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탈출-265화 (265/373)

00265  Episode 2-11 돈의 왕좌.  =========================================================================

청부 살해자.

연쇄 살인마.

평범한 사람이 어느 순간 피에 굶주린 악귀로 변해버린다면, 그 죗값은 누구에게 돌아가야 하는가?

내가?

아니면 당신이.

삑 -

삑 -

의료용 침대의 위에서 햄버거를 베어 물고 있는 인섭의 표정은 무언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걷고 난 뒤의 노인을 연상시켰다.

‘돌아온 건가?’

어둠의 장막에 쌓인 듯 움직이지 않았던 기억들과 감정들이 소용돌이가 되어 그의 가슴을 때렸고 그 때문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병실의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긴 세월이었다.

정말로 긴 세월이었다고 인섭은 생각했다.

삑 -

삑 -

무표정한 그의 얼굴 안에서 기억의 폭풍이 어지럽게 휘몰아쳤다.

(제자야. 이 분이 너를 새로운 경지로 이끌어 주실 사람이다.)

세상을 증오하며 날마다 저주의 의식을 했던 사부는 그날따라 기분이 좋아보였다. 사부와 같이 나타난 남자는 무엇이 즐거운지 하얀 이를 가지런히 내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아~ 굳은 표정 짓지 마~ 안 그래도 우리 재단에서 사람을 능력을 강화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어요~ 인섭 군은 그 첫 번째 혜택을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남들이 모두가 우러러보는 초인, 그래 요즘말로는 히어로라고 하죠. 다시 눈을 뜨면 히어로가 되는 거라니까요~ 자자~ 릴렉~ 릴렉스~)

(영매 사매도 이 수술을 받는 건가요?)

(걱정 말아요~ 당신이 히어로가 되면 사매는 당신 곁에서 편하게 있을 테니~)

(...그럼. 조금만 나중에 받을 수는 없을까요... 제가 바빠지게 되면.. 그녀를 볼 시간이 줄어들 테니...)

호흡을 할 수가 없었다.

사부의 손이 그의 목을 틀어막았기 때문이다.

(이 개 같은 새끼야.)

사부가 세상을 위한 영웅을 만든다고? 지랄이었다. 그야말로 지랄.

영매 사매와 몰래 도망치려는 생각을 사부도 알아 챈 것이었겠지.

(워~ 워~ 사제지간에 이렇게 싸우면 안 되죠~ 그죠~ 진정하세요.)

그 말에 사부는 손을 풀었다.

(죄송합니다. 쿠조 씨. 못난 꼴을 몇 번이나 보이는군요.)

그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사부가 악마같이 보였다. 하지만 그 자는.....

(인섭 씨. 사실은 말이죠. 당신에게 하려는 수술은 영웅을 만드는 수술이 아니에요. 인간이 가져야할 기본적인 도덕심들과 선한 감정들을 제거하는 수술이에요. 아- 이해 되셨으려나? 아무 죄책감도 없이 생명체를 죽일 수 있게 되니까, 영웅과 다를바는 없죠~? 뭐- 굳이 당신이 받지 않겠다고 하지 않으면 말리지 않겠어요. 그럴 줄 알고~ 당신이 아는 여자분 한분도 저희 집에 모셔서 이야기가 잘 하고있거든요~)

거미줄에 걸린 먹이는

거미를 거스를 수 없었다.

삑 -

삑 -

수술이 끝난 날도 이런 신호음 들었었다.

삑 -

삑 -

(수술이 잘 끝났군요~ 인섭 씨~ 그럼 테스트를 해 볼까요~?)

안돼요.

그러지 말아요.

제발.

(이 여자 한번 죽여 볼래요?)

의료용 가위가 인섭에 손에 쥐어졌다.

인섭의 가장 소중한 사람은 그의 감정이 없어지는 날,

그가 든 의료용 가위에 의해 사라졌다.

쿠조가 웃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좋아요. 인섭 씨. 아주 좋아요.)

두려움은 언제나 가장 나타나지 않았으면 하는 미래를 만들었다.

회색 방에서 그를 다시 만난 날. 그는 인섭에게 햄버거 하나를 쥐어줬다.

매그도나르도. 라고 쓰여 있는 종이가 인상적이었다.

“아~ 인섭군~ 예전에는 미안했어~ 회색방에서도 만날지는 몰랐네~ 이게 무슨 효능인지는 모르겠는데~ 자네 한번 먹어봐~ 나도 궁금하거든~ 이제 슬슬 자네가 죽인 그 여자 생각도 다시 해보고 해야 하지 않겠어~ 혹시 자네 멀쩡해지면 편지하라고~ 그거는 그거대로 큰일이니까 말이야~ 하하~”

“......”

덜컹. 바람에 유리창이 부딪히는 소리에 인섭이 상념에서 깨어났다. 을씨년스러운 병실에서 그는 조용히 자신이 쌓아온 죽음의 업보에 짓눌렸다.

“잠시만 시간을 내줄 수 있겠나.”

허공을 향해 그는 그렇게 말했다.

거짓말처럼 병실의 그림자 속에서 대답이 울려 퍼졌다.

“유언인가요?”

우비를 쓴 헬라가 저승사자처럼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인섭은 그녀의 우비에 빗방울이 묻어있지 않다는 사실을 읽어냈다.

“그냥 내 이야기를 좀 들어줬으면 해서.”

인섭은 침대에 누워 여러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와 감정을 잃게 된 이야기. 사부와 쿠조란 자의 이야기. 그리고 이상한 햄버거 덕분에 최근에 감정을 회복하게 된 이야기 까지 말이다.

헬라는 미동도 없이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마지막으로 인섭을 그런 말을 했다.

“살려 줄 수는 없나? 이제까지의 나는.. 내가 아니었어.”

헬라가 검을 역수로 잡았다. 칼날이 무표정한 인섭의 얼굴에 닿을 듯 말 듯 움직였다.

“듣기 좋지 않은 이야기였어요. 당신이 그렇게 된 것도 이해가 가요.”

“......”

헬라가 검의 손잡이를 양손으로 움켜줬다.

“그렇지만 말이에요. 당신은 착각하고 있어요. 내가 당신을 죽이는 것은 당신이 나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그녀가 양손에 힘을 주자.

인섭의 몸에서 피가 배어나와 침대를 적셔갔다.

차가운 그녀의 얼굴이 인섭의 몸을 파헤쳤다.

자비를 구하는 그의 얼굴이 헬라의 마음을 두들겼다.

그럼에도 그녀는 손의 힘을 풀지 않았다.

“당신이 나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이곳이 회색 방이기 때문이죠.”

노란색 우비에 붉은 물감이 흥건히 적셔졌다. 헬라가 창가를 향해 걸었다.

우비를 따라 방울방울 떨어지는 붉은 색조들이 그녀의 마음을 짓눌렀다.

아무 일도 없을 것이었다.

헬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람들에게 타인의 죽음이란 언제나,

아무런 일도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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