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63 Episode 2-11 돈의 왕좌. =========================================================================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응급실의 접수대 앞에 서 있었다. 몰려드는 전화에 머리가 지끈 거리던 간호사는 그녀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기자들이 수시로 와서 환자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는 것 만해도 미칠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빨리 교대하고 퇴근하던가 해야지. 아오 짜증나.’
뉴스에 나올 정도로 큰 사건이어서 그런지 이상한 사람들이 많이 왔다 갔지만 검은 드레스의 여자는 더 많이 이상했다. 도시 한 복판에서 드레스를 입고 다니는 것도 이상한데 손에는 우비를 든 채 수십분 째 뚫어져라 접수대만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정신이 이상한 여자인가..?’
따르르릉. 접수대의 전화기가 울렸다.
“내 xx병원 입니다.”
폭파 사건으로 입원한 사람이 자신의 가족이라며 호실을 알려달라는 전화였다.
“죄송하지만, 직접 가족 관계 증명서를 떼 오셔서...”
벌써 부모라고 주장하는 사람만 10명이 넘어가고 있었다. 아마 특종 취재를 하고 싶어 몸이 달아오른 기자들일 것이었다.
“그 환자 병실은 공개 할 수 없어요. 아 안 됩니다. 이미 경찰 쪽에서도 이야기가 된 사항이고...”
병원의 자동문이 열리며 취재 장비를 멘 기자들이 또 한 무리 들어왔다. 간호사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여기 폭파사고 환자 병실을 알고 싶은데요.”
역시 저 질문 일 줄 알았어. 간호사가 짜증을 참기위해 두 눈을 감았다.
“그 환자 병실은 공개되지 않기로 이미 경찰 쪽에서...”
간호사와 기자의 실랑이 소리가 접수대를 메워갈 때 검은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린 헬라가 뚜벅뚜벅 엘리베이터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아무리 간호사가 관련 자료를 손으로 가리고 책상 안에 넣어둔다고 해도 헬라는 볼 수 있었다.
딱딱한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자. 얼마 지나지 않아 띵동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그녀가 우비를 꽉 쥐고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은 그녀가 13층의 버튼을 눌렀다.
‘13층에? 중 환자? 중환자실은 따로 있는 것 아니던가?’
깜빡 깜빡 층수를 가리키는 불이 13층을 향해 움직였다. 엘리베이터가 13층에 가까워질수록 웅성거리는 소리가 헬라의 귀로 들어왔다. 그녀가 크게 공기를 들이마셨다.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그녀의 후각을 자극했다.
띵동.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우비를 입기 시작했다. 한쪽 팔을 끼고 또 다른 팔을 끼고 있을 때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며 대치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경찰?’
방송 장비를 든 수십 명의 기자들을 경찰들이 막아서고 있었다. 욕설과 고함소리가 병원 복도를 때렸다.
“니네가 뭔데 우리를 막아?! 경찰이면 다야? 경찰이면 다냐고?!”
헬라의 손가락이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눌렀다.
‘15층이 옥상으로 연결되어 있던가.’
그녀의 손가락이 15층 버튼을 누르자 엘리베이터가 다시 움직였다.
띵.
“15층입니다.”
엘리베이터의 음성과 함께 문이 열리며 노란색 우비를 뒤집어 쓴 헬라의 모습이 보였다. 노란 우비의 아래에 얼핏 보이는 검은색의 드레스가 무언가 꺼림칙한 느낌을 주었다.
“...가볼까.”
검은 구두가 또각 또각 병원 복도를 밟고는 비상계단 쪽으로 향했다. 옥상의 문을 향해 걸어가는 그녀의 머릿속에는 칸나가 돌을 던지지 않고 멈춰선 장면이 계속해서 재생되었다.
(잠깐만요!!)
(저..저기! 살려주세요!)
(그러지 뭐.)
(대신 나중에 먹을 거 줘. 배 많이 고파졌어..)
끼익. 옥상의 문이 열리며 어두운 밤하늘이 나타났다.
