
‘그럴려고 그런게 아니었어요......’
그가 체포되는 뒷모습을 보며, 그녀는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기억 재생률 70%...]
기억의 파도가 눈을 감고 있는 나연에게 밀려왔다.
여 선생과 아버지의 불륜을 목격했던 순간이
그녀의 손에 잡힐듯 다가왔다.
나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거 먹고 눈감아줄래?)
처음에 다르게 말했더라면.
(네, 그럴게요.)
사탕하나에 눈감아 주지 않고
처음부터 어머니에게 말했다면
무언가가 달라졌을까?
[00년 48일 00시 04분]
시계를 바라본 나연은 깊은 무력감을 느꼈다.
============================ 작품 후기 ============================
[여 선생]
살인보험설계사.
나연의 아버지에게 단순 불륜 관계 이상을 바라게 되고
나연의 친 엄마를 죽이고 자신이 그자리를 차지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절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