헬라는 죄인이라도 된 마냥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
잠시 바닥을 바라보던 그녀가 한쪽의 난간에 섰다.
밤하늘에서 빛나는 별을 잠시 바라보던 그녀가 인벤토리에서 장검을 꺼내들었다.
“칸나 씨. 당신에게는 빛이 있지만... 당신을 믿지는 못하겠군요.”
옥상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괜찮다고 느끼며 우비를 깊게 눌러쓴 그녀가 난간의 위에 섰다.
다음 순간 그녀의 모습은 옥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열려진 병실의 창문이 바람에 삐걱거렸다.
삐- 삐- 하는 신호음이 헬라의 귀에 들어왔다. 우비를 깊게 눌러쓴 그녀의 눈에 병실 바닥에 떨어져있는 흰색의 머리카락들이 보였다.
신호음은 병실의 안쪽 방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헬라가 우비의 안쪽으로 장검을 숨기고는 구두를 벗어서 인벤토리에 넣었다.
천천히 더 천천히 한발자국씩 방의 안쪽을 향해 걷는 헬라. 안쪽이 보이는 위치를 향해 걸어감에 따라 피 냄새가 그녀의 후각을 자극했다. 피 묻은 붕대들이 구석에 쌓여있는 것이 보였다.
조금 더 걷자 중환자 침대에 누워있는 붕대로 감겨있는 미라가 보였다. 붕대 사이로 빠져나온 흰색 머리카락만이 그녀가 누구인지 추측하게 했다.
‘칸나.’
헬라가 잠시 멈춰 섰다.
그녀의 시선이 열려있는 창문과 중환자 침대를 번갈아 바라봤다.
“......”
미동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는 헬라.
열린 창문이 수 십 번 삐걱 거리고 난 다음에야 그녀가 표정을 굳히고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칼날이 우비 사이로 천천히 삐져나왔다.
붕대에 감긴 칸나의 모습을 보며 헬라가 작게 고게 숙여 인사했다.
무기도 없는 상태에서
능력자 두 명을 동시에 상대하고
혼자서 저택 전체를 날려버린 플레이어.
헬라는 자신이 백년 이상 더 수련 한다고 해도 그녀와 같은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까 생각했다.
‘천년을 살아남는다고 해도...’
그녀가 부르르 손을 떨었다.
칸나를 처음 봤을 때 느낀 것은 강함에 대한 경외감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이 여자가 마음을 달리 먹는다면...’
"......."
칸나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르지만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 지는 온 몸으로 느꼈다.
두려움.
미안함.
시기심.
죄책감.
수많은 감정이 그녀의 검을 무겁게 했다.
“미안합니다.”
헬라가 장검을 역수로 잡았다.
붕대에 감긴 칸나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내리쳐지는 칼날.
칼날이 꽂히려는 순간.
그녀의 등 뒤에서 앳된 소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칸나 언니를 살려 주시면 안 되나요?”
헬라가 침을 삼키며 황급히 검을 뒤로 휘둘렀다. 고개를 숙여 반사적으로 피하는 여자의 몸을 잡아 넘어뜨린 뒤 헬라가 목소리의 주인을 살폈다.
염색을 한 지 오래되었는지 노란색과 갈색이 섞여있는 머리를 지닌 여자.
“누구야 너.”
헬라에게 제압되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여자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녀가 작게 입을 열었다.
“유라... 라고 하는데요.”
“칸나랑 무슨 관계지.”
유라가 몸을 떨면서도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칸나 언니는... 제.. 음.. ..은인.. 이에요.”
삑-
삑-
심장박동기의 소리가 주기적으로 울렸다.
헬라가 슬쩍 유라의 목을 바라봤다.
비명소리가 나지 않게 한명을 처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삑-
삑-
헬라가 작게 입을 열었다.
“죽이진 않을 거야. 다만.”
바람에 창문이 부서질 듯 덜컹였다.
“다시는 싸울 수 없게 될 뿐이지.